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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한담(茶中閑談)4
-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2023년 10월 29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인사 올리겠습니다. 지난번에 마음과 몸까지 이렇게 말씀 드렸는데요. 오늘 다른 비유를 한번, 아주 쉬운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마음속에서 천정에 그림을 그릴 수 있죠. 근데 허무하게도 그 생각과 꿈에서 깨어나오고 나면 그림은 없죠.
저도 어릴 적에 글 빛은 져가지고 원고를 언제까지 주긴 해야겠는데 쓰기는 싫고 밤에 열심히 썼는데 아침에 깨 보면은 꿈에서 썼던 거죠. 없죠. 결국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걸 받아줄 도화지가 필요하죠. 천이든 그것이 캔버스가 됐든 뭐가 됐든, 허공의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니까요. 허공에서도 자기가 볼 수 있고 자기가 느낄 수 있는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내놓을 수 있는 그림은 즉, 형상을 갖추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그림을 그럴 수는 없죠. 그래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공이 아닌 물질로서 그 물감을 받아줄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죠. 물체가 필요하죠.
마음에 대해서 지난번에 마음씨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객담들을 했는데요. 그전에 제가 샴브레이 셔츠 이런 얘기를 했었죠. 가로 세로 실을 짜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사실은 살짝 던져 놓은 겁니다.
우리 몸이 있는데, 이 몸이 누구나 생각해도 내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이 몸! 그런데 내가 아닌 것 같거든요. 뭔가 더 안에 있어야 될 것 같거든요. 안에 있어야 될 것 같은 그것은 현실적으로 뭐냐? 거대한 강장동물이나 누구는 용이라고 표현하는 그 안에 있는 것? 엄밀하게 보면 그 안에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관이 있죠. 그 강장동물은 재료를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기관과 작용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그것도 내가 아닌 것 같거든요. 대장과 소장이 내가 아닌 것 같거든요. 이 밥통이 내가 아닌 것 같거든요.
허벌과 벌
우리 밥통, 즉 아랫배에 있는 것들을 우리말로 ‘허벌’이라 그러죠. ‘허벌나게’ 할 때 ‘허벌’이 상스러운 말이 아니고 배를 말하죠. 배 안에 있는 것을 말하죠. 배 안에 있는 것의 전체 덩어리를 ‘허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허벌나다’라는 것은 배가 빵빵하게 이렇게 나온 모습이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장기만을 이를 때는 허벌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벌’이라고 하죠. 이 말이 바뀌어서 그게 ‘밸’이 되죠. 누구는 말을 흘려서 배알이라고 하지만, 밸이 꼬였다 뭐 하다 할 때 밸은 바로 허벌의 벌이죠.
그런데 이 허벌 안에 있는 벌 혹은 밸, 이것도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을까? 첫 번째 질문이에요. 첫 번째 시간에 ‘나는 어디에 있지?’를 먼저 말했습니다. ‘나는 뭐지’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지?’ 이 몸뚱이도 내가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것도 내가 아니고,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지?
그런데 그것 말고 어딘가에 내가 있을 것 같지는 또 않거든요. 이 몸 안에 있는 것 말고 다른 그 어딘가에, 내 밖 어디에 다른 세계 어디에 내가 있을 것 같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어려워지는 거죠.
씨줄과 날줄 그리고 바라돌
마음씨라는 얘기를 했잖아요. 씨라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하나 비유하자면 줄과도 같은 영역이겠죠. 에너지를 동반한 어쩌면 정보를 동반한 영역이겠죠. 근데 이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허벌이 아니라는 거죠. 무언가라는 거죠. 아무튼 그 무언가는 젖혀놓고, 일단 가정해놓고 보면 뭔가 씨가 나와요. 그렇다고 씨가 나와봐야 그 상태로 내 몸이 만들어질 리가 없죠. 씨가 있으면 날이 있어야죠. 씨줄이 있으면 날줄이 있어야죠.
씨줄이 있고 날줄이 있는데 마음의 씨줄들이 날줄과 짜이는 그 만나는 점이 있겠죠. 거미집처럼 또는 벌집처럼 혹은 직물처럼 말이죠. 직물을 보면 이렇게 속이 안 보이게 비침이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촘촘하게 짜도 비침이 많잖아요. 니트를 갖고 춥지 말라고 너무 쫀쫀하게 짜가지고 무게가 엄청난 직물들. 니트 중에 제일 무거운 니트는 안드레센 안드레센(ANDERSEN ANDERSEN)인데요. 거의 아령을 들고 있는 것 내지 역기를 들고 있는 것하고 비슷한 부분입니다.
그래도 보면은 구멍이 있단 말이죠. 물론 다 구멍이 있을 텐데 그렇게 구멍이 아닌 지역에 서로 씨와 날이 만나는 곳이 있겠죠. 옛날 사람들은 그거를 ‘바라돌’이라고 그랬어요. 바라돌이라는 게 씨줄과 날줄이 만나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을 그렇게 불렀던 거죠.
공자가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삶을 시작했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쳤는지를 보면은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어찌 그의 사람됨을 숨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어디에서 시작했고 어디를 경유했으며 어디를 목적으로 하는가를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그랬는데요. 굳이 비유하자면 마음에서 시작한 그 씨줄이 시작점인 거죠. 씨줄이 시작점이고 그리고 날줄이 하나씩 하나씩 쌓일 거 아니에요. 우리 날줄이라는 말의 ‘날’은 태양의 해와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날것 할 때 날과 해할 때 날은 다른 말이에요. 발음이 달라요.
예를 들어서 표기할 때 ‘이’라고 쓰지만, 이를 길게 하는 것과 이를 짧게 하는 것 그리고 이를 중간으로 하는 것은 다 다르잖아요. 이를 짧게 하면 ‘이어주다’라는 얘기고 그럴 때 쓰이는 어근이고, 이를 중간으로 하면 ‘살다’라는 어근이에요. 이를 길게 하면은 ‘붉다’라는 의미죠. 이꽃은 홍화죠. 붉은 꽃이니 길게 발음하죠. 머리에 이고는 (짧은)이고도 아니고 장음 이도 아니고 중간 길이죠. 예전에는 소리에 장단이 있었으니까, 있다 해야지 할 때의 ‘있다’를 짧게 하면은 이어가야 하는 거죠.
씨줄과 날줄 그리고 결
마찬가지로 날도 장음의 날이 있고, 단음의 날은 어떤 사물의 곁가지를 말해요. 중간쯤의 날이 우리가 ‘어느 날’ 혹은 날씨 할 때 날이죠. 날줄은 시간이죠. 쉽게 말하면, 시간이 쌓여가는 거죠. 시간이 가면서 이 씨줄에 날줄이 얹혀져 가는 거죠. 그러니까 씨줄이 시작점이라면 날줄은 경유점이죠. 다 짜이면 하나의 천이 이루어지겠죠. 그렇게 이루어진 천 전체의 흐름을 우리는 결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씨와 날이 짜여서 만들어진 하나의 면적 내지 공간으로서의 결이 있는 거죠. 그래서 다 짜진 모습을 보고 결이 곱다든가, 결이 세밀하다든가 하는 얘기를 하겠죠. 천은 결의 문제인 거죠. 씨줄과 날줄로 짜여 있죠.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씨줄은 나고 날줄은 남이죠. 자타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죠.
씨줄은 내 무언가의 마음에서 온 것이죠. 거기서 출발한 것이죠. 근데 날줄은 시간이 가고 내가 시간을 점유하면서 점유하는 만큼 쌓여가는 것이죠. 즉 내 밖의 환경과 여건으로부터 온 것이죠. 내 자주적인 면과 외부적인 면의 결합으로서 결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나? 우리가 볼 때 그 결 위에 얹혀 있는 거죠.
옛날에 러시아와 미국이 과학 경쟁을 하던 시절에 80년대쯤입니다. 그 경쟁이 끝날 무렵, 결국은 냉전 시대가 해소됐는데 러시아는 미국 계통의 과학을 이렇게 비판했죠. “끊임없이 해체하는 과학”이라고 비판을 했죠. 끊임없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을 때까지 해체해 들어가는 과학이다! 물론 자기들도 했죠. 그러나 자기들은 그러면서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서 해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요소들을 묶어 갈 것인가, 연합해 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꺼내서 고민들을 했었죠. 그런 고민들이 서로 잘 섞이기 전에 두 국가를 중심으로 한 대립의 흐름은 끝나버렸습니다만.
아무튼 하나하나에 해체할 수 있는 사물까지 해체해 가보잖아요. 그럼 해체하는 그 단위만 남아요. 근데 문제는 “해체가 되기 전에 왜 그것들은 거기 얹혀 있었을까?” 하는 거예요.
우리가 꿀을 짤 때, 꿀이 얹혀 있는 그 꿀만 보죠. 사실은 꿀이 얹혀 있는 씨줄과 날줄의 벌집이 없다면 꿀이 얹혀 있을 수가 없죠. 그 사이에 들어가 있을 수도 없죠. 우리가 우리를 볼 때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되죠. 바로 얹혀져 있는 내 세포 또는 더 나아가 내 기관 등 이런 것만 보게 되면 내가 안 보이는 거죠. 도화지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내 몸이라는 것 자체가 얹혀져 있는 도화지로서의 씨줄과 날줄이에요. 그 씨줄과 날줄이 있어서 세포가 얹히는 거죠. 한 번 더 날줄이 짜일 때마다 또 얹히고, 어떤 날줄은 수명을 다하면서 짜들어가면서 사라지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거죠. 뒤집어 말하면 그 도화지인 씨줄과 날줄의 결합이 ‘나’일 수 있는 거죠.
나라는 것은 몸뚱이 안에 없으나 몸뚱이에 있는 거죠. 근데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한두 번에 어떻게 전달해 드릴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차근차근 해 나갈 텐데요. 그 관계, 씨줄 날줄이 짜인 관계, 씨줄 날줄 위에 각각 얹혀지는 것들과의 또 대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어쩌면 얹혀지는 것은 씨줄과 날줄의 결합, 나와 나 아닌 것의 결합으로서 통합되어 있는 물질인 거죠.
엄밀하게 보면 날줄이라고 해서 이미 짜인 다음에 그것을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씨줄이라고 한다 해서 이미 줄이 형성된 다음에는 그것이 내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죠. 그러면 내 마음은 또 어디에 있는가? 또 문제가 되죠. 어쨌든 간에 나는 어디에 있지? 진짜 나는 뭐지? 이야기될 부분들은 지금 남겨놓고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씨줄과 날줄이 짜집니다. 씨줄과 날줄이 짜질 때 초기의 첫 시작점, 시작하는 데를 보고 경유하는 데를 보고 종착점을 보면은 알 수 있다고 했다면 그 첫 점! 그렇게 씨줄이 날줄을 만나서 짜진 그 첫 점이 어쩌면 그 천을 결정할 수도 있어요. 조금씩 다른 색이 들어갈 수도 있고, 조금 다른 굵기의 천이 날줄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큰 틀은 결정이 되는 거죠. 그렇게 결정됐다고 해서 완벽하게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결정성에 가까운 첫 씨줄과 날줄의 만남 지점에 뭐가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고찰도 이루어졌겠죠. 즉 바라돌에 대한 이야기들이죠.
바라돌
바라돌의 ‘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생각하는 스톤(stone)이 아니고 밭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흙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우리 땅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바라’라고 하는 것은 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원래 말이 ‘해 밭’이죠. 해 밭. 해가 앉는 밭인 거죠. 우리의 ‘바라’와 ‘하라’는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첫 씨줄에 앉은, 그 씨줄에 날줄이 만난 그 밭, 그 밭이 이제 우리가 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혹시 몇 분들은 바라돌 얘기 들어보신 분도 있겠지만, 대부분 처음 들어보시죠? 이런 얘기는 제가 처음 합니다. 그러면 바라돌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짜질까? 누구의 벌집은 육각형으로 짜지고 그러는데요.
이 바라돌의 흔적은 이렇게 비유하면 돼요. 여러분이 꿀을 샀다고 할게요. 선물 받은 꿀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샀다고 해야 돼요. 선물 받은 꿀은 무슨 꿀이죠? 무조건 좋은 꿀이죠. 지상에서 가장 좋은 꿀이죠. 선물 받은 꿀은 실험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도 좋은 거지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곤란하잖아. 절대 하면 안 되지만. 꿀을 샀어요. 그건 내가 돈 주고 산 거니까 내 마음이에요. 교환한 거니까. 내 과거화된 노동을 지불하고 현존하는 물건을 산 거죠. 그럼 그게 정말 제대로 된 꿀인지, 설탕물인지 어떻게 알죠?
확인하는 방법 아시죠? 설마 모르시진 않죠. 일단 꿀을 커피 스푼 한 스푼 정도를 떠가지고 종지에 얹죠. 또는 대접 같은 데 얹죠. 놓고 그 위에 찬물을 놓고 살살 흔들죠. 살살 흔들면 정말 벌이 만든 꿀이 맞으면 육각형이 싹 보이죠. 100% 보입니다. 만일 육각형이 전혀 안 보인다. 설탕물이죠.
그런데 육각형도 보이고, 육각형이 완벽하지 않으며 흐트러져 있다, 섞었다 또는 섞였다 하죠. 왜냐하면 겨울에 집에서 기르는 벌도 먹어야 되잖아요. 벌이 열심히 수확한 건 싹 훔쳐오고, 먹을 걸 넣어주잖아요. 벌이 먹을 거로 꿀을 줄 거면 꿀을 훔쳐오지 않죠. 그래서 설탕을 넣어 주잖아요. 벌들은 설탕을 겨우 내내 먹고 자라요. 그럼 얘들이 이제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걸 먹었을 때와는 다른 삶이 이루어지겠죠. 이렇게 수백 세대를 거듭하면은 벌들도 변화가 오겠죠 벌들의 번식력이 약해지죠. 자기가 만들어서 먹는 것이 자기 삶의 오랜 전통이고 수 억 년의 전통인데요. 수백 년에 걸쳐서 몸을 자꾸 바꾸다 보면 이상해지겠죠. 어느 날 벌들은 그런 변화가 이루어지면 싹 사라지겠죠. 생식이 안 될 테니까.
그래서 벌이 만든 것은 생산물이죠. 꿀은 벌이 만든 생산물이죠. 벌이 아니죠. 벌의 몸이 만든 생산물이죠. 벌의 마음도 아니죠.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런 물질에도 그렇게 배어 있어요. 만들어왔던 역사와 짜였던 천의 모양새가 되어 있어요.
육각형 위에 짰다는 거죠. 육각형으로 짜진 거기에 꿀을 얹었다라는 거죠. 그 얹혀진 꿀도 그 육각형을 보존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러면 우리 세포 하나하나는 전부 거기 얹혀 있죠. 바라돌 위에 얹혀 있죠.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그곳을 경계로 해서 그곳을 중심점으로 해서 얹혀 있죠. 그 사이에 얹혀 있는 게 아니고 끼어 있는 게 아니고 꿀처럼 마찬가지로 얹혀 있습니다.
육각형과 육각형 사이에, 육각형과 육각형이 만나는 지점이 우리의 본색이죠. 다르게 육각형 안에 들어 있고 다른 육각형 안에 있는 게 본성이 아니에요. 꿀이라고 한다면 그냥 당분이에요. 육각형의 선이 곧 어쩌면 꿀인 거죠. 그러면 설탕물만 넣어서 그 흔적이 없는 것은 당분이죠.
사람 몸도 마찬가지로 세포 하나하나는 그 바라돌 위에 얹혀 있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얹혀가지고 바라돌이 커져서 점점 씨줄과 날줄이 복잡해지고, 그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경계인 올 지점에 전부 세포 하나가 다 얹혀 있는 거죠. 그 얹힌 것의 종합이 ‘나’라는 물질인 거죠.
엄밀하게 보면 그렇게 틀을 얹히도록 세포가 얹히도록 틀을 짜준 거, 그게 본색일 수 있는데요. 현대 의학과 생물학은 그렇게 얹혀져 있는 세포 덩어리를 나로 인식하죠. 적어도 나와 관련된 물질적 영역으로 인식하죠. 엄밀하게는 그렇게 얹히도록 짜놓은 것이 더 본색일 수 있다! 이런 거죠.
집으로 말하면, 필요한 것은 집 안에서 내가 사는 공간이지만 집이 집인 것은 기둥과 서까래가 만나는 점이에요. 위에 있는 고갱이와 기둥이 만나는 거죠. 들보와 기둥이 만나는 그것이 집의 본색이죠. 그게 있음으로써 공간이 확보가 된 거죠. 공간이 집의 본질이 아니라 집을 짠 얼개가 본질인 거죠. 그리고 그 공간은 그 얼개를 반영하고 있죠. 그 안에 머무르는 공기에도 그 집을 짠 얼개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봐야죠.
아무튼 그렇게 얹혀져 있는 세포 하나하나에도 다 동일한 무언가를 가진 씨와 날이 결합돼서, 나도 아니며 내가 아닌 것도 아닌, ‘씨’의 나와 ‘날’의 바깥의 것이 결합되어 있는 그 세포 하나하나가 다 보편적으로 우리 인간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확인해 냈는데, 과학적으로는 그걸 DNA라고 한 거죠.
엄밀하게 보면 DNA 전에 그런 DNA를 가진 세포가 얹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우리가 세포에만 중점을 두면 세포 분열이라고만 생각해요. 그런데 그 세포와 세포는 왜 붙어 있어야 되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면에서 그런 식으로 쪼개기를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전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할 수 있어요. 양자까지 가려고 해요. 양자까지 가도 양자에 접근할 수 없어요.
양자란 바로 바라돌이기 때문이에요. 날줄과 씨줄이 만난 그 올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언젠가 과학은 그러한 시점으로 갈 거라고 봐요. 현재 대다수의 과학은 분해해서 최소 단위를 이해하는 데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세포의 경우에는 그 안에 공통으로 DNA를, 어느 세포를 빼도 공통의 DNA는 다 있죠. 그러한 세포가 분열돼 가는데 왜 그 분열된 세포는 붙어 있을까? 왜 붙어 있을까? 무엇 때문에 붙어 있을까? 어디에 기대서 붙어 있을까? 붙어 있게 한 그 힘이 ‘나’일 수 있다는 거예요. 내 심(心)이라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심이라고 말하는 거죠.
심과 기
그것이 심이고 동양학에서 말했던 기(氣)라는 거예요. 기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씨줄과 날줄이 결합돼서 하나의 에너지가 발현되고, 그 에너지는 사물을 얹어 놓을 수 있는 에너지요. 제가 능직과 평직 얘기를 한 적이 있잖아요.
능직은 왜 나왔죠? 평직이 너무 빨리 닳으니까. 잘못 짜면 축 쳐지니까. 힘이 없으니까. 능직은 튼튼하려고 짠 거 아니겠습니까? 또는 평직은 옷이 상대적으로 시원한데 능직은 따뜻할 수도 있죠. 겹겹이 짰으니까. 바지 같은 데는 우리가 능직으로 하면 오래 입을 거고 반대로 능직으로 하면 여름에 셔츠를 만들면 덥겠죠. 뻣뻣하기도 할 거고요.
제가 능직과 평직 얘기를 했지만, 벌집만 하더라도 육각형이잖아요. 우리가 보이는 것만 육각형이잖아요. 근데 그게 벌집의 씨줄과 날줄은 아닐 거예요. 또 다른 줄이죠. 그러면 인간에게서는 어떤 식으로 그 줄이 짜질까? DNA를 통해서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런 쪽의 연구가 안 이루어졌으니까요. 아까 꿀을 넣고 찬물 넣어서 살살 흔드는 식으로 우리 세포를, (그와 궤를 같이 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세포 흔들기를 해본다면 어떤 씨줄과 날줄의 모습이 물질적으로 확인될까? 과연 육각형일까? 사각형일까? 오각형일까? 칠각형일까? 이것도 또 아닌 이상한 기하학적인 무늬일까?
우리가 올이라 그러잖아요. 올이 풀린다 그러잖아요. 그럼 올은 뭐죠? 올은 이미 풀리기 전 상태가 올이잖아요. 그러니까 올이 풀린다 그러죠. 애초부터 풀려 있으면 올이 풀린다고 하면 안 되죠. 올은 바로 그런 것이죠.
혹시 여러분 ‘연인’이라는 프로그램 보신 적 있으세요? 역시 연세 드신 분이 먼저 보셨다고 하시는 군요. 전 연인에 등장하는 단어의 뜻을 나중에 알고 운 적이 있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쯤에 엄청 크게 울었던 적이 있어요. 어릴 때 모르고 화냥년이라는 표현을 저도 배웠던 거예요. 부정적인 개념으로 배웠던 거예요. 그리고 중학교 들어가서 알게 됐어요. ‘아, 호란 때 잡혀갔다가 돌아온 분들이구나!’ 아, 그렇게 불쌍한 분들인데 그분들의 그 불쌍함을 모르고 내가 함부로 말을 했구나! 회한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너무너무 죄지은 느낌인 거예요. 그 말을 그런 뜻으로 썼다는 것 자체가…
아무튼 그런 분들이 거기 많이 나오잖아요. 근데 그렇게 해서 그분들이 와서 뭘 하죠? 자기들이 보호를 못해 그렇게 됐는데 오면 남자들이 같이 안 살죠. 세계 역사에서 자기가 보호를 못해서 그렇게 된 여인들을 버린 나라는 대한민국 역사밖에 없습니다. 조선밖에 없습니다.
칭기스칸은 어떻게 했나요? 자기의 부인이 어디론가 잡혀가고 거기서 큰아들 주치(Зүчи) 낳아왔죠. 그 주치에 대해서 다른 종족의 아이라고 말만 꺼내면 그냥 안 두지 않겠다고 그랬죠. “얘는 100% 내 아이다. 헛소리만 꺼내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 그랬죠.
그러면 그것이 성리학의 폐해냐? 성리학에는 그런 여인들을 버리라는 어떠한 근거도 없어요. 지저분하고 더러운 조선 남자들의 버릇이에요. 조선 남자들은 그때 역사적으로 몇 억 년 동안 희생해도 갚을 수 없는 죄를 몇 십 년 동안 진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돌아왔잖아요. 그 여인들을 버리죠. 그 여인들을 버리는 걸 뭐라 그러죠? 우리 말로? 소박이라고 그러죠. 소박을 한자로 하면 뭐죠? 소박을 한자로 하면 그걸 ‘이혼(離婚)’이라고 해요.
이혼은 버렸다는 뜻이에요. 아직도 그 말을 쓰고 있어요. 우리 결혼의 반대가 이혼이 되겠죠. 여자들도 몰라요. 이혼이란 말 자체가 소박 맞은 것이에요. 지금 우리는 그런 의미로 쓰지 않죠. 원래는 해혼(解婚)이라고 해요. 결합하는 것의 반대는 해체하는 거죠. 이(離)라는 것은 쫓아낸다는 뜻이에요. 떠날 자를 떠나게 하는 거죠. 자기는 그 자리에 있고 떠나게 하는 거죠. 그런 의미로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지금은 바로 잡을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원래는 소박 놓는 것이 이혼이었어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씨줄과 날줄도 결이 돼요. 결이 되면 끝나는 데가 나오겠죠. 끝부분이 옷으로 치면 그렇게 끝나는데 옷 풀리지 않게 매듭지어진 데가 있죠. 인간이 짜는 천이다 보니까 풀릴 수 있어서 마지막에 이렇게 올이 안 풀리게 처리하는 데를 영어로 뭐라 그러죠?
셀비지(Selvedge)! 그렇죠? 엣지(edge), 세르지(serge)의 끝부분 셀비지죠. 천의 매듭이죠. 근데 그게 만들어지면 더 이상 이제 못 가는 거죠. 그러면 거기가 끝이죠. 그곳이 결론이죠. 시작은 씨줄과 날줄의 첫 연합으로 이루어졌고 계속 씨줄이 짜이죠. 이것을 제가 지금 너무 단순하게 설명을 이렇게 해나가지만요. 우리가 천을 짜는 것도 우리 몸에 있는 씨줄과 날줄을 짰던 본성이 나온 거예요.
그렇게 우리 몸이 형성됐던 그 본성이 나와서 우리도 천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만든 모든 상품은 자신 안에 있는 모습들을 밖으로 드러내요. 그럼 우리가 만든 이야기도 다 드러낸 것일 가능성이 많아요. 아까 말씀 드렸죠. 그리고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죠. 사람 몸 속에 거대한 지렁이 또는 거대한 용, 용치고는 작은 거죠.
구약에 나오는 뱀은 그거예요. 그게 내 밖에서 나를 꼬신 것 같죠. 씨줄과 날줄이라는 면에서 보면 내 밖일 수 있지만 엄밀하게 내 안에 있는 그 지렁이고 그 용이에요. 걔가 에너지를 생산하려고 살살 꼬셔서 선악과를 먹게 한 거죠. 선악과를 먹은 놈도 자기고 선악과를 먹지 않은 놈도 자기인 거죠. 구약에 나오는 뱀은 자기 안에 있는 장(腸)이에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살살 꼬드겨서 단맛을 줘가지고 먹게 하죠.
부도지(符都誌)에서는 그러는 거죠. 처음에는 땅젖, 즉 지유(地乳)만 먹던 인간들에게 포도를 주죠. 여기서는 포도가 선악과로 등장하죠. 포도를 먹고 나서는 어느 순간에 펄쩍 뛰면서 ‘이게 힘이로구나!’ 이렇게 되죠.
닷과 빛
아무튼 이게 무슨 얘기냐? 하나하나 짜가는 데 있어서 외부에서부터 뭔가 안 들어오면 짤 수는 없다는 거예요. 짠다는 것은 거기에 들어와 안착할 조건을 갖춰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는 뭐라 그러냐? 온도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땅이에요. 그걸 ‘닷’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씨줄을 ‘빛’이라고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의 빛을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빛과 닷의 결합보다 그러니까 씨줄과 날줄의 첫 올인 이 바라돌이 제일 문제인 거예요. 이 정체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번 이야기마당은 그 정체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모임은 아니에요. 그거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어떤 쉬운 방법도 없고, 하나하나 조금이라도 하면서 해봐야 되는 어려운 얘기죠.
그렇게 우리 몸이 이루어져요. 그리고 수많은 세포들이 그 위에서 삶을 유지해요. 그 삶을 유지하는 것을 통으로 묶어서 하나의 결이 되죠. 결이라는 것은 곧 결합(結合)이에요. 그러니까 한자의 결(結)이라는 것도 당나라 시대 때 발음 갖고 보면 우리 말 결과 같아요. 발음을 채용해 간 거예요. 태초에 글자가 먼저 있었던 게 아니라 음가가 먼저 있었던 거예요. 음이 있고 나서 세월이 가다가 문자가 만들어지는 거죠. 문자부터 읽고 음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기본 음가와 표음과 표의문자의 전개 과정
제가 한자 혹은 옛날 상형 문자 수업을 하는 첫 시간에 물어보는 게 그거예요. 사람 인(人) 자를 써요. 그리고 이거 뭘 상형했지? 그러면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에요.” 누구나 알아요. 중국인이라면 더 잘 알아요. 그때 두 번째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 인 발은은 현재 런(Rén)이죠. ‘런’도 중국의 보통화를 배우면서 생긴 발음이고, 정확하게 표준 발언을 하면 알(r)이 들어간 런이 아니고, 연(yen) 비슷해요.
그러면 그 발음은 어디서 왔지? 그 순간 고요해져요. 발음이 먼저였겠죠. 그 발음을 표현하려고 표기 부호를 만들었겠죠. 표기 부호를 만들다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부호를 일단 만들어 놓고 그걸 형상으로 썼어요. 그럼 그렇게 읽어요.
어떤 데서는 형상을 써놓고 형상으로서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발음을 표기해요. 발음을 표기하면 나중에 복잡해지면 그 음가들끼리 결합하겠죠. 그러면 단어가 만들어지겠죠. 그건 표음 문자가 가야 되는 필수적인 길이에요.
표의 문자는 그럼 어떻게 가야 되나요? 애초에 출발이 표음문자였어요. 상형으로 그럼 방법 없어요. 글자를 다양하게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음가를 유지하면서 다양하게 형상을 바꿔서 뜻을 복합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동일한 음가에서 온 유사한 의미가 분화되면서 다양한 글자가 만들어지는 것이 표의문자의 갈 길입니다.
그런데 발음을 표기했어요. 글자가 똑같아요. ‘인’이라고 쓰면 인은 똑같이 써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면 다른 음가와 결합시켜서 단어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출발에 따라 문화적으로도 어떤 식의 창의적인 생각을 내놓느냐가 달라지죠. 어떻게 결합해서 창의적인 것을 내놓느냐 하는 쪽으로 분해 작용이 많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어떤 쪽에서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형상 내지 약속을 만들어낼 것인가 다양해지겠죠.
결국 표의문자든 표음문자든 처음에는 최초의 기본 음가에서 온 거죠. 기본 음가가 먼저 와서 되는데 문제는 나중에 글자가더 복잡해지잖아요. 예를 들어서 인이 있어요. 그럼 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 인(因)자도 쓰고 여러 가지 인자를 쓸 수가 있죠. 어질 인(仁)도 쓰고 사람 인도 써요. 글자를 다양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사람이 함께 있을 때 해야 되는 도리, 그 다음에는 사람이 짓는 뭔가에 원인(原因)을 제공할 때의 因 등등 이렇게 뜻을 분화해 써요. 그런데 그것 갖고도 안 돼요. 그러면 표의문자도 표음문자가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채용할 수밖에 없어요. 두 개의 글자를 붙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본격적으로 붙이기 시작한 게 언제냐? 그게 당나라예요. 왜 당나라였을까? 중국은 우리 같은 조그마한 나라를 보고 굉장히 시샘하죠. 사실 우리도 굉장히 못난 나라잖아요. 남과 북이 총 겨루고 앉았고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서로 망하는 길을 막 열심히 가고 있죠. 같은 민족끼리 같은 공동체끼리는 승부라는 건 없어요. 싸움이 있을 뿐이에요. 승부가 안 나요. 승부가 난 역사는 유사 이래 없어요. 언제 나느냐? 같이 망하는 걸로 나요.
중국에 대한 이해
아무튼 그렇게 못난 나라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고 시기질투를 하는 중국이 있어요. 왜 그럴까? 사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기 역사보다 식민지 역사가 훨씬 길어요. 원나라! 따지고 보면 식민지죠. 수나라! 따지고 보면 식민지죠. 청나라는 만주족 식민지죠. 오호십육국이나 위진남북조 전부 식민지죠. 한족이 중심이 되어서 그 땅을 이끌어갔던 역사는 지극히 짧아요.
언제? 진, 한, 당 정도죠. 그런데 당도 애매해요. 정말 (한족 중심이라면) 송과 명이에요. 그게 다예요. 춘추전국은 따질 것도 없어요. 복잡해요. 애초부터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해요. 진나라는 세월도 없어요. 몇 십 년 정도였어요. 한나라도 기껏해야 한 2~300년으로 그렇게 길지도 않아요. 송나라는 우리 역사로 비교하면, 고려 초기에 시작해서 고려 중기에 망했어요. 명나라는 우리 조선 때 시작해서 우리 조선 중기 때 망했어요. 조선으로 비교하면 중국의 역사 전반부는 자기들이 이끌어온 역사이고 후반부는 식민지인 셈이에요. 고려시대 갖고 생각하면 역시 전반부는 식민지였죠. 전반부에 송나라 자기들이 이끌고 그 다음에 후반부에 가면은 원나라의 식민지였죠. 삼국시대로 가면 처음에는 위진남북조 식민지였고, 수나라는 돌궐족이잖아요. 당나라 반(半)식민지라 할 수 있죠.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식민지 역사예요. 그걸 어떻게 해요. 수나라를 자기 역사라고 만들어야죠. 위진남북조도 한족의 역사로 만들어야죠. 원나라도 자기 역사로 만들어야죠. 청나라 역시 자기 역사로 만들어야죠. 이왕 만드는 김에 고구려도 자기 역사로 만들어야죠.
그것은 자기들의 정당화를 위해서, 역사적 스트레스를 없애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중국은 식민지 역사가 훨씬 길어요. 독립적으로 자기 종족의 명운을 자기들이 결정해 온 역사는 너무너무 짧아요. 얘기가 객담으로 가는데 나중에 한 두 주 지나면 돌아와요. 제가 횡설수설하면서도 얼개를 잘 짜요.
그래서 중국인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나라 이름은 언제 만들어져요? 하나의 나라로서는 진나라 때 만들어졌죠. 어떻게 해요. 나라 이름은 진 즉 차이나(china)의 진이 되죠. 나름대로 하나의 민족이다고 할 수 있는 건 진나라로서는 너무 짧아요. 그래서 민족은 한(漢)이 되죠. 문화는 송(宋)문화하는데 송만 하니까 조금 짧아 당송 문화라고 그래요.
그래서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들이 그나마 직접적으로 명운을 결정했던 세 시기를 갖고 자기를 표현해요. 영토적 틀로서는 진(秦) 즉 차이나, 그 다음에 인간들로서는 한(漢) 피플(people), 문화로서는 송(宋) 컬처(culture)! 나머지는 다 식민지 시절이거든요. 자기들의 영역을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잖아요.
한(漢)민족 안 하고 원(元)민족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청(淸)족이라 할 수도 없고요. 문화도 마찬가지죠. 청문화를 대청문화 이러면 중국이 뭐가 돼요. 대원문화 그러면 중국이 뭐가 돼요. 그러니까 중국이 내세울 수 있는 게 겨우 세 개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것들이 침입해도 깨지지도 않고 쳐들어왔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물러 나가버리고 이상한 게 있는 이 자그마한 나라가 신경 쓰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는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그분들 얘기예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곁다리 말씀이지만 왜 드리느냐? 현재 중국의 역사 또는 중국인 안에 청나라적 요소 없을까요?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닐까요? 원나라의 요소는 없을까요? 골동시장 가면 제일 많은 게 원나라 유물이에요. 파란색, 녹색, 빨간색 있는 도자기들 있죠. 당삼채 있죠. 그건 당나라하고 원나라 거죠. 두 나라가 어떻게 색깔을 같은 걸 쓰네요. 뭔 얘기죠? 한족이 아니라는 얘기죠.
외부 민족들이 컬러풀(colorful)에요. 기마민족들이 컬러풀(colorful)해요. 기마민족들이 뭘 갖고 들어오면은 나중에 한족들이 다시 차지하면 그것을 싹 밀어내고 단순화시키죠. 그러면 다른 이민족들이 또 들어가 컬러풀하게 만들면 또 단순화시키죠. 북방 기마민족이 흑도 즉 까만색 도자기를 쓰면서 내려오죠. 그러다가 당삼채 같은 게 들어오는 거예요. 송나라는 다시 복구를 하죠. 단색인 청자로 복구를 해버리죠. 그 다음에 원나라가 들어와요. 또 울긋불긋하게 칠하는 거예요. 다시 명나라가 들어왔어요. 여러 가지 현실성에 의해가지고 또 단색화 시켜요. 백자죠. 근데 백자 갖고 열심히 쓰는데 만주 애들이 들어가서 또 칼라풀하게 만들어버리잖아요.
지금 중국 도자기는 뭘까요? 중국 사람들이 그래서 지금도 경덕진과 이싱을 좋아하는 겁니다. 다른 많은 요(窯)가 있어요. 그러나 거기는 되게 울긋불긋한 도자기를 만들었던 전통이 강한 곳이에요. 자기들이 심리적으로 백자와 단색이었던 이싱 자사를 좋아하는 거예요. 이싱 자사에 지금도 유약 바르면 안 된다 그러잖아요. 유약 발랐던 시절이 있어요.
자사는 명나라 이후부터 주로 역사에 많이 등장하니까 명나라는 한족이죠. 유약 바를 이유가 없죠. 청나라 때 자사 위에 보면 법랑채를 막 발라요. 파랗게 바르고 빨갛게 바르고 노랗게 바르고 녹색 바르고 해가지고 화려하게 만들어놓아요. 그리고 그 밑에다가 진짜면 대청건륭어제(大清乾隆御製)라고 새기죠.
경덕진도 정복을 한 다음, 청화백자만 만들던 데다가 울긋불긋하게 무늬를 막 넣고 하죠. 유약을 넣죠. 청나라의 영향이죠. 그러니까 엄밀하게 하면 칼라 문화와 단색 문화의 상황에서 중국의 유물 중에 남아 있는 게 단색이 많으냐, 칼라가 많으냐 보면은 남아있는 건 비슷하다고 보고요. 그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깨버렸으면 칼라를 깨버렸겠지, 단색을 깼겠어요. 근데도 칼라 도자기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식민 역사가 훨씬 길었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칼라와 단색은 동일하게 중국적인 것을 담고 있어요.
내 몸에 쓰이는 에너지에 대해
내 안에 내 다른 요소가 끊임없이 들어오죠. 날줄로서 들어오죠. 그래도 그거 다 나예요. 나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사람이 무언가를 먹었어요. 먹으면 일부는 내 것이 되고 일부는 나가죠. 일부는 내 것이 됐다가 다시 더 깊이 내 것이 됐다가, 더 깊은 내 것이 안 된 건 또 나가고 그러죠.
우리가 밥을 먹으면 이 지렁이 안으로 집어넣죠. 그럼 지렁이가 우물우물해가지고 여러 가지 스텝 기관인 간이나 폐나 심장이나 신장 등에 도움을 받아서 에너지를 만들죠. 그 에너지를 다시 정밀하게 만들죠. 그리고 정밀하게 만든 것을 가지고 신경 작용 등에 쓰죠.
거친 에너지의 첫 집합소가 위(胃)죠. 에너지를 만들 소재 가운데 거친 에너지의 소재가 위에 모이고 위에서 모인 이후 다양한 작용을 거쳐서 거친 에너지가 되고, 거친 에너지는 다시 신장으로 모이죠. 신장으로 모여서 거친 에너지는 일단 피로 모이죠. 피에서 다시 정밀한 체액 등등으로 신경에 쓸 수 있는 물질로 가죠. 피는 직접 신경에 쓸 수 없는 물질이거든요. 피는 거친 에너지에 속하죠. 그게 더 정화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 피는 빼가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피는 정밀한 에너지로 전환되어서 사라지는 게 더 많아요. 그 부분도 앞으로 의학의 과제예요. 그게 앞으로 의학의 과제이면서 가장 돈 많이 버는 대기업의 탄생의 과제예요.
세포 하나하나마다 전부 DNA 있죠. 혈액은 그 개인의 특징이 다 남아 있죠. 근데 수혈을 해요. 어떻게 될까요? 남이 들어오는 거예요. 남이 이미 자기화시킨 것이 들어오는데 자기화가 안 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그러므로 모든 수혈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 얘기 못하죠. 하는 순간 수술 받지 말고 이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자는 애기니까. 언제까지? 인간이 생산한 피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게 나올 때까지, 즉 대체혈이 나올 때까지죠. 심장이나 간 이식 받는 것은 피 수혈 받는 거랑 똑같아요.
심지어 피 수혈 받고 나서 그 사람 꿈꿀 수도 있어요. 누구 피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꿈을. 근데 그런 거 따지면 안 되죠. 따지는 순간 모든 치료에 혼선이 와요. 남의 피를 가지고 지금은 수술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생산된 피가 나오는 시절이 2~3년 이내로 도래할 겁니다. 제 이야기 그때 가서 또 떠오르실 거예요. 그때는 마음 놓고 이제 피를 쓰겠죠.
어쨌든 피에는 그의 개성이 담겨요. 우리 개성이 있다는 건 거칠다는 뜻이에요. 개성이 아닌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이야기하지만 현실적으로 보편성이라는 것은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이야기예요. 진짜 보편성이라면, 어디까지가 보편성이에요?
개성이 잘 안 찾아지는 정도라는 이야기예요. 현재 우리가 쓰는 보편성이라는 말의 현실적인 진짜 의미는 개성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인, 닳고 닳아서 또는 개성이 깎이고 깎여서 더 이상 개성을 찾기는 쉽지 않은, 이 정도를 그냥 보편성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진짜 보편성이라는 건 철학에나 존재하는 거예요. 연역적인 개념에서만 존재하지 귀납적으로는 보편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보편이라고 가정한 영역이 있는 거죠.
그러면 저도 같이 그 개념을 일단 쓴다고 치면 피는 그의 인자성을 다 알 수 있는 개성이에요. 지금은 피만 가지고는 무언가 사람을 다시 만들던가 할 수 없죠. 그 핵이 있어야죠. DNA가 있는 뭔가 있어야죠. 그런데 곧 피만 가지고도 복제를 할 수가 있을 거예요.
피를 가지고 보면 피는 개성이 듬뿍 담겨 있는 물질이에요. 누구 누구 피가 어느 정도는 보편성이라고 치고 우리가 수술도 하고 수혈도 하고 여기에 헌혈도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개성이 듬뿍듬뿍 담겨 있는 물건들이에요. 어느 정도 선에서는 수술하고 의학적인 면에서는 보편성인 인체 물건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왜? 간주 안 하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요.
피 자체에서 ABO만 따져가지고 계산을 나눌 게 아니죠. 어느 정도 반드시 피해야 되는 정도의 개성이기 때문에 ABO를 따지는 거고 사실은 더 따져야 될 게 많아요. 예를 들어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을 하기 위해 적합도를 조사하잖아요. 피만 갖고 돼요? 더 많은 부분을 조사하죠. 급하면 피만 해야죠.
아무튼 개성이 많다는 거예요. 개성과 개성은 맞춰야만 부작용이 없죠. 일단 어느 정도 보편성을 봐놓은 것은 의학적 편의주의예요. 그렇게 만든 피는 따라서 개성이 있는 만큼 거친 에너지예요. 거친 에너지 재료의 집합소가 위라면, 거친 에너지의 집합소는 심장이에요. 심장을 통해서 피는 더욱더 정밀한 에너지로 전환이 되죠. 필요하면 여러 기관의 도움을 또 받죠.
피를 정화시켜주다가 무리가 오면은 어떤 때는 폐가 그 기여를 해서 폐가 섬유화되기도 하죠. 어떤 때는 췌장이 망가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담이 망가지기도 하죠. 너무 거친 게 오니까 덜 거친 게 오게끔 심장에 무리를 주기도 하고요. 아무튼 어느 정도의 카테고리와 범위 안에서, 어느 정도의 경계 안에서 거친 것이 용납되고 모이는 것이 심장입니다. 심장을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냥 피 공급한다고 하지만 피는 따라서 거친 에너지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소화를 시켜야 되잖아요. 소화를 시키려면 피도 물론 엄청나게 쓰여요. 그래서 밥을 먹고 소화를 하는데, 이 피를 소화하는데 너무 쓰다가 나중에 지쳐서 나타나는 현상이 밥 먹고 나면 졸리는 거죠.
특히 소화를 해야 되는 피가 소화를 해야 되기에 너무 무리한 재료가 들어가면 더 졸리죠. 인공 조미료의 문제는 그 합성 성분의 문제가 아니에요. 합성 성분으로 보면 2~3년 내에 인공 조미료는 천연 조미료보다 더 좋은 게 나와요.
저는 지금도 외국 가면은 제가 물을 좀 가려요. 그러면 자연적인 재료보다는 인공물을 사서 먹어요. 차라리 탄산음료 사서 먹어야 그게 탈이 적거든요. 근데 엄청 졸리죠. 그걸 소화하려고 피는 노동을 쳐야 되니까 엄청 졸리죠. 그래서 미원 같은 인공조미료 많이 친 음식 먹으면 거의 코끼리 수면제를 맞은 것처럼 잠이 오죠. 그때 피가 요동쳐야 되기 때문이죠. 피는 그 순간에 정밀한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서 미리 지불하고 있는 거예요. 체액이라는 것, 무슨 무슨 즙 하는 것은 사실은 피보다 더 정밀 에너지에 가까워요. 완전하게 정밀한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제가 그런 거예요. 연세 드신 분들은 현미 드시지 마시라고. 현미를 소화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정밀 에너지는 엄청나게 소모되니까요. 얻는 게 열이라면 소모되는 게 아홉 정도죠. 얻는 거 하나밖에 없어요. 차라리 정밀한 에너지 하나 소비하고 그냥 4개짜리 얻으라는 거죠. 그게 득이죠. 잘 지은 쌀밥 먹자! 그런데도 너무 몸이 아파서 다양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면, 정밀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해먹자는 거고요. 원칙적으로 현미를 먹는 것은 바보 중에 상 바보 짓이다!
어디 가면 요즘에 그런 건강 미신들이 너무 많아요. “신발을 헐렁하게 신고 다녀라!” “질질 끌듯이 막 발이 잘 놀아야 된다!” 그런데 발은 언제 제일 건강하죠? 날렵하게 걸을 수 있을 때 제일 건강해요. 잽싸게 걸을 수 있을 때요. 발이 터덕터덕 걸리면 발이 자유롭게 노니까 발바닥은 좋을 지는 모르지만, 무릎도 환장하고 골반도 환장하는 거죠. 그리고 엄청 정밀한 에너지와 덜 정밀한 피가 엄청 고생하는 거죠. 그게 몸에 좋겠어요? 근데 그게 돌아다녀요. 그래서 일부러 막 두 사이즈 큰 거 사가지고 막 발 놀리고 다니는 사람 있다고 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죠. 검토하면 우리에게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오행과 심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전기를 얻기 위해서는, 화학 발전하기 위해서는 뭔가 화학 연료가 들어가야 돼요. 수력의 전기를 얻기 위해서는 물의 에너지가 들어가야 돼요. 에너지가 투입되지 않고 얻는 에너지는 우리는 아직까지 없어요.
햇빛을 받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가 들어가야 돼요. 다만 햇빛도 그냥 가만히 받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내가 안에서 모터를 돌려야 돼요. 에너지 없이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없어요. 그 에너지 체로서 존재하는 것 그 에너지를 ‘심’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힘이 음문 변화를 이어가서 심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힘이라는 것은 뭔 뜻이냐?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내 안으로 응축시킬 수 있는 것을 힘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 힘은 이상하게 색깔로는 아무것도 없는 흰색이 거기에 가정돼서 붙여졌어요.
우리가 오행을 보면, 흔히 그냥 속류 오행이라 그러죠. 요일 별로 하면 화수목금토 여기에 해와 달을 붙여놨죠. 그게 우리 요일인데요. 그것이 진짜 불이 아니고 물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에너지와 형상들 특히 에너지의 분류 기호예요.
뭔가 에너지를 받아들여 놓고 보니까 이것이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정밀한 에너지로 가기 전에 개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을 때의 에너지의 작용과 특징들을 분류해 놓은 거죠. 그러니까 어떤 에너지는 이렇게 들어와가지고 솟구치는 운동을 잘하더라는 거예요. 얘는 붙일 게 없으니까 불이라고 한 거죠. 101이나 100이라고 분류된 도서에 가면 아무 상관없잖아요. 거기는 도서를 분류하는 방법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심을 구성하는 혹은 심이 또는 만들어낸 그 에너지를 분류하는 방법이에요. 어떤 에너지는 내림 운동을 잘하니까, 그 에너지는 그렇게 물이라고 불러준 거예요. 물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떤 에너지는 보니까 동시에 번쩍번쩍 해요. 나무라고 불러준 거예요. 나무의 특징이 있으니까 그렇게 분류해 준 거예요. 아라비아 숫자와 그 분류된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냥 간판이듯이 마찬가지예요. 어떤 거는 보니까 에너지 폭발을 탁탁 시켜주는 거예요. 그런 걸 그냥 흙이라고 불러준 거예요. 어떤 건 에너지를 쫙쫙 결집시켜주는 거예요. 그런 건 그냥 쇠라고 불러준 거예요. 쇠가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지금 현재 자연계로 볼 때는, 화가 먼저인지 수가 먼저인지 즉 내리는 게 먼저인지 오르내리는 게 먼저인지, 퍼지는 게 먼저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에너지는 처음에는 집중을 해야 돼요. 쉽게 말하면 에너지는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응축이 먼저 시작이에요. 그런 습성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안 하고 겨울 봄 여름 가을 하기도 했던 거예요.
자라가지고 씨를 만든다가 아니라 그분들은 씨가 그냥 자라서 이렇게 돌아온다죠. 사실은 어디를 잡든 간에 똑같죠. 그 상황 자체 모습들을 거부하는 건 아니니까요. 생각이 좀 다르다고 보면 다르게 이해한다는 거죠.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올을 중심으로
우리 몸은 그렇게 씨줄과 날줄을 끊임없이 짜면서 다 짜일 때까지 가요. 언제까지? 더 이상 짤 능력이 씨줄에게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정확하게 말하면 앞에 짠 씨줄과 날줄이 더 이상 밖으로 더 자기를 확장할 능력이 없을 때까지! 그러고 죽는 거예요. 그러면 죽는 거에요.
지난번에도 한번 비슷하게 얘기 드렸습니다만 아이를 보행기에 태운다는 것! 물질적으로 계속 훈련을 시킨다고 못 걷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재활을 열심히 해도 안 될 때 안 돼요. 근데 안에서 마음의 씨줄 날줄이 딱 짜면서 그걸 받아주는 상황까지 오면, 씨줄 날줄이 짠 그 에너지가 안에서부터 발현이 되면, 재활하며 그렇게 반복했던 것과 결합이 탁 되면서 어느 날 회복이 되거든요.
재활을 하면 점진적으로 회복되는 것 같지만, 탁 하고 일어나는 어느 계기가 있어요. 그때부터는 점진적이에요. 진짜 훈련이죠. 근데 그 이전까지는 아무리 해도 효과가 없어요. 안에서 받아주는 게 없어요. 받아주는 게 없는데도 받아주도록 살 수 있어요. 뭐냐 누군가가 시키고 강제하면서 할 수 있어요. 힘은 들죠. 그게 우리 역사의 비밀이고 가치관의 비밀이에요.
모든 가치관은 내 안에서 나오는 내 에너지의 씨줄과 날줄의 작용에 의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대신에, 그 씨줄 날줄 대신에 또 다른 계기를 부여해서 움직이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은 팍스예요. 나를 노예로 만드는 거죠.
아무튼 얘기를 오늘 어디까지 드릴까 좀 헤맸는데요. 씨줄과 날줄 얘기를 드렸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올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내 몸을 보면 내가 보인다! 거기에 얹혀 있는 물질을 중심으로 보면 한없이 찾아도 나는 없다! 나는 없는데 나는 뭐지? 하고 물어봐야 소용없다! 나는 뭐지? 하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지를 묻는 게 더 빠르다!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이 답이 아닐 수 있어요. 답은 없을 수 있어요. 그래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내 입장이 편안해지고,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나 자신은 있다”까지만 보면 일단 그것만도 크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 얘기를 더 이어가야겠지만 오늘 어디까지 이어가야 될까 하고 좀 하다가 얘기를 그냥 쓱 날아서 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몸이 어쨌든 그래서 짜였어요. 그 씨줄 날줄 위에 그 올마다, 그 올이 전제가 돼서 올마다 몸이 얹혀졌어요. 얹혀진 몸은 벌이 만든 꿀처럼 얹혀졌던 얼개들로 보이기 시작해요.
사람의 세포를 흔들어서 그걸 보는 과학이 나오는 순간 인간의 과학, 생체 과학은 한 겹 확 나갈 거예요. 제 나름대로 추측으로는 4~5년 후에 그런 얘기가 다 나올 거라고 봐요. 아마도 거대한 환란을 겪고 난 다음이 되겠죠.
지금은 세계가 겨레
제가 석 달 전쯤에, “우리 지금 앞으로 2~3년 내에 심각한 게 온다.” 그랬는데, 그때는 실감이 안 났는데 요즘은 점점 실감이 나죠. 이야기마당 첫 회에 이슬람권이 충돌했다고 그랬잖아요. 저는 아무래도 큰 전쟁이라고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죠. 타이완도 정말 전쟁 나게 생겼어요. 타이완은 현재 총통 후보들이 한 너 댓 명 돼요. 그 중에 주의해서 봐야 될 후보들이 한 4명 정도 되고, 국민당 후보가 약 24%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그 다음에 이런저런 무소속 후보들이 28% 정도 하고 있어요. 24하고 28을 더하면 52%가 되는데, 이 지지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 죽어도 통합이 안 돼요. 될 리가 없죠.
그런데 민진당 후보는 혼자서 35%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차이잉원(蔡英文)을 이어갈 다음 후보자가 이스라엘 총리보다 더 한 사람이에요. 내일이라도 대륙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사람이에요. 라이칭더(賴清德)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아주 살벌한 사람이에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원조 내지 그 그룹에서 가장 극렬한 지향성을 보이고 있는 분이에요.
그런데 내년에 총통 될 건 거의 정해진 것 같아요. 이분이 뭐라고 주장한 적이 있냐면, 총통 후보로 거론될 때부터 “먼저 대륙을 선제 공격하자. 선제 공격을 해야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벌고 국제적으로 우리 편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우리가 선제 공격 당한다면 우리는 기회가 없다. 전쟁은 일어날 것이고 어차피 안 겪으면 안 된다. 차라리 선제 공격하자.” 지금도 사석에서는 자기가 총통 되면 한 달 내에 한 판 벌리겠다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시진핑은 가만 앉아서 선제 공격 당하겠어요?
아무튼 정세는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요. 하나의 흐름이에요. 우리가 짜놓은 결이에요. 우리 역사도 결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류 역사가 짜놓은 하나의 결이에요. 우리 인류 역사가 짜놓은 하나의 씨줄과 날줄이 가고 있는 결이에요. 그 결을 우리는 다 같이 함께하고 있어요. 지금은 세계가 겨레이에요. 겨레라는 건 결을 함께하고 있는 생명체라고 말씀 드렸죠. 결을 같이 하면 그게 겨레예요.
어떤 사람이 만주어를 말하면서 ‘가락’에서 왔다 그러는데 그건 만주어를 잘못 배운 거예요. 아무튼 손가락 할 때 가락 같은 데서 왔다고 하면서 가락이 같은 거고, 그래서 한 가락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오히려 우리가 쓰는 말에 만주어가 많긴 하죠. 오순도순 같은 것도 만주어죠. 오순도 작은 마을, 도순도 작은 마을, 오순 도순이에요. 그 작은 마을들이 옆 마을과 잘 지내듯이 잘 지내는 게 오순도순이에요.
오늘 제가 드리는 황당한 이야기는 5년 후에 상식이 될 수도 있어요. 상식이 되기 위해서는 리세팅이 돼야 될 수도 있어요.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 세계에서, 소위 물질적으로 또는 생활 습관적으로 가장 잘 산다고 하는 나라들은 다 2차 대전 주참전국들이에요. 피해국이든 피해를 준 나라든, 전쟁에서 폐허가 된 나라든 승전국이든 그들이 제일 잘 살아요. 리세팅 되었기 때문이에요.
한국이 이만큼 사는 것도 역설적으로 6‧25 때문이에요. 그때 완전히 사회가 리세팅 돼버렸어요. 리세팅 안 됐으면요, 박정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나와서 몰아붙여도 국민들이 받아낼 만큼의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리셋이 돼버렸기 때문에 뭐든지 가능했어요. 천이나 도화지로 치면 아무것도 안 그린 백지가 돼버렸던 거였어요. 그렇게 불행과 파괴의 역설이 존재해요. 이런 시기 앞에서 우리가 뭔 얘기를 하고 있느냐 겨우 몸 얘기하고 있습니다.
몸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 물질적이지 않기를
몸 얘기를 해야만 해요. 왜 해야만 하는지는 나중에 끝나고 나면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일부러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제 몸 쪽으로 좀 더 옮겨와서 아까 얼개까지 얘기했는데, 그 얼개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을게요.
이제는 그 얼개 위에 얹어 있는 세포를 비롯한 사람 몸의 작용들에 대해서만 말씀을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번까지 하면은 꽤 많은 내 몸에 관련된 단어들을 한꺼번에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내 몸에 관련된 단어들을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너무 몰라요.
뉴턴이라는 사람 얘기를 전주에 가서 했었는데, 뉴턴이라는 사람 직업 아시죠? 과학자였지만, 뉴턴은 원래 조폐국 직원이었죠. 위조 화폐 검사하는, 검사해서 고소 고발 조치해서 처리하는 조폐국 검사였죠. 뉴턴 때문에 고발 고소된 위조 화폐 범인이 300명 정도돼요. 화폐 구분을 너무너무 잘했던 사람이죠. 그리고 엄청난 초기 주식 투자자였죠. 주식으로 100억을 벌었던 사람에요. 요즘 돈으로 화폐 환산하여 가치로 보면 한 천억 벌었던 것 같아요. 물론 나중에 주식 실패하고 보물선 투자해서 훌러덩 다 날라가요.
이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 사기를 당하고, 주식 실패를 하고 나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모습이 궁금했던 거예요. 당시에 어떤 분석가를 찾아가서 자기 분석을 받았어요. 자기 분석을 받는 방법이 뭐냐면, 2천 단어를 써내라는 거예요. 네가 아는 단어 2천 단어를 써내라는 거예요. 그거 갖고 분석한 결론이 뭐냐? 뉴턴을 보고 “정말 많은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아 들이면서 살아가실 분이다.” 즉 물질 덩어리라고 한 거죠. 물질적인 특징으로만 살아갈 사람이고 진짜 너는 영혼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죠. 아주 극단적인 욕을 먹은 케이스예요.
아무튼 뉴턴이 잔꾀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됐을 텐데요. 여러분 동전 끝에 톱니바퀴 모양의 눈금이 있죠? 그것도 뉴턴이 만든 거에요. 왜냐하면 옛날에 은화는 진짜 은으로 만들었잖아요. 은화 30개를 구해서 30분의 1씩만 싹싹 깎으면 은이 하나가 나오죠. 은화 30개를 사서 귀뚱이를 싹싹 깎아서 각 돈마다 30분의 1만 깎아 모으면 은화 동전 한 잎 아니에요. 이것은 위조도 아니고 잡을 수도 없고 누가 했는지도 알 수 없는 거예요. 제일 골치 아픈 거예요. 뉴턴 입장에서는 이걸 다 처리해야겠는데 그래서 못 깎게 톱니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깎으면 바로 흔적이 나오니까. 머리 좋은 사람이죠.
그리고 옛날에 통용되는 동전 중에서 순은이면 순은의 성분도 있지만, 은을 바르거나 금을 바르는데 무게를 비밀로 하기 위해서 그 안에 양질의 구리를 넣죠. 근데 잡철를 넣어 맞출 수도 있죠. 그래도 바르긴 발랐죠. 구리는 분명 돈이거든요. 잡철은 돈이 아니죠. 이건 은화에서 30분의 1을 깎는 것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죠. 그런데 이걸 알 수가 없는 거예요. 한 1mm 깎아봐도 은인 거예요. 일일이 깎을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 하죠? 이것을 어느 돌에 갈아보니까 표가 나는 거예요. 갇힌 은이 갈려 나오는데도 그 안에 있던 성질이 묻어 나오는 거예요. 그 돌을 어디서 구했느냐? 오늘날의 가자지구에서 구했어요. 그래서 그 돌을 갖고 와서 위조 화폐 감별을 했어요. 그때 가져왔던 돌을 뭐라고 부르느냐? 시금석이라고 불러요. 금과 은을 테스트해 본 거니까. 그러니까 뉴턴은 외국 문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순수 과학자가 아니라 너무너무 현실적인 지식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아무튼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이 쓰고 있는 단어를 가지고 자기를 분석 받아봤어요. 제가 한다 하더라도 그 방법은 매우 합리적인 방법일 거예요. 자기가 살아온, 자기가 자기 삶에 또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씨줄 날줄을 짜온 그것이 단어로서 가장 많이 표현될 거예요.
나는 어떤 단어를 쓸 수 있을까? 한 2천 단어 한번 써보세요. 인구 5천만에서 2천 명만 조사해가지고 정확도 플러스 마이너스 2%에서 지지율을 조사해 전망도 하는데요. 2천 개 받아서 오면 자기가 할 거예요. 일단은 정밀 분석 안 봐도 ‘나는 이렇게 살아왔구나!’
여러분이 살아오는 데서 돈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도 특별히 많지 않고 그것만큼 자연에 대한 이야기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만큼 하늘 이야기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몸 이야기를 해나가는 보람이 앞으로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야만 저도 얘기를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오늘 얼개에서도 씨줄 날줄 얘기를 하다가 지금 여기서 중단해버렸는데요. 어디까지 해야 될까! 저도 더 하면 좋겠는데, 막 바라돌을 그려가면서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도 일단은 2천 단어를 제가 못 받아봤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세상에 못 고치는 현상도 없지만 고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사람이 개입되거든요. 어떤 아픈 것도 돌아올 수 있어요. 그러나 말 안 들으면 답이 없잖아요. 서로가 안 통하면 말이 없잖아요. 답이 없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좀 통해가는 영역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단어 이야기들, 결이니, 씨니, 날이니… 이런 얘기들을 드리는 거고요. 그래서 마음씨라는 게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캐릭터의 의미가 아니라는 거고요. 마음이라고 하는 가정된 것의 첫 운동성의 모습이 마음씨라는 거고요. 그것이 어떻게 마음이 아닌 바깥과의 대화를 이루어가는 첫 올로서 그 첫 씨와 첫 날이 결합된 바라돌의 모습! 이런 얘기를 짧게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간의 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수많은 단어들을 우리 말로 확 돌려보려고 합니다.
‘천상분야열차지도’라는 거 보신 적 있습니까? 혹시 28수도 같은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중국은 그런 문화에서 처음부터 평준화시키려는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28수의 별을 쳐다보잖아요. 그 별들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가 보는 시야의 면적이 다 동일하지 않아요. 어떤 별자리는 방위각이 좁고 어떤 별은 넓고 어떤 건 아주 좁고 그래요. 28개로 분류하더라도 28개의 별자리가 차지하고 있는 각은 다 달라요.
그런데 중국은 28개로 딱 평면 등분해가지고 칼같이 북방 7개, 남방 7개 역시 칼처럼 평균화시키죠. 그렇게 보편적 도형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우리 28수도는 달라요. 있는 그대로 나둬요. 인체도 마찬가지예요. 중국에서 온 인체 모형을 갖고 혈 찾아가잖아요. 그래서 맥을 못 잡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배우기 편한 점도 있지만 실체에 못 가는 점도 있어요. 여기를 다 인중(人中)이라고 얘기해요. 인중이란 말은 알아도, 널심이라는 말은 모르잖아요. 널의 심이라고 하면 넋이 나왔잖아요. 혼백 이야기할 때, 넋이라는 용어가 나왔잖아요. 심이라고 하면 역시 ‘심’이라는 말이 나왔잖아요. 널의 심인 거죠. 어딘가에 씨줄로 가고 있는 틀인 거죠. 이 인중이 널심이라고 본다면 생각나는 개념이 있고, 그냥 인중이라고 하면 사람의 한가운데 정도로 생각하죠. 한 가운데가 아닌데? 그러면 한가운데로 통하는 뭐겠죠.
이게 그러면 왜 널심이라고만 불릴까? 또 다른 이름은 없을까? 여기를 건드리면 죽기도 하고, 어떤 때는 깨우기도 하는 거잖아요. 기절할 때에 누르면 깨잖아요. 예전 사람들이 제일 뭐한 게 우환청심 하나를 먹이고 여기 눌러주는 거잖아요. 그러면 깬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반대로 세게 누르면 죽잖아요.
그러면 이름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긍정적인 요소로 불릴 때 부정적인 요소로 불릴 때, 그렇게 두 가지로요. 우리가 한국이라고 할 때 한의학을 쓰는데, 무슨 한의사예요. 쓰는 용어가 전부 한자인데요. 360혈의 이름이 전부 한자인데요. 중의학의 변방판이죠.
인체도라는 것도 중국에서 그려놓은 도형 그대로 쓰는데요. 인체를 보는 여러 이름들만 알고, 이것을 이어만 놔도 여러분들이 나중에 혹시나 써먹을 때가 있을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을 점검할 때죠. 오늘 얘기 좀 복잡하게 하다가 정리하네요. 일찍 정리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환영합니다.
(차중한담4-질문편은 별도로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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