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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날개 아래
룻기 2:10-12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넷째주일이다. 코로나19가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관리가 된다지만, 세계에 흩어진 색동가족을 비롯해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걱정이 많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우리 식구이지만, 재난이 일어난 외국에서는 남의 식구, 군식구, 객식구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 밤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갑자기 늘어난 확진자 때문에 위기와 고통을 겪는 이탈리아로 전화를 걸었다. 2월 초, 확진자가 단 1명이 없던 그 때에도 동양인 혐오가 기승을 부렸던 이탈리아였다.
그곳에서 27년 째 살고 있는 홍기석 목사님은 난생 처음 겪는 재난으로 이탈리아가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하였다. 거리는 이동금지, 집회금지, 영업금지령이 내려졌고 겨우 동네 슈퍼마켓만 갈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사회 붕괴와 같은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대부분 관광업과 식당, 가이드로 먹고 사는 교민들은 더 큰 걱정이다.
신문에 보니 이탈리아 가정에는 무지개 그림과 함께 이런 글귀를 내 걸었다고 한다.
“안드라 투토 베네”(다 잘 될거야).
‘다 잘 될거야’라는 믿음은 턱없는 소리 같지만, 그러한 마음 마음이 모여 희망으로 이끈다.
색동교회는 국내에서 마스크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을 위한 마스크 기부운동에 참여하려고 한다. 안양 YMCA 꿈꾸는부엉이가 마스크 제작을 위해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함께 하려는 분은 교회헌금 계좌에 따로 마스크라고 붙여서 참여할 수 있다. 면 3겹인데 1장 당 3500원이다. 마스크 기부를 통해 ‘다 잘 될거야’란 믿음을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오늘 룻기의 말씀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모압 출신 여성 룻이었다. 한 마디로 룻은 이방인, 나그네, 과부의 삶을 한 몸으로 살아온 당사자이다.
룻기의 시작은 룻의 시가인 한 유대인 가족에 대한 스토리로 시작한다. 시아버지 엘리멜렉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살았는데,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자기 식구를 데리고 요단강 건너 동쪽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다. 흉년이 그칠 때까지 잠시 몸을 붙이자고 임시로 간 것이다. 그런데 잠깐 머문다는 것이 훌쩍 10년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엘리멜렉 가정의 1차적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험해 엘리멜렉 가족 중 남자들은 모두 일찍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다. 시절도 험하고, 사람 꼴도 참 험하였다.
룻은 나오미의 두 며느리 중 한 사람이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단해야 하였다. 결국 동서인 오르바는 그래도 친정 나라가 더 나은 듯하여 모압에 남을 것을 선택하였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남의 나라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온다. 이젠 룻은 이전에 시어머니 가족처럼 이주민이 되었다. 룻의 경우 그냥 이주민이 아니라, 이방인이고, 과부이고, 여성이었다. 당장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 보다 더 불행한 처지가 되었다.
나그네 혹은 이주민 신세는 참 괴롭다. 오죽하면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주민이 되기보다는 비참한 원주민이 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누구든 자기 고향과 조국을 떠나는 것은 가장 큰 실연의 아픔이고, 지독한 상실감을 느낄 만하다.
그동안 아무리 처지가 딱하였어도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자기 친정 동네로 돌아간다. 그런데 룻은 본래 유대인도 아니고, 지금 남편도 없다. 오죽 하면 가난하고 홀로 남은 그런 시어머니를 붙잡고 따라 나선 것이다. 룻의 선택은 여러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선택이고, 최후의 선택이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나그네 이야기는 성경 속에만 있지 않다. 우리 한민족의 경우에도 150여 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 나그네로 살았다. 그 숫자가 현재 750만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도 2019년 통계로 236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모험을 한 사람들이다.
2)
룻기 이야기는 이런 막막하고 암담한 처지의 룻이 유대 땅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그 배경에 무슨 도움과 보호를 받았는지 들려준다.
처음에 룻은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한다.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일은 나그네와 과부 등 가난한 사람의 몫이었다. 룻이 이삭을 주운 밭은 “우연히”(2:3) 엘리멜렉의 먼 친척 보아스의 소유였다. 보아스는 친절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종들에게나, 이삭을 줍는 가난한 이들에게나 따듯하게 대하였다.
마을 유지인 보아스는 모압 여자 룻이 어디서 왔는지, 홀로 된 자기 시어머니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 전후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여자 룻의 따듯한 시어머니 사랑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
보아스는 룻 시아버지의 먼 친척이었다. 그런 보아스가 룻에게 더욱 친절을 베푼 것은 자연스럽다. 자기 일군들이 떠온 물을 룻도 마실 수 있게 했고, 일군들이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 룻도 끼어서 함께 먹도록 배려하였다. 게다가 떡을 나누어 주면서 초에 찍어 먹도록 하였다. 심지어 볶은 보리를 나누어 주고, 룻이 다른 이삭 줍는 여인들보다 더 많은 이삭을 줍도록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그 앞에 뽑아 놓게 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만큼 고마운 일은 없다. 그래서 이런 친절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이다.
우리 그리스도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신앙공동체이다. ‘환대’의 전통은 뿌리 깊은 그리스도교의 유산이다. 성경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을 강조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우리의 경우 손님은 내가 알고 있는 초청받은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낯선 사람, 이방인을 뜻한다. 성경에서 나그네 손님은 약속하고 찾아 온 사람이 아니다. 그냥 떠돌이이다. 인도말에도 ‘손님’의 뜻은 시간을 정하고 찾아 온 사람이 아닌, ‘약속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땅에 찾아온 손님, 곧 이주민은 우리의 친절에만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고달플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동포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디아스포라로 산다는 것은 깨어지지 않는 유리벽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보호자가 되신다. 나그네는 제3자를 가리켜 한 말이 아니다. 그 배경은 너희도 억압받은 종살이를 한 백성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은 나그네 출신이다.
과연 나그네 아닌 인생이 있을까? ‘인생은 나그네 길’은 누구나 공감하는 애창곡이다. 그러기에 나그네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그네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나 역시 한시도 남의 친절이 없다면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나는 하루 동안 과연 몇 사람의 친절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 종종 그들은 내게 천사와 같은 보호자요, 안내자였다.
보아스는 룻의 감사인사를 받은 후 더욱 룻을 축복하였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12).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필리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다. 다음 달에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지하에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정식으로 간판을 내건다고 한다. 내게 교회에 걸 십자가를 의논하였다.
그래서 먼저 필리핀에 연락해서 고향을 느낄만한 나무를 공수해 오라고 하였다. 필리핀에는 ‘나라’라고 부르는 소나무가 있다고 한다. 그 나무를 반듯하게 자른 송판 두 개가 한국에 도착하였다. 양양공항 세관에서 걸렸는데, 겨우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돌려받았다고 하였다.
평범한 송판 두 개를 두고 계속 묵상하였다. 십자가를 만들기에는 너무나 평범하였다. 게다가 말끔히 다듬어서 정체성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두 개의 송판을 양 날개처럼 재단하여 한국산 참죽나무 기둥 양쪽에 끼워서 십자가를 만들도록 주문하였다.
참죽나무는 한자어로 ‘춘’(椿)자로 쓰는데, 참죽나무 춘, 아버지 춘이라고 한다. ‘춘’은 춘부장 하듯 남의 아버지를 높이는 말이기도 하다. 십자가에 아버지란 의미의 기둥을 세로로 하고, ‘나라’라는 고향나무를 양쪽의 가로로 하여 만든 십자가 이름을 ‘날개 십자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아버지 나라의 십자가인데, 한국과 필리핀 협력품이다.
‘날개 십자가’는 이 땅에 나그네로 온 필리핀 사람들이 이곳에서 안심하고 살고, 친절한 이웃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소망하고 있다. 지난주 월요일에 가족 톨레레게 룻기에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선택한 구절(43명 참여 중 23명)이 바로 선택한 요절이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2:12).
그렇다. 이방인 나그네들이 원하는 것은 어디서든 ‘주님의 날개 아래’에서처럼 보호받는 것이다. 보호를 받으러 온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3)
룻기 이야기는 디아스포라 이야기다. 디아스포라는 ‘씨앗’(스포라)을 ‘뿌리다’(디아)란 뜻이다. 씨앗이 스스로 자라나는 과정은 독립운동과 다름없다. 나무를 옮겨 심는 일처럼 사람이 옮겨 다니는 일은 그만큼 모험적이다.
이주민의 삶은 불안하고, 취약하며, 혼란스럽다. 그들은 삶의 경계선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은 원주민의 친절에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다. 그 친절은 개인의 도움이고, 사회적 보호이며, 국가적 시스템이다.
하나님은 시어머니 집안의 먼 친척 보아스를 통해 이방 여인에게 친절을 베푸신다. 그것은 룻만이 누린 개인적 행운에 그치지 않는다. 율법은 하나님 자녀에게 부과된 국가적 시스템이다. 나그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의무였고, 마땅한 계명이다.
어제(3.21)는 ‘국제인종차별 철폐의 날’이었다. 유엔 총회가 1966년에 제정하였다. 사실 이주민은 자기 시대에서 가장 진취적인 사람이 된 사람이다. 비록 삶의 자리에서 뿌리 뽑힌 사람이지만, 이주민은 그런 실존적 처지 때문에 가장 진취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룻의 기막힌 인생스토리를 보면 룻은 가장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자신의 불행을 딛고 미래를 진취적으로 열어갔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산다. 얼마나 많이 사는가 하면, 진부령에 있는 산돌교회 목사님 댁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엄마,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지?”
“아니. 엄만, 대구사람이야.”
아들이 몹시 실망하더라고 한다. 그 어린이집은 진부령 아래 인제군에 있는데 대부분 이중문화권 자녀가 다닌다. 그 만큼 산골에 시집온 베트남 여자들이 주를 이룬다. 친구들의 엄마는 12명 중 11명이 베트남 여성인데, 자기만 아니어서 소외감이 든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이 어려움을 컸지만, 특히 코로나19를 맞아 어려움이 더 커졌다고 한다. 내가 힘들면 남에게 훨씬 배타적이게 마련이다. 특히 외국인이 공적마스크를 구입하려면 건강보험증과 외국인등록증을 직접 제시해야 한다. 보험 가입자격이 없는 난민 신청자와 국외에 다녀온 뒤 체류 기간이 6개월이 넘지 않는 난민은 그나마 마스크 살 기회조차 없다. 바이러스는 국적과 인종, 내국인과 이주민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한국인 중심의 공동체를 고집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까이 금정역이나, 서울 대림동, 안산 선부동 땟골 등 특정 동네에서는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세계화 된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 교회는 그들의 타향살이를 돕는 공동체문화를 익히는 일이 절실해졌다. 탈무드는 “자기 이웃에게 자비로운 자는 누구든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라고 말한다.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일이다.
실은 우리도 나그네에 불과하다. 종종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들이다. 자주 삶의 경계선으로 내 몰리고, 남의 친절과 배려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염려한다.
우리는 누구나 룻이며, 또 보아스이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된 내게 항상 은혜를 베푸시고, 내 자녀들이 좋은 이웃과 만나게 하시길 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의 날개 아래 보호를 구하고, 일용할 양식과 일용할 행복을 찾는 우리 가족과 이주민들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엄마,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지?” “아니. 엄만, 대구사람이야.” 아들이 몹시 실망하더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룻이며, 또 보아스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거듭 가르쳐 주셨음에도 우리의 문제만 살피느라 이 땅의 또다른 약자들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늘 이렇게 세상을 뛰어 넘는 사랑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낸 것이 교회였지요. 세상의 근심과 지탄거리가 된 한국교회의 현실이 참 가슴아프고 그 와중에 색동교회와 같은 깨어 있는 교회가 있기에 그래도 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