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김문기 교수님의 연재내용입니다.
기후변동이 심해지고 이와 연관된 대규모 자연재해가 이어지면서 기후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류 역사 속에서 기후변동은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 기후변동과 역사의 상관관계 를 연구하고 있는 김문기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의 새 연재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를 통해 접근해본다. (기사 중)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 코끼리 '象'과 상상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414.22022204101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3> 소빙기, 조선을 지배하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428.22022201253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4> 브뤼헐, 소빙기를 그리다
혹한의 겨울로 종교분쟁 시대상황 은유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505.22018200355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5> 감귤, 기후변동을 이야기하다
'천하제일' 동정귤, 소빙기에 명성 추락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512.22022203251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6> 제주감귤과 소빙기
달콤하고 향긋한 제주 감귤, 백성에는 공물 고통의 열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519.22022203031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7> 임진왜란과 기근
한파 덮쳐 추위·굶주림 … 食人행위 만연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526.22022210453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8> 일본대지진과 정유재란
대지진에 무너진 히데요시의 야망…조선인 희생양으로 살육전쟁 초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602.22022200818
(기사 중에서)
당시 후시미성은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장엄한 자신의 성에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을 맞아들여 강화교섭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다. 후시미성은 조선침략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기 위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화려한 무대장치였다. 이미 한 달 반여 전에 심유경을 후시미성에 초빙해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며 강화교섭을 타결하려 했다. 자신을 일왕으로 책봉하려는 명의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무사행렬이라는 정치이벤트도 준비했다. 대지진은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기사 중략)
대지진으로 국내정세는 불안해지고, 성공을 목전에 두었던 강화교섭마저도 끝내 파탄에 이르자 히데요시는 새 희생양을 찾았다. 조선이었다. 그는 강화교섭이 성사될 수 있었는데 조선사신이 늦은 바람에 후시미성이 붕괴하고 자신의 권위는 떨어졌다고 분노했다. 그 결과는 이듬해 정유년의 대대적인 2차 침공이었다.
(기사 중략)
만약 그때 후시미성에서 히데요시가 죽었다면 전쟁은 좀 더 일찍 끝났을까? 그는 조선인 대량학살을 지시하고 그 증거물을 요구했다. 소금에 절여 바다를 건너간 조선인의 목과 코는 전리품으로 자신의 무덤 앞을 장식하게 했다. 비뚤어진 그의 욕망은 일본 역사 속에서 면면이 이어졌다. 1910년 한국을 강제적으로 병탄했을 때 일본인들은 히데요시의 꿈을 마침내 이뤘다고 했다. 지난 3월 일본에 대지진이 있었다. 그렇지만 415년 전의 일본대지진으로 정유재란이 초래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9> 마녀사냥과 소빙기
날씨가 나빠 흉작일때 마녀사냥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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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0> 기상이변과 여성: 그녀의 세가지 소원
1430년 이상한파 뒤'오뉴월 서리=여자의 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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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1> 소빙기의 템스 강, 17세기의 겨울 풍경들
얼어붙은 강 위의 빙상시장, 낭만보다는 생존문제 봉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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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2> '얼음 깨는 노래(打氷詞)' 17세기의 겨울 풍경들
열대인 중국 해남도· 한국 동해마저 꽁꽁 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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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3> 강원도의 한, 강원도의 힘
17세기 강원도, 혹한 시달려…21세기엔 세계를 놀라게 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714.22022211202
(기사 중에서)
17세기의 기록들을 보면 이때의 이상 한랭현상은 다른 해에 비해 그다지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기사중략)
강원도의 강추위를 잘 보여주는 것은 동해의 결빙이다. 조선시대 함경도와 강원도 바다의 결빙은 10차례 정도 있었다. 19세기 말의 1차례를 제외하면 모두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집중되어 있다. 강원도 앞바다는 명종 때 1차례, 효종 때 2차례, 숙종 때 2차례가 확인된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1709년이다. 1월 중순께 시작되어 40여 일 동안 계속된 결빙은 너비 20㎞에 이르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해 7월 한여름에 간성의 앞바다가 너비 10여 발이나 얼었다는 사실이다.
17세기 동안 강원도는 '슬픔의 해들(Years of Sorrows)'이라 이름 붙여야 할 정도로 혹한과 이상 한랭현상이 심했다. 그렇기에 조정에서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등 이상기후가 나타나면 쉬이 '한(恨)'을 이야기했다. 명종 16년(1561) 평창 군수 양사언은 첩첩산중 평창의 곤궁함을 마음 아파했다. "백성들은 모두 굴에서 짐승처럼 사는데 섶을 묶어 구멍을 가리고 비탈 밭을 일구어 위태롭게 수확하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엉클어진 머리에 귀신의 얼굴을 하고 옷은 해져서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40호에 불과한 백성들이었다.
건국 초기 500여 호에서 현격하게 줄어든 것이다. 56년 뒤 동부승지 이홍주는 "큰 산과 긴 골짜기에 둘러싸여 온 종일 길을 가도 인적을 볼 수 없는" 평창에 17호만 남아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의 표현대로 "참으로 영서 지방의 궁벽한 곳", 그 평창이 2011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올 초의 추위는 유난히 혹독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올림픽실사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온난화가 진행되는 오늘날 2018년의 겨울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때만은 17세기처럼 추워도 기꺼워할 것이다. 다만 들으니 평창 73%의 땅이 이미 타지인의 손에 넘어 갔다고 한다. 온 국민, 아니 인류가 함께할 '축제'를 자신들의 '축재(蓄財)'의 장으로 삼으려는 그들은 누구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눈을 부릅떠야 할 때이다.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4> 기근과 전쟁- 정묘호란의 한 원인
청나라, 식인 사례 등 기근에 전황 유리 불구 조선과 강화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721.22022204801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5> 기근과 반란- 동요하는 동아시아
한랭현상 강해질수록 농민반란 극심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728.22022204819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6> 1690년대 소빙기
안용복과 그 일행이 독도로 간 까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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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7> 안용복과 독도, 바다를 보라
섬에서 일본 어민 내쫓은 그의 절규 들리지 않는가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811.22022200837
"옛날 동래 수군 안용복은 홀로 왜정(倭庭)에 들어가 울릉도를 놓고 다툼에 왜놈 추장을 마주하여 거리낌 없이 따져서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왜놈들이 다시는 울릉도를 넘보지 못했다. 만약 이런 인물로 하여금 변방을 지키게 했다면, 도리어 한고조(漢高祖)의 용맹한 장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정조는 안용복의 기개와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1696년 안용복은 다시 바다를 건넜다. 3년 전 울릉도·독도 영유권을 당당히 인정받고 돌아온 그를 기다렸던 것은 '월경(越境)'이라는 죄목. 그는 대마도의 사주를 받은 동래부사에 의해 형벌을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다. 이해 봄 안용복은 울산에서 10명의 사람을 규합하여 울릉도로 건너갔다. 울릉도와 독도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어민들을 내쫓다.
17세기 후반 동해의 절해고도가 양국 어민들이 대립하는 장소가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영토분쟁은 동해뿐 아니라 서북변경과 서해에서도 있었으며, 그것이 소빙기 기후변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난 회에 언급했다. 1696년도 마찬가지다. 한 해 전에 시작된 기근은 이 해부터 절정으로 치달아 1699년까지 계속되어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현종 대의 '경신대기근'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대의 기근으로 일컬어지는 '을병대기근'이 이때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시기에 일본에도 대기근이 있었다. 한랭한 기후가 계속되면서 '엔로쿠대기근'이 발생하여 수십만 명의 아사자를 낳았다. 울릉도에서 조우한 양국 어민들의 절박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더 중요한 것은 어획물 자체다. 주된 어획물인 전복과 해삼은 단순한 해산물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3국에서 모두 진귀한 고가상품이었고, 특히 중국에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1684년 이후 청의 상선들이 일본 나가사키에 폭주하자 결제대금인 구리가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이를 대신할 수단으로 에도막부가 눈독을 들였던 것이 바로 전복과 해삼이었다. 1698년 에도막부가 전복과 해삼을 공식 수출품으로 적극 장려한 이후 이 두 해산물은, 1764년에 덧붙여진 상어지느러미와 더불어, 대중 수출에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다.
나가사키를 통한 거대한 동아시아 해산물 유통망이 형성되고 있던 시기에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업분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소빙기 동안 바다는 생존에 쫓긴 사람들에게 탈출구였고,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부의 원천이었다. 안용복은 단순한 어부라기보다는 해산물 무역에 깊숙이 관여했던 상인이기도 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우리의 '부의 원천'이 남의 나라에 유린당하는 현실이 아니었을까?
음력 8월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되돌아왔다. 그에 대한 조선정부의 처분은 사형. 그나마 몇몇 대신의 변호로 1등급 감하여 유배형에 처해졌고, 그곳에서 그는 울분에 죽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그것은 바다를 두려워하고 바닷사람을 멸시하고 바다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팽개친 조선이라는 문명 자체였다. 안용복의 재능을 안타까이 여긴 정조마저 끝내 바다의 잠재력을 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독도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기껏 하는 것이 독도에서 사진이나 찍고 오는 것이라니 통탄스럽다. 바다 문제를 전담하던 해양수산부는 어디로 갔는가? 세계 5위 해양대국(Ocean G 5)의 꿈은 그 누가 기억하는가? 바다로 가야할 배를 산맥을 뚫어 산으로 올려 보내면서 국가발전이라 강변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봐야할 것은 독도가 아니다. 독도를 품고, 우리 땅과 우리 문명을 감쌌던 바다 자체이다. 부산 좌천동 사람 안용복. 아직도 그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바다, 바다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