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나이아가라까지
몇몇 분들이 글을 잘 읽고 있다는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셔서 나머지 4일간의 여행 또한 용기를 내어 비교적 자세히 올리려고 합니다. 한동안 글을 올리지 못할만한 교회 일들로 분주했고 오늘에서야 다시 글을 쓰기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에서의 마지막 밤에 숙소에 들어와 잠을 청하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바람이나 쐬고 들어와야지 하며 문을 열고 보니 민경용 목사님이 감리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효성중앙교회에서 부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미국 필라델피아의 ‘뒤나미스’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북지방의 목사님들이 미국에 오셨다니까 일을 마치고 저녁에 출발해서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오셨던 것이다.
나도 함께 어울려 로비로 내려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어려웠던 일들과 지금도 사모님은 일을 해야 하는 미국의 생활을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목회자의 삶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 편할 수 있을까? 아마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계신 이천휘 목사님의 마음의 90% 이상은 한국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아무리 안식년으로 교회를 떠났다지만 목회자는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무리 기회의 땅이라고 하지만 모든 이민자들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자녀교육 때문에 기러기 아빠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보면서 ‘가정’을 비정상적으로 만들면서까지 애를 미국에서 가르쳐야 한다면 나는 절대로 외국에 보내서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진정한 행복은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믿는 내 행복론을 끝까지 지켜가고 싶기 때문이다. 감리사님이 민목사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셨고 악수를 나누면서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민목사님은 이 밤에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내일도 삶과 사역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 밤을 지내고 나면 우리도 새로운 여행 길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 다시 출발이다. 우리는 이 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그네의 인생이니까 말이다. 방안에서 짐을 꾸리면서 ‘늦으면 벌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부지런히 버스에 올라탔다. 가이드는 오늘은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모든 버스는 창문을 열수 없도록 했는데 오직 한 버스들은 창문을 열도록 했다고 했다. ‘어떤 버스일까요?’ 정답은 스쿨버스였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이들이 타는 버스라면 창문을 여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할텐데 왜 스쿨버스의 창문을 열도록 허락했을까? 이유는 에어콘이 없기 때문이란다.
가이드는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너무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에 스클버스에는 에어콘 설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국은 세금을 안 내는 사람들에게는 좀 인색한 것 같다. 물론 미국인들이 아이들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내는 세금에 대한 권리를 철저하게 누리며 사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학생들도 소중하지만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직 누리는 것을 먼저 배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을 생각해 보면서 국가가 교육의 철학을 좀 갖고 교육정책을 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한국에서 스쿨버스에 에어콘 설치를 금지한다면 과연 부모들이 먼저 가만히 있을까? 그러나 진정한 교육이란 누리는 삶을 배우기보다는 먼저 땀 흘리는 삶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
Gettysburg
우리 일행은 2시간을 달려 게티스버그에 도착했다. 영어로는 Gettysburg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Brug(부르크)는 성이라는 독일식 지명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가이드는 그건 모르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짤츠부르크는 소금성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알 수 없지만 이 게티스버그에 정착한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은 독일인(혹은 독일어를 사용하는)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제법 많은 brug가 들어간 지명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영화광들은 기억할지 모른다. 1993년에 “게티스버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게티스버그에서 있었던 4일간의 전투를 소재로 해서 톰 베린저와 마틴 쉰이 주연한 무려 4시간30분 짜리 영화다. 인내심이 있는 분들은 도전해 볼만 할 것이다. 게티스버그는 인구가 10만명도 안되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이 남북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격전지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고 조용한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납북전쟁 당시의 끔찍한 참상을 배틀필드 파크(battlefield park)와 20여개의 박물관들이 보여주고 있다.
게티스버그 국립묘지에 있는 병사기념탑은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설(1863. 11. 19)을 했던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약 1200개 이상의 남북전쟁 기념물·묘표·명판 등이 있고 이 중에는 최초로 발사되었던 대포, 리 장군의 사령부, 국립 게티스버그 전투지 조망탑, 국립 남북전쟁 모형박물관등이 묵묵히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 1861-1865)년 당시 펜실베니아주 남동부의 작은 도시 게티스버그(Gettysburg)에서 1863년 7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 있었던 3일간의 전투를 말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연방정부와, 연방에서 분리할 권리를 주장했던 남부 11개주 사이에 일어난 4년간의 전쟁(1861~65)을 말한다. 간략하게 전쟁 이야기를 소개한다.
1860~61년 남부 주들의 연방탈퇴(탈퇴순서는 사우스캐롤라이나·미시시피·플로리다·앨라배마·조지아·루이지애나·텍사스·버지니아·아칸소·테네시·노스캐롤라이나)와 잇따른 무장 소요 및 노예제·무역·관세 및 주권(州權)에 관련된 문제들로 몇 십 년을 끌어온 지역간의 불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불화는 근본적으로 남부와 북부의 경제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는데 남부 경제가 노예 노동에 의한 대농장(플랜테이션)을 기초로 하는 반면 북부에는 자유민의 노동에 의한 작은 농장들과 날로 발전하는 제조업이 분포하고 있었다.
1840~50년대 북부의 주들은 언젠가 새로운 주가 될 서부 지역에서 노예제도가 금지되기를 바랐지만, 남부의 주들은 노예제 확장을 저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반대하면서 북부의 정책이 남부 자체의 노예소유를 위태롭게 할 것을 염려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부의 사람들이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남부의 몇몇 주들은 노예를 소유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말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연방에서 탈퇴했다.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 이끄는 '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은 남부가 북부보다 애국적이었고, 전략상 유리한 내륙수송로를 가지고 있으며, 국제적인 중요성을 갖는 환금작물인 목화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북부 연방은 남부보다 인구가 2배 이상 많았으며 제조력·수송력에서 남부보다 우세했다.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있는 섬터 요새를 향해 남부연합의 포가 발사됨으로써 전쟁은 시작되었고, 양측은 신속하게 군사를 모집하고 전투체제로 전환했다. 7월 21일 남부연합의 수도인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로 행군하던 3만 명 가량의 북군은 '철벽장군' 토머스 J. 잭슨과 P.G.T. 보르가드 장군이 이끄는 남군에게 패배하여 워싱턴 D.C.로 후퇴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북부는 신병 50만 명을 소집했으며 조지 B. 매클렐런 장군에게 포토맥 군대를 훈련시켰다. 1862년 2월에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테네시 서부에 있는 남부연합 요새인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점령했다. 뒤를 이어 북군의 존 포프 장군은 미주리 주의 뉴마드리드를 점령했고 4월 6~7일에 테네시 주 샤일로에서는 양측의 희생이 큰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또 같은 4월에 북군 해군제독 데이비드 G. 패러것이 뉴올리언스를 장악했다. 동부에서는 매클렐런이 10만 명의 병력으로 리치먼드 점령을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매클렐런은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과 그의 유능한 부하 잭슨과 J.E. 존슨턴에게 저지당했고 '7일전투'(6. 25~7. 1)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제2차 불런 전투(8. 29~30)에서 리는 포프가 지휘하는 또다른 북군을 버지니아 주 밖으로 몰아내고 메릴랜드 주까지 추적했으며 앤티탐에서 매클렐런에게 저지당했다. 리는 철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후 12월 13일 버지니아 주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매클렐런의 후임자인 A.E. 번사이드를 크게 패배시켰고, 북군은 조지프 후커로 사령관을 바꾸었다. 후커 장군은 1863년 4월 공격을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주의 챈슬러즈빌에서 리의 책략에 넘어가 후퇴해야 했다. 이후 리는 2번째 북부공격을 시도했으며 펜실베이니아로 진격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전투(7.1~3)가 벌어졌다. '미드' 장군이 이끄는 북군은 게티스버그 구릉지를 먼저 점령하여 높은 위치에서 남군을 공격할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을 얻게 된다. 남군은 지형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1863년 7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당시 전투에 동원된 인원은 북군이 8만 8천명, 남군이 7만 8천명에 달했고 특히 병력이 부족했던 남군은 동원 가능한 병력 거의 전부를 투입하여 총력전을 펼쳤다. 남군은 계속된 전투에 따른 피로와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북군에 대해 치열한 공격을 가했지만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 북군은 효율적으로 공격을 막고, 물자와 지원 병력을 보급 받으면서 전세를 뒤집어 나갔다. 이에 반하여 남군의 피로도는 점차 쌓여져갔고, 전투 마지막 날에 리 장군은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군단의 3개 사단을 동원하여 북군에 대한 마지막 돌격을 명령한다. 하지만 평지에서 북군의 포병대를 향해 1마일(1.5킬로미터)정도를 걸어서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3개 사단은 전멸하고 만다. 리 장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7월 4일 버지니아로 후퇴하였다. 북군은 후퇴하는 리 장군을 추격하여 남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지만 '미드'장군은 '리' 장군과의 우정 때문에 추격을 중지시켜서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빠진다. 게티스버그 전투의 결과 양쪽 모두 2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부에서도 전세가 역전되었다. 북군 장군 그랜트는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 주의 빅스버그를 점령했으며 이어 미시시피에 남아 있던 몇 개의 남부요새도 쉽게 점령했다. 이로써 미시시피 강은 완전히 북부의 손에 넘어갔고, W.S. 로즈크랜스 장군이 이끄는 북군이 조지아 주의 치카모가에서 패한(9. 19~20) 뒤 10월에 그랜트에게 그곳의 지휘가 맡겨졌다. 윌리엄 T. 셔먼 장군의 도움을 받아 그랜트는 남군의 브랙턴 브래그 장군을 채터누가에서 몰아낸데(11. 23~25)이어 테네시에서도 쫓아냈다.
1864년 3월 링컨은 그랜트를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랜트는 동부의 포토맥군을 맡았으며 병력과 물자에서 연방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을 기초로 곧 지구전(持久戰) 전략을 세웠다. 그는 5월에 전진하기 시작하여 버지니아 주의 윌더니스·스폿실베이니아·콜드하버에서 벌어진 전투로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으나 6월 중순 무렵 피터즈버그 전방의 요새에 리를 묶어 두었다. 거의 10개월 간 북군의 피터즈버그 포위공격이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그랜트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한편 셔먼은 조지아 주에서 남부연합의 또 다른 주요 병력과 맞섰다. 셔먼은 9월초 애틀랜타를 점령했으며 10월에는 전쟁의 참화를 뒤에 남기며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는 480㎞의 행군을 시작했다. 12월 10일 서배너에 도착한 그는 곧 그 도시를 점령했다. 1865년 3월 무렵 리의 군대는 사상자와 탈주자들 때문에 수가 줄어들었고 물자도 크게 부족했다. 그랜트는 4월 1일 파이브포크스에서 마지막 진격을 개시하여 4월 3일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 근처에서 리의 항복을 받아냈다. 셔먼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주까지 들어갔으며 4월 26일 J.E. 존스턴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결과, 연방은 보존되었으며 아울러 노예제가 폐지되고 해방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5년간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북군 35만, 남군 25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그보다 많은 부상자와 난민이 발생한다. 또한 격전지가 된 남부의 여러 주들이 황폐화되었고 비록 북군이 승리했고 노예 해방이 선언되었지만 북부와 남부의 대립은 없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남북 간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뚜렷하게 존재한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에서 승패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고, 유명한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전투가 끝난 지 4개월 후인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서 전몰자 추도 기념식을 하며 했던 연설이었다.
가이드는 적극적인 노예 해방론자로 알려진 링컨도 사실은 소극적이었다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역사적인 사건의 배후에는 늘 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의 의미를 훼손하고 왜곡하는 말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일행이 받은 게티스버그의 브로셔에는 3일간의 전투의 내용과 지도가 그려져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역시 게티스버그에도 많은 미국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국립묘지 지역을 돌아보면서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한국 역사를 배운 기억이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봄 가을 소풍 때 陵을 찾아간 것 외에는 말이다. 우리 학생들을 학교안에만 잡아두지 말고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교육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다. 아! 교육은 백년지대계인 것을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왜 모르는가? 말이다.
작은 기념관 안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권총들과 군악대가 연주했던 악기들 병사들이 들고 다녔을 물병(통)들 문서적인 기록들과 당시 수여되었던 훈장도 유물로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은 Jorge Daniel Rossensteel이라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은 전쟁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게티스버그 국립 박물관과 세계에서 가장 큰 남북전쟁의 전시품을 전시하고 있는 로젠스틸 전시관을 기초한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Josehp Louis Rosensteel로서 초기의 군대의 리더들과 역사적인 인물들을 포함한 전쟁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최초로 전기로 작동하는 지도를 디자인하고 개선해 나간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Gettysburg Rememberance Wall이라는 벽이었다. 그 벽에는 좌우측으로 두 인물의 초상이 그려 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의 명패가 붙어 있는 벽이었다. 그 기념벽 아래에는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다. 게티스버그 국립공원의 우정을 위한 프로젝트(계획)! 나는 그 벽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른쪽 위에는 남부의 장군 로버트 리의 초상화가 그리고 좌측으로는 북부군의 장군이었던 조지 G 미드 장군의 초상화였다. 그렇다면 이 벽은 비록 잠시나마 국가의 분열 때문에 전쟁을 해야 했던 남북이 미국의 역사라는 한 물줄기 안에서 화해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벽을 세우는 근본적인 정신이 미국인들이 가진 신앙심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엡 2:14-18절까지 이런 말씀이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우리가 잠시 자신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달라서 싸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 아닌가?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그곳이 학교이든지, 직장이든지, 이웃과의 삶의 현장이든지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그리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본다. 이념이라는 보이지 않는 칼날 앞에서 첨예하게 분리되어 살아온 50년의 시간이 남과 북을 너무나 멀리 떨어 뜨려 놓은 것이다. 언젠가 우리도 그곳이 판문점이든지 다른 곳이든지 이런 한국전쟁 기념벽을 세우고 그곳에 이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들을 기억하면서 이런 분열과 갈등이 다시 없도록 그래서 나라와 민족이 전쟁의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마음들이 모아지는 때가 오리라 기대해 본다.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을 American Civil War 혹은 War between the States라고 부른다. 철저하게 국가의 분열로 이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해 본다. 실제로 이 게티스버그에는 리장군이 머물던 곳을 리 장군 기념 박물관으로 보존하여 해마다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누가 패배한 장군의 역사를 기억하는가? 그것이 미국의 저력이 아닐까?
우리의 국립묘지처럼 일반 국민들이 찾기에 좀 어렵다는 느낌이 없이 일반 공동묘지처럼 지키는 경비병도 관리인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국민들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리라 믿는 것 같았다. 오직 한 가지 금하는 것은 묘지안에서 바퀴달린 것을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기들을 태운 유모차는 제외였다. 묘지 안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물론 시간도 많이 흘렀지만 폐허가 된 전쟁의 흔적을 딛고 새로운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기념물로 전쟁터는 다시 채워져 있었다. 생명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고 그것이 역사인 것이다. 아이들은 역시 누가 뭐래도 대포를 가장 좋아했다.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데 쓰여진 살상용 무기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묘비 하나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꼭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미국 동부지역의 사람들 가운데 다른 전쟁에서, 예를 들면 세계 1,2차 대전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골도 함께 묘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일행들이 링컨이 연설한 곳에 세워진 그의 흉상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사실 우리 일행이 사진을 찍은 곳은 링컨이 연설했던 바로 그 장소는 아니고 300야드정도 떨어진 장소로서 지금 링컨이 연설한 장소에는 군인들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역시나 시간에 쫓기는 우리 일행(벌금 때문에, 이게 생각보다 상당히 신경이 쓰입니다요.)은 부지런히 버스에 올랐고 아이들을 찾는 엄마들의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 없이 꼬맹이들은 역사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버스에 벌써 올라타 자리를 잡고 놀고 있었다.
얼마간을 달려 점심을 중국식 양식 뷔페로 먹으면서 보니 제법 많은 미국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가족이 식사를 하고 난후 청구서가 들어있는 갈색의 책자 안에 아빠가 음식 값과 팁을 넣고는 아무 말도 없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빙하는 사람들이 와서 돈을 챙기고 탁자를 정리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미국인들이 늘 그렇게 하는 것을 영화에서 많이 보았지만 눈앞에서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생각을 잠시 하니 좀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부분 청구서를 들고 창구로 가서 계산을 하고 나가든지 혹은 먼저 계산을 하지 않는가? 음식 값을 떼먹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음식 값은 떼먹지 않는 나라요, 적어도 팁을 계산할 줄 아는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지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우리 학교 앞에도 500원짜리 냉면과 떡볶기를 주 메뉴로 하는 할머니의 가게가 있었는데 그곳도 자율계산으로 유명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배가 고파 300원 넣고 음식을 먹고 다음에 700원 채우기도 몇 번 했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을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우리 국민 모두 느끼고 살게 되는 날이 오도록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실천하고 살아가야 할것이다.
버스에 올라타야 하는데 갑자기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행이 나처럼 버스로 달려가야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공주인척 하고 움직이지 않던 사모님들이 계셨고 공주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목사님들의 충성스러운(?) 우산 들고 사모님들 모시러 가기가 있었다. 한찬희 목사님 사모님이 함께 오셨더라면 우리 모두가 목사님의 지극한 사모님에 대한 배려를 보았을 것이고 나는 집사람에게 옆구리를 한번 찔렸을 것이다. ‘보고 좀 배워!’ 이번에는 한찬희 목사님 사모님이 오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모님에 대한 지극한 배려를 몸소 보여주신 정목사님 덕분에 옆구리를 한번 찔리고야 말았다. ‘봤지?’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게도 습관이 되어 몸에 익은 것이 아니면 아무리 여러 번을 봐도 잘 실천이 되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부족하여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지 않은가? 신6:4-6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장담할 수 없지만 마음에 새겨보리라 다짐을 해 본다.^^*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탔는데 이제 자연스럽게 눈을 감게 되었다. 여행을 위한 기록을 남기려는 나의 의지도 소용없이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기지개를 키고 일어서는 코닝이었다. 우리들의 계획된 일정에는 없었는데 나이아가라까지 가는 도중에 위치한 볼만한 곳이라고 해서 우리 일행은 코닝에 들르게 된 것이었다.
Corning은 인구가 약 2만명이 채 안되는 작은 소도시이다. 미국 뉴욕주 남부 시멍강(江) 연안 펜실베이니아주 경계선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1868년에 설립되어 수많은 종류의 유리제품을 생산하는 코닝글래스워크스(Corning Glass Works)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유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코닝유리박물관과 로크웰코닝기념관이 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전 5월29일에는 우리나라 여자 골프선수 한희원 선수가 코닝CC에서 있었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코닝 클래식에서 연장전 끝에 우승을 하기도 했다. 사족이지만 그녀가 받은 우승상금은 18만달러였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한국프로선수들 가운데 유일한 기혼자이다. 누군 좋겠다! 마누라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박물관은 글자 그대로 유리가 인류 역사에 나타난 이후의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는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들도 있었고, 실제로 유리를 제작하는 공정을 보여주었다. 유리로 만든 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화를 보는 것처럼 신선한 느낌과 강열한 색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2층에 있는 유리작품 전시관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과 우리나라의 유리작가로 유명한 김성연씨라는 분의 작품을 보지 못한 것이다. 김성연씨는 세계적인 수준의 유리작가로서 코닝 유리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전시하기 위해서 지난 89년에 그의 작품을 구매하여 갔다. 적어도 손재주에 관한 한 한국사람이 세계 최고라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글로벌 마인드’였다. 한국이라는 좁은 우물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것이 있어도 내어 놓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 이 땅의 젊은이들이여! 글로벌 시대의 마인드와 비전을 품고 땀흘려 노력하라! 세계를 품으라!
미국은 역사가 없는 나라다. 우리나라 5천년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정말 보잘 것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친구들은 역사를 만들어갈 줄 안다. 코닝이라는 곳에 왜 우리 일행이 시간과 돈을 들려 들러야 했을까? 유리회사 하나가 세워지고 그 회사가 뜻을 가지고 세계의 유리의 역사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으고 전시하니까 관광회사마다 나이아가라로 가는 도중에 20달러를 받고 들르는 곳이 되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에 개신교의 역사를 100년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한 곳이라도 찾아갔을 때 한국교회의 역사를 한곳에서 조명하여 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교회 역사 박물관(가칭)을 교파와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통해서 순교의 정신을 이어가며 새로운 시대의 교회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역사박물관을 만들어가야 할 때인 것이다.
첫댓글 저도 함께 다녀온듯 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