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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2
12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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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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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vr88Kco3ps
[살레시오회 심재현 치릴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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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의 18번곡, 마니피캇(Magnificat)!>
요즘 나훈아 선생님의 노래에 푹 빠져 있습니다. 영영이 제 18번곡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가삿말이 사무친 ‘사랑’이란 노래도 자주 부릅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하루에도 몇 번을 부르는지 모릅니다. 요리할 때도 부르고 화장실 청소할 때도 부릅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성모님에게도 18번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성모의 노래, 마니피캇입니다.
이 노래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부르셨던 노래, 성모의 노래입니다. 라틴어로는 마니피캇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이 지친 몸으로 엘리사벳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엘리사벳이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의 노래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는 멋진 찬미가를 하나 부릅니다. 그 노래가 그 유명한 노래, 성모의 노래, 마니피캇입니다. 이 노래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구원 업적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첫 구절을 한번 볼까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Magnificat anima mea Dominum) 내 마음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기쁨,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랑의 찬가입니다. 이 노래는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노래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 사제 수도자들은 매일 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이 노래를 되풀이합니다.
마니피캇은 보통 노래가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작고 비천한 사람들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찬가입니다. 교만하고 오만불손한 권력자들을 경고하는 노래입니다. 굶주리는 이들을 배불리겠다고 약속하는 노래이고, 죽어도 나누지 않는 부자들을 내치시겠다는 노래입니다.
결국 마니피캇은 작고 가난한 사람,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해방을 선포하는 노래요, 나눔 없는 부자들과 높은 자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향한 저주의 노래입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우리도 성모님처럼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지극히 겸손한 여종의 자세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자비를 찬양하는 마니피캇을 수시로 불러야겠습니다.
성모님의 마니피캇은 그때 딱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8번 노래를 딱 한 번만 부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모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틈만 나면 흥얼거리셨던 마니피캇을 들은 소년 예수님도 따라부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가 부르셨던 마니피캇을 부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재미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첫 시작때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이사야서를 봉독하시는데, 그 내용은 마니피캇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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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Vhf6qMCU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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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성모 찬송’입니다. 성모 찬송 안에는 성모님의 겸손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이 겸손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이라야 당신 선택에 더 감사할 수 있고 그래서 당신도 더 기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엄청난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한 운동선수가 된 미식축구 선수 마이클 오어(Michael Oher)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마이클은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마이클의 아이큐는 80입니다. 마이클은 오갈 데가 없어서 비를 맞고 배회합니다. 이때 한 백인 상류층 가족이 그를 집으로 맞아 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운동 신경을 알아보고는 그를 훌륭한 미식축구 선수로 키울 계획을 세웁니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생활하며 커다란 화제를 일으킨 오어는 모든 대학팀이 원하는 선수가 됩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려면 공부도 어느 정도 해야 합니다. 가족은 과외 선생들을 대주며 오어의 공부도 돕습니다. 다행히 성적을 높여 대학에 들어갔고 프로 팀에는 수백 억을 받고 입단하여 나중엔 슈퍼볼도 우승합니다.
왜 모든 게 부족할 게 없는 상류층 가족은 오어를 선택했을까요? 자신들이 아니면 오어가 제대로 꿈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다면 그만큼 능력을 발휘하고 싶습니다. 또 그들이 아니었으면 절대 하지 못했다는 것을 오어도 알기 때문에 그 가족에 지금도 감사하며 삽니다.
도자기를 배우겠다는 한 청년이 도자기를 잘 굽기로 유명한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도자기 장인은 젊은이를 잘 맞이해 주었고 공장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좋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거실에 있는 유리 상자 안에 든 꽃병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저 작품은 정말 귀한 것이겠군요. 선생님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저에게 파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도자기 장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젊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나에게 얼마를 준다고 해도 저것은 팔 수 없는 물건이라네. 내가 자네와 같은 젊은 시절 하는 일은 잘되지 않고 그래서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다른 도자기 공장에서 쓰고 남아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흙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주워다가 저 꽃병을 만들고 구운 것일세. 나도 처음엔 저렇게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버려진 흙으로도 저 정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고, 그때부터 술과 도박을 끊고 열심히 정진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네. 내가 남이 버린 아무 쓸데 없는 흙을 가지고 저런 작품을 만들었지만, 또한 저 작품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네. 그런데 어찌 돈을 받고 팔 수 있겠나.”
버려진 흙으로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작품을 만들 때 자기 능력이 드러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자기 자신도 만족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시편을 인용하십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가장 천대 받고 가장 큰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지만, 하느님은 그 천대 받는 돌로 당신 나라 건설을 위한 주춧돌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비천한 당신 자신의 처지를 굽어보시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큰일을 하셨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 능력도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인간 구원을 위한 가장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피카소는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과 손잡이로 ‘황소 머리’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1993년에 293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아마 많은 훌륭한 작품을 남긴 피카소도 버려진 자전거로 만든 황소 머리를 보고 가장 기뻐할 것 같습니다. 만약 성모 찬송처럼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고 싶다면 성모님처럼 자신을 아무 쓸모도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인정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버려진 돌을 머릿돌로 만드는 것을 즐기십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성모 찬송을 듣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라는 말은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제가 되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사제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그런 나약함을 보시고 저를 사제로 불러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약하다는 것, 비천하다는 것, 그것은 주님께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에 착안하여 자신이 어떤 자리를 맡아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을 그 자리에 앉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자신이 없는 이를 앉힙니다. 그리고 믿어주면 그는 결국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난 봉사자가 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해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는 사제로서는 기쁨이 두 배가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이렇게 바라보시고 그러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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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투자와 투기’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개념입니다. 투자는 불확실한 면이 있지만 더 낳은 미래를 예측하고 시간과 노력과 자본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는 ‘전기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대학생 때는 ‘전자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이 전기에서 전자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창들 중에도 ‘전자과’를 선택한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요즘의 학생들은 ‘인공지능, 생명공학, 유전공학’과 같은 과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그런 과목들이 미래에 대한 수요가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험, 증권, 은행은 더 많은 수익을 예상하면서 고객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고객들은 100% 안전하지 않다는 설명을 듣고, 원금에 손실이 갈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듣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투자합니다. 반면에 투기는 100%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과 자본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땅 짚고 헤엄치는 경우입니다. 개발정보를 미리 알거나,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 정보를 미리 알면 부동산을 사거나, 주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먼저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서 투기를 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투명한 사회, 선진국에서는 이런 ‘투기’를 하지 않고, 할 수 없습니다. 투기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고, 결국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투자와 투기와는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일까?’ 요한복음은 그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정보를 아시고, 모든 권력을 가지셨지만 ‘투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투자’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미리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투자의 위험성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투기’가 아닙니다. 신앙은 ‘투자’입니다. 때로 고난의 가시밭길이 있고, 때로 캄캄한 어둠이 앞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주님의 길을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수고의 열매를 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성모님의 마음은 저의 무딘 마음을 깨우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기억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왜 우리는 신앙인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2023년 성탄을 기다리면서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를 준비하였듯이, 우리들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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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47절) 마리아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이 말은 마리아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이 온갖 복을 받은 것은 은총이라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49절) 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겸손을 굽어보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그 여인에게 큰일을 하셨고,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50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말이다. 대대로라는 말은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1절) 당신 팔로는 당신의 힘을 쓰신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통치자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교만함을 흩으시고 그들이 율법의 포로로 만든 이들을 당신 나라에 받아들이셨다. 이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굶주리는 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이다. 부유한 자는 교만하고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분이 거두신 이스라엘은 허울뿐인 교만해진 육에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라, 당신의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믿고, 약속과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된 이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고,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창세 22,18 참조)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이 약속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시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는 석 달 정도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며, 요한이 탄생한 다음 엘리사벳을 위해 봉사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그리스도를 낳아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성탄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바로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로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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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성모님의 인사말 소리에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던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던 것처럼(어제 복음 참조), 엘리사벳의 칭송을 들은 성모님의 마음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기’ 시작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마니피캇’(성모의 노래)이라고 하는 이 아름다운 노래로 기쁨을 표현하시는 이유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이라는 시골에 사는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여인에게서 그토록 큰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체험을 바탕으로 고백하시고 찬송하시는 주님께서는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보다는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에게 더 마음을 쓰시고,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심오한 뜻을 펼치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그제 복음)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종’으로 고백하십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 겸손한 마음으로 가장 높으신 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종’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제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으로 불리시며, 모든 세대가 그분의 행복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어제 복음) 행복은 다른 길에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순종하며 그분 말씀이 실현되리라 굳게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불행의 길은 어떤 것일까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11)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계십니까? 사람이 되신 겸손함으로 다가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곧 맞이하게 될 우리의 마음속 생각이 교만하여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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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의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46-55)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과 앞으로 ‘하실 일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고, 또 메시아께서 하실 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고 회개하라고 권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성모님의 개인적인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해서 드리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노래’에서 ‘나’는 ‘우리’로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의 노래’이고, ‘나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대한 ‘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큰 기쁨’이라는 말은, 단순히 기쁨이 크다는 뜻이 아니라, 순수하고 참되고 영원한, 영적인 기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기쁨은 세속이 주는 허무하고 헛된 즐거움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성모님 개인의 기쁨이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의 기쁨입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이라는 말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인 인간의 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면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시편 90,3)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그런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굽어보시고(가엾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주신 일입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이라는 말을, 성모님이 ‘시골의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처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성모님은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시골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아버지 요아킴은 큰 부자였고,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부자였다고 해서 성모님도 부자였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거의 고정관념처럼 생각하는 ‘시골의 보잘것없는 처녀’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단순히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힘’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에 있는 ‘나를’과 ‘나에게’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를, 우리에게’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서 구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것은 맞지만, 또 그 일이 성모님에게 ‘큰일’(위대한 일)이 되는 것도 맞지만,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고, 우리 모두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 모두에게 위대한 일이고, ‘구원의 행복’은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니고,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만, 즉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만 그것을 누리게 됩니다. 여기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회개해야 하는 자들’이고,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은 ‘믿고,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18,14; 요한 3,17), 그 뜻에 따라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구원 사업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고, 그들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는,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당신 종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하느님의 새 백성’, 즉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그 자비가 ……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는, 우리가 얻어 누리는 구원, 생명, 행복, 평화는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은총’이라는 믿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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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문상 디오니시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에 마리아의 노래로 응답합니다. 정말 기쁨에 넘쳐서 하느님을 찬양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을 잉태하셨습니다. 너무도 두려워서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성모님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 행동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있습니까? 괜히 웃음이 나와서 입을 다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 반가움을 감출 수가 있습니까? 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여서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묵주를 건 차를 몰고 난폭운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믿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너그러움, 용서와 화해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모님이 마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지, 혹은 믿는 척하는지, 혹은 안 믿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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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자식이 없어 브닌나로부터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 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느님의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신이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하느님께 도로 바친다.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 2,21)
한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복했기 때문에 사무엘의 한평생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 사무엘의 봉헌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니라 영원한 봉헌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욥 1,21), 하느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함을 깨닫고 있었다.(시편 15,4)
그리하여 그녀는 모성애를 뛰어넘는 헌신적인 결단을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어여삐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으므로, 그녀도 하느님께 사무엘을 봉헌한다.
한나는 참으로 믿음 깊은 여인이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간절히 구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실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께 간구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신앙은 결코 실망하지도, 성급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신앙은 곧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신앙은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기력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필요로 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탄생과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까지도 모두가 은총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사도 바울로의 권고대로 살아간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을진대 어찌 기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앙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힘이요 은총임을 알면서 어찌 자신을 봉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삶의 일부인 시간을 봉헌하고, 노력의 대가를 봉헌하고, 자신의 삶 전체, 생명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신앙이다.
한나는 참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의 분신인 사무엘을 낳기 전에도 그를 온전히 봉헌하기로 서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서 젖을 떼자마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녀는 아이가 없어서 고난을 겪을 때에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은 후에도 결코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달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참 신앙인이었다.
이처럼 믿음 깊은 한나는 곧 예수님을 강생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신 성모님을 보여주시는 예표이다. 한나와 성모님처럼 믿음 깊은 여인이 곧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며 맞이하는 참 신앙인임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 자신을 아는 겸손한 신앙인,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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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방삼민 가스발 신부님]
<마니피캇>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교회의 가장 오래된 노래 하나를 소개 해 주고 있습니다. ‘마니피캇’ 또는 ‘마리아의 노래’ 라 불리는 이 노래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찬미가로서 오늘날까지 성직자, 수도자들의 성무일도 저녁기도에, 레지오 단원들의 까떼나 찬미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노래는 우리의 ‘아리랑’처럼 교회가 가장 사랑하고 애창해 왔던 대표적인 노래라 할 수 있죠.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여 이 교회의 노래가 불려지게 함으로써 마리아를 교회의 표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는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이 내세울 것 없는 비천한 신세임을 알고 있었고, 온 백성이 우러러볼 만한 위대한 일이 성취됨도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똑똑하고 능력 있다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부족함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설 땅을 잃어 갑니다. 이른바 가진 자들은 자신의 것은 하나도 내어놓지 않으면서 세상을 위하여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무엇이 잘못되면 앞다투어 남의 탓을 하고,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없도록 독선적인 논리로 여론을 호도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양심 앞에 솔직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처럼 비천한 종의 신분임을 자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노래는 이들의 교만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권세 있는 자들, 부요한 자들의 교만을 내치시는 분이며 정직한 이와 거짓을 일삼는 자들을 가려내어 심판하리라는 점을 강도 높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노래는 세상의 모든 양심과 정의의 외침을 대변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세상을 모른 척 하지 않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리라는 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몇몇 영웅이나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힘없고 가나하지만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보통사람들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하는 CF의 노래가 마음에 드는 것은 이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수사님으로부터 한 장의 카드를 받았습니다. 카드의 표지에는 늙고 깡마른 한 수녀, 마더 데레사의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고 그 배경에는 밤하늘을 비추는 별들이 그려져 있는 카드였습니다.
여러분은 마더 데레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늙고 힘없어 보이는 할머니 수녀님이 무슨 힘으로 그 엄청난 일을 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의 힘은 가난한 이를 향한 끝없는 사랑이었을 겁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돌보듯이 자기 자신이 아픈지 배고픈지 힘든지도 잊은 채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자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 그것이 그녀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스스로가 비천한 여종임을 자각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께 대한 신뢰 하나로 하느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의 겸손은 비굴함이나 자신의 비하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존재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하나됨으로써 세상과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위대한 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의 일생은 물론이요, 진리 앞에 의연히 살아온 의인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이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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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1,46~47)
우리 모두의 참된 신앙의 표본은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참된 신앙의 길잡이시며, 참된 영적 거울과도 같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 곧 마리아의 노래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묶음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성녀 엘리사벳 역시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기 이전까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無와 같은 존재: 없는 것과 같은 존재, nothing’이었지만, 하느님의 아주 놀라운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의 아주 ‘특별한 존재, something’로 탈바꿈하셨던 것이며, 이런 자신의 새롭고도 놀라운 은총으로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신원을 확인하고 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두 분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들 안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신앙의 수동적인 자세와 수용의 태도로 기꺼이 응답하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마리아의 방문을 받으신 성녀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2가지 축복을 확인해 드립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1,42~43) 이 인사의 내용은 바로 여성이 여성으로써 여성성의 완성, 절정은 ‘자녀 잉태와 출산 곧 母性性’에 있으며, 이런 여성들 가운데서 당신은 바로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사랑의 시작인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셨으니 참으로 복되신 분이심을 세상의 모든 여성을 대표해서, 아니 온 교회를 대신해서 성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어머니께 축하와 축복의 인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고, 여인들 가운데 어떤 누구도 받지 못하고, 누려보지 못한 하느님의 선택과 총애를 받으시고 그 놀라운 섭리 곧 구원의 신비를 신앙으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 되심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후의 복음에도 어머니 마리아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신 이 위대한 신앙의 표본임을 예수님은 역설적 표현으로 강조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루18,19) 참된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믿고 그것만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기쁨,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심만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인 하느님의 예언자로 사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질서란 바로 미래를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빛 속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의 태도이며 이것이 바로 예언자적인 존재의 태도입니다. 볼 수 없는 미래, 알 수 없는 미래를 신앙으로 희망하며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곧 미천한 자신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시고 계시며 이를 찬미하고 감탄하고 그것의 성취를 위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온전히 내 던지는 새로운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어머니 마리아의 방문은 바로 천사의 예고의 뜻을 확연히 드러내고 새로운 신원을 자각하고 투신하려는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아주 필요한 만남이며 쉼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은 마리아가 그에 대한 답가로 노래하는 ‘하느님 찬미가 Magnificat, 즉 성모의 노래’입니다. 마니피캇이란 ‘위대하다, 장엄하다, 참으로 놀랍다.’라는 뜻이며, 성모의 노래는 곧 ‘주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에 관한 노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의 사견이긴 하지만 성모의 노래는 구조상 복음의 초입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 노래는 어머니 마리아 삶의, 생애의 결론이자 회고라고 느껴집니다. 부활하신 이후 어머니 마리아는 초대교회 공동체 중심에서 계셨으며, 성령의 기억과 더불어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을 통해서 성경의 테두리가 완성되었지 않았을까 상상합니다. 그러기에 마니피캇은 사도들과 교회를 향한 어머니의 격려이며 증언의 요약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렇게 성모의 노래는 삶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할 때 더욱 힘차게 깨어 의식하면서, 희망의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런 신앙의 태도로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를 믿고 감탄하며 투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노래라고 봅니다.
성모의 노래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어’ 자신의 온 생애 동안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에게 큰일을 하셨음’을 되돌아보시면서 받은 모든 은혜를 기억하고,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의 화답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의 자비와 크시고 놀라우신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비록 삶이 어렵고 힘들 때라도 주어진 하느님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신앙으로 희망하며 기다리며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확신한 데 하느님의 ‘그날’은 올 것이며,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로 바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날에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 시겠지만,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실 것임을 믿고 희망으로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삶의 체험이며 신앙고백이었듯이 교회 역시도 세상을 향해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매일 노래하기를 원하시고 바라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교회의 기도인 성무일도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매일 저녁에 이 찬미가를 노래하면서 세상을 향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Magnificat’을 단지 입으로만 노래할 것이 아니고 자기 삶의 체험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마음의 노래 곧 세상을 향한 희망을 노래했으면 싶습니다. Magnificat은 우리 각자의 온 존재와 삶으로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한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을 함께 느끼면서 이젠 우리 모두 또 다른 이 시대의 마리아가 되어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을 향해 뜨겁게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놀라운 일을 노래해야 할 차례입니다. 세상은 온 존재와 삶의 통해 체험한 우리의 Magnificat을 듣길 원합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 세상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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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영화를 잘 보지 않습니다. 볼 때도 있지만, 책에서 영화에 대한 소개가 나올 때 강의 자료로 쓰기 위해 영화를 볼 뿐입니다. 그러나 영화 보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영상을 보는데 눈이 쉽게 피곤해져서 ‘빨리 보기’를 눌러서 영화를 봅니다. 그리고 원하는 장면을 찾게 되면 어떻게 이 부분을 강의 때 쓸지를 떠올리면서 그 부분만 천천히 봅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봐서일까요? 영화의 내용을 잘 모르고, 또 영화가 크게 와 닿지도 않습니다. 매번 이렇게 영화를 봐서인지 영화에 정을 갖지 못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어떤 영화도 다 재미있게 봤지만, 지금은 아주 재미있다는 영화도 또 온 국민이 본 영화라고 해도 관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 안에서 빠른 결과만을 찾고 있다면, 그래서 미사나 기도에 있어서 ‘빨리 빨리’만 외치고 있자면 주님의 그 깊은 뜻을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은총도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영화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야 감독의 의도와 배우들의 연기가 와닿는 것처럼, 주님께도 시간을 갖고 정성을 기울여야 주님의 뜻과 주님의 활동이 더 크게 와닿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너무 빠른 결과만 원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정성을 기울이는 주님과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사 시간도 빨리 끝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 의미를 찾으면서 미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시간도 해야 할 기도만 얼른 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빠른 것만을 추구하다가 미처 주님을 놓쳐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찬미가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친다고 하십니다. 또한 당신 팔로 권능을 펼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어느 순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하느님 안에 머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언제나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모범을 기억하면서, 빠른 결과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함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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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굽어보시는 하느님과 함께>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
그때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굽어보시는 하느님과 함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나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나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나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나는
그다지
잘나지 않습니다
크지도
높지도
잘나지도 않은
나를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맘으로
느껴봅니다
나는
참으로
작지 않습니다
나는
참으로
낮지 않습니다
나는
참으로
못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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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성탄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낯선 카드와 선물을 받으며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카드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과분한 선물을 받기만 하며 빚을 지게 됩니다. 카드를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매일 우편물을 확인합니다. 어느새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거듭 태어나기를 다짐합니다.
마리아는 시골의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7-48) 비천함을 굽어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며 또 희망입니다.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된 여인,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믿는 바를 가슴에 새기고, 새긴 바를 실행하게 될 때 비로소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복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처지나 여건, 환경을 비관합니다. 능력이나 성격을 상대와 비교하며 스스로 위축시키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비교는 비참함을 가져오든 교만을 드러내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1-53)
하느님께서는 지금 나의 처지를 인정해 주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지금은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빛나는 존재입니다.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일에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지는 모는 수고와 땀의 결실은 하느님께서 충만하게 하시어 되돌려 주십니다.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늙은 나이에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주셨구나”(루카1,25).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충실한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 안에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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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노래의 힘, 기도의 힘>
-아나뷤(amawim;가난한 이들)의 노래, 아나뷤의 영성-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의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 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2부 엿새째 12월22일 “오! 후렴” 역시 주님 오심을 갈망하는 가난한 우리 아나뷤들이 바치는 애절한 노래요 기도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가난한 영혼의 노래요 기도입니다. 갈망의 사람이자 갈망의 기쁨이요, 갈망은 성소의 잣대이자 원동력이되고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갈망의 사람입니다. 희망과 꿈을, 갈망을 잃은 사람은 살아 있다 하나 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갈망할 때 비로소 깨어 기도하는 순수한 마음이 되고 주님을 기다리게 되고 마중나가게 됩니다. 은총의 대림시기야 말로 영혼은 갈망의 그리움, 갈망의 사랑으로, 갈망의 빛으로 은은히 밝게 타오르는 시기입니다.
노래의 힘, 기도의 힘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이들 아나뷤은 물론 우리 모두가 깊이 잘 들여다 보면 가난한 이들 아나뷤입니다. 아나뷤의 영성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배곺아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가난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근원적 영혼의 허기(虛飢)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어제 나눈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리움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畵)이 되고
그리움
글자로 써내면
시가(詩)가 되고
그리움
소리로 부르면
기도(祈禱)가
노래(歌)가 되고
그리움
몸으로 풀으면
춤(舞)이 됩니다.”-
이래서 갈망의 사람들은, 그리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하느님을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시는 그대로 갈망의 고백 노래이자 기도가 됩니다. 아마 저보다, 여기 사는 수도형제들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나이들어 70을 넘으니 동요童謠나 가요歌謠, 민요民謠의 맛을 알겠습니다. 산책시 아무도 없을 때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참 좋아하는 노래를 맘껏 부르니 애창곡愛唱曲만 해도 수십이 됩니다. 노래는 그대로 기도가 됩니다. 늦게서야 노래의 맛을 알아가니 이제 좀 철이 드나 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수도형제들 역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아마 이렇게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한결같이 노래 많이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성가를 노래로 부릅니다. 노래 중의 노래가, 기도 중의 기도가, 시편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찬미와 감사의 시편 기도와 노래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정화하고 성화하니, 그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들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영혼들이 즐겨 부르는 시편 노래기도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참으로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아나뷤의 노래인 시편입니다. 어느 나라나 가난한 민초民草들을 위한 민요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노래없이 그 절망의 엄혹한 현실을 견뎌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 어느 곳이나 전래되어온 있는 민요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시편 중의 시편이, 노래 중의 노래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도 책이라 불리는 수천 년 동안 면면히 계속 불려지고 있는 시편집입니다. 시와 기도가 노래가 하나 되어 고백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시편의 찬미와 감사와 더불어 주님께 선사되는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 위로와 평화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영혼들을 참으로 부유하게 하는 시편노래기도 은총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에게 노래는 절대적입니다. 노래의 힘, 기도의 힘입니다. 도대체 노래 없이, 기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요 깊이 들여다보면 가난한 영혼들이기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시편 노래기도는 그대로 영혼의 호흡이자 식이자 약이 됩니다. 새삼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좋은 시와 노래를 많이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시와 노래를 잃었기에 희망과 꿈을 잃어가는 참 가난하고 불쌍한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나뷤의 빛나는 본보기가 바로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와 마리아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노래하는,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이런 한나에게 사무엘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선물로 주어졌으니 바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진리가 입증됩니다. 한나의 믿음과 사랑의 고백은, 거룩한 봉헌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아나뷤의 빛나는 모델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바로 복음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빛나는 예표가 됩니다. 하느님은 또 하나의 마리아 성모님같은 이런 한나와 같은 가난한 어머니들의 기도는 우선적으로 들어주십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노래는 바로 한나의 노래요 기도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노래로 한나의 입에 담아 내 노래로 부른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시편에 각자 마음을 담아 바치는 수도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개인의 노래이자 가난한 모든 이들의 염원이 담긴 가난한 공동체의 노래가 됩니다.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개인 고백에 이어지는 노래 가사를 보면 그대로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를 빼다 박은 듯 닮았습니다. 아나빔의 노래는 계속 전승됨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노래는 바로 아나빔의 빛나는 후예인 우리 가난한 수도자들이 2천년 동안 날마다 저녁성무일도 때마다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끊임없이 불러온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의 감사찬미에 이어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에 베푸신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표현하는 공동체의 노래가 됩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노래를 마리아 성모님의 입에 담아 성모님과 함께 부르는 아나빔의 노래입니다. 혼자 부르라 있는 노래가 아니라 함께 부르라 있는 노래입니다. 혼자 구원이 아니라 함께 구원입니다. 아마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노래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가난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아나빔의 후예들인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노래의 힘,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아나빔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난한 이들 아나빔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요, 가난한 빈 마음, 빈손으로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받아 모시고 주님의 힘으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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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은 엘리사벳의 마리아 찬미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런데 두 찬미의 내용도 아름답지만 찬미하는 두 분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찬미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도 서로 이런 식이면 좋겠습니다. 이웃이 은총을 받았을 때 시기하거나 흠잡지 말고 칭찬하고 칭송하고, 그 칭찬과 칭송을 받은 사람은 은총을 자기 공으로 꿀꺽 삼키지 않고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으로써 덕을 돌려드리는 그런 식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미의 내용은 구원의 은총에 대한 찬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은총에 대해 찬미하지만 먼저 자기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하고
이어 자기를 통해 모두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미천한 자신을 구원해주심에 대해 찬미하는데, 마리아가 자신을 미천하다고 하는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사무엘기의 한나가 미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께 찬미하는 것과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 다 미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지만,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 처지였고 그래서 진짜 비참한 처지였던 데 비해 마리아는 전혀 그런 처지가 아니었으니 마리아가 자신을 미천하다고 한 것은 다른 의미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미천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미천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있는 우리는 미천하고 그 은총을 받기에 늘 죄인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 반대잖아요? 존재로나 사랑으로나 은총으로 모든 면에서 더 크신 하느님 앞에서는 무시하고 대들고 원망하고 하느님보다 훨씬 못한 미천한 인간 앞에서는 자신이 쫄아들고 열등감을 느끼며 자기를 미천하게 생각하잖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의 미천하다는 느낌은 성사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하느님 찬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뿐 아니라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찬미가 확장됩니다. 이것은 즈카르야의 찬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느님 구원의 은총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만 또는 자기만 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통해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면 날름 삼켜버리고 입 싹 닦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나누라고 주신 은총을 확장하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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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b)
<기쁨의 찬가(2)>
오늘 복음(루카 1,46-56)은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엘리사벳의 칭송을 들은 마리아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의 찬가', 곧 '성모의 노래인 마니피캇(Magnificat)'입니다. 이 찬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마리아의 이 찬가는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마리아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이런 예수님을 닮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의 관심과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주님의 성탄이 임박한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약속한 것을 잘 지켰는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오늘 독서(1사무 1,24-28)는 '주님과의 약속을 지켜낸 한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한나는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굽어보시어 아들 하나만 허락해 달라고 청하면서, 그렇게 해 주시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다고 주님께 약속합니다.(1사무 1,11 참조)
주님께서는 한나의 그 간절한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한나는 주님께 약속한 것을 그대로 지킵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이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마니피캇의 원조입니다.
은총을 청하고, 받은 은총에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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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25gluRoq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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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구원자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를
잘 아십니다.
다함이 없으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가시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유일한
우리 삶의
의지처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끝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픔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살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살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는 우리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진정한 오늘의
행복입니다.
바로 오늘이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시는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세상 일에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원히 미칠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우리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더 없는 행복
더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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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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