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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죽음의 문턱서 살아난 게 실감 나지 않는지.."
이계홍 작가, 언론인2020. 1. 10. 09:18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6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35장 야만의 거리
오민균의 체포
서울로 숨어든 오민균이 고향 친구 신관유를 불러냈다. 인왕산 계곡에서 둘은 만났다. 오민균의 행색은 꾀죄지했고,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두툼한 겨울 잠바 하나 준비해줄 수 있나?”
숙군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데 육군 정보국(특무대)은 여순 사건 가담자나 좌익 혐의 군인들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정보국 정점에 백선진이 있었으나 조직의 실력자는 김창동·이한진이었다.
“왜 하필이면 산속에서 만나자고 했어?”
신관유가 의아해서 물었다. 오민균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쫓기는 거 아니야? 요즘 시국이 하수상하다. 자수해서 광명 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럴 일 없어. 죄가 없는데 자수라니....”
오민균이 눈을 크게 뜨고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다. 산자락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잘못되는 건 아니지?”
“걱정할 것 없다니까. 난 미군 기관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어. 미군이 지켜준다구. 두툼한 옷가지 챙겨서 내일 아침까지 이 바위 밑에 넣어줘. 부탁이야. 가족들을 만날 수가 없다.”
오민균이 계곡 한켠에 있는 바위 틈을 눈으로 가리켰다. 신관유는 그날 밤 두툼한 솜바지와 점퍼를 신문지에 말아 약속한 바위 밑에 쑤셔넣었다.
1948년 11월 오민균의 먼 집안 오용윤이 청주 7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육사 7기 과정을 마치고 소위 임관해 고향인 청주 연대에 부임했다. 경비대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9월 5일자로 육군사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래서 정부 수립 후 첫 육사 생도라는 자긍심이 생겼다.
오용윤은 청주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시험 준비를 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 시간을 벌기로 하고 일단 군문에 들어갔는데, 마침 장교 모집이 있어서 재빨리 응시했다. 이렇게 해서 경비대사관학교 마지막 기이자 신생 정부 첫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 되어 소위 계급장을 달고 현지 부임했던 것이다.
어느날이었다. 드리쿼터를 타고 일군의 육군 정보국(특무대) 헌병들이 들이닥치더니 오용윤을 체포했다. 그들은 헌병대로 오용윤을 끌고가 건물 이층에 설치된 취조실에 꼬라박고는 매타작부터 시작했다. 취조실은 영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용윤, 네가 여기 붙들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지?”
조선조 형리들이 “니 죄를 니가 알렸다?”하고 조지던 숫법과 똑같이 수사관들은 그렇게 묻고 때렸다. 영문을 모르고 맞고 있는데 한 수사관이 물었다.
“오민균과 한 집안이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됐지 이 새끼야, 왜 군말이 많아.”
그러면서 군말을 한 것도 아닌데 군말했다고 늑신하게 팼다. 왜 오민균과 일가친척이면 맞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따져 물을 사이도 없었다.
“이 새끼들은 언제나 숨길 것부터 생각하고 나온단 말이야. 너 여기 붙들려온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이냐?”
“잘못했다면 맞아야 하지만, 내가 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 아직도 몰라?”
그가 무슨 사고를 쳤나? 그래도 이건 너무 생뚱맞다. 그가 사고를 친 것과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오용윤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싸움에 말려들거나, 누구를 때리거나 하다못해 여자를 농락하거나, 무엇을 훔친 적이 없었다. 성실한 모범청년으로 있다가 군문에 들어왔을 뿐이다. 흔히 ‘날라리 해방 소위’라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의 어엿한 초급 장교 아닌가.
“해주 오씨냐?”
“그렇습니다.”
“해주 오씨가 김이박최정도 아니고 임마, 많지 않은 씨족에, 그것도 같은 충청도에, 같은 고보에, 이웃 군에... 이런데도 입을 봉할 수 있어? 너 우릴 뻘로 보지 마라. 신사적으로 말할 때, 오민균이 어디 있는지를 대라!”
“알지 못합니다.”
“이 새끼들은 결정적인 때는 꼭 이렇게 숨기지. 하지만 내 완력이 이기나, 니 고집이 이기나 보자. 너 그 자가 빨갱이라는 것 몰라?”
“네?” 오용윤이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가 빨갱이라고요?”
“너를 세포로 쓰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니네 동기생이 밀고해준 거야. 너 육사 7기생 맞지?”
“맞습니다.”
“7기생 하춘구 소위가 불었다.”
정보국이 오민균의 고향 인맥을 뒤지면서 같은 군(郡) 출신 하춘구를 불러다 조지니 오민균의 먼 이웃인 오용윤이 얼핏 머리에 떠올라 그렇게 말해준 것이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었다. 육사 7기는 앞 기와 달리 3차에 걸쳐 600여명의 졸업자를 배출해 소속감이나 연대감, 결속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제주 4.3, 10.19 여순사건에 투입하기 위해 속성으로 장교를 배출할 목적으로 정규, 특7기 등 세 차례에 걸쳐 추가 모집하고, 교육기간은 3개월로 같았으나 입교 일시가 다르니 임관식 또한 각기 달라 같은 동기생이라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하춘구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수사는 증거주의가 아니고 혹독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형식이었다. 생사람 잡는 야만적 수사 방식이 거리낌없이 자행되었다. 고문을 못견딘 자가 다급한 나머지 동기생이나 친구들을 대면 그들 또한 잡혀들어와 제보한 자 못지 않게 당하다가 빠져나가기 위해 다른 친구들을 댄다. 이렇게 해서 숙군 과정에서 수천 명이 무고하게 당했다. 숙군은 상부로부터의 지시에 의해서라기보다 육군 정보국을 중심으로 군 내부 질서를 잡는다는 열혈 장교들의 사명감에서 비롯되었으나, 굳이 말하면 위세와 오만과 공명심이 뒤엉킨 무리수였다.
“그 잘난 빨갱이 오가가 같은 집안이라고 너를 세포로 심어놓았단다. 그의 행선지를 대지 않으면 너는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옆방에서도 절푸덕 절푸덕 맞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그때마다 아아악 으으으,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울부짖는 남자의 절규가 허공을 찢었다. 몽둥이로 다듬거나 고문 기구로 살을 찌르고 박는 것이다. 오용윤은 공포감으로 몸을 으스스 떨었다.
밤이 깊자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 밑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생각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맞아죽을 것인가, 죽을 각오로 도망갈 것인가. 여기서는 살아나갈 가망이라곤 없다. 가마니 거적대기에 덮여서 들것에 실려 나간 시체만도 이틀 걸러 한두 구 씩은 나오지 않았는가...
오용윤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웠기 때문에 아래층의 공포심은 없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리가 부러졌지만 병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병영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북 기어서 개구멍을 빠져나왔다. 살얼음이 얼어있는 들판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낮은 포복으로 계속 기어나갔다. 동이 터서야 산 기슭에 이르렀는데, 마침 절이 보였다. 예불을 마치고 나온 중이 그를 발견하고 재빨리 골방에 숨겼다. 간병을 받은 얼마 후 점차 원기를 회복했다. 그리고 선배와 연락이 닿아 그가 신원보증을 서주자 자대 귀대 대신 다른 부대로 전속 가서 초급장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군 질서가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친분을 통해 임의 이동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때였다.
그는 다리가 부러진 후유증으로 발목에 철심을 박고 살았는데, 날이 꾸물거리거나 일기가 불순할 때면 다리가 쑤시는 통증에 평생 시달렸다. 그는 후에 국회의원 등 고위직에 있었지만, 다리 통증은 휴대품처럼 늘 그를 따라다녔다.
삭풍이 몰아치는 12월 하순의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긴 골목길. 아침 일찍 젊은 청년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뒤, 조그만 광장 쪽에 있는 세탁소를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신문 배달, 두부장수가 골목을 지나고, 집집마다 아침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골목으로 퍼졌다.
청년이 세탁소에 거의 닿을 즈음, 공교롭게도 앞에서 오는 두부장수와 몸이 부딪쳤다. 두부장수가 바짝 붙어서 마주친 통에 부딪친 것인데, 쫓기는 기분이어선지 그가 부딪친 것 같기도 했다. 두부판이 바닥에 쏟아지고 두부장수가 넘어졌다.
“이거, 미안합니다. 아침부터 낭패군요.”
그가 두부장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 뒤 두부 판을 수습했다. 순간 일단의 청년들이 골목에서 후다닥 쏟아져나왔다. 그들이 그를 감싸며 소리쳤다.
“오민균 소령! 세탁소 갑니까?”
순간 청년이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나는 오민균이 아니오! 잘못 보았소.”
“허튼 소리 말라. 오민균 너를 체포한다!”
억센 사나이들이 달려들어 그의 팔을 잡아 비틀고 수갑을 채웠다. 그들은 육군 정보국 수사요원들이었다.
오민균은 사촌형 오창성이 운영하는 세탁소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약혼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고향에 머물고 있던 약혼녀가 그의 연락을 받고 사촌형의 세탁소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사촌 형의 세탁소를 접선지로 하여 아침 일찍 찾아 나섰다가 잠복중인 김창동의 수사대에 체포된 것이다. 김창동은 수사대를 풀어 그의 약혼녀를 줄곧 미행해왔다.
오민균은 명동의 명치죄에 설치된 정보국 영창에 갇혔다. 들어가자마자 예의 구타가 시작되었다. 북어쪽 패듯 반 죽여놓는 것이다. 며칠 후 이한진이 보조 둘을 대동하고 오민균 방으로 들어섰다. 저항할 기운을 뽑아내고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만났지?”
“그런 일 없소.”
그는 일단 부정했다. 만난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박정희가 다칠 것이다. 어차피 당한다면 자기 선에서 멈춰야 한다.
“미친 새끼, 우릴 바보로 아나. 우리가 미행하는 것도 모르고 잘 접선하더군. 하동, 광양, 광주, 목포... 그런데도 안만났다고?”
사실 그들은 박정희로부터 자백과 함께 리스트를 받아 수사에 나서고 있는 중이었다.
“김종석과 최남근과 함께 폭동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 탄로나니 기분이 언짢나? 여수 순천에서 지창수가 먼저 반란을 일으킨 통에 산통이 깨지고 말았지? 맞아, 안맞아?”
잘 몰랐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사태 진전에 따라 무슨 일이든지 저지를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민족군대라고 그들은 보지 않았다.
“우리가 허수아비로 있는 줄 아나. 이래 봬두 독사팀이야.”
잠시 후 각반을 든 다른 수사관이 들어와 합류했다. 그가 물었다.
“제주 포로들 중 빨갱이는 풀어주고, 양민은 묶어두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 이유가 뭐냐.”
“나는 모르는 일이오. 구분할 필요가 없소.”
“구분할 필요가 없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한꺼풒 벗기면 모두 제주 양민들이오. 좌익이다 우익이다 구분한다는 게 무의미하단 말이오.”
“뭐야 새끼야? 그렇게 해서 빨갱이들을 풀어준 거야? 그놈들더러 다시 입산해 군경에 대항하라고 석방한 거야? 과연 역도 새끼군.”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들은 스스로 화를 돋구어 폭력을 가했다. 이한진이 더 방방 뛰었다. 그는 한번 흥분하면 보조를 제치고 그 자신이 패는 습관이 있었다.”영관급을 이렇게 대접할 거냐?“
오민균이 맞으면서 호통을 쳤다.
“너는 정신이 덜 들었어. 지금 천지분간을 못해. 너는 범죄자고, 국사범이고, 역도지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 아니야!”
각반을 든 수사관이 윽박질렀다.
“경찰의 응원 요청에도 너의 병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부대가 배치된 지 얼마 안된다고 출동하지 않았다. 병사 훈련중이라고 토벌을 회피했다. 그리고 통적(通敵)하면서 적들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렇지 않나?”
그렇게 보면 그럴 수 있었다. 오민균이 대답했다.
“네가 말한 것이 꼭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동족간에 살상을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개자식, 경찰의 보고만으로 너는 두말없이 총살감이야!”
오민균은 경찰의 모략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주에서 사사건건 부딪친 대상은 경찰이었다. 과도한 진압과 주민 탄압, 무자비한 소탕전에 그는 경찰을 비판했고, 때로 그들의 거친 진압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적장과 내통해 비밀협상을 갖고, 우리측 기밀을 적도에게 넘겨주었다.”
“아니다! 똑똑히 알고 말하라!”
이 대목에 이르러 오민균이 맞고함을 쳤다. 모든 것이 부정되고, 모든 것이 범죄로 몰린다는 것은 모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건 맨스필드 제주도군정장관이 미군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협상에 나선 것이다. 책임이 있다면 그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협상하도록 지시해놓고, 휴전협정을 깨고, 충돌을 부추기고, 총을 쏘고, 이렇게 해서 협상을 무력화시키고, 토벌의 근거로 삼았다. 모든 과정이 음모 수준이다. 야비한 놈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당신들이 도대체 뭐냐?”
“묘한 놈일세. 우릴 범죄자로 모네. 그래봤자 넌 끝났어. 적도들에게 수천 발의 총탄을 지급하고, 총기까지 지급했잖나!”
“난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한 적이 없다.”
“제공하지 않았다고? 그들이 제공받았다고 문서로 작성해 상부에 올린 것도 모르나?”
“그들이 작성해 올리면 모든 게 진실이냐. 진지 동굴에 있던 일본군의 무기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무기를 건넨 적은 없다.”
오민균이 부하들이 발굴한 진지 동굴에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회수해온 과정에서 일부 병사가 빼돌려 무장자위대에 투항했거나, 병사들이 버리고 간 것을 적이 수습해갔을 수는 있다. 이것을 현장 지휘관으로부터 노획했다고 적이 공명심을 내세울 수도 있다. 그렇게 선전하면서 내부의 패배주의를 결속시키고, 사기를 올릴 근거로 삼았을 수 있다.
“네놈이 제공했다는 것이 적도의 문서에서 다 나와있단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해도 나와는 상관없다.”
“왜? 그들이 제공받았다고 썼데 상관이 없다는 거냐.”
“내가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그들은 연대에 지휘관 세포를 심어두기까지 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이 그들 입맛대로 말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들 말과 보고서가 모두 죄를 묻는 기준이 되나?”
“니놈이 적도와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래서 빨갱이 새끼들을 석방했고 말이다.”
“빨갱이를 석방한 것이 아니고, 양민을 석방한 것이다. 빨리 놓아주느냐 늦게 놓아주느냐의 차이일 뿐, 기왕이면 농번기에 일손 하나라도 덜어주어야 하지 않나.”
“군수품 빼돌려서 사적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착복했다는 제보도 들어왔다. 부인하나?”
“부인한다. 증거를 대라. 의심하는 자가 증거를 대야 하는 것 아닌가.”
“물증은 혐의자가 대는 것이지, 우리가 대야 한다고? 니가 저지른 범죄를 우리더러 소명하라고? 이런 개자식이 있나?”
당장 주먹이 날아왔다. 곁의 수사관이 각목으로 그를 패기 시작했다. 맞는 가운데서도 그가 외쳤다.
“물증을 대지 못하면 무죄다.”
“그러면 물증을 대지. 너의 계보는 다 드러났다. 박정희 김종석 최남근 조병헌 김태성 황택림 이성구 김학림 곽종진... 모두 남로당 군맥이지.”
이한진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그도 명단을 주욱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중업, 이재복, 김영식, 그렇지 김영식은 이재복의 비서지. 아니 이중업의 비서냐?”
“알 바 아니다.”
“모른다고 하면 통용될 것 같나? 넌 돌아다니면서 가명을 여러개 사용했어. 이씨, 김씨, 허씨라고 둘러댔어. 그런 놈을 누가 신뢰하나? 너의 말은 거짓이거나 변명이라는 것을 그것 하나로도 증명이 되지. 묻는대로 대답하라. 황택림 김학림 이상진 이성구 이정길 모두 접선 대상자 아닌가. 만주군 계보는 박정희 최남근이 맡고, 일본 육사 출신은 김종석이 지휘하지 않았나? 틀렸나?”
“그런 것 없다.”
“모르면 골로 가는 거야.”
다음날은 김창동이 들어왔다.
“너 나 알디?”
오민균은 장독으로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대꾸할 힘도 없었다.
“나한테 잘 말하믄 벗어날 수 이서. 이리 연대서 날 본 적 있네?”
“난 이리 연대에서 근무한 적 없소.”
“그럼 휴가받아 조병헌 만나러 간 거 아니간?”
“4연대 시절 잠깐 다녀간 적은 있소.”
“고렇디. 접선 일이십 분이면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할 시간 아니간? 무슨 변명이 그리 많네? 난 애초부텀 널 의심했댔디, 좆같은 놈...”
“나는 당신보다 계급장이 높소. 예우를 받고 싶지는 않지만 점잖게 다루시오.”
“계급장이 높다구? 모두가 가짜디. 일본군 출신 선배들이 만들어준 ‘짜가 계급장’ 아니간? 난 너를 애초부터 사람 새끼로 보지 않았대서....”
“나도 당신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소. 내가 당신한테 굴복하고 목숨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소. 나는 대한민국 장교의 명예와 자긍심으로 나를 지탱해왔소.”
“고래, 좋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우.”
그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
“너희들 들어오라우!”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덕대 큰 사내 두 명이 들어왔다. 이미 훈련이 된 듯 그들이 오민균을 포승줄로 묶어 전기 의자에 앉혔다. 전기선을 연결하고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리자 오민균의 몸이 부르르 떨더니 곧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오민균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 끝에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김창동과 이한진은 거물에 대해서는 그들이 직접 관여했다. 김창동이 푸대처럼 퍼져버린 오민균의 팔을 끌어당겨 손에 인주를 묻히더니 심문조서에 그대로 찍었다.
“나는 본디 사감을 갖는 사람이 아니디. 하지만 이 새끼에겐 사감을 갖지 않을 수 없어. 건방지고 우쭐대고, 새파란 놈이 시대의 영웅처럼, 엘리트주의에 젖어서 껍적댄단 말이디. 고런 건 내한텐 용서가 안되디.”
며칠 후, 오민균이 갇힌 방에 떼거리로 수사관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한 군인을 앞세우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 오민균은 앞에 서있는 키 작은 남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박정희는 김창동과 이한진의 헌병대에 이끌려 그의 방을 찾은 것이었다.
예의 굳게 다문 잎, 슬픈 듯 차가운 눈, 그리고 작고 단단한 체구. 오민균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벽을 짚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통증과 함께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입이 얼어붙은 듯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박정희 역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으나 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오민균의 위아래를 살폈다. 그러더니 한 순간에 몸을 홱 돌려 그를 외면했다. 그는 앞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게 너무도 낯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밤새워 통음하며 세상을 탄식하던 선후배 사이 아닌가. 날갯죽지 떨어져 나간 새처럼 처참하게 감방에 쳐박혀 있는 동생을 위로 말 한마디 없이 나갈 수 있는가.
왜 그는 자유의 몸으로 들어왔으며, 들어왔는데도 아무 말없이 돌아서 나가버렸을까. 그때 그의 눈에 어린 물기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돌아서버린 것인가. 그런 박정희가 오민균의 뇌리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오민균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굳이 말하면 재판이랄 것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방경비대사관학교 5기 오보균은 1948년 4월 소위 임관하자 남원 기지사령부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여순 사건으로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자 부대는 빨치산 토벌사령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오보균은 형을 선망했던 관계로 청주고보를 졸업하자 곧 형이 가는 길을 따라 경비대사관학교에 입교했다. 형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그는 마음으로부터 군인을 동경했다. 군문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통신 사정 때문에 입대 내내 편지 한 장 주고 받지 못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뒤 반란군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현상 부대와 합류했다. 오보균은 편성된 토벌군사령부 소대장 보직을 받았다.
지리산 산골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다. 꽁꽁 얼어붙은 산지에 방한화를 신었어도 발이 떨어져나갈 것같이 시렸다. 그가 산지의 보초병을 점검하고 돌아서던 때, 그에게 일단의 사복조가 들이닥쳤다.
“오보균 소위 맞나?”
“그렇다. 누구냐?”
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사복조가 물었다.
“오민균 소령이 형님인가?”
“그렇다. 내가 그의 친제다.”
“형의 연락한 게 언제냐?”
“형과 편지 한 장 주고 받지 못했다.”
“토벌군사령부를 와해시키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다고?”
“너희들 정체가 뭐냐?”
오보균이 권총을 뽑아들자 덩치 큰 사내가 한달음에 달려들어 그의 손을 내리치고, 권총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옆의 사내가 그의 복부를 칼로 찔렀다. 능숙한 솜씨였다. 그가 쓰러지자 키작은 사내가 돌덩이를 들어올려 그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한치 흐트러짐 없는 고단수 실력들이었다. 전문 킬러 쯤 되어보였다. 키작은 사내가 땅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여 오보균의 가슴을 향해 확인사살을 한 뒤 허리춤에 찔러넣고, 동시에 그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보균의 가족들은 지금까지 그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전사인지, 행방불명인지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군 누구도 통보해준 사람이 없었다. 일부 병적기록부엔 1952년 사망한 것으로 나와있다고 하는데, 가족들에게 그런 사실조차 전달된 적이 없었고, 사실은 그런 기록이 없었다. 1948년 소위 임관과 함께 소식이 끊긴 장교가 4년 후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미스테리였다. 다만 남원기지사령부에서 함께 복무했던 옛 전우가 그의 시체를 보지는 못했으나 맞아죽었다는 소식만 간접적으로 흘려들었을 뿐이었다.
1949년 5월 12일. 남산 밑에 있는 국방부(구 통위부) 건물의 장교식당. 임시로 설치한 군사법정이다. 중앙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김종석 오민균 김영식 등 18명이 피고인석에 배석했다. 민간인 김영식은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었으나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함께 받았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김종석 오민균 등 현역 군인에게는 사형, 재령 출신 김성숙, 대구 출신 김용진, 철산 출신 한태희 등 4인의 민간인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06호 내용 중 김종석 오민균의 혐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종석 전 4여단, 전 육군중령,제18조·33조, 반란기도죄·간첩죄, 사형, 원판결 승인, 상동
오민균 전 4여단, 육군소령, 제18조·33조, 반란기도죄·간첩죄, 사형, 원판결 승인, 상동
위 기소 내용 중 ‘전 4여단’은 1948년 4월 29일 수색기지에 창설돼 그해 11월 20일 제6여단으로 개편돼 충북 청주로 이동한 부대였다. 초대 여단장은 채병덕 대령, 참모장 김종석 중령이었으며, 채병덕이 통위부 총참모장으로 이동하자 김종석 참모장이 8월 16일자로 후임 여단장이 되었다. 이때 여순사건에서 진압작전을 펴다가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이 참모장으로 부임(1948.11.12.)했다.
오민균은 4여단 소속이 아니었다. 제주 포로수용소장직에서 해임되거나 타 부대로 전속간 기록이 없으니 그대로 제주 포로수용소장이라야 맞다. 굳이 말하면 부대 탈영자였다. 아마도 김종석 최남근 오민균을 같은 혐의자로 묶기 위해 편의상 소속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두 달 사이에 모두 처형되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려진 판결문이 수정되었다. 명령서 마지막 장에 김종석 오민균에 대하여 죄과 2, 무죄. 단 국방경비법 제32조로 수정하여 유죄라고 나와 있다. 즉 33조는 무죄로 하되 대신 이적죄인 제32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분명치 않다. 국방경비법 제18조, 제33조를 무죄로 하고 32조로 대체한다는 것인지 섞갈린다.
애써 해석하자면 제18조 반란 기도죄와 제33조 간첩죄 위반은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제32조 적에 대한 구원, 통신연락 또는 원조죄 위반으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한다는 판결이다. 반란 기도죄와 간첩죄보다 통신연락 또는 원조죄 위반이 더 무거운 형을 받은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형 선고문이라면 자구(字句) 하나, 코마(,) 하나에도 우주적 근거를 대야 하는데 이런 논리모순·형용모순·해석모순이 있다는 것이 내내 의문스러운 것이다.
1949년 8월 2일 오후 2시. 폭양이 내려쬐는 수색기지. 서울에서 고양으로 나가는 황막한 길 옆에 야트막한 야산이 나온다. 군용 트럭 몇 대가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말아올리며 달려오더니 야트막한 야산 앞에 와서 멈춰 섰다. 군용 트럭에 분승한 헌병들이 차레로 뛰어내렸다. 열댓 명 쯤 되었다. 그들이 언덕쪽에 도열하고, 잠시 뒤 다른 차량들이 도착했다.
허름한 국방복 차림의 죄수들이 포승줄애 묶인 채로 현병들의 인솔하에 차에서 내리고, 지프에서 육군 정보국 소속 장교와 헌병대, 의무감 소속 군의관이 내렸다.
먼저 온 헌병과 공병들이 야전삽과 곡괭이를 들고 야산 밑으로 가 구덩이 다섯 개를 1m 정도의 깊이로 팠다. 그리고 통나무를 박고 흙으로 덮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다졌다. 인솔 헌병들이 죄수들을 한사람씩 데리고 가 말뚝에 끈으로 묶었다. 가슴 높이를 묶고, 허리를 묶고, 발목을 묶었다. 뒤이어 가리개로 눈을 씌우고, 왼쪽 가슴에 둥그런 원이 그려진 무명베를 붙였다. 총알의 표적지였다. 준비가 끝나자 형 집행 헌병 장교가 각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육군 제4여단 소속 전 육군중령 김종석(28세)
윤군 제4여단 소속 전 육군소령 오민균(23세)
민간인 황해도 재령군 김00 (27세)
민간인 경상북도 대구시 김00 (29세)
민간인 평안북도 철산군 한00 (26세)
집행관이 마지막 유언을 하도록 김종석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김종석이 무슨 방언 같은 말을 쏟아내더니 갑자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다음은 오민균 차례였다.
“나는 왜 죽는지 모르고 죽는다.”
그러나 집행관은 그의 말을 묵살했다.
오민균은 왜 이 자리에 와있는지를 몰랐다.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모의를 꾸미거나, 직접 거사를 도모했거나 세력을 규합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반란 수괴에게 내려질 사형수라고? 설사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언제, 어떤 경로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가담했는지를 가려주어야 한다. 시대를 고뇌하는 젊은이라면 고민이 없는 것이 이상한 시대 아닌가. 일제 암흑기보다 더 가혹하게 쪄누르고 국가 폭력의 광란의 춤을 춘 자들이 누군가. 합리적 증거도, 적법한 절차도 무시된 재판 과정은 또 무엇인가. 야만과 광기 그 자체 아닌가. 좌익 혐의 때문이라고? 좌익 혐의가 그렇게 중대범죄인가?
오민균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자 형 집행 과정을 무비 카메라에 담고 있던 미 정보고문관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이 옆 장교에게 물었다.
“저 친구 뭐라고 말하는가.”
무비 카메라에 신경쓰느라 그의 말을 헤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신경쓸 거 없습니다. 자신의 영이 하는 말을 육체의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우스만이 고개를 갸유뚱하면서 다시 형 집행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때 오민균이 ‘대한민국 만세!’ 3창을 외쳤다. 형 집행관이 형 집행장을 꺼내 낭독하기 시작했다.
-단기 4292년(1949년) 7월 29일자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 107호에 의거하여 사형이 선고된 5인에게 총살형을 집행한다.
뒤이어 그가 사형수 맞은편 15m 거리에 도열해있는 헌병들을 향해 외쳤다. 도열한 헌병들은 앞줄은 앉아 쏴 자세를 취했고, 뒷줄은 서서 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거총!”
헌병 소총수들이 일제히 격발 자세를 취했다.
“준비!”
무거운 침묵이 감돈 가운데 찰가닥 찰가닥 총기의 가늠쇠를 동시에 푸는 소리가 들렸다.
“발사!”
빠빠빵빵빵.... 헌병들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일대에 푸른 연기와 함께 화약 냄새가 좌악 퍼졌다. 사형수 뒤편의 황토도 총알이 박혀 뽀얗게 흙먼지를 일으켰다. 다섯 명의 죄수가 앞으로 푹 고개를 떨구었다. 총소리가 멎자 적막이 짙게 야산에 내려앉았다.<이상 정운현의 ‘오일균 전기’(가제), 사사키 ‘한국전 비사-건군과 시련’ 외 자료 종합>
일본의 보수 우파 군사학자 사사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경비대사관학교 교관 시절 오민균 조병헌 교관들이 생도들을 좌익 교육을 시켰다고 했으나 그들의 영향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 경험이 많은 일본 하사관 출신까지 철저히 훈련된 그들을 그들만의 능력으로 감화시켰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사관학교 2,3기생에 불순분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의 사회상의 반영과 남로당의 경비대 공작의 성과라고 본다(한국전비사 상권115-116페이지).
오민균이 일본 육사 61기로 입교한 것이 열아홉살 때였고, 해방과 함께 귀국해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국방경비대사관학교 교관이 된 것은 스무 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청주연대, 경비대사관학교 교관, 부산 5연대를 거쳐 제주 4.3에 투입된 것은 22세 때였다. 제주에 파견돼 6개월 복무하다 체포된 것은 22세 때였으며, 처형되기는 23세 때였다. 세상을 알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박정희 김점곤 유양수
박정희가 백선진 사무실을 찾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같이 살아난 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그는 한동안 그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것이었다.
“힘들었지요? 좋은 소스를 주어서 일망타진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하긴 죄책감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과 같은 길을 택하면 살 길이 있을 것이다. 결코 다치라고 밀고한 것은 아니다. 형마저 억울하게 죽은 마당에 자신 또한 그렇게 당한다면 집안은 멸절해버린다. 어렵게 쌓아올린 이현란과의 사랑은? 갓 태어난 아들은? 생각할수록 착잡했고,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선진은 전향하긴 했으나 박정희가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분간 누구도 그를 상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르는 후배들은 배신자라고 침을 뱉을 것이고, 협력을 받은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백선진이 그가 비틀거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었다.
“어디 일할 곳이 있습니까?”
박정희가 쓸쓸하게 웃었다. 백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앉아서 좀 쉬고 있어 봐요.”
하고 사무실을 나와 복도 끝쪽의 유양수 전투정보과장 사무실로 갔다. 유양수 과장은 김점곤 전투정보북한과장이 5사단의 부연대장으로 발령이 나자 그 후임으로 갓 부임해온 장교였다.
“유 과장 사람 하나 필요하지 않나? 하나 쓸까?”
“네?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 좋은 유양수가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박정희 소령이 갈 곳이 없네. 군대 밖에 모르는 사람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이 되면 한 걸음도 못걷지. 갈 곳이 마땅찮아 보이니 유 과장이 좀 데리고 있으면 어떨까.”
유양수 의중을 존중하는 듯한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은 지시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의사를 거부할 하급 장교는 없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유양수가 알아채고 나섰다.
“군무원으로 데리고 있으라는 말씀이군요? 한데 예산이 부족해서 줄 봉급이 마땅치 않습니다. 부대원들의 월급을 쪼개서 줄 수밖에 없겠군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오. 정보국장 기밀비에서 얼마간 마련해줄 테니까 박 소령을 군무원으로 일하게 해요.”
“알겠습니다.”
백선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쓸쓸하게 앉아있는 박정희에게 말했다.
“박 소령, 나와 함께 좀 갑시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백선진의 뒤를 따랐다. 유양수 과장 방에 들어선 백선진이 박정희를 향해 말했다.
“앞으로 유양수 과장 밑에서 문관 자격으로 일을 하시오. 넉넉지는 못하나 밥을 먹어야 할 것 아니오? 소문에 아이도 출생했다고 하는데...”
그제서야 박정희가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물기가 촉촉이 어렸다. 백선진이 위로 차 다시 말했다.
“미안해할 것 없습니다. 나와 함께 근무하는 미군 고문관 리드 대위가 건네준 C레이션이 몇 차 분 있습니다. 전투 식량이지만 평시에는 현금 대용으로 쓸 수 있습니다.”
리드 대위는 미 군사고문단의 허락을 받아 C레이션 두 창고 분량을 백선진이 쓰도록 조치했다. 그것을 시중에 일부 내다 팔면 돈이 되는 것이다.
김점곤 소령이 새 배속지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석방 소식을 듣고 용산 기지 군인 관사를 찾았다. 그가 집에 들어서자 박정희는 마침 아침 식사중이었다. 부인은 없는지 집안은 쓸쓸했다.
김 한조각으로 밥을 뜨려던 박정희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김점곤을 보자 그대로 맨발로 뛰어나와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내어 울었다. 여태껏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포옹한 채 울고 있는 그를 향해 김점곤이 말했다.
“박 소령, 고생했소. 부인도 얼마나 힘들었겠소. 이제 새롭게, 멋있게 출발하는 것이오.”
김점곤은 아직 그의 가족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아내는 행방불명이 되고, 신생아는 죽었다. 김점곤은 먼 훗날 그 눈물을 달리 해석했다.
-동료와 사랑하는 후배들을 배신한 것에 대한 속죄의 눈물일 것이다. 처형당한 후배들이건, 이를 밀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박정희 자신이건 모두 역사의 희생물이자 피해자 아니겠는가. 인간으로서 일신의 안전을 위해 벗과 후배를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된 비인간적인 시대가 준 ‘잔혹한 선물‘이 아니겠는가.(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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