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교토를 가는 도중에 나고야(名古屋)를 잠시 들르기 위해 나고야 역에서 일어섰다. 신칸센을 통해 교통혁명을 이룩한 일본은 도쿄와 나고야 사이도 지척이고, 나고야와 교토 사이도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나고야역의 물품보관 로커에 여행 짐을 넣어두고 홀가분하게 나고야 시내로 들어섰다.
나고야가 위치한 일본의 아이치현(愛知縣)은 일본열도의 거의 중앙부에 있다. 그래서 아이치는 일본의 동서교통에서 핵심적인 위치가 되었고, 도요타(豊田) 자동차 등의 산업거점으로 번성해 왔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이 아이치현의 현청 소재지가 된 나고야(名古屋)는 일본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서, 인구가 200만명이 넘는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봉건시대의 나고야는 영주의 성인 나고야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강력한 성곽 도시였다.
아무 것도 메거나 들지 않은 채로 가볍게 나고야 시내를 산책해 본다. 나고야 시내는 잘 정비되어 있다. 자로 잰 듯한 도로망과 적당한 높이의 빌딩들이 그리 번잡함을 느끼지 않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고야 지역은 군수산업이 발전한 곳이었다. 그래서 세계대전 중인 1945년 미군 공습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전통적인 나고야 모습은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의 경제부흥으로 나고야의 재건이 시작되면서, 나고야의 도심은 넓고 잘 정비된 현대 도시가 되었다.
나고야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시야쿠쇼(市役所)역에서 내려서, 나고야성을 목표로 걸어갔다. 평일 낮 시간이라서 나고야 시청이나 아이치현 청사와 같은 관청가와 중심가인 사카에(榮) 지역도 분위기가 조용하다. 나고야의 심장부인 이 곳의 바로 북쪽에 나고야의 상징인 나고야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옛 건축물과 현대적 빌딩이 잘 어울리고 있다. 성의 동쪽에는 성이 건설되던 17세기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귀족들의 저택과 창고 등이 있다. 나고야성의 서쪽 일대도 전쟁 당시의 폭격을 피해서 에도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나고야성은 원래 이마가와(今川) 가문에서 1521년∼1528년에 쌓은 성인데, 몇 년 뒤 폐허가 된 것을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가문을 몰락시키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거점으로서 자리하게 된다. 원래 나고야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 | ▲ 나고야성 작은 텐슈가쿠 | | ⓒ2004 노시경 | |
이 나고야성은 17세기 초에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대적인 건축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의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가신들을 물리치고, 1603년에는 일본 무신정권인 바쿠후(幕府)의 수장인 쇼군(將軍)이 되어, 에도바쿠후(江戶幕府)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오사카 성(大阪城) 인근에 잔존하고 있는 토요토미(豊臣) 가문과 신하들을 공격하고, 간사이 지방의 한슈들을 관리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토카이도(東海道)의 요지인 나고야에 성을 짓게 된다. 그는 1610년∼1614년에 오다 노부나가 가문의 발흥지인 이곳에 거대한 성을 건축하여, 자기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성을 쌓은 것은 각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성축조의 공사를 맡김으로써 막대한 물자를 소진시켜서 도쿠가와 가문에 반항할 경제력을 없애버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지금도 나고야성의 성벽을 쌓은 석재에는 사각형이나 동그라미 모양으로 다양하게 새겨진 각 지방 성주들의 코쿠몬(刻紋)이 남아 있다. 이 코쿠몬은 다이묘들이 자신의 일꾼들이 가져온 것은 다른 다이묘들의 것과 섞이지 않도록 한 특별한 표시이지만, 각 다이묘들이 파견한 일꾼들의 실적을 구분하는 데에도 쓰였다.
이 성의 해자를 만들 때에는 지금 메이조(名城) 공원이 있는 부근이 커다란 호수였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해자에 물을 공급하기가 용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나고야성의 성벽과 건축물들은 당대 일본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서 만든 성이었다. 1610년에 이 성을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어, 1612년에 텐슈가쿠(天守閣)가 완성되었고, 나머지 건물들은 1614년까지 완성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아홉 번 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德川義直)를 나고야성의 성주로 봉하면서, 나고야성을 한슈(藩主)의 거대한 성으로 발전시킨다. 그 이후 나고야성은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없어지는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까지 약 250년 동안 도쿠가와 3대 가문의 하나인 오와리(尾張) 도쿠가와 가문의 중심 성으로서 지위를 누렸다. '오와리의 나고야는 성으로 견딘다'라고 전해지는 것과 같이 나고야 성은 나고야에 자리잡은 명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미국과의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5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이 나고야 성의 대부분은 불에 탔다. 그 당시 폭격에서 살아남은 것은 문 3개, 망루 3개, 그리고 성벽과 벽화였는데, 이들은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나고옥(那古屋)이라고도 불리는 나고야성은 현재에도 오사카성(大阪城), 구야모토성(熊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으로 꼽히고 있다. 나고야 성은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에 그 크기나 구조면에서 떨어지지만, 성 주변 공원의 2천여 그루 벚나무가 풍기는 아늑한 분위기는 일품이다.
나고야성은 이중의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다. 성 내부의 해자는 물이 차 있지 않고 풀이 듬성듬성 자라며 사슴까지 어슬렁거리고 있다. 성 외부의 커다란 해자에는 물이 가득 차 있다. 이 외부 해자를 일본에서는 소토보리(外堀)라고 하는데, 적의 침입시 성을 지키기 위해 성 주변의 땅을 파고 물을 채워놓은 곳이다.
이 외부 해자 위의 다리를 건너는데, 불곰같이 생긴 일본의 스모 선수를 만났다. 그의 덩치로 보아서는 일본 스모계의 상당한 거물일 것으로 보인다. 한 초등학생쯤 되는 남자애가 이 스모 선수에게 인사를 건네자, 이 선수도 손을 들어 밝은 웃음을 건넨다. 그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해맑은 웃음이 왠지 신선하다.
메이지유신 전에는 이 나고야성 내외에 저 스모 선수가 입고 있는 기모노를 입은 사무라이들이 넘쳐났다. 나고야가 속한 아이치현은 과거에 오와리국(尾張國)으로 불렸었다. 그리고 이 오와리에서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태어났다. 그들은 이 곳에서 일어나서 일본의 전 국토를 통일하면서, 이 나고야성을 빈번히 왕래했을 것이다.
해자를 건너자 커다란 정문(正門)이 나온다. 거대한 쇠판을 붙여 적의 공격을 막는 이 커다란 문은 웬일인지 문의 기둥들이 나무결을 그린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나라는 시멘트로 만든 서울 광화문의 재복원을 검토하고 있는데,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일본에서 왜 이런 몰상식한 복원을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건너편 언덕 위의 거대한 큰 텐슈가쿠(大天守閣)와 작은 텐슈가쿠(小天守閣)가 내 눈앞에 들어왔다. 그리고 텐슈가쿠 옆의 평지에는 땅 위에 튀어나와 있는 석재들이 보인다. 이 석재들은 폭격으로 소실된 혼마루고텐(本丸御殿)의 주춧돌이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부분은 텐슈가쿠와 정문이고, 한슈가 정무를 보고 숙소로 사용하던 혼마루고텐은 현재 복원 작업 중이다.
회색 지붕의 작은 텐슈가쿠는 2층 건물로 큰 텐슈가쿠과는 달리 아담하고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작은 텐슈가쿠로 들어간 후 교대(橋臺)라는 통로를 지나면 큰 텐슈가쿠으로 이어진다. 이 통로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텐슈가쿠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나고야성의 이 텐슈가쿠는 과거와 같이 내부를 목재로 짓지 않고,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이다. 나고야 성은 재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세월의 이끼는 느껴지지 않는다.
원래 5층이었던 나고야성의 큰 텐슈가쿠는 1959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재건되었다. 이 텐슈가쿠는 흰 벽의 성채와 그 위에 초록색 녹이 슨 청동기와의 조화가 일품이다. 큰 텐슈가쿠는 망루 겸 창고의 역할을 하는데, 성안의 건물 중 가장 높고 크며 위압적이기 때문에 한슈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 | ▲ 나고야성 큰 텐슈가쿠 | | ⓒ2004 노시경 | |
큰 텐슈가쿠의 내부에 들어서자 성안에 어울리지 않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건물 가운데에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텐슈가쿠의 5층까지 올라가면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리고 전망대의 아주 조그마한 창문 밖으로는 나고야성 동서남북의 광활한 시가지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5층부터 1층까지 주제별로 만들어진 전시실이 연결되는데, 이 전시실에는 전쟁 중 화재로부터 구해낸 도쿠가와 가문의 유물 등 나고야 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재 1047점이 전시되어 있다.
나고야성 5층은 나고야성의 역사와 샤치호코(金魚虎)의 내력, 4층은 이시가키(石垣)의 축성 과정, 성문, 혼마루(本丸), 텐슈가쿠(天守閣)에 대한 설명, 3층은 성 내외의 서민 생활상, 2층은 혼마루고텐(本丸御殿) 전시실, 사진자료, 축소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의 전시물과 특히 다른 점은 이곳의 한슈들이 사용하던 예리한 일본도와 무구들이다.
나고야성 텐슈가쿠 외부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텐슈카구 내부에서는 전혀 옛 성의 운치를 찾을 수가 없다. 한국인인 내가 아쉬워할 것까지는 없지만, 텐슈가쿠를 왜 기존의 모습대로 똑같이 복원하지 않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 안에 전시실까지 만들었지는 이해할 수 없다.
문화유산의 복원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정석이고, 일본인들의 꼼꼼함을 보여주는 전시실은 성 주변의 수많은 공터 중의 한곳에 자리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큰 텐슈가쿠 지붕의 용마루 양끝에 황금 샤치호코가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다. 높이 약 2.6m에 중량이 약 1200kg이나 되는 이 샤치호코는 나무로 모양을 만들어 그 나무 위에 얇은 동판과 아연판을 붙이고, 그 위에 다시 금판을 붙인 것이다. 금 사용량만도 암수 한 마리당 약 45kg이니, 모두 약 90kg이나 되는 금이 저 샤치호코에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금으로 된 샤치호코는 범고래라고도 하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꼬리를 곧추 세워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 샤치호코의 얼굴은 호랑이 같고, 몸은 물고기이며,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다.
이 샤치호코는 화재를 예방한다고 믿어지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년∼1573년)에 일본 성(城)의 기본적인 형태가 완성되면서 화재를 예방하고 지붕을 장식하기 위해 용마루에 장식물을 얹어놓기 시작했는데, 이 샤치호코는 생김새가 아주 독특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나고야성을 만들 당시에 가장 많은 재물을 투입하여 만든 이 샤치호코는 당시 일본 한슈의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다가 이 샤치호코는 나고야의 상징이 되었고, 현재는 번쩍이는 효과로 인해 장사가 잘 되기를 빌거나 좋은 일을 불러오기 위한 부적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고야 시내의 모든 기념품 가게에서는 이 샤치호코 장식품이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다.
이 샤치호코는 내가 나고야성을 떠나면서 뒤돌아볼 때에도 그 높은 텐슈가쿠의 하늘 위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사실, 나고야성의 전시실을 둘러보기 전에는 저 샤치호코의 존재도 몰랐고 그 의미도 전혀 몰랐었다. 그러나 샤치호코의 유래를 알고 난 뒤에는 그 샤치호코를 유심히 뜯어보게 된다. 그래서 여행에서의 앎의 즐거움은 열심히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리라.
상징 속의 동물, 샤치호코는 과거에 피로 물들었던 이 일본의 전장에서 포근한 상상력을 키워주는 상징물이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이러한 동물들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저 높은 곳에 샤치호코를 끌고 갔을 과거의 일꾼들은 저 텐슈가쿠의 지붕 위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텐슈가쿠의 높이는 당시에는 아무나 근접할 수 없는 높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했을까? 그 장인들은 무를 숭상하는 사무라이 문화 속에서 힘든 세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샤치호코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르겠다.
교토로 가는 기차를 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고야성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다. 나고야역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나고야 여행 일정 중에는 이 나고야성 외에도 도쿠가와 비주쓰칸(德川美術館)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나고야성을 둘러보고 나오니 벌써 돌아갈 시간이다.
나고야를 생각할 때면 그 미술관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 여행지를 모두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여행의 한계이자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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