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疫病)과 장마,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불쾌지수 높은 꿀꿀한 일상(日常)이 반복된다.
과학을 믿고, 위정자들의 정책을 따르며 그저 버티는 길밖에 없다.
그러니 “안죽을 만치 숨만 쉬고 있을란다.”
예전 발산재에서 준봉산~만수산~보잠산~경남수목원<☞ 산행기>을 산행한 적이 있다.
그 때 코스가 일부 겹치는 국제신문 가이드를 접했으나 난이도가 있어 발을 빼고 있다가 이번에 그 초입을 가볍게 다녀왔다.
컨디션에 따라 선동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무더위속 잡목 헤치기에 지쳐 그만 남성치에서 끊었다.
선동치는 예전 적석산과 깃대봉을 하면서 거쳐간 곳이기는 하지만.
용암산(龍岩山 400.6m)은 산이 용처럼 생겼다거나, 또는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해서 생긴 이름일 것.
아니나 다를까, 정상부위에 산재한 크고작은 바위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각양각색의 형체를 띠고 있었다.
산하가 내려다 보이는 바위 정수리에 앉으면 ‘龍의 氣’가 느껴진다.
용암산부터는 낙남정맥의 잔등에 올라타게 된다.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부터 김해 분성산(또는 녹산 봉화산)까지 이어지는 230여km의 산줄기다.
그 옆 삼각점이 있는 △399.8m봉은 국제신문의 자료를 따라 ‘작은용암산’이라 명명하였다.
미암산(美岩山 358.5m)이란 이름은 바위가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어딘가에서 그러한 바위가 있을 줄 알았으나 잡목더미 두루뭉술한 육산이었다.
마리봉(299m)의 ‘마리’는 설마 외국 이름 ‘Mary’나 ‘Marie’는 아닐 터.
자료를 확인하니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摩尼山)이 ‘마리산(摩利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마니(摩尼)’란 용의 턱 아래나 용왕의 뇌에서 나왔다는 여의보주(如意寶珠)로 보물구슬을 일컫는다.
‘마리’란 고어(古語)로 ‘머리’를 뜻하기도 하고, 또 용암산의 턱밑 여의주일 수도 있겠으나 잡목숲속 감춰진 봉우리일 뿐이었다.
마리봉(摩利峰)의 한자이름은 마니산의 옛이름인 마리산(摩利山)에서 따왔다.
옥녀봉(玉女峰 337.2m)은 지형도엔 보이지 않으나 국제신문의 자료를 따랐다.
전국에 산재한 같은 이름의 산처럼 옥녀(玉女)의 전설이 이름의 기저에 깔려 있으리라.
궤적.
큰 지도.
자세히.
고도표.
<산길샘>
<산길샘>의 통계. 약 7km에 4시간가량 걸렸으며, 도중에 국지성 소나기를 만나 조금 지체하였다.
<참고 개념도> 국제신문.이 코스는 10km가 훨씬 넘는 데다 오르내림이 많아 난이도가 높은 편.
미리 준비한 표지기.
네비엔 '청광보건진료소(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107-20)'를 입력하여 농협창고 앞 널따란 곳에 차를 댔다.
농협창고 맞은 편엔 커다란 고목 쉼터가 있고...
산길 입구는 박진사고택으로 통하는 골목.
박진사고택(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92호)은 조선후기의 밀양 박씨 전통가옥으로 일제강점기에 다시 고쳐 지었다.
효자 박효근이 이 집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들 박한회와 손자가 진사를 지냈다는 안내문.
골목을 따라 예쁜 담장이 이어지고 있다.
대문은 굳게 잠겨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고,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대문에는 효자정려 현판(懸板)이 붙어 있다.
전통가옥이라지만 담장이 높아 마치 철옹성을 두른 듯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산자락 입구에 우물이 있고, 우물을 지나 화물트럭 10m 위에 산길이 숨어있다.
유리문으로 보호되고 있는 우물.
산길은 배수로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누가 이곳을 산길이라고 하겠는가?
능선으로 붙기 위하여 이리저리 맴돌다가 바로 밑 정자나무 아래에서 놀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길을 물었다.
"할머니, 산에 갈려면 어데로 가야되는데예?"
"바로 위 돌다리를 건너가이소."
"돌다리라~ 아항, 이기 돌다린갑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배수로에 걸쳐있는 이 넙적돌을 발견한 것.
입구도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오면 대나무밭.
국제신문의 시그널이 달려 등로가 확실함을 알려준다.
한동안 지루하고 갑갑한 오름길을 오르자 뜻밖의 전망바위를 만난다.
저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가 필봉산(?). "날파리가 앵앵거리더니 카메라 렌즈에 끼이고 말았땅."
더 우측 가까이 중앙에 수리봉이고, 우측 날파리가 올라선 봉우리가 선유산(?), 수리봉 좌측이 소곡산(?)인 듯하다.
아니면 말고다.
구불구불 오르는 잘록한 나동고개. 좌측으로 보잠산이고 우측 능선이 만수산 방향으로 예전 만수산~보잠산 코스다.
들판을 가로질러 수리봉(中)과 선유산(右), 소곡산(左).
능선 아래로 내가 올라온 청광리의 박진사고택과 정자가 보인다.
이후 산길은 더 거칠어 무조건 마루금을 선택, 희미한 산길을 반복하다 마리봉에 닿았다.
목이 말라 아무데고 퍼질고 앉았다. 초코파이를 안주겸 간식꺼리로 준비하지만 늘 배낭에 넣고만 다닌다.
묘지를 지나자...
이름도 예쁜 미암산.
다시 뭉툭뭉툭 큰 퇴적암을 비켜돌아...
정수리에 올라서니...
고성군에서 세운 용암산 표지판이 있다. 낙남정맥 반듯한 산줄기에 올라섰다는 의미이니 카메라를 바위에 올려놓고 인증.
표지기를 걸고, 다시 타는 목마름을 해소한 뒤...
전망바위에 올라섰다. 龍의 등에 올라 탔으니 신령한 氣만 받으면 될 것.
조금 이동하자 삼각점(국립건설연구소 소삼각점)이 있는 399.8m봉. 국제신문을 따라 '작은 용암산'이라 명명하였다.
삼각점 안내판.
대구 산꾼이 오래전 매달아 놓은 정상목은 위치가 잘못 되었고, 나는 그 옆에 작은 용암산이란 표지기를 걸었다.
산길은 정맥꾼들의 발길로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어지는 널따란 길은 야산 버전이라 풀숲이 우거졌고...
묘지를 지나자...
옥녀봉.
표지기를 건 뒤...
한적한 산길에서...
"이기 뭐꼬?"진시황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불노초(不老草) 영지(靈芝)를 발견하다니...
아까 용의 기를 받을 때 알아봤지 않은가?
"고놈들, 참 예쁘게 생겼네"
2차선 아스팔트도로에 내려섰더니...
고갯마루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
바로 위 남성치엔 주차장이 있다.
남성치에서 바라보는 내려오는 산길.
아스팔트도로는 선동마을 방향. 선동마을엔 연리지가 있다고.
내가 내려갈 나동마을 방향.
길가의 나팔꽃.
임도 우측 잡목에 가린 조그만 저수지는 나동저수지.
임도를 터덜터덜 걸어...
선동저수지 위의 엘림농원을 지나고...
임도를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선동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선동저수지 뚝방을 건너며...
잔잔한 은빛 수면을 바라본다.
뚝방 아래로 보이는 벼논과 농로.
그리고 나리꽃.
선동저수지 뚝방입구.
내려오다 돌아보는 선동저수지.
나동마을에 들어서자 소나기가 퍼붙는다.
비를 피하는 마을 입구에서 고사 일보직전의 노거수 한 그루가 수술자국을 한 채 모진 생을 이어가고 있다.
정자나무는 수령 약 700년으로서 불에 탔으나 개천쪽으로 뻗은 가지 하나가 겨우 살아있어 커다란 분재같다.
그 옆엔 '동청(洞廳)과 정자나무'라는 안내판이 있다.
동청이란 한글을 가르치고 회의도 하는 공회당식 자그마한 집으로 지금은 헐려 터만 남아 공청터로 불린다는 것.
나동마을회관을 지나자 커다란 주차장이 있고, 안내판과 정자도 있다.
무지돌이 마을은 산촌생태마을로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되었다.
정자에서 비를 피하다 카메라를 배낭에 넣은 뒤 비를 맞고 걸었다.
그러다가 길가의 비석을 보고 카메라를 끄집어 냈지만 밀성 박씨만 알 수 있을 뿐.
다시 논 한가운데 길가에 수령 500년 된 커다란 정자나무.
나동교를 건너며 개천을 내려다본다.
나동교 옆에 비각이 있다.
'고성 청광리 창효각(固城 淸光里 彰孝閣)'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5호다.
죽포공 박영회(朴瑛會 1827-1886)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고종 31년,1894) 정려각으로 붉은 색 단청문양이 선명하다.
박진사고가의 아버지 박효근(朴孝根)에 이어 2대에 걸친 효행이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안내판.
카메라를 배낭에 넣은 채 비를 맞고 터벅터벅 내려오다 담장에 곱게 핀 능소화를 위하여 다시 카메라를 끄집어 낸다.
박진사 고가 앞의 정자나무 쉼터에 닿았다.
그 옆 청광보건진료소.
아내에게 龍이 점지한 영지(靈芝)를 풀어 놓고 무용담을 늘어 놓았더니 표정이 영 시큰둥하다.
영지를 처음 보았으니 귀한 줄이나 알려구?
거기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된다고 이리저리 전화질이다.
그렇게 선생들한테 교육을 받은 뒤에야 인터넷을 검색하고 난리부루스다.
깨끗이 씻은 뒤 쪘더니 귀체(貴體)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