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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들이 글쓰기에 대한 은유로 보일 때가 있다.
길을 잃은 개나 녹슨 자전거, 눈앞에서 놓쳐버린 버스나 쉽사리 꺼지지 않는 담배꽁초, 시들어버린 부추 줄기와 망쳐버린 크림 스파게티 같은 것을 바라볼 때. 특히나 아무리 청소를 해도 쌓이는 먼지처럼 메일함을 차지하고 있는 스팸메일의 ‘그녀를 만족시키고 싶다면’ 같은 제목을 볼 때면, 나는 어김없이 글쓰기를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내 대학 동기는 소설을 쓰려면 여성들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여성이나 심금은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이고 그런 단어들 앞에서 나는 고작해야 심해에 살고 있다는 어떤 생명들의 투명하고 유연한 몸체나 그들 스스로 내뿜는 신비한 빛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뿐인데, 물론 나는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하고 그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심해 다큐멘터리를 몇 번 보았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글쓰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낯모르는 이들의 문장들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들 또한 글쓰기를 고민하며 그런 글들을 써내려갔겠지. 사소한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길을 잃은 개나 녹슨 자전거, 눈앞에서 놓쳐버린 버스나 쉽사리 꺼지지 않는 담배꽁초들을 보고 무언가 근사한 글을 떠올리거나, 적어도 어떤 '적절한' 느낌을 받을 거라는 사실. 자세한 과정이야 알 길이 없지만, 생생하게 펼쳐진 세계를 바라보며 ‘나의 글쓰기(=곧 나의 글못쓰기)’에 대한 영원처럼 지루한 생각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길을 잃은 개에 대한 글은 좋은 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길을 잃은 개를 보고 집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는 저 모습이 어쩌면 글을 쓰지 못하는 나와 같구나 하지만 저것도 저 나름대로의 견생 어쩌면 저들이야말로 견공계의 작가가 아닐까 저들의 단단한 동시에 말캉한 발바닥이 도시의 비열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새기는 것은 결국 하나의 소설 어쩌면 시 그런데 나는 글을 안 쓰고 무엇하고 있는지 내 신세가 저 개들만도 못하니 이번 생은 망했고 다음 생에는 그저 떠돌이 개로 태어나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거랑은 다를 거란 말이다.
이를테면 썩어가는 시체를 눈앞에 둔 루카스와 클라우스 형제의 예 :
내 형제가 말했다.
- 모두 다 죽은 건 아니야. 이것들은 살아 있어.
벌레들이 우글거렸다. 나는 그것들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났다.
내가 말했다.
-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내 형제가 자기 지팡이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 생각하지 마. 저길 바라보라구!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어?
나는 눈을 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 아니, 결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 "
나의 경우 :
완벽하게 썩어버렸어. 마치 내 글 같이…. (물론 나도 결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을 거다. 그게 무엇이건, 나는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니까.)
내가 오늘 읽은 문장은 이런 문장이었다.
“죄송해요.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요.” 나는 말했다. 왜 그녀를 찾느냐고 물어봐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면 진실을 들려주었을 텐데.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엄마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고, 그런 사람을 찾으려는 희망을 아직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러는 동안에 다른 것도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그건 처음에 내가 찾던 것과 관련이 있지만 다르기도 하고 또 나와도 관련이 있다고.
이것은 미국의 젊은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가 쓴 문장이고, 그녀는 마찬가지로 미국의 젊은 소설가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부인이고, 나보다 겨우 몇 살이 많은 그들은 이미 몇 권의 책과 ‘천재 문학 부부’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글들을 쓰는 능력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사랑의 역사>이고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으며 민음사의 다른 책으로는 이 모 작가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라는 책이 있는데 크리스테바의 같은 제목의 책은 소설이 아니고 김정운기 씨가 리브로 반값 행사에서 주문한 책이 바로 그 책인데 며칠을 기다린 끝에 그가 받은 책은 니콜 크라우스의 책이었고 하지만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다만 결혼은 미친 짓이라니 반짝반짝 빛나게만 보이는 크라우스와 포어의 결혼 생활도 젖과 꿀로만 가득하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할 뿐인데 그것 또한 이 글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신의 불공평함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다음 기회에.
아무려나 나는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 한 대목을 읽으며 그제 받았던 합평의 한 대목을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긴데…” 나는 말했다. 왜 노숙자가 나왔느냐고 물어봐주었으니 하는 이야기다.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을 좀 더 생기 있게 만들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고, 특별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희망을 아직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러는 동안에 노숙자를 찾게 되었다는, 그건 처음에 내가 찾던 것과 관련이 있지만 다르기도 하고 또 나와도 관련이 있다는 그런 이야기.
그렇다고 내가 저 대목을 읽고 기뻐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건 내게 마치 부인이 도망가고 배탈까지 난 장님이 손가락을 딸 바늘을 찾으려고 방바닥을 더듬다가 빗을 찾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찾았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그걸 가지고 머리를 빗을 수는 있겠지만(그런데 장님도 머리를 빗을까?) 그게 바늘은 아니다. 언젠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고쟁이에 소중하게 빗을 찔러 넣고 다시 방바닥을 더듬어 본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익숙한 어둠뿐이다. 애초에, 도망간 마누라쟁이가 별로 많지도 않은 집안 살림을 싹 빼갔다면 어쩔 것인가? 낡은 빗과 낡고 눈 먼 그를 남겨둔 채. 그리고 그는 여전히 배가 아프다.
그제의 티타임도 ‘나의 글쓰기’에 대한 완벽한 은유였다. 아무래도 글쓰기는 잘 되지 않고, 회사까지 그만두고 글을 쓴답시고 앉아 있는 마당에 이대로라면 안 될 것 같아서 긴급회의를 소집한다. 내 머릿속의 비둘기… 가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퐁퐁, 방울 터지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심 Ego : 이대로는 아닌 거 같아. 글을 쓸 의욕도 없고, 에너지도 없잖아.
생각 1 : 밥 해먹고 설거지만 하기에도 시간이 없어. 스파게티도 지겹다.
생각 2 : 잠을 자도 자도 부족한 게 운동이라도 해야 할까봐.
생각 3 : 근데 통장잔고가 떨어지고 있는데….
생각 4 : 어제 엄마한테 전화 왔더라. 언제 취직 하냐는데.
생각 5 : 아 요즘 눈이 너무 침침해. 삐콤씨를 먹어야 해. 얼마나 하지?
생각 6 : 옷이 없어. 작년엔 뭐 입고 다녔는지 모르겠다니까.
중심 Ego : 이게 무슨 개로 태어날 소리냐. 열정은 어디 간 거니?
생각 7 : 열정?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애 얘기는 왜 꺼내?
(이것은 말장난을 담당하고 있는 persona의 의견일 뿐 금정연의 의견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
솔직히 이게 바로 나의 머릿속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반성하지 않는 인간이고 떳떳하게 이런 글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글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 두 칸뿐인 야외 간이 화장실 앞에서 설사를 참으며 선 줄처럼 길었던 그제의 티타임도 분명 도움이 되었듯이. (어떤 때는 단지 똥을 싸기 위해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나랑 성용이 형은 마을버스에서 만나 장이 예민해 요즘엔 바깥에만 나오면 배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고, 정작 화장실에 갈 수 있었던 건 저녁 식사를 먹고 난 전/후였다.) 머릿속에 떠돌고 있는 생각들을 미약하게나마 얼마간의 바이트로 구체화할 필요가 내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은 이것은 합평 후기일까, 하는 생각이고 하지만 시인이 쓰면 시가 되듯이 합평 받은 사람이 쓰면 합평 후기가 된다고 우기면 될 거 같고 그러니 별로 걱정은 안 되는데 다만 잘 시간이 넘었고 어느새 해가 떴다.
그러니까 다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후로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핑계를 찾는 특별한 능력을 계발해왔다. (그리고 여기서는 ‘키워왔다’ 보다는 ‘계발해왔다’가 더 재미있고 우습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글을 왜 못쓸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다 보면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는데, 그 온갖 것들은 모두 핑계이고 변명이기 때문이다. 썰물 때 드러난 바위섬에서 따개비를 따듯이 그냥 툭, 하고 가져와서 담수에 몇 번 헹궈주기만 하면 끝, 핑계 완성이다. 그리고 따개비를 아무리 많이 따도, 다음 물때에는 또다시 그만큼의 따개비가 생겨난다. 끝이 없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다시 몇 주가 더 지났다. 나는 매일 아침 내 방으로 들어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탁상공론식으로 영감이 떠올랐고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갖가지 아이디어로 머리가 가득 찼지만, 막상 자리에 앉아 종이에 뭔가를 쓰려고만 하면 생각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펜을 집어 드는 순간 말이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몇 가지 계획에 손을 댔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하나 그만두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째서 일을 해나갈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될 만한 구실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얼마 안 가서 곧 나는 갖가지 구실을 생각해 냈다. 결혼생활에 적응하는 문제, 아버지가 된 데 따르는 책임감, 새로운 작업실(너무 비좁아 보이는), 원고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야 글을 써온 오랜 습관, 소피의 육체, 갑작스런 횡재 - 그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되었다.
더 재미있는 건 바로 그 다음 부분이다.
한 달이 넘도록 내가 한 일이라고는 몇 권의 책에서 이런저런 구절들을 베낀 것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스피노자에서 뽑아 벽에 붙여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몇 권의 책에서 이런저런 구절들을 베끼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고,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가 아닌, 스스로에게.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짜증내는 것도 지겹고, 핑계를 찾고 변명하는 것도 지겹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배가 아프다. 졸리기도 하고…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번 합평에서 내가 얻은 교훈을 정리해야겠다. 그건 이런 내용이었다.
“네가 장님이고 배가 아파서 바늘을 찾아 온 방바닥을 더듬고 있는데 손에 무언가 잡혔고 그것이 빗이라면, 빗을 꼭 쥐고 기어서라도 화장실에 가 변기 위에 앉아라. 앉아서 머리라도 빗으면서 똥이라도 싸봐라. 힘이라도 줘라. 화장실도 못가겠으면 소리를 지르고.”
어쩐지 똥이 아니라 토가 나올 거 같긴 하지만, 별 수 있나. (김훈 톤으로) 아무 도리 없다.
* 원래 이 글은 존댓말로 쓸 작정이었으나 그러지 않기로 함. 내가 쓰는 글은, 그게 무엇이건 간에, 존댓말을 쓸 만큼 높거나 부러 존댓말을 써서 높여줄 만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니까. 다만 책을 파는 일을 할 때에는 종종 그러기도 했는데, 고객은 언제나 왕이기 때문. 그것은 진리. 그러니 우리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응?)
* 다음 카페에 내가 글을 쓰는 게 꺼려지는 이유는 나는 줄 바꿈을 하지 않는 타입이고, 카페 화면은 가로가 너무 길어서 읽기가 불편하기 때문. (30매 글방에다 올릴 걸 그랬나?)
* 오늘은 술 마신 거 아님. (그런데 이 술 냄새는 뭐지?) -끝-
첫댓글 그래도 열심히 쓰기 바람. 내 나이가 되면(곧 그렇게 되겠지)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짓이, 책 앞날개의 저자 나이를 확인하고 절망하는 거임.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 ㅠㅠ
26인치 모니터로 보는 형의 글이 가로가 너무 길어서 눈이 다 아프네요. ㅎㅎ 잘 읽었어요
모니터가 작아 다행이라는 ㅎ
응가가 마려워 배가 아픈 것과 체증으로 탈이 난 것은 다르니, 방에서 바늘을 찾다가 없으면 곧장 약국으로 기어가 부채가 그려진 활명수를 구하라.
머리를 빗으며 변기에 앉아 있어봐야 여전히 속은 뒤틀리고 어느 순간, 거시기 외핵이 튀어나왔구나, 라는 신체의 외적인 변양만 감지하게 될 것이다.
응가 배와 체기 배를 분별치 못하니 애꿎게 화장실 앞에서 줄만 서게 되는 거 아닌가! 아닌가? 아닌가....
오우, 두 번째 문단 김훈 빙의인데?
시들어버린 부추 줄기, 급기야 연약한 몸체에서 배어나오는 진물...
정연씨 덕분에 가끔은 냉장고 문을 열고 닫으면서도 게으른 나의 글쓰기에 대해 떠올려보겠군요.
반장님이랑 수수께끼같은 얘기만 하네 ㅎㅎ
은근 매력있은 것 같음^^
아웅 배아퍼 ㅜ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