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사촌 누나 케이 보스를 사랑했다. 사촌 누나는 고흐의 구애를 거절했고, 고흐의 아버지도 케이의 아버지도 모두 고흐를 비난했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엔 저주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면서 방에서 나가라고 했고 저주를 퍼부었어. … 게다가 아들의 사랑을 ‘부적절하고 천박하다’니 이게 옳은 처사냐고.”
고흐는 이후에 파리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노동자라고 하는’ 여자를 만난다. 여자의 노동은 성을 파는 것이었고 딸이 있었고 임신 중이었다. 케이를 향한 사랑이 좌절된 후 고흐가 택한 것은 사랑이었을까 반항이었을까, 둘 다였을까. “목회자들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지… 사랑을 구하고,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감정을 느낀다고 그게 죄란 말이야? 나는 사랑 없는 삶은 죄가 가득하고 부도덕하다고 생각해.”
고흐의 아버지는 개혁교회 목사였다. 고흐는 사랑을 책망하는 목사 아버지의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의 하나님과… 설교는… 그저 무의미한 잔소리일 뿐이지. 나도 미슐레, 발자크, 엘리엇을 읽는 것처럼 틈틈이 성경을 읽지만, 아버지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걸 보고, 아버지가 상투적으로 들먹이는 것들은 찾아볼 수조차 없어.”
고흐의 아버지는 1885년 3월 27일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장례식을 치른 고흐는 돌아가신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성경을 그렸다. 성경 옆 꺼진 촛불은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겠다. 촛불은 꺼졌지만, 성경은 펼쳐 있다.
성경 우측면 상단에 프랑스어로 ‘ISAIE’(이사야)라고 적혔고, 페이지 중간에 로마 숫자 ‘LIII’이 기재돼 있다. 이사야 53장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4-5절).
성경 앞에 놓인 책은 에밀 졸라가 쓴 ‘삶의 기쁨’이다. 한 가족에게 “배반당하고 모든 것을 다 잃”은 고아(孤兒) 파울린의 이야기라고 한다. 고흐는 표지가 상하고 모퉁이가 닳도록 이 책을 열독했다. 표지가 뿜는 빛이 책상보를 비추고 있는 건 살아있는 고흐 자신을 상징하겠다.
빛을 뿜은 노란 책이 덮여 있다. 고흐는 아버지를 목사로서 인정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강론을 다시 들어보겠다는 것일까. 아버지의 손때 묻은 성경을 펴고, 성경 앞에 자신이 열독하던 책을 두었다. 이사야가 찬양하는 고난받는 종에 관해 들으면서, 에밀 졸라가 소개하는 고아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