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가 인문학 분야에서 왜 이 꼴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누구도 복합적인 문제를 칼로 무 자르듯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왜 그렇게 되었는가의 그 원인을 따지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뿐만 아니라 사계의 권위자라 자칭타칭(自稱他稱) 하는 사람들 의견을 종합하면 우선 조선시대 성리학 폐해를 들고 다음 구라파 중세시대에나 통용될 근본주의 기독교 피해 때문에 이 나라가 좀먹고 피폐해지면서 폭 넓은 사고의 인문학 지평을 넓혀야 하는데도 꺼꾸로 그 발전될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국민이 믿고 따르는 정신세계의 인문학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공부를 하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라 성리학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사계의 권위자라 대접을 받는 것이 문제요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근본주의 기독교를 진실인양 믿고 따르는 것을 넘어 어떻게 생각하면 기적이 횡행하는 기막힌 나라가 된지가 오래 되었다. 이웃 일본이 한국을 낮춰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지몽매한 민족으로 깔보고 있는 데도 문제는 이를 어떻게든지 극복해서 일본에 당한 학문적 멸시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우리 인문학에는 아예 없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는 대단한 민족이며 지금은 재수가 없어 남북이 갈라져 있지만 주님의 힘과 영광으로 곧 통일이 되고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 나라가 될 것이다』 라는 선진국이며 우리의 영원한 우방 미국 근본주의 목사의 허황된 말을 믿는 어리석은 국민이 된지가 오래다. 무슨 놈의 이론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여름철 땡감나무 아래에 가서 입을 벌리면 감이 익어 떨어져 입으로 쏙 들어오는 허무맹랑한 얘기 즉 한반도 통일을 그에 비교하고 있다.
근데 문제는 이러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가 머리가 좋은 것을 비교하면서 동양의 이스라엘이라는 어느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보았을 때 너무 오버한 것 같았다. 1500년 떠돌이 민족과 감히 우릴 어떻게 비교하는지? 물론 그 조그만 나라가 아랍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지금도 아랍권에서는 맹주 노릇을 하니까 좋아 보이지만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다.
여기 보통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갑과 을의 대화내용을 음미하면서 우린 어떻게 앞날을 대처해 나갈까! 하는 생각을 공유해 보자.
등장 인물 갑: 임모
을: 남모 외 등
갑과 을은 일주일에 2번 이상 꼭 만나는 폭이고 만나면 당구 실력이 250점 같기 때문에 반드시 자웅을 겨루고 술이 소주 2병씩 같기 때문에 시합이 끝나면 반드시 한잔 한다. 각자 2병씩 먹어야 되니 둘이 대화가 없을 수 없고 또 부족하다 싶으면 특히 입가심 맥주 한잔은 기본이다. 여러 가지 시사상식, 정치, 역사, 철학, 여자, 옛날 회사 이야기 등 갖은 양념을 버무리듯이 자그마치 10년을 대화하고 있다. 대화는 주로 을이 갑에게 그 동안 겪으면서 의심했던 분야를 질문하고 갑은 대답을 하는 식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는데 을이 질문이 주로 많으나 갑이 을에게 질문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을이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어떻게 하다가 일본한테 먹혔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왜 이 꼴인지 도저히 억울해서 못살겠다는 억지가 반영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 그것도 무지몽매한 쪽발이한테 먹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뭐 이런 투다.
갑은 그 내용을 차근히 풀어가고 있다. 그럴 수 박에 없는 것이 전에도 또 앞으로 긴긴날을 서로 대화하는 장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을이 그 동안 몰랐던 사실에 대한 열정이라 하겠다. 70대 중반 나이에도 하나하나 알아 가면서 삶이 행복하다고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호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에 가면 옛날 영천 전차 종점에 독립문이 있다. 요새 서울에 가서 독립문을 지금은 못 보았고 어디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일본한테 독립한 것은 아닐 테고 도무지 모르겠다. 자세히 좀 설명해 달라』
『아! 그거 청나라한테서 독립한 겁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조선이 거듭나고 다시 말해서 독립국가가 된 것으로 즉 그때까지 조선은 청나라 속국이었습니다.』
『어! 청나라에서 독립한 것이라고?』
『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삼배구고(三拜九叩)의 예로서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어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청나라 속국이 되었습니다. 1894년 청일 전쟁의 발단은 다른 거 다 무시하고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청나라에서 독립시키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물론 한국을 먹기 위해서 재롱을 떤 것이지만 이들의 간악한 흉계를 모르는 젊은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박영효 서재필 등이 진짜인 줄 알고 그들한테 지원금을 받아 자랑스럽게 세운 것이 독립문입니다.』
『우리도 독립국가다! 얼마나 멋 있습니까?』
『그리고 사실 1897년 황제국가인 대한제국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당당한 독립국가다”라고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있지만 사실 이때부터 곡절이 많았지만 중국은 속으로 『아니다! 아직 내 꺼다』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은 독립을 인정하면서 공사 등을 주재시키면서 지구를 인체에 비유하면 세계지리상 겹간에 해당하는 엑기스 한국을 서로 먹으려고 으르렁거림을 알 수가 있습니다. 깊은 역사는 어렵고 사실 많이 잊어먹어 잘 모르니 큰 것만 대답합니다.』
『하! 근데 난 이 큰 거를 왜 몰랐을까? 옛날 역사 선생한테서 배울 땐 이런 깊은 내용이 없었는데! 그리고 독립문이 뭔지도 모르게 그냥 우물우물 넘어 왔는데!』
『그리고 그 자리가 옛날 청나라 사신을 모시는 모화관 입구 영은문에 바로 이 독립문을 세움으로써 당당한 제국의 길로 나감을 알 수가 있고 고종은 황제가 되면서 모든 제도를 황제국가에 걸맞게 고치면서 드디어 독립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놈은 바로 일본입니다. 이제 한국의 벼슬아치들만 구슬리면 병탄은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진행되자 배가 아픈 러시아가 가만히 놔 두겠습니까? 골치 아프게 아관파천이니 하는 어려운 얘기 말고 서로 먹겠다고 드디어 노일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일본이 이기니까 마음대로 한국을 먹을 수가 있는데 미국도 껄덕 거리니까 일본의 가쓰라 미국의 태프트라는 놈들이 서로 밀실에서 미국은 필리핀 먹고 일본은 한국 먹고 이렇게 진행된 내용이 한일합방입니다. 우리가 일본국가가 된 것이죠!』
『지금까지 설명 드린 거 무슨 불만 있습니까? 또 하나는 일본이 무지 몽매하다고 하셨는데 임진왜란 전에는 우리만 못해서 그렇게 불렀지만 왜란 때 성리학자를 우리한테서 잡아다가 그 학문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성리학이 뭔가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스스로 연구 공부해서 공자 적통을 찾아 학문을 계속 발전시켜 19세기 초에는 우리보다 뛰어난 인문학 분야의 학문을 완성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동북아세아에서 지금까지 150년을 제패한 일본의 정신적 학문적 백그라운드입니다.』
『우선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을 정리해서 일본이 치밀하게 우릴 어떻게 먹게 되었는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나라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정규군이 거의 없던 관군으로 이를 막지 못하자 청나라 즉 종주국에 이를 진압해 다라고 요청하고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고 이것이 청일 조약에 의거 한국에 군대를 보내지 않기로 된 것을 어겼다고 조선이 요청한 내용을 무시하고 일본은 군대를 파견한 김에 청군을 무자비하게 격퇴시키고 즉 작살을 내고 시모노세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나라는 구미열강 식민지에서 일본에까지 침략을 당하는 비참한 식민지 신세로 전락되면서 조선에서 손을 떼게 되는데 이는 대한제국으로 조선이 독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일본의 인문학에 따른 정한론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메이지 유신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메이지 유신 근본 개념 요약
사이고 다까모리의 정한론 배경
일본이 조선을 먹을 수 있는 묘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황제 복귀였고 이를 통해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그들이 내건 슬로건은 탈아입구로 근대화의 길로 박차를 가하면서 조선을 합리적 명분으로 차근차근 병탄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청과 러시아다. 반드시 전쟁을 통해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병탄한 결과 인구 약 1억의 세계 강국이 되어 제국을 실현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형세
1637년 1월 병자호란으로 인해서 나라의 종주국이 명에서 청나라로 바뀌면 우린 청나라 속국으로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행하며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는 시점에 우리의 조선은 꺼꾸로 쇄국의 길로 들어선다.
대한제국의 탄생
일본은 청일전쟁 노일전쟁 양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일 전쟁 후 노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 정말 많은 사연이 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등 그러면서 드디어 1897년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중국 천자에서 일본 천황으로
기가 막힌 논리지만 어차피 청나라 속국에서 일본 속국이 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의 양반 귀족을 통치권자로 인정하면서 대한제국을 을사늑약 한일합방이라는 명분하에 주변국의 거리낌 없이 병탄하게 된다. 그러므로 1910년 대한제국도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이고 다까모리가 왜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천황국가로 꺼꾸로 갔는가의 답이 나온 것이다.
이상을 논했을 때 사이고 다까모리의 일본 앞날 혜안을 엿볼 수가 있다. 조선만 병탄하면 그 기반으로 만주를 공짜로 먹고 이를 바탕으로 그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자원 보고인 동남아시아를 먹고 필립핀에서 미국을 내몰고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미국과 일전을 겨뤄 이긴다면 독일과 세계를 반반 나눠 통치하면서 자신들 민족이 영원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의 일번이 조선의 병탄인 것이다. 인구, 자원, 지정학적 요충지, 식량 배급기지 등 모든 요소가 조선 병탄 그 자체가 대답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란 장기판 졸이네!』
『당근입니다. 결국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그것을 살펴 앞날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놈들이 아주 약아서 잘 알지 못하게 재롱을 떨었고 친일파들이 여기다 장단을 맞추니까 요새 거꾸로 이 친구들이 큰소리 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대한제국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조선은 고려에서 역성혁명 즉 왕가에서 이가로 바뀌어 나라를 개국한 것은 좋은데 ‘얼씨구나!’ 하고선 나라를 명나라에 바칩니다. 명나라 속국 즉 제후국이 되고 연호도 명나라 것을 그대로 쓰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만주는 명나라 통치권이 미치지 않던 시절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만 안하고 그대로 만주를 꿀꺽할 수 있었던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어느 역사책에는 명이 철령에 도호부를 세우려 하자 겁이 나서 바쳤다고 하지만 이것도 다 일본놈들의 간계에 의한 역사기술입니다.』
『그러면 왜 멀쩡한 나라를 갖다 바쳤을까요? 사실 거기에는 성리학을 숭배하는 신료(臣僚)들이 몽고족인 원나라에 중국이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 잘못된 것으로 한족인 명이 원나라를 쫓아 내고 나라를 다시 세우니까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주의자들이 이를 정통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자(주희)가 만든 송나라의 성리학 정통 맥이 원나라로 인해 끊어지게 된 것을 한족인 명이 정통의 맥을 잇게 되니 조선이란 나라 이름도 명의 허가를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중화를 받드는 재롱을 발현하고 있습니다. 그 성리학의 맥을 명이 이었으니 조선의 개국 이념이 성리학이니 명을 종주국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웃기는 것은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땅을 호령하는데 우리 사대부들은 이를 부정합니다. 정통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만주 오랑캐라고 부르는 청나라에 개기다가 병자호란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군신의 예로서 나라를 청나라에 바치고 있습니다』.
이때 웃기는 일이 참 많았는데
첫번째 명이 망가졌으니 성리학의 명맥이 조선에 이어져 스스로 우리를 소중화라 부르고 만주족인 청을 깔보고 있습니다.
두번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인데도 불구하고 중화 즉 명을 위해서 목숨이 다해도 청과 싸워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펴는 주전론자들을 보면 한마디로 이런 종자들이 어떻게 벼슬아치가 되었는지 창피해서 못살겠습니다. 주전론의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들이 잘한 일이라고 그 칭송하는 비문을 송파 삼전동에서 보았을 때 이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거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사람이 자기 주장이 확실한 사람들이라고 인정은 하겠구먼!』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 주전론의 명분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켜준 명나라의 은혜 갚기 위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데 있습니다. 승패가 확실한 전쟁에서 무슨 의리 하면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간 주전파들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인조가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봉해지는 칙서를 명에게 요구 이를 받으면 광해 대신 왕의 적통을 잇게 되는데 이 허가장이 명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왕 만들려고 재조지은 뭐 그렇게 재롱을 떤 것입니다.』
세번째 화전론이 우세해서 나라를 바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쌍령(지금 경기도 광주) 전투에서 아군 10만 여명이 섬멸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병사들이 충청 전라 경상 절도사들이 임금을 구하기 위해 모집한 병력으로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숫자만 믿고 청군에게 덤비다가 깨지는데 도망가다 서로 밟혀 죽는 자가 반이 넘었다고 합니다. 오합지졸은 군사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힘을 발휘하질 못합니다. 임진왜란 원균의 칠천량 전투, 쌍령전투, 625 현리 전투 이렇게 3대 패전 전투 기록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네번째 이중협이 쓴 <비어고>에서 “정묘·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간 이들이 물경 60만명이 넘는다”고 추정했습니다. 하기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부부까지 인질로 끌려간 형국이니!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은 “오랑캐의 포로가 된 조선 백성의 반 이상이 여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고 고발했습니다. 아이고! 남자의 나라에서 남자들이 한 짓거릴 보면 그 나라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다 잊어 먹고 맘대로 얘기하지만 정말 배운 사람들은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혹자는 그러더라!』
만주는 원래 우리 고구려 것이니까 그 동안 잘못된 것이니까 우리 민족끼리의 사건이니까 그리고 알고 보면 청나라도 우리 선조 후예니까--- 말이 말고서 말이 많으니—웃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ㅎㅎㅎㅎ 많이 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1500년을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이 옛날에 살았다던 자기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면서 제목을 영광의 탈출이라 명하고 있습니다. 미국 영국의 지원으로 그것이 가능했지만 세계 역사상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거 다 알면서 지나갈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식이면 만주 연해주 물론 우리 거죠! ㅎㅎ 그렇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모르니까 선생으로 모시지 않았나? 좀 설명 좀 부탁하자고!』
고리대금업이 지금은 금융업이라 해서 고급 직종이지만 무지 몽매했던 중세 구라파 기독교 시절 로마 교황은 가장 더러운 직업인 고리대금업으로 밥이나 먹고 살라고 이스라엘 떠돌이 한 테 가장 하찮은 직업을 영위하게 합니다. 이것도 아마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를 기화로 유대민족은 갖은 박대와 천시 속에서 부를 쌓기 시작합니다. 지독하게 구두쇠 노릇을 하면서 욕을 처먹으면서도 부의 끈을 놓지 않고 20세기엔 이들 돈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까지 됩니다. 예를 들어 2차대전 때 영국 독일 소련이 전쟁을 벌리는데 물어 봅시다. 맨입에 전쟁이 됩니까? 미국 영국이 전쟁 채권을 발행하는데 그것을 사주는 금융업자가 거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전쟁 채권을 사주는데 나중에 고향에 가게 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전쟁을 독일과 하는데 앞뒤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고 해서 탄생한 것이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문제는 독일 소련 역시 전쟁을 맨입에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근데 방식이 구두쇠들이 돈을 안 내놓으니까 골로 보내서 그 돈을 뺏어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많이 죽였죠! 독일이 한 350만 소련이 250만 정도 유대인을 학살 합니다. 소련은 전승국이니까 독일한테 덤터기 씌우고 자기들은 학살 안 한 것처럼 빠져서 독일이 60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나라는 왜 60만명이나 되는 조선인을 잡아 갔을까요? 그것도 되도록 잘사는 집을 골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몽탕 데려간 이유는 돈 받고 돌려 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후 광해는 왕권을 강화하지 않으면 즉 왕이 병권을 갖고 있지 못하면 제2의 임진왜란이 또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할 돈이 없었고 그 이유는 명나라가 참전한 대가로 조선이 가지고 있던 은을 몽탕 털어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광해는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되고 왕권이 강화되면 신료가 힘을 못쓰는 결론에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세 이후 조선에선 군대가 없었던 이유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대화 내용은 예를 든 것으로 을이 말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섯번째 재롱은 왕이 개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막힌 사정이다. 중종반정 이후 임금이 절대적으로 병권을 잡을 수 없었다. 이유는 병권을 임금이 가진다는 사실은 신료의 몰락을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전 권력을 신료가 다 가지고 있는데 왕이 뭘 할 수가 있느냐? 즉 어느 군주도 병권을 가질 수가 없는 현실에서 우리가 기대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 여기에 신료와 왕권의 평형을 이루면서 제국의 길로 들어 서려던 정조의 독살을 우리의 20세기를 일본에게 그냥 바쳤던 개 같은 사건으로 마감된 것이다. 아이고! 억울해라!
여섯번째 인조의 대국민 사과문을 감상해보자!
『내가 세상 돌아 가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평화롭던 강토가 갑자기 정묘 병자년의 큰 변란을 당했다--------------------- 오호! 금번 변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날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것은 내 죄다. 어찌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정도면 임금을 그만 두어야지 그래 우물우물 임금자리를 사과문으로 대체하며 재롱을 떠나? 아니 전에 이괄의 난에 서울을 떠나 도망갔던 왕이 그땐 별 것이 아니라고 사과문도 없으면서 호란온 국민의 마음이 자기를 떠날 것이 두려워서 사과문을 발표했는지 의문이지만 문제는 이런 어리석은 왕을 가지고 있는 신료(臣僚)로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만한 사과문이다. 정권을 잡은 파벌의 경우 허수아비 왕이 진정으로 지네들 손아귀에 있게 되었으니 이제 지네들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성이야 죽건 말건 자기네 패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라는 점점 구렁텅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하고 백번째를 꼽아도 모자라는 이런 궤변의 왕이 그대로 있어야만 되고 그냥 넘어가게 된 연유를 따져 본 후 일곱번째를 논해야 할 생각을 하니 그 연유가 너무 많아 아득하기만 하다. 거기다 임진왜란의 선조를 들먹이면 인조보다 더하면 더했지 하는 왕의 실체가 들어난다. 우린 이렇게 어리석은 500년을 보낸 업이 있었기에 일본한테 나라를 드디어 세번째 바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려까지가 독립국이었고 이조부터 명나라 청나라 제후국이었고 대한제국이 되어서야 드리어 독립국이었지만 겨우 8년만에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나라를 빼앗긴 일본 천황국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조선은 겨우 8년을 독립국 행세를 했지만 이것도 일본 재롱에 움직인 것이니까 우리 이조 5백년을 명 청 일본의 위성국에 불과한 초라한 민족이었다고 말해야만 한다.
할 수 없다. 일본 경성제대 역사학과 학자들의 식민사관만 하더라도 차라리 나을지 모르는 친일파 이완용의 조카인 이병도 및 그 후배 일당과 자기들만의 역사를 꽁꽁 묶고 그 무지막지한 경성제대 역사학과 출신들이 똘똘 뭉쳐 여기 출신이 아니면 대학교수가 될 수 없는 그리고 역사학자 모임에 식민사관 잘못을 암만 되뇌어 봐야 그 벽을 넘을 수가 없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내용 자체가 헛소리 보다 못한 것을 찾아야만 한다.
한심한 나라! 비참한 나라! 뿌리가 없는 나라! 그렇게 일본 역사학자들은 우릴 손가락질 즉 멸시하고 있다. 『환단고기』 한자도 검토하지 못하며 『단재』의 『조선 상고사』 한자 한줄을 『단재』가 저술한 이유 하나만으로 보태지 않는 우리 나라를 보면서 일본 역사학자가 쓴 식민사관의 한국역사만이 정사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우릴 보고 일본의 정한론 후예들은 지금도 상소문을 올리고 있다. “역사를 모르는 조선 같은 나라는 영원한 식민지 밖에 할 수 없는 나란데 지금 한국이 그렇다! 왜 침공하지 않는가?”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을 동원만 하면 금방 먹을 수 있는데---
일본 총리란 놈이 대답한다. 그들은 조금만 있으면 스스로 대한 제국처럼 나라를 가져다 바칠 것이다. 우리가 못 먹어서가 아니라 그러면 우선 중국이 가만 있겠느냐? 무슨 놈의 대답이 구한말 정세와 똑같이 진행되는 시나리오에 을이 얘기한 『장기판 졸』 신세라는 넋두리가 어쩌면 고렇게 잘 맞을까? 이런 데서 우리들은 궁합이 맞아 가고 있다.
『ㅎㅎㅎ 한잔 더! 어떠십니까? 허! 무슨 소리! 요새 나이가 드니까 자꾸 술이 줄고 있어! 그러면서 역시나 빈 잔을 내밀며 소주들 주고 받는 우리들이 차라리 역사학자 보다 거룩해 보인다! ㅎㅎ』
일제시대 때 연해주에 살던 우리 국민들 수가 대략 4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여기 땅은 우리 후고구려 즉 발해인이 살던 우리 땅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잊어버린 동간도 서간도 북간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게 우물우물 뺏긴 땅이다. 간단히 시술하면 신라가 3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후고구려라고 할 수 있는 발해의 북조와 신라라는 남조인 남북조 시대가 있었을 뿐이다. 이 만주가 식민사관에 의해서 북조가 없어지게 된 것을 지금도 찾지 않는 대한민국 역사학자 즉 정사를 고수한다는 서울대 역사학과 출신들의 역사학회다. 이거 바뀌면 지네들 밥벌이에 교수자리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놈들이 일제시대 때 저지른 간도를 서류로 중국에 돌려주고 있다. 왜? 조금 있으면 어차피 만주는 지네들 거니까! 그리고 만주공화국을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일본이 망하니까! 아무 이유 없이 간도가 그렇게 중국 공산정권에 넘어가고 말았다.
똑 같은 맥락으로 연해주 역시 마찬가지다. 연해주 개척은 고려 윤관 장군까지 소급되며 토문강에 9성을 쌓아 관리했다는 우리땅을 일본 역사학자 놈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일본을 위해 우물우물 기록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사실 발해는 시베리아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백두산 폭발로 멸망하면서 임자가 없는 땅으로 전락되고 그 후손명맥이 끊김으로써 영원히 잊어 버린 땅이 된 것이다. 스타린이 우리 한국인(거기서는 고려인이라 부른다)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에 강제 이주 시킨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민투표에 부칠 경우 잘못하면 인구가 많은 고려인 때문에 한국에 나라가 붙어 버릴까 봐 그런 무지막지한 짓거릴 한 것이다. 그때 연해주 인구분포를 보면 고려인 70% 러시아인 30%로 고려인의 2/3안 25만명 정도를 이주시켜 러시아인 보다 훨씬 적은 인원을 만들므로 투표를 해도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갈 염려를 원천봉쇄한 것을 일본놈 정치가 역사학자 및 그 후예와 친일파 역사학자들이 입도 뻥긋 안 했던 그 죄가 21세기에 고놈의 나라가 폭망이라는 업으로 되돌아 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 차라리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사실 김일성이다. 그는 625를 일으킨 것 말고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놈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나마 중국 조선 자치주만 하더라고 한국지도에 우리땅이었던 것을 망할 자식이 중공군 참전으로 자기 정권을 살려주자 그 보답으로 백두산 가운데에 금을 그어서 친구 모택동에게 바치고 있다. 여기서 간도 연해주라는 언어 자체가 몽탕 없어진 것이다. 두고 봐라! 아주 먼 훗날 통일이 되면 우리 후손들은 잊지 않고 제 땅을 반드시 찾아 그 동안의 모든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근데 이상한 것은 이런 것은 현재 하나님 기적이 아니면 절대로 풀 수가 없는 것인데 뻑 하면 통일 운운하는 근본주의 목사들! 왜 입도 뻥긋 하지 않을까? 못할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나란 벌써? ㅎㅎㅎ
우리가 이렇게 맥없이 남에게 먹히고 짓밟히고 씹히는 치욕의 역사는 어디서 연유가 된 것일까? 우린 그 근본을 찾아 차근차근 하나하나 고치고 풀어서 제자리에 갔다 놓아야 한다. 이런 말이 친일파라고 해도 좋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승배하고 있는 성리학을 버려라! 그리고 그 비조인 맹자를 버려라! 창피하지만 일본의 오규소라이를 다시 연구하고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교과서인 일본 제왕학을 연구해서 우리 것으로 재 창조해야만 한다. 일본의 정치제도에 있어 천황을 가지고 갔던 그들의 깊은 뜻을 이해 해야만 한다. 그들은 영국의 입헌 군주제도를 연구해서 정착시킨 것으로 2차대전 종료 후 전범의 최고인 천황이 살아난 것은 영국 덕분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전후 일본은 장기판 졸이었지만 그래도 궁은 살리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대영제국 왕같이----
지금도 시중에서 판매하는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보면 주자 집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 학문 수준에 나만 억울하다. 주자가 해설한 집주를 버려라! 그리고 맹자를 버려라! 대학 중용 모두 경이 될 수 없는 일반적 논문으로 가볍게 치부하자. 성리학으로 대한민국에서 대학교수하고 고문 번역 연구원 등으로 밥 먹고 사는 학자들 지금이라도 양심을 가지고 우리 다시 시작하자! 그 정통이 바로서고 우리 갈 길을 찾는다면 한국인의 저력으로 금방 일본을 정신적으로 대등하게 갈 수가 있다. 좀 안다는 사람들이 몽탕 일본 가서 다시 공부해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학문 수준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력이 없는 것을 눈 가리고 아웅! 하려니 밑천이 달려 성리학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하이고! 불쌍한 학자들 창피하지도 않나?』
이런 식으로 이야길 전개하다 보면 조선의 학문 모두를 버려야 한다라는 전제가 따르게 된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우선 그렇다! 특히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명나라 성리학의 맥을 이은 우리 조선의 대표격인 이황(퇴계)과 이이(율곡)를 버린다는 것 그리고 학문의 정통이 아닌 즉 저급한 수준의 학문이라 간주하고 젖히는 데서 즉 무시하는 데서 우리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도대체 그 유명하다는 주기론 주리론 이기론 사단칠정론 이통기국론 등 무지무지 많은 성리학 이론이 우리 삶과 나라 발전에 무슨 도움을 주었는지 기대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공부한 바로는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고 응용할 수도 없으며 이를 이용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학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내가 수준이 안된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나서서 무엇이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논리를 전개했으면 좋겠다. 이럴 때 정말 억울한 것이 아예 전공을 경영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옛날에 바꿨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정통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나름대로의 일가견은 있는가? 여러 가지 의문이 난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나는 논어의 인을 논한 것 중 아래 내용을 해석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아 보고자 한다.
논어
1417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覇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자공왈: "관중비인자여? 환공살공자규, 불능사, 우상지." 자왈: "관중상환공패제후, 일광천하, 민도우금수기사. 미관중, 오기피발좌임의! 개약필부필부지위량야, 자경어구독이막지지야?")
♣ 자공이 "관중은 어진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그를 따라 함께 죽지 못했고 또 환공을 보필하기도 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이 환공이 제후들을 제패하여 온 천하를 바로잡도록 보필해주어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은택을 입고 있다.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머리를 풀어서 늘어뜨리고 옷자락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통치하에 살고 있을 거야! 어찌 평범한 사람들이 조그만 신의를 지킨답시고 도랑 가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겠느냐?"
◈ 여기서는 천하를 바로 잡고(匡天下) ‘백성들이 혜택을 입는 것(民受其賜) 즉 사람과 나라를 큰 틀에서 생각하여 주는 것, 이렇게 하는 것이 인의 한 모습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적어도 ‘인’의 방향이 천하와 백성 이런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0630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자공왈: "여유박시어민이능제중, 하여? 가위인호?" 자왈: "하사어인, 필야성호! 요순기유병제! 부인자, 기욕립이립인, 기욕달이달인. 능근취비, 가위인지방야이.")
♣ 자공이 "널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민중을 어려움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 뿐이겠느냐? 틀림없이 성스럽다고 하겠다. 요 임금과 순 임금도 오히려 그렇게 하기는 힘들어했을 것이다. 인한 사람은 자신이 나서고 싶은 자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내세우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그곳에 보낸다. 가까운 것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공자는 백성들(民)에게 널리 베풀어서(施) 많은 사람(衆)을 구제하는(濟) 것 이것이 ‘인’의 구체적인 모습임을 시사한다. 단 이것은 『성스러운 일』 즉 『’인’ 이상의 ‘인’』이라고 할 만한 그런 것이라고 평가한다. (‘성聖’이라고 해서 인 아닌 것은 아니다. 방향이 같다) 그리고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 스스로 다다르기를 바라서 남을 다다르게 하는 것(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이 ‘인’(仁)임을 일러 준다. 가까운 데서 비유(譬)를 취할 수 있음이 또한 ‘인’의 비결(方)임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란 것은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논어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공자가 추구하는 인의 세계는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군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실제로 사(士)를 양성하기 위한 군자학을 계발한 것이다. 군자를 양성한다는 것 자체가 박시어민(博施於民)을 할 수 있는 초석이 되는 셈이다.
공자 사후에 그 군자학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 순자다. 순자는 치국평천하를 대변하는 치평학이 군자를 양성하는 지름길임을 알고 직하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도가 명가 음양가 법가 등 제 학문들을 받아들여 군자학을 완성시켜 나갔다. 문제는 이러한 정통의 군자학이 어느 날 주자에 의해 이단으로 그 본류에서 멀어진 관계로 말단 속유인 맹자가 대신 적통의 길을 걸으면서 주자의 성리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조선 학자들이 정통을 바로 잡지 못하고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결과 나라를 남에게 넘긴 기막힌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도 성리학을 신봉하는 우리 인문학의 치졸함에 그만 이를 간다. 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모든 지폐에 이들 영정이 도배가 되고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경우 이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고액 오만원권에 초상이 나오니 미쳐도 한참 미친 작태가 21세기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임당의 문학작품이래야 시조 몇 수가 전해질 따름인 것은 이 나라가 맹자의 오상에 미쳐 남존여비를 실천한 데 따른 연유가 있지만 이 덕분에 일본의 학자 정치가들이 이런 것 하나만 봐도 한국의 앞날이 뻔하다는 논리를 펴는 것을 보면 정말 이가 갈린다. 억울하다.
사임당 초상이 들어간 연유가 임진왜란 전에 이이가 10만 정병 양성을 건의했다는 데서 그 어머님이 맹모삼천과 같이 훌륭한 어머니라는 논리로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 권력이 신료에게 있었기 때문에 또 파벌 때문에 될 수도 없는 해본 소리 정도밖에 안 되는 상소였다. 그래서 오만원권에 초상이 올라갔을까? 아니다! 어떤 친일파 자식이 재롱 떤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을은 자기도 억울하다면서 이런 제안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 임금의 발명품이 왜 통용되지 못했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아! 그거 기득권 세력의 밥그릇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글이 통용되면 자기들만 아는 한자를 안 쓰게 되는데 혁명이 일어나는데 이거 할 신료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료에 밀려서 한자로 500년을 사용하던 조선이 고종 갑오경장 때 국한문 겸용을 주장하고 나왔으나 이것은 일본놈들이 그 필요성을 역설해서 고종이 실행한 것입니다. 일본놈들 얼마나 약은지! 이렇게 하면 대한제국을 먹은 후 한글을 이용해서 통치를 쉽게 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짓거릴 한 것입니다. 근데 웃기는 것은 그렇게 한 20년을 사용하다 보니까 한글의 우수성이 일본 가나를 훨씬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야단 났습니다. 원래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 제일인대 가나와 비교 자체가 무리입니다. 아이고! 큰일 났다 해서 내선일체라는 얌체 짓거리로 일본말 글만 쓰게 일본 놈들이 1930년대에 재롱을 떠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역사왜곡 중 가장 최고는 임진왜란입니다. 세계적으로 임진왜란 때 그 실력이 세계 5위 일본, 6위 조선 정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나라가 건곤일척 승부를 벌린 전쟁이 임진전쟁이라 이렇게 불리여야 합니다. 근데 겨우 난이다 라고 아주 가벼운 터치 정도로 격하시켜 별거 아닌 임진왜란이라 한 것을 보면서 이를 맞는다고 그냥 쓰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이 몽탕 친일파이기 때문입니다. 미친놈들 축구 한일전보다도 적게 표현한 고놈들의 농간에 우린 우리 자신이 굉장한 줄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근데 재미가 있는 것은 중국놈들은 무엇이라 역사에 기술했을까요? 한국이 속국이니 명일전쟁 대첩이라 했을까? 잘 모르겠다. ㅎㅎ
이상을 우선 발표하면서 일차 마감을 해 봅니다. 댓글로 좀 까주세요! 다음 편은 일제 잔재에 대한 군 경찰 관료 선생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을 밝혀볼까 합니다.
첫댓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내 수준에는 너무 어렵습니다.ㅎㅎ
나같은 보통사람은 이글을 한번읽어 보기도 힘든데 이런글을 쓴분은 대단하십니다.
임사범께서는 그간 기록해놓은 좋은글들을 모아 책을 출판해도 좋겠읍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올려주시기 부탁합니다.
역사 고찰에 의한 탁견해설을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자주 글 올려주시면 애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