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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31일
말씀: 롬9:27-28
제목: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을 수있어나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치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늘 느끼며 살아갈 수는 없으나 하나님을 찾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어떤 사고를 당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난다든지, 어떤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있다든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든지 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하나님 중심적인 삶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 된 삶을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단에 나와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람도 응답하시느냐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응답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반면에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며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가 왔을 때 제단에서 기도 하면, 응답을 깨닫고 받은 은혜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참 어렵게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안다면 동행하는 삶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독생자 그리스도를 내어주어 대신 우리를 자녀 삼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대속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어디에 계신다고 했습니까? 교회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연합되어 계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어찌 하나님과의 동행이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찾으면 찾으실 수 있도록 우리와 가까이에 계십니다.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하려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더듬어 찾다’는 뜻의 헬라어 ‘프셀라파오’인데 ‘만지다’, ‘느끼다’는 뜻으로 ‘소경이 무엇인가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으면 멀리 계시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하면, 우리가 더듬으면, 찾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계십니다. 우리가 부르면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계십니다. 이것은 설명보다 이론적인 부분보다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체험을 소유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니까 ‘아예’ 찾을 마음도 자세도 없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멀리 느끼느냐하면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의 삶을 볼아 보지 못할 만큼 멀리 계신하나님 내가 부르면 대답할 수 없을 만큼 내가 기도하면 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계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급하거나 위기에 놓였을 때 찾기는 찾는데 이 찾는 자세가 형식적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성경을 읽습니까? 그 말씀 속에서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의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성경책과 여러분의 얼굴과의 간격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을 부르고 찾을 때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왜 예배를 드립니까?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이론이 이론 적으로 들리십니까? 실제적으로 들리십니까? 여기서 동행의 차이가 분명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살아 있는 말씀을 체험하십니까?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은 이미 멀리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묵상할 때 창조적 세계관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십니다. 그 창조세계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길 기뻐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빠져들면 말씀이 그분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명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이신지를 느끼며 만져지는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영광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을 따라 그 분을 느끼며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성립됩니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은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교제와 교통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런 점진적인 체험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 싶은 갈망이 더욱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점점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분명히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 말씀도 들리지 않고, 느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예성이가(둘째 딸) 약대에 떨어졌을 때 일입니다. 온 가족은 P.T 공부를 시작할 때 쉽게 합격할 줄 알았습니다. 시험을 쳐놓고 저와 집사람은 꿈 이야기도하고, 기도했을 때, 감동 이야기도하고 그러면서 합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고 예상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예성이도 기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불합격 하고난 후 예성이가 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셨고 응답하셨다며, 그런데 시험에 떨어졌으니 그런 응답하신 하나님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현실보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이 너무 크셔서 내가 실망하거나 낙심할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부분보다 교리적인 것, 지식적인 것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우리는 앞으로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는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부분만 가지고는 신앙생활을 역동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 하나님나라의 그 거룩함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임재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우리는 언약궤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약궤의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궤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 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이토록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여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삶속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와 은혜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를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헬라어로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 즉,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 입니다. 즉 창조론적 관점에서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에서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 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의 집중은 성도들을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협력하여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오늘의 현실을 좀 봅시다. 설교시간을 통해서 광고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보적으로, 외교적으로 어려운 실정에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실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우리를 몰아가시는가? 하는 부분에서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의도와 뜻과 계획을 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느끼고, 느끼지 못하고 간에 오늘날 현실을 심각하게 여기는 자들을 통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할 때임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런 현실에 이 말씀이 해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떻게 변형되어 인간을 괴롭힐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바이러스도 살아야하니까 계속 변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BA5는 BA1,2보다 다른 형태로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인데요, 6차대유행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여러 부분에서 힘든 상황임을 틀림없습니다. 자영업자를 비롯해서 기저환자, 노약자 등은 위험에 이미 노출되어 있고, 50대부터 위험한 상황도 올 수 있는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3년 이상을 힘들게 하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하셨는가? 그러면서 하나님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죄 때문이다’라고 강력이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날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떠나 죄악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진단에 토를 달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은 지금도 펼쳐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파수꾼이 세워질 수밖에 없고 전 교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긍휼을 구해야할 때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교회는 점점 침체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교인들은 떠나고 교회는 비기 시작했습니다. 영적감각을 가지고 보면 우리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방향의 길로 전혀 우리가 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쩌면 불행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위기 때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을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며 하나님의 섭리가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땅이 쉼을 얻었고 소음이 줄어들었고, 더불어 진동도 아산화배출도 상당히 줄어들어 결국 창조세계가 정비되는 기회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사업과 언택트(untact)시대를 앞당겼고, 사차산업혁명과 드론 등의 계발이 본격화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이 코로나로 인해 나타난 장, 단점을 비교해서 무엇이 났느냐하는 평가는 쉬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100% 나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창조의 섭리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태풍은 바다의 공기를 주입시키는 계기가 되어 바다의 플랑크톤이 살아나게 되고 그럼으로 플랑크톤을 먹는 고기가 살아서 우리의 식탁이 풍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런 위기를 맞이하여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을 구하고 찾을 때라는 말씀을 하고 계심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런 은혜가 지금 부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많은 역사를 경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교회 같은 경우는 코로나로 말미암아 기도파수꾼을 세우기로 하고 이 일에 동참하는 심령들을 통해 많은 간증거리가 나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말미암아 ‘찾아가는 전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3년 이상 지금 코로나로 심리적 격리를 당하고 있고, 자영업자들이나 사업하시는 분들이나 의료진이나 할 것 없이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고 또 개인적으로 우울감, 불안, 긴장, 공허함 등에 시달리는 분들도 많은 이때에 우리가 찾아가는 전도를 실시하며 또 이들을 정보와 필요를 채어주기 위해 교회에서 기도파수꾼들과 교회가 적극적으로 필요를 채우는 일들을 감당해 나간다면 코로나로 말미암아 생명이 소생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롬9:27-29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열왕기상 19장에서의 인용된 말씀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이 아합과 이세벨의 통치하에서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백성들, 즉 바알우상에게 이스라엘이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에 일만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흩어지고 위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남은 자들을 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사사시대를 보면 더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 7년간 붙이셨습니다. 그 후 사사 기드온을 세워 미디안을 치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32,000명의 군대 중에 두려워 떠는 자 들 22,0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남은 10,000명 중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지 않고 손으로 물을 핥아 마시는 300명 군인들만 데리고 나가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정예대원을 이끌고 나가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지금이 300용사를 부르고 계시고 그 300용사를 통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일하게 계시리라 믿습니다. 여기서 300용사는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세상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마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잡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을 통해 일하시겠다는 뜻도 되지만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셔야합니다.
계속해서 강조해 오고 있는 사건들이지만,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아도 국가와 교회가 위기에 처하고 삶의 터가 흔들릴 때 몇몇의 부름을 통해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사건은 많습니다. 중세 암흑시대에 진리의 말씀을 들고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마틴루터, 그리고 칼빈과 존낙스의 개혁운동이 영적대각성의 확산이 되었고, 18세기 웨슬러의 부흥운동으로 영국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국이 말할 수 없이 타락하고 부패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한 집 건너 술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타락했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 옥스포드의 몇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영국을 뒤집어 놓는 영적 대각성운동과 부흥이 일어났고 이것을 기점으로 전 세계가 새롭게 영성운동의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외 웨일즈부흥운동을 비롯하여 하나님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코로나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깨닫는 부분도 참 많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가 습관적으로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필요했고 절실한 부분인지를 깨닫게 되면 코로나는 영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병 들었을 때 건강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아는 것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부모님의 그리움이 크듯이, 그리운 사람과 헤어졌을 때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듯이, 우리가 코로나가 장기화됨으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고 믿음의 수준을 알게 되었고, 또한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복된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창조적 관점에서 이 세상의 위기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 통해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당뇨병에 걸리면 참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는데요, 젊었을 때는 돈 모으느라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여행도 못하고 알들 살들 산다가 이제 살 만하고 무엇인가 맛있는 것 좀 먹으면서 살 형편이 되면 당뇨가 찾아오고 이제 해외여행도 다닐 만한 형편이 되면 건강이 좋지 못해서 여행도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뇨는 병이 아니라 당뇨로 인해 합병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당뇨병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김광원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당뇨와 비만이 찾아오는 것은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밥 먹는 습관, 운동의 습관, 잠자는 습관이 생활습관인데 이것을 고칠 수 있는 계기라는 것입니다. 당뇨가 신의 은총이 될 수 있는 구체적으로 4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 당뇨병을 고치려고 하다가 각종성인병 예방을 한다는 것입니다. 뇌졸중, 심장병, 고혈압, 비만증 등, 모두를 예방합니다. 두 번째로 조화로운 생활습관, 즉 생활습관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운동 및 과식, 수면조절 스트레스 조절 등입니다. 세 번째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지요. 당뇨환자들이 지키는 규칙을 지키면 조화로운 생활습관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생활습관은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 가장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규칙적인생활은 일의 극대화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가족 모두가 건강해 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탁에 올라온 음식이 전부 당뇨환자가 먹는 것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고 가족들이 그것을 먹으면 건강해 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당료의 축복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런 어려움은 우리가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느냐에 따라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에게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지언정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또 힘든 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마는 먼 훗날 이 코로나로 말미암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앙적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시 않으시고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와도 그 속에서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