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간직한 수로왕릉
김성문
김해시에 가면 약 2,000년 전의 수로왕릉이 있다. 사적(史蹟)으로 지정됐고 공식 명칭은 ‘김해 수로왕릉’이다. 이 능은 가락국 또는 가야국, 곧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이다. 왕릉의 높이는 약 6m이고 지름은 약 22m에 이르는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이다.
수로왕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여러 군데 나온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에,
“서기 199년에 수로왕이 붕어했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허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장사지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조에도 실려 있다.
“수로왕릉은 김해부의 서쪽 삼백 보 거리에 있다. 서기 199년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붕어하니 성 북쪽의 납릉에 장사지냈다. 이때 왕릉 옆에 편방(便房)이라는 건물을 세웠다고 하니 능 구역을 관리한 재실(齋室)인 듯하다.”
수로왕릉을 납릉(納陵) 또는 수릉(首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릉을 만들고 능을 관리하는 건물도 세운 것으로 보아 수로왕이 붕어한 후 계속 이곳에 잠들고 있다. 왕릉은 나름대로 수호됐고 제사도 지냈다.
신라 문무왕은 수로왕릉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수로왕을 사당에 모시도록 명한 것으로 보아 금관가야 멸망 후 제사를 빠뜨린 때도 있는 듯하다. 문무왕은 서기 661년에 교서를 내려 능 옆의 토지 30경인 약 14만 평으로서 봄, 가을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능소의 봉분도 크게 성토하고 신라 왕릉의 양식으로 새롭게 조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가 건국되자, 수로왕릉은 다시 변화를 맞이한다. 고려 성종은 신라 문무왕이 내린 토지 30경 중 반을 국가로 반납하게 했다. 이는 당시 지방 세력을 약화할 필요성이 있었던 고려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하지만, 고려 문종은 서기 1062년에 능을 새롭게 보수하고 비문을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산소 다듬는 작업을 했다. 그 당시 금관지주사 김양일(金良鎰)에게 명하여 능침을 수리하고 향사를 갖추게 하였으며, 김양일이 비문도 지었다.
조선 세종 때인 서기 1439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수로왕릉 수호를 위한 건의도 했다. 이선이 순찰하면서 수로왕의 능을 직접 살펴보니, 논바닥에 잠긴 능에는 길을 내어 짓밟기도 하고, 소와 말을 놓아먹이기도 한 것을 보고 관리해 줄 것을 건의했다. 세종은 사방으로 각각 30보인 약 56m 안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다.
조선 성종은 서기 1471년에 신라 시조와 수로왕, 고려 태조 이하 네 곳의 능실에 경작과 땔나무 채취를 금하도록 하였다. 왕릉 경내에는 회로당도 건축되었다. 회로당을 방문한 조선 초기 학자이자 문신인 김일손은 회로당기를 남겼다. 김일손은 사초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를 실은 사건으로 참수되었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이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조선 선조 때인 서기 1580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이 두 능을 수리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다. 이때 왕릉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수로왕릉도 임진왜란은 피하지 못했다.
『지봉유설』 「궁실부」 능묘 조에 따르면,
“임진왜란 후에 왜적이 김해의 수로왕릉을 팠다. 무덤 속이 무척 넓고 머리뼈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 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모두 매우 컸다. 널 옆에는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 모양이 산 사람과 같고, 나이는 20살쯤 되었다. 이것을 광 밖에 내다 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 아마 왕에게 순장된 자들일 것이다.”
지봉유설의 기록으로 보면, 왕릉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도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 수로왕 무덤이 파헤쳐진 소식을 들은 허경윤(許景胤)은 힘센 장사 100명을 뽑아 밤에 남원에서 김해로 달려가 유해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흙을 채워 봉분을 다시 쌓았다. 그 뒤 안찰사에게 건의하여 조정에서 제수를 내리고 나무를 심어 보호하게 했다.
조선 선조는 서기 1603년에 임금들의 능묘(陵墓)가 변란을 겪은 뒤이므로 각각 그 고을이 편의에 따라 훼손된 곳을 수리하고 땔감과 짐승 기르는 일을 금하라 하였다. 수로왕릉도 해당되었다.
조선 영조는 서기 1746년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의 사방 4백 보(步) 되는 곳에 경계 표석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 시대 1보는 약 1.87m이다. 서기 1749년에는 웅천현감 이광연(李光然)을 보내어 능침을 수리한 후 치제고유문(致祭告由文)을 올렸다. 임금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조가 치제고유문을 올렸다. 서기 1761년부터는 수로왕릉에 대한 제사가 국가적 차원의 제사로 인정되었다.
영조에 이어 정조도 수로왕릉의 수호를 권장하였다. 정조는 수로왕릉의 능비를 고쳐 세우는데 향과 축문(祝文)을 내려주기도 했다. 정조가 직접 지은 축문은 서기 1792년에 보냈다.
조선 고종 때 서기 1878년에 5위도총부 도총관인 허전(許傳)이 고종에게 수로왕릉에도 평양의 숭령전, 경주의 숭덕전처럼 전호(殿號)를 내려주고, 능을 지키는 관원을 설치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다. 당시 의정부의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이 허전의 상소를 고종에게 건의하여 숭선전(崇善殿)이란 사액(賜額)이 내려지고 옛 가락국의 왕릉과 종묘 제도가 재확립되었다. 서기 1884년에는 ‘가락국 태조릉 숭선전비’를 세웠다. 비문은 이조판서 허전(許傳)이 지었다.
오늘날 수로왕릉이 있는 위치는 김해시가지 북쪽 중앙이 되었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숭선전 외에 여러 건물이 있다. 왕릉 앞 잔디밭 좌우로 문인, 무인, 말, 양, 호랑이 등의 석조물이 능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능을 바라보며 약 500여 년 동안 가야의 살아 있는 역사를 있게 해 준 수로왕의 모습을 그려본다.
첫댓글 전설같은 수로왕의 능을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니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조 선생님! 관심가지시고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설 명절 잘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