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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간다라 불상
불좌상-페샤와르박물관
불좌상(설법)-샤리바하로르 출토-페샤와르박물관
고행상
마투라 불상
불입상-마투라박물관
굽타양식의 불상-434년이라는 명문이 있다. 1976년 마투라 주택조성지에서 발견-마투라박물관 소장
붓다의 두상-마투라 출토-마투라박물관 소장
불입상-5C-마투라 출토-마투라박물관
1. 간다라 불상을 접하면서 시작하는 몇가지 의문...
2. 영광의 불교 도래지와 간다라 미술의 관련성...
3. 고대 인도의 역사지리와 종교.
4. 대승불교와 간다라 지역의 의미.
5.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 그리고 굽타양식...
6. 내가 좋아하는 불상들과 용산 중앙박물관에서 본 간다라 미륵보살상.
7. 정리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완수씨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대원사/2002년~2007년>란 책을 통해 접하게 된
<간다라 불상>을 보며 내 눈으로 직접 불상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고? 멋있어 보였으니까...^^
근데,,, 오늘,,, 박물관에서,,, 나는 내 눈으로!!! 직접 그 불상을 보고 있다.
비록 입상 1구와 두상 몇 개의 불상을 보면서
간다라 불상에 대해 충분히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실체의 모습을 내가 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리바롤에서 출토되어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된 비슷한 모습의 불상들,
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되어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을 비롯해,
인도의 뉴델리/캘커타박물관, 프랑스, 일본, 미국, 영국 등
세계각지에 흩어진 간다라 불상들과 비교하기 쉽지 않지만,
직접 본 불상을 사진도판들과 비교해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은 <간다라 불상>에 대해 이것저것 정리해 보려 한다.
1. 간다라 불상을 접하면서 시작하는 몇가지 의문...
간다라 지역의 불상을 보면서 몇가지 의문들을 메모해 보았다.
1) 왜 그런 모습을 갖추었을까?
2) 왜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을까?
3) 간다라 지역과, 그 문명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지?
4) 간다라 지역의 불상이 인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지?
5) 그 지역의 불상은 우리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주었을까?
만만치 않은 질문들...
그러다보니 자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1) 내가 좋아하는 불상은 무엇이지?
2) 인도에서 불교는 어떤 의미일까?
3)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된 이유가 뭘까?
후후... 점점 깊어지는 의문들...
이에 대한 충실한 답을 나는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지식과 노력으로 그 방대한 내용에 접근하려 한다는 게 애초 무리이니까...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 불상들을 볼 기회가 있을 것이고,
오늘처럼 색시와 햇살이에게 간다라 불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사전조사 정도로 시작하고자 한다...
2. 영광의 불교 도래지와 간다라 미술의 관련성...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간다라 불상에 대한 지식의 출발은
고등학교 때의 교과서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헬레니즘의 영향>과 <고행하는 부처상> 같은 사실적 조각이라는 점...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와는 무관(!)한 정말 시험답안용 암기사항들이 전부였다.
<영광 불교 도래지 옆으로 돌아간 백석해안/07년... 빙빙 돌아가느라 석양을 놓쳤었다...ㅠㅠ 참 좋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곳...>
몇 년전 전남 영광의 불교 도래지라는 곳에 간적이 있다.
문살로 이름 있는 갑사와 석양이 좋다는 백석 해안도로를 찾는 길에 들렀던 곳...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지역이지만,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에 위치해 있는데,
간다라 미술관이 있고, 간다라 불상에 대한 복제 혹은 재현조각들이 조성되어 있다.
복제, 재현품에 대해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나로서는
(완벽하게 재현을 하든지, 창조를 위한 출발로서의 모방은 인정한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384년 최초로 백제지역에 불교를 전파했다는 의미 외에
왜 굳이 인도의 간다라풍으로 불상을 재현하고 탑파를 조성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었다.
<영광 불교도래지/07년... 고행상의 복제? 맛이 없다... 게다가 간다라 미술중 한 유형에 불과하다...>
물론 후한제국의 멸망이후, 위-촉-오로 분열되고 북위로 부분적으로 통일되었다가
5호16국-남북조시대, 소위 이민족들이 중국에 득세하던 시기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불교가
고구려를 통해, 중국화된 불교가 백제에 전승되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불교의 성지, 인도의 승려를 통해 직접 전래되었다는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이해를 하지만,
간다라지역의 불상들이 아무런 매개와 여과 없이 이곳에 조성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유일한 흔적이라면 불사(佛舍)에 시작을 의미하는 갑(甲)자가 들어간 불갑사란 명칭 외에
간다라 미술과 불상이 백제지역의 불교 전래와 부흥에 어떤 의미가 있지?
내가 영광이라는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의 지역을 특화시키려는 노력에 딴지를 거는 것은,
그 성의와 애정을 탓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실체에 대한 혼돈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영광 불갑사 대웅전/07년...>
사실, 삼국시대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고구려와 직접적으로 대치한 전진(前秦)의 영향이 크고,
중국의 불교는 한족(유교)과 거리가 먼 동이족 계열의 북방이민족에 의해 수용, 번성하였고,
특히 고구려의 승랑 같은 이를 통해 오히려 중국(수나라)의 불교는 정돈되고, 그 맥이 일본에 이어졌으며,
(고구려 불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으로 승랑의 <삼론종>은 쇼토쿠태자까지 이어진다)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상은 뚝섬에서 출토된 선정인류(중앙박물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불교든 어떠한 사상이든 그 전래는 사람, 교리와 격식(경전), 그리고 그에 따른 상징물을 포함한다.
백제로의 불교 전파도 이 내용과 수순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가 만약 인도의 불교를 전파했다면
4세기후반, 5세기 초 간다라와 미투라 양식이 통합된 굽타양식의 불상이 직수입되어야 한다.
육계와 나발이 분명하고, 삼도에 귓불도 늘어지고, 미투라식 투박의에 간다라식 통견의 불상형태가.
그러나 이시기 백제를 포함해 한반도, 심지어 중국 어디에도 그러한 양식의 불상이 조성된 바가 없다.
<경주 남산 불곡 선정불좌상 /97년... 흔히 감실부처라 불리는데, 최완수씨는 운강,용문석굴의 불상과 비교하면서, 포복식불의와 포수좌를 근거로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얼굴은 백제식이라 설명하고... 개인적으로는 훨씬 앞선 시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왜냐면 뚝섬출토 불상이 5세기초이고, 6세기 후반이며 상당한 수준의 반가사유상이 신라인의 힘으로 직접 조성된다고 그 자신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인의 얼굴에 백제인의 손길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김씨 왕들이 본격적으로 세습이 시작되던 5세기초엽에 이미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에 들어왔고, 5세기 후반이면 신라왕의 칭호는 불교식으로 바뀌게 된다는 점에서 이 감실부처가 조성된 시기는 늦어도 5세기 후반, 6세기 초를 넘기지 않았을까 생각을...^^>
오히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불상은 인도처럼 시무외인 불상이 아니라 <선정인> 형식이다.
이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불교의 발전과정이 중국 등의 또 다른 문명에 적응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석가모니 사후 600년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불상은 대승불교의 정착과 궤를 같이 한다.
<두려워 마라!>는 의미의 시무외인으로 시작한 불상조성은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있지만,
4세기를 전후한 중국이나 한국의 수준은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와 국가적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이제야 중국풍의 불상들이 중국인, 황인종의 모습으로 조성되기 시작하던 때에 불과하다.
불교가 3세기 전기(후한의 멸망) 중국에 전파되면서 처음으로 조성된 양식은 선정인의 모습이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불상의 형태도 뚝섬 출토 불상과 경주 남산 불곡처럼 선정인 양식으로,
선정인(禪定印)은 불교의 근본적 이해를 기초로 조성되었다기 보다는 개인적 호신불의 수요와
예배의 대상이라는 의미에 한정된, 중국(3세기)과 한국(5세기초) 초기 불상의 시원 양식이라 생각된다.
<예산 사면석불, 태안 삼존불에 이어 백제의 특성이 잘 나타난 서산마애불 /97년... 완벽한 시무외인을 갖추고 있다...>
이후 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와 수준이 깊어지고, 승단이 국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면서
<시무외인> 불상이 나타나고, <삼존불>이 이제야 주류를 이루게 된다.
대립과 전란의 혼란기를 겪은 중국과 한반도에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며,
이후 <아미타삼존불과 관세음보살>이,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 <미륵불과 석가불, 비로자나불>이 조성된다.
결국 불상의 양식은 시대의 흐름과 요구, 그리고 불교의 이해에 대한 깊이를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4세기 후반, 영광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지역에 (기록상!!!)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그 형식과 내용은 중국화된 불교(동진/남중국)의 한흐름에 불과하지 인도의 간다라 풍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적 불교의 정착은 광개토대왕-장수왕, 동성왕-무령왕 등을 통해 중국의 흐름과 동화된다.
중국과의 동조현상도 처음에 200여년의 간격이, 이 시대에 들어와 3~50년의 시차로 좁혀진다.
또한 이 땅에 정착된 불교의 백제식 해석은 <사방불>이라는 독창적인 형태라 생각한다.
영광의 불교 도래지와 간다라 미술에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과 마애삼존불/97년... 최완수씨는 성덕왕에서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8세기 초중반에 조성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초기형태인 사면석불과 삼존불이 동시에 조성된 모습이어서 골라보았다...^^>
생각해보라. 100여년 전의 실패를 딛고 한국전쟁 이후에 급속히 확산된 기독교 전파과정을...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을 앉혀 놓고 기독교의 종류는 구교와 신교가 있고,
다시 정교,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으로 나뉘는데, 십자가 조성방식은 다르다며 포교했을까?
믿어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니... 마라난타의 포교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미 수십년전부터 백제지역에도 불교는 충분히 알려져 있었고, 마라난타는 이를 조직한 선교사다.
게다가 그는 인도를 출발하면서 가져온 대부분의 불상은 중국(동진)에 놓고 몸만 왔을지 모른다.
인도출신만 강조한 마라난타가, 영광을 간다라 미술과 연결시킨 오늘날의 큐레이터보다 한수 위다...^^
영광의 불교 도래지에 조성된 간다라 미술관과 그 조성 의도에 대해 아쉬운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차라리 백제와 인도를 연결하는데 급급할 게 아니라 간다라 미술에 대해 깊이 있게 안내를 하든지,
아니면 백제에 불교가 수용되는 의미와 과정에 대해 충실히 설명을 하든지,
그도 아니면 당시의 인도와 중국, 백제의 불교미술의 수준에 대해 비교를 하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영광 불교 도래지/07년...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한 모습들... 너무 가볍고 들떠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ㅠㅠ>
게다가 내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도 불교에 대해서도 충분한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간다라 불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느끼기에 너무 부족함이 많았고,
여전히 간다라 지역에서 꽃피운 불교 미술에 대한 편협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인도미술을 간다라 미술로 대체시키는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모습까지 강요받았다는 느낌이다.
그런면에서 영광의 불교 도래지 조성사업은 부실한 내용을 과대포장한 문화상품에 불과하다.
<영광 불교 도래지/07년... 법성포를 바라보는 해안가에 조성되어 있고, 사진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간다라 미술관이다... 아무튼 마라난타에 대한 기록이 있어, 순도조려(고구려는 순도) / 난타벽제(마라난타는 백제) / 아도기라(아도는 신라) 유래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고로, 혹자는 수로왕과 허황후의 설화를 근거로 남방도래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AD100년을, 금강산 유점사의 설화를 근거하는 이들은 AD 4년설을 주장하지만, 후자의 경우 AD 4년이면 인도에서도 불상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이니 근거있는 주장이라 납득하기는 어렵고, 수로왕설화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즉 불교는 2세기 전후 중국과 한반도에 이미 들어왔고, 국가에서 공인하고 번성한 시기는 그 후대가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이제 간다라 불상과 미술은 어떤 모습인지?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간다라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 볼까?
사실, 이곳으로 떠나면서(? 상상만...^^) 고민이 많았다.
그 지역을 알자니, 인도의 역사가 빠지면 안 되고, 인도의 철학과 종교도 검토되어야 하고...
아무튼 이때부터 시작된 미로에 빠져,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도의 지도를 보면서 차분히 살펴보자...
(사실,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내가 인도에 대해서 고민하겠나?)
세계 여러나라중 영토의 크기로 7번째, 인구에서는 중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인도는
눌린 모습의 여덟팔(八)자를 그리는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이 북쪽에 위치해 있고,
이 산맥들을 발원지로 한 인더스강과 갠지즈강이 왼쪽은 서있고 오른쪽으로 늘어진 사람인(人)자를 그리고,
그 밑에 나르바다강을 경계로 데칸고원이 삼각형을 그리며 이루어져 있다.
(좌도(左道)우사(右史)라는 말을 좋아하는 나는, 지도가 없으면 상상이 잘 안 된다...ㅠㅠ)
<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창비/2006년 3쇄... 지리도서로 적당할 것 같아서 스캔함...>
파미르고원 서쪽, 힌두쿠시산맥 북서쪽은 사막이 분포하며,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이 있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지스탄, 타지키스탄, 아프카니스탄 등)
히말라야산맥 북쪽으로는 티베트고원, 곤륜산맥, 타클라마칸사막, 텐산산맥으로 이어지는 중국,
그리고 인더스강 서쪽은 아프카니스탄을, 갠지즈강 동쪽은 미얀마를 경계로 삼고 있다.
인더스강 중류에는 BC 3000년 이전부터 드라비다족이 고대 인더스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으나,
BC 1500년경 북서쪽의 야금술을 갖춘 기마족 아리아인들이 침입하면서
소위 <리그베다(지식의 노래라는 뜻)> 시대(신들을 위한 찬양과 제사)를 열게 된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키 작은 <호빗족>과 비슷한 주거문물과 이미지를 가진 <드라비다>족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를 중심으로 발달하다가, 아리아족에 쫓겨 나르바다강, 데칸고원 북쪽으로 옮겨간다.
<지도서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Harappa 지역이 예전의 간다라 지방인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 강 서편과 동편 양쪽으로, 그리고 서쪽 아프카니스탄의 카불까지 이어지는 교역로는 비단길 오아시스 남로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오던 길이기도 하다...>
하라파지역(간다라지역,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쪽, 인도의 펀잡지역 서쪽)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은
차츰 동진을 하면서 후기 베다시대에는 갠지즈강 상류까지 영역을 넓히며
BC 7세기 경에는 마가다국 등 수많은 분소국가를 이루며 살다가 갠지즈강 하류까지 진출한다.
즉,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족과 다른 문명이며, 갠지즈강은 2000년이 지나서야 문명사에 등장한다.
(엄밀히 인더스 문명은 모헨조다로 지역보다는 인더스강 중상류 지방의 하라파 문명이 중심이다.
또한 나는 지금까지 인도 문명을 아리아족이 만든, 인더스강 + 갠지즈강 유역으로 생각했다...)
(아리아족(알렉산더였나?)이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했을 때 강 이름은 <신두>였다고 한다.
ㅅ 발음을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신두(인더스강)을 힌두이라 불렀고,
결국 그 연속선상에서 인도, 인더스강, 힌두교가 됐다는 썰’이 있다...^^
우리 똘똘이는 수박을 후박/우박이라고 발음한다. ㅅ 발음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색시의 설명...)
(이러한 지역적 구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인더스강 중상류의 카슈미르, 펀잡지방(인도 서북부)은 오늘날에도 극심한 분쟁에 시달리고 있고,
인더스강 유역은 이슬람의 파키스탄이, 펀잡지방은 이슬람+힌두교 성격의 시크교도가,
그리고 벵골만이라 불리는 갠지즈강 하류지방(역사에서 소외된 곳)은 이슬람의 방글라데시...
<인도방랑기 카페에서 스크랩한 인도전도... 붐베이 주변의 나르바다강을 기준으로 횡선을 긋고, 북쪽으로 세줄을 그어서 생각하면... 파키스탄 / 델리 / 부다가야 주변 / 캘커타로 나눌 수 있고, 남쪽은 다시 세로로 한줄을 그으면 동서 양쪽으로 나뉠 수 있다...? >
힌두교도 나뉘는데, 석가모니가 탄생한 갠지즈강 중상류 지방은 비슈누파가,
벵골만과 아삼지역은 샤크티파, 드라바다강 남쪽의 데칸고원 지역은 시바파가 우세하고,
인더스강 하류 남쪽과 드라바다강 하류 북쪽(붐베이)은 일부 자이나교와 기독교가,
그리고 완전히 남쪽 스리랑카는 소승불교로 지역적 특성과 차이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급속한 생산력의 발전이나 상업세력의 등장과 팽창은 변화를 가져온다.
농업의 발전은 문명을 안정시키기만, 상업의 발전은 문명을 혁신시킨다.
농업의 몰락은 파괴와 증발로 나타나지만, 유목의 몰락은 변화와 새로운 생성을 잉태한다.
BC15세기경, 앗시리아 제국의 이란, 인도 북부지역의 아리아인들이
고대 인도의 신화와 토속신앙을 흡수하여 <베다교/브라만교>를 만들었다면,
BC7세기경,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강 유역의 촉진된 농업발전에 이은 상업발달은,
이란,이라크 지역의 아케메네스국 페르시아 왕조에서 <조로아스터교>를 탄생시킨다.
먼저, <조로아스터교>를 살펴보면, 선과 악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구세주를 기다리며,
최후의 심판과 부활이라는 기본틀은 비슷한 시기 유대교를 종교적으로 정립시키고,
대략 600년후의 크리스트교와 또다시 500년후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를 만드는데 기본이 된다.
(유대교의 기본경전인 구약성서는 앗시리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배타적 선민사상을 결합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베다/브라만교는 신화가 철학적 체계를 갖추어가는 원시종교의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일신과 내세를 조건으로, 베다시대 브라만교를 원시적이라 칭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척박한 사막에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조건과 상업적 계약이 전제된 것이 조로아스터교라면,
브라만교는 정착한 사람들이 농업에 기반을 두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종교로 비교할만 하다.
급변하는 자연에 변하지 않는 사회계급, 그리고 유한한 행위(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윤회와 해탈,
결국 고통뿐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벽하고 순수한 자아(브라만/아트만)를 찾아
더 이상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해탈/윤회의 단절)을 지향하는 것이 초기 브라만교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종교와 사상은 후대에 이르면 격식과 형식만 남는다. 조선의 예학논쟁처럼...
BC11세기에서 BC7세기까지 고대 인도지역에 뿌리를 내린 브라만교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농업의 발달에 따른 상공업의 발달과, 내부의 계급충돌, 그리고 확대되는 정복전쟁의 소용돌이와
브라만교의 극심하게 형식화된 제사의식과 내세의 거부는 새로운 사상을 요구하게 된다.
(세계5대 종교중 불교와 이슬람교는 상업세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그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유교와 힌두교는 상업세력을 억누르고 농업세력을 끝까지 공고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체계이다)
BC6세기, 이러한 브라만교의 폐해를 지적하는 출가공동체에서 종교혁명을 인도에서 일으키니
나르바다강으로 쫓겨난 드라비다족의 중심지에서 마하비라가 만든 <자이나교>가 그것이고,
후기 베다시대의 영향을 받은 갠지즈강 중상류 지방의 고타마싯타르타가 만든 <불교>가 또 하나다.
살생을 반대하고, 계급을 거부하는 평등사상, 제사만능주의를 배격하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의 수행방식은 온몸의 털을 손으로 뽑는 등 극단적 방식으로 일단 <불교>가 대세를 장악한다.
그리고 BC6세기는 인도가 마가다국, 코살라국 등 분소 10여개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다.
비슷한 시기,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 연상되지 않는가?
증대된 생산력에 인접한 나라들이 경쟁하면서 더 많은 영토와 노동력을 확보해 나가는...
중국의 유교도 이때 사상적으로 정립되고, 인도에서도 불교와 자이나교가 탄생한다.
여기서 종교나 철학으로 넘어가면 너무 복잡하므로, 일단 역사로 계속 나간다...^^
인도의 서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아케메네스국으로 통일되고,
(이 나라와 지중해 국가의 전쟁이 바로 마라톤 전투, 스파르타 300인이 벌린 테르모필라이 전투다)
BC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전쟁으로 페르시아제국과 고대 인도지역은 요동을 치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동진은 오늘날 인도에 이른게 아니라,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하고 돌아섰는데,
그 이유는 마가다국을 포함한 인도의 연합군이 200만명을 넘는다는 말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알렉산더 동진의 영역을 수정하자는 게 아니라 정확히 하자는 말인데,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한게 아니라, 하파라-모헨조다로 지역 등 파키스탄까지만 진출했다...^^
오늘날 간다라 미술과 불상을 헬레니즘의 영향, 그리고 그 시원으로 알렉산더의 영향을 말하지만,
실상 간다라 미술은 그로부터 450여년이 지나서 꽃피운 것으로 그리스 미술이 뿌리는 아니다.
(혹자는 간다라 불상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을 겨냥해, 서양문물에 빠진 사대주의자라 칭한다)
문제는 알렉산더의 8만 군사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찬드라굽타 장군의 208만 대군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는 다른 성격이지만, 허탈한 기분에 빠진 군대를 해산하지 않은
찬드라굽타 장군은 마가다국을 멸하고 마우리아 왕조(BC321~BC185년)를 세운다.
이때 8만8천탑(석주)을 세웠다는 그의 손자 아소카왕이 등장하면서 불교는 크게 융성하게 된다.
또한 아소카왕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도는 인더스강-갠지즈강-나르바다강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인도인들에게 알렉산더와 서방의 존재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충격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으니, 진시황, 강희제와 버금간다는 한무제의 존재다.
(중국의 3대황제중 한무제는 우리와 인연이 많은데, 그가 바로 고조선을 멸망시킨 인물이다)
진시황의 바톤을 이어받고, 항우를 굴복시킨 유방의 전한(前漢)은 영토확장으로 흉노를 자극한다.
북으로 진출한 한무제 때문에 흉노는 서진하고, 흉노족에 나라를 뺐긴 월지족도 서진한다.
바로 돈황부근에 살던 월지족이 비단길중 오아시스 남로를 따라 진출한 곳이 간다라 지방이다.
<비단길과 바다길... 카불 바로 위쪽에서 둔황에 이르는 지역에 월지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더 사후 아케메네스 왕조의 대제국은 <파르티아 왕국(BC250~AD226)>으로 축소되고,
마우리아왕조의 멸망에 따른 간다라 지방의 공백은 <대월지국>이 지배를 하니,
어쩌면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삼천 세계란 인도와 서역과 동방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대월지족을 야만인으로 부르는 Assioi가 오늘날 아시아의 어원이라는 썰”도 있지만,
월지족은 옥의 민족이라 불릴만큼 옥의 교역을 주도하였고, 그들이 만든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이 서역에 전달되면서 비단길이 생겼고, 그 옥이 신라까지 이어졌다)
아무튼 그 시대의 간다라 지방에는 페르시아 문명과 중국의 문물이 분명 혼용되고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후 인도는 축소된 형태로 슝가왕조가 지배하지만 200여년 동안
끊임없는 외침과 내분으로 부침을 거듭하다가 인더스강 중상류-갠지즈강으로 이어지는 <쿠샨왕조>,
드라비다족이 중심이 된 남쪽 나르바다강-데칸고원의 <안드라 왕조>로 양분(1세기경)이 되는데,
쿠샨왕조는 대월지족의 협력을 받은 파르티아에서 넘어 온 이란계통의 쿠샨인이 세운 나라다.
그리고 쿠샨왕조의 성격이 간다라의 미술과 불상의 특징을 결정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파르티아 왕국(BC 250 ~ AD 226년) /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간다라 미술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되는 나라는 파르티아 왕국이다... 그리스식 알렉산더의 영향을 이야기하기에는 450년 이상이 흘렀고, 그 과정에 존재했던 박트리아 제국은 월지족에 멸망하고, 실제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국가와 가장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파르티아 제국이고, 자연 파르티아와 국경을 접한 쿠샨왕조의 간다라 지역에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에 들어와 우세한 이론으로 부각되고 있다...>
4. 대승불교와 간다라 지역의 의미.
이제야 간다라 지방의 역사에 대해 정리를 한셈이네?...휴~~~
근데... 빼 먹은 게 있다...^^
바로 카이사르의 로마제국 성립과 <크리스트교의 포교활동>이다.
로마제국이 과거 그리스의 영화를 쫓아 동진을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면서 재생되지 않는 법...
소위 페르시아 지방의 저항에 막힌 로마는 아프리카 북부와 이집트, 유럽으로 서북진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크리스트교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 파르티아 왕국으로 동진하고...
<산치대탑 사원 복원도. 인도의 건축/윤장섭/서울대학교출판부/2004년간... 스투파는 하나의 무덤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당시의 사원의 형태를 갖춘 건축유적이다...>
석가모니(고타마 싯타르타) 사후 부흥한 불교는 개인의 참선으로 해탈을 목표로 한 소승불교다.
때문에 당시의 불교는 브라만교에 대한 부정적 영향으로 불상을 제작하지 않았지만(무불상 시대)
리그베다에서 언급 되듯이 상징적 건축으로 <스투파>를 독립적, 혹은 석굴형태로 조성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탑파/탑의 어원인 스투파는 브라만교의 베다에서부터 언급된 명칭으로
우주목(宇宙木), 황금의 언덕, 신성한 불꽃, 천지의 중심축 등을 상징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생존 시 손톱 등을, 사후에는 사리를 안치했다고 하는데 자이나교도 공통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1세기말, 2세기초부터 대승불교가 정착하면서 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유가 뭘까?
마우리아 왕조는 최초의 인도통일 제국이다.
그리고 마우리아 왕조의 탄생은 알렉산더의 침략이, 왕조의 몰락에는 월지족의 침략이 있었다.
즉, 우리만의 세계가 아닌, 그것도 우리보다 거대한 힘의 외부세계가 존재함은 물리적인 충격이다.
여기에, 예배와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유일신을 내세우며 포교하는 종교의 존재는 정신적 충격이고.
불교가 동쪽, 서쪽, 남쪽으로 파급될 때는 분명 소승불교의 형태였다.
그러나 오늘날 바라보면 외부세계와 차단된 곳을 제외하면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국가적 체계를 형성하면서 외부세계와 대립 항쟁하는 곳에서 포교와 예배는 신선한 방식이 아닐까?
어쩌면 AD가 시작된 크리스트의 탄생과 신약성서의 보급은 소승불교의 한계를 지적했을지도 모른다.
<석굴암의 범천/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본디 범천은 불교의 보살이 아니라, 브라만교의 신이 석가모니의 수호신으로 흡수된 하나의 세계=천을 다스리는 신이다...>
제자만 존재하던 소승불교에, 브라만교의 제석천, 범천 등이 불교의 수호신으로 둔갑하고,
모든 중생들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해탈을 미루는 새로운 의미의 보살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불교는 대승불교의 체계와 체제를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확립해 나간다.
월지족의 등장과 파르티아 왕조의 영향력,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전파에 대한 불교의 내성이
대승불교를 만들고, 그들과 똑같이 예배의 대상으로 신상을 제작한 것이 바로 불상의 시작이 아닐까?
불상의 조성은 쿠샨왕조의 전성기에 꽃피운 대승불교의 시작, 부흥과 궤를 같이 한다.
간다라 지방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말에 사실 놀랬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과 간다라 지방은 북경과 경주보다 더 멀고
장안(중국 시안)과 평양만큼 떨어진 아주 먼 곳이기 때문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그 넓은 영토 중에 왜 하필 간다라 지방에서 불상이 처음 조성되었을까?
이해가 잘 안되기도 했고, 그 지역의 특성을 모른다면 불상에 대해 할말이 적어질 게 분명하다.
<왼쪽 상단의 페샤와르 일대가 예전의 간다라 지역이다... 그리고 인더스 강과 갠지스강 사이에 마투라 있다...>
인더스 문명이 시작한 발원지이며,
인도 동쪽의 페르시아 지방과 서쪽 중국의 교역 중심지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지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간다라 지방은 인도 수도 델리보다는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 가깝다.
늘 그곳에는 상업적 교류가 빈번했고, 새로운 문명의 점이지대로 지배층의 교체가 빈번한 곳이었다.
문명이 충돌하는 곳, 문물이 집결되는 곳... 그곳은 항상 변화의 중심지가 되며,
간다라 지역 사람들은 그 변화의 흐름을 사상적 종교적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저력을 갖추고 있었다.
<상투끈이 사라진 2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간다라 불상... 양쪽 어깨에서 망토를 둘러쓴 통견의 양식에 두터운 옷주름에서 연유한 후박의 차림을 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개방적인 형태, 가장 유동적이어서 민감하고 능동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파괴 속에서도 끊임없는 창조를 반복하고 시대를 선도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중심을 잃지 않는 한, 자유와 개방은 열린마음을 강요하고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역사의 발전과 진보의 동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런지...
중심이면서도 변방인 곳, 아웃사이더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문명은 발흥한다.
5.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 그리고 굽타양식...
그러면 인도불교가 불상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말은 사실일까?
간다라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부산에서 신의주보다 조금 더 떨어진
갠지즈강 상류의 마투라 지역에서도 2세기초부터, 단독 불상 형태로 동시에 조성된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에 가깝지만, 간다라 지방과 중간쯤에 해당하는 위치다.
(때문에 간다라 불상이 최초형태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곳도 간다라 지방과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쿠샨왕조가 파르티아 제국과 중국의 한나라의 보호막이 되어주면서 착실히 성장한 안드라 왕조는
양쪽 나라의 중계무역의 생산지 역할을 하면서 쿠샨왕조와의 접경지대 마투라 지역이 발달한다.
물론 이곳도 상업세력이 집결된 곳이다.
쿠샨왕조의 간다라 지방이 외부세계와 점이지대였다면, 안드라의 마투라 지역은 내부의 점이지대다.
그리고 그 차이가 두 불상의 외형적 특징을 결정하게 된다.
<보살 명불삼존비상/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최완수/대원사/2002년간... 2세기 전기, 카트라 출토, 마투라 박물관 소장... 간다라 불상과 비교해 보기 위해 스캔하였다... 전혀 다른맛 다른 느낌의 불상이다... 모든면에서...>
얼굴 형태부터 다른데, 간다라쪽이 가늘고 긴 얼굴에 윤곽이 뚜렷한 아리아족에 가깝다면
마투라쪽은 드라비다족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둥글납작하고 강인한 모습이다.
머리카락은 간다라쪽이 완전히 곱슬머리이지만, 마투라쪽은 머리카락을 표현하지 않았다.
육계와 나발의 형태도 완전히 다른데, 마투라쪽은 소라모형으로 만화속의 똥 그림 같다...^^
신체도 간다라쪽이 미끈하고 늘씬하다면, 마투라쪽은 넓은 어깨에 강인한 형태를 갖췄다.
흔히 알렉산더 이후의 그리스 복식으로 알려진 우단편견은 마투라쪽의 영향이다.
간다라 불상들은 3세기 후반까지 100년 이상을 후직의(두터운 천으로 만든) 통견의복이지만
마투라 불상들은 2세기 초반부터 투박의(얇은 천으로 만든) 우단편견 양식이다.
3세기 후반이면 이 양식이 역전되는데 간다라는 우단편견을, 마투라는 통견의복으로 바뀐다.
그리고 소재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데 간다라는 청흑암을, 마투라는 적색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시무외인을 공통점으로 육계가 생기고, 나발의 형식이 완성되면서 양쪽은 서로 영향을 받는데,
갠지즈강 중류의 마가다국에서 등장한 슈리굽타(275~300년)대에 통일제국을 지향하고,
그 손자 찬드라굽타(320년,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 대장과 동명이인)에 의해
인도는 다시 통일되고 굽타 왕조(320~550년) 시대가 열리면서 양지역의 불상은 통일된다.
<굽타왕조의 전성기... 마우리아 왕조와 비교해보면 서쪽, 남쪽으로 영역이 많이 축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나발과 육계를 갖추고, 굵고 완벽한 형태의 삼도에 귓불도 충분히 늘어진 두상,
그리고 속이 비추는 투박의에 통견의복(양쪽어깨를 감싼 형식)이 U자, V자형 옷주름으로 처리된
완숙한 형태의 불상이 4세기 중반부터 나타나니 그것이 바로 굽타양식 불상이다.
또한 굽타왕조는 마투라 지역이 중심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고대 브라만교의 영향에서도
남근과 성애를 주도적으로 조성했던 비슈누파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불교의 주도속에서도 브라만교는 해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건축과 조각을 이어갔는데
그러한 영향인지, 5세기 중엽에 이르면 나신모양에 옷주름이 없는 불상이 조성된다.
(그리고 이시기쯤에 시무외인과 선정인을 벗어나, 법륜인을 한 불상이 조성된다)
<대통령관저 소장 불입상/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1... 4세기 후반, 마투라 부근 자말푸르 출토, 인도 뉴델리대통령관저 소장...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이 통일된 양식으로, 흔히 굽타양식으로 불린다...>
약 200여년간 번영을 구가하던 굽타왕조도 몰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파르티아 제국을 이어받은 사산페르시아 제국(225~650년)의 등장으로 흉노족의 2차 이동이 시작된다.
흉노족중 투르크 계열의 훈족은 아틸라를 중심으로 아랄, 카스피해 일대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남쪽으로는 굽타왕조를, 서쪽으로는 로마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475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굽타왕조에게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로마와의 바다길(유리 교역로)을 통한 교역중단을 의미하고
훈족을 비롯한 외부의 지속적인 공격에 쇠약해지면서 내부의 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인도의 고전 문화를 성숙시키고 완성한 굽타왕조는 불교를 동서양에 전파하였고,
아잔타석굴, 엘로라 석굴과 불교사원 건축문명을 남겼지만, 결국 불교와 함께 몰락하게 된다.
<아잔타 석굴 19굴의 내부/ 인도의 건축... 석굴 내부에 불상을 안치한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불상이 부조된 스투파 안치가 많았고, 석굴 입구에 아소카 양식의 석주가 서 있는 경우도 있다...>
결국 석가모니 탄생이후 대략 12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불교는 쇠락하고,
고대의 브라만교와 불교, 그리고 인도의 신화들이 뒤섞인 힌두교가 발호하게 된다.
굽타왕조의 쇠망이후 인도는 뚜렷한 통일제국을 만들지 못한체 지리멸렬하게 되지만,
8세기까지도 브라만, 자이나, 힌두교와 뒤섞여 불교의 건축과 불상, 스투파는 건립된다.
사실, 중국에 처음으로 불상이 소개된 시기는 2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이시기에 이미 중국에서는 간다라 풍의 금동제 불상이 모방되어 조성된다.
즉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소개된 불교는 마투라 지역보다는 간다라 지역의 영향이 컸다.
이런 이유로 간다라 불상은 중국에 오래전부터 각인되어 왔고, 훨씬 친숙한 게 사실이다.
투박의 형태의 복식과 아리아식 얼굴의 불상이
중국황제의 도포식으로, 또 한족에 가까운 얼굴로 바뀌면서 중국식으로 정착하고,
비단길을 통한 왕성한 교류와 인도의 고법승 등을 통해 전파된 불교의 사상이 중국에 정착하면서
불교의 성지 인도는 각국의 구법승들의 순례지가 되고, 또 그렇게 불상의 양식이 전파된다.
<연가7년명불입상/ 재현품(?) 539년 고구려에서 조성된 것으로 불상으로, 북위시대(520년)에 만들어진 중국과의 시차가 거의 없어졌다... 이런 불상의 기록들을 보면서 제작의도를 살펴보는 것도...>
중국에서 인도의 경전들이 본격적으로 번역되고 연구되는 5세기 중엽부터 중국의 불상은 완성되고
광개토대왕, 동성왕 이후 5세기부터 본격화된 한반도에도 6세기에는 독자적양식의 불상이 조성된다.
그리고 7세기, 당나라의 현장(서유기의 주인공/ 최완수씨는 당태종이 보낸 간첩이라고 규정...^^)과
신라 혜초의 구법여행은 사실 불교가 쇠락해가는, 그래서 가장 완숙한 형태의 문물을 보았을 것이다.
즉, 전래되고 구전된 형식의 불상이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바라본 불상은
초기 간다라나 마투라 지역의 흔적이 아닌, 충분히 인도화 되고 완성된 굽타양식이었을 것이다.
인도의 스투파와 사원건축, 불상들은 그렇게 소개되고 분석되고 변형된다.
그리고 8세기 후반, 신라 경덕왕대에 인도와 중국의 불교문물을 충분히 섭렵한 이후,
<불국사/석굴암>을 통해 대승불교의 교리를 완벽하게,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구현해 낸다.
<석굴암 본존불/97년...>
6. 내가 좋아하는 불상들과 용산 중앙박물관에서 본 간다라 미륵보살상.
내가 좋아하는 불상들이 있다.
가지고 싶은 불상들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석굴암의 불상들을 꼽고 싶다.
문수/보현보살, 제석천/범천, 그리고 십일면관음보살...^^
여기에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관세음보살상 2구(국보 183호, 184호)와 광륭사 반가사유상.
(이쯤이면 나의 성향은 분명해지지?)
<석굴암 보현보살 탁본... 보고 또 봐도 감탄할만한... 간다라 미륵불상의 투박의를 보니 더더욱 석굴암 안에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뿐...>
가장 중요하고 자랑할 만한, 가슴에 담을만한 보물을 꼽으라면 이도 주저가 없을 듯싶다.
석굴암 본존불, 서산마애불, 삼화령 애기부처,
<법륭사 백제관음... 부분... 법륭사간/백제관음>
그리고 반가사유상 2구(국보 78호, 83호)와 법륭사의 백제관음.
<경주박물관 삼화령 애기부처/08년... 참 신라적인, 그래서 한국적인 미소를 담은 얼굴이다...>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꼭 봐야할 불상들을 시대별로 꼽으라면,
<고구려인의 얼굴일까? 그 작은 크기임에도 올려 볼 것을 강요하는...^^ 박물관에서 모형이지만 구했다...>
가장 귀여운 모습의 고구려 연가7년명 불입상,
<법륭사 십일면관음보살상... 화제로 손실이 되었지만... 어두침침한 금당내부에는 비천상만이 1400여년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나머지는 재현이다...>
가장 중성적 모습의 담징이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중 십일면관음보살상,
<국립중앙박물관의 감은사탑 사리함의 사천왕상/08년... 지금은 양지의 작품이라고 추정되고 있지?>
가장 활기찬 모습의 감은사탑 출토 사리함의 사천왕,
<동대사 노사나불... 동대사간>
가장 담백한 얼굴의 교토 동대사 청동 노사나(비로자나)불,
<보리사 석불/03년...>
가장 준수한 얼굴의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
<관룡사 석불/07년...>
가장 풋풋한 얼굴의 창녕 관룡사 석조 석가여래좌상,
<도피안사 비로자나불/97년... 흔들렸다...ㅠㅠ 아무래도 나는 보림사 비로자나불보다는 이쪽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가장 순박한 웃음의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용미리 석불/97년...>
가장 못생긴 얼굴의 논산 관촉사 은진 미륵불과 파주 용미리 석불,
<팔공사 석불/2000년...>
가장 근엄한 얼굴의 대구 팔공산 관봉사 석조여래좌상,
<충주 미륵사지 석불/2000년... 촌스럽다기 보다는 순박하다는 게 더 어울릴까? 아무튼 친근하다...>
가장 촌스런 얼굴의 충주 미륵사지 석불,
<아양동 석불/97년... 가냘픈 선이지만 부드럽고 세련된 모습... 눈웃음치는 그 모습에 반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어여쁜 얼굴의 안성 아양동 할머니 미륵불,
<금산사 미륵불/04년... 1930년대 만들어진... 김복진의 삶이 녹아들었을까? 환희의 기쁨도 근엄함도 카리스마도 없는 참으로 무심한 표정으로 느껴진다...>
가장 무심한 표정의 김복진이 만든 금산사 미륵전의 장륙미륵불과, 안동 제비원 석불
<강릉 신복사지 공양보살상/07년... 내가 본 불상중 뒷모습이 이처럼 요염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가진 불상을 보지 못한듯싶다...^^>
가장 요염한 자태의 강릉 신복사지 공양보살 뒷모습과 남해 보리암의 해수관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좋아하는 불상들의 시원 중 하나라는
간다라 불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사실 얼굴과 표정에서는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오히려 시선을 뺐었던 것은 신체, 투박의와 전반적인 비례였다.
어찌 옷주름 하나하나가 바람에 날리듯 가볍고 투명하게 처리될 수 있었을지...
살짝 튀어나온 뱃가죽까지도 그렇게 예민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막 걸어 나올듯한 긴장과 달관한 표정의 무미건조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건장하면서도 여리게 보이는, 참 완숙한 솜씨의 대비가 너무 좋았다.
물론 청흑색 편암이 아닌 적색 사암으로 조성되어 있어 간다라 지역 출토인지 의심스럽지만,
육계의 구슬장식과 목걸이 장식과 펜던트, 그리고 팔뚝의 장식과 복장을
여러 도판과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간다라 불상중 <미륵불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도 왼쪽에는 정병이나 꽃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나타냈으리라...
석굴암의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비교해 봤다...
여전히 투명한 옷가지의 주름사이로 비친 배근육과 전반적인 자태가 아름답다.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두와 마투라 지역에서 출토된 후대의 조각들까지 묶어 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불상들과 하나씩 비교해 보고,
우리나라 불상들이 조성되어가는 순서를 생각하며 간다라의 미륵보살상을 다시 생각한다.
하나의 문명이 500년, 1000년의 세월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어져 온다.
그리고 2000년에 가까운 시간의 거리를 건너 뛰어 내가 그 작품을 대한다.
간다라 불상까지 이어온 1500년의 인도 고대사...
조금 더 멀리, 3000년을 이어온 인더스 문명의 흔적...
그리고 알렉산더에서 한무제, 당태종과 혜초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그런 이유로 내가 간다라 불상을 찾는 것이다.
아마도 몇 번 더 가보지 않을까 싶다...^^
7. 정리하면서...
처음 생각은 간다라 지방을 매개로 인도의 역사와 그리고 종교에 대해 정리하려 했다.
물론 나의 주요 관심사는 간다라 지방의 불상이었으므로 여기에 초점을 둔게 사실이다.
그러나 간다라 불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도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도불교의 사상적 배경과 종교적 특성을 다루는데는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간다라 불상의 기원과 의의, 그리고 한계에 대해 정확히 정리하려면
인도에서의 불교 영향력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불교에 대해 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인도의 지리와 역사로 급선회했다...^^
한참 글을 쓰는데 인도에 대해서 쓰는 것인지 간다라 불상에 대해 쓰는 것인지도 불분명했고,
더군다나 불교의 역사에 대해 건들이게 되면, 너무 광대해지겠다는 판단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인도불교, 중국/한국/일본/동남아...
그래서 이 부분은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인도의 역사는 BC3000년 금석병용 시대를 기준으로 원시시대와 고대사회를 구분한다.
인도의 고대사는 인더스 문화(BC 23세기) - 베다 문화(BC 15세기) - 마우리야(BC 4세기초)
- 쿠샨(BC 1세기초) - 굽타(AD 4세기초 ~ 6세기말) 시대까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힌두교가 중심에 서는 7세기초의 하루샤 및 소국가 시대부터 12세기까지를 중세,
13세기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놓인 델리 술탄 - 19세기 무굴시대를 근세로 구분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정리한 부분은 인도의 맨 앞쪽에 해당하는 고대사 부분이다.
인도의 고대사가 불상 하나로 정리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건축, 문화, 정치, 사상 등을 포괄하거나 관통할 수 있는 키워드만 정리하고자 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인도의 중세와 근세까지 정리를 이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