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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원한 약수터의 물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습니다. 조금 천천히 걸으면 땀 흘리지 않고 넘어갑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인해 나뭇잎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점점 쌓여가겠지요. 이제는 피어나는 때가 아니라 지는 때이니 말입니다. 드문드문 아직은 덜 여문 밤송이도 산길에서 파랗게 눈에 띕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잘 익어서 반겨줄 텐데 바람을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중간에 종치는 생명도 있기 마련이지요. 주어진 생명도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아픔을 남기고 떠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좋은 날씨가 곧 태풍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선답니다. 9월의 태풍이나 폭우가 우리를 아프게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도 그런 지경이 되어야 하는가 걱정이 됩니다. 기막힌 8월을 지내고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당해야 하는가 지레 겁이 납니다. 멋지게 시작하였는데 행여 명절 앞에서 다시금 재난을 당하면 어쩌지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대비는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생기더라도 최소한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마주해야 할 위기라면 이겨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난히 지나가기를 바라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대비는 해두어야 하겠지요. 이번 추석 명절이 상처로 범벅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9월도 시작되었고 가을이 발차를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고난의 때를 지나 화려한 단풍의 금수강산을 맞을 때도 오고 있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힘든 때를 이겨나가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을을 빕니다. ^)^
2022년 9월 3일 김종우 목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 : 10)
<육사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남북 갈등의 해소를 위해서도 열쇠는 바로 돈이겠다 싶은 것입니다. 돈, 이건 나라, 인종, 사회, 문화, 정치적 이념과 종교를 떠나서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통하는 윤활유이고 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기를 원하는 성직자라도 돈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돈입니다. 공기나 물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정말 필요합니다. 산속에서 아니면 무인도에서 홀로 자급자족하지 않는 한 이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려면 돈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생명줄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구입은 하지 않더라도 한번쯤 꿈은 꿔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옛날에는 주택복권이라고 있었지만 요즘은 ‘로또’입니다. 당첨확률은 거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이지만 그래도 한 주간의 꿈을 담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구입합니다. 하기야 그래서 이 복권사업이 운영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실제로 그 거액을 쥘 수는 없어도 가져보는 꿈속에 한 주간을 살 수 있습니다. 생활이 각박한 사람에게는 그나마 여름날의 시원한 냉수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순간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길게는 한 주간의 꿈을 지탱해줍니다. 천원 한 장으로 그만한 희망을 살 수 있다면 그다지 손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장할 일은 아니더라도 구태여 막을 일도 아닙니다.
우연히 줍게 된 조그만 종잇조각, 그게 바로 로또입니다. 그리고 그까짓 것 하고 버리려 했는데 자꾸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일단 집어 듭니다. 그리고 주말 방송에서 로또추첨 하는 것을 봅니다. 놀라 뒤집어질 일이 생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고참 병장 ‘천우’가 좋아 어쩔 줄 모릅니다. 어깨 힘주고 제대날짜만 세고 있던 고참병이 갑자기 희죽거리고 혼자서 별난 짓을 합니다. 게다가 해서는 안 될 미친 짓(?)까지 합니다. 너무 좋아하다가 그만 바람결에 로또가 날아 군사분계선을 넘어갑니다. 그냥 포기해요? 목숨을 걸고 그 지뢰밭을 더듬어 북쪽으로 넘어갑니다. 그걸 부대에서 모르겠습니까? 상관이 정신감정을 위해 후송 보내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이실직고합니다.
북쪽으로 넘어간 로또가 북한 병사 ‘용호’에게 떨어집니다. 역시나 인터넷으로 1등 당첨 로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돈이 되려면 남쪽과 통해야 합니다. 천우와 용호가 그렇게 군사분계선에서 마주칩니다. 자그만 종잇조각에 불과하지만 수 십 억의 돈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쪽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로또가 북쪽에 있는 것입니다. 내꺼 네꺼 싸워봐야 소용없습니다. 돈으로 바꿔야 현실이 됩니다. 그쪽에서도 용호 옆에 두 사람이 더 붙고 이쪽에서도 천우 옆에 두 사람이 붙습니다. 어쩔 수 없이 3:3 남북협상(?)이 벌어집니다. 일단 돈으로 바꾸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로또가 남쪽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그냥 넘겨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인질 한 사람씩 교환하고 로또가 남쪽으로 넘어옵니다.
남쪽의 한 병사가 돈을 찾으려 서울로 외출을 합니다. 로또 한 장 숨기려 별짓도 다합니다. 덕에 인터넷으로 위치파악이 됩니다. 그 사이 남과 북에서는 요상한 사건들이 발생하지요. 이야기니까 만들어낸 것입니다. 서로 인질이 된 낯선 신입병들이 생겼으니까요. 각자 자기 전공(?)을 살려 영웅이 됩니다. 덕분에 천우는 북측의 아리따운 여성 병사와 썸을 타기도 하지만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있습니다. 아무튼 로또를 돈으로 바꾸는 일도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사명 완수하여 귀대합니다. 그리고 협상장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북에서 천우가 여성 병사에게서 이별의 선물로 받은 멧돼지 새끼로 인하여 소동이 벌어집니다.
거액의 가방이 그만 어미 멧돼지와 함께 사라집니다. 꿈은 사라지고!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방이 좀 작았던 모양이고 돈이 너무 많았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거액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꿈을 이루기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싶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이, 우리 돈도 아니고 그 거액을 혼자서 달러로 환전하여 다니는 것이 가능합니까? 우선 거액 환전, 그것도 현금으로 가능한가요? 이야기라지만 너무 환상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불법 환전상을 만났다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거부일 수 있나요? 너무 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말 그대로 영화이니까.
그런데 정말 실감나는 것이 바로 돈이라는 괴물입니다. 70년이 넘는 휴전 가운데 언제 어떻게 무슨 도발을 또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입니다. 하지만 그런 원수지간이라 할지라도 관계회복의 끈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돈입니다. 이 돈을 이용하면 그렇게 어려운 관계도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있겠구나 싶은 것이지요. 이념을 떠나 그리고 서로의 입장을 떠나 한 마음으로 한 자리에 머리를 맞대고 협상할 수 있는 구실이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길을 열 방법을 생각해내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영화 ‘육사오’(6/45)를 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45개의 숫자 중에 6개 숫자가 맞으면 로또 1등이 된다고 북한에서 만든 용어랍니다.
<불심판>
옛날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겠다고 애굽 왕 바로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출 5 :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한 마디로 ‘이제 우리 백성 그만 부려먹고 보내십시오.’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2절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누구냐? 난 모르겠다.’ 그런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누굽니까?’하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사실 어떤 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물어보면 대답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질문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냥 사실로 알고 느끼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라도 혹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른다고 물리치겠습니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자칫 좀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당황하여 말도 못하는 우리를 되받아칠 것입니다. 뭐라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고 합니까? 우리가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혹시 모세가 그런 꼴을 당할지 몰라서 이미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라고요? 출 3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우리가 불확실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 그대로 하나님을 ‘자존자’(自存者)라고 알고 있습니다. 누가 있다고 해서 계시고, 없다고 해서 안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사람이 뭐라 하던 그냥 계신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그냥 계십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앞으로 하실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예언이지요.
잘 아는 대로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 즉 옛날의 약속입니다.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지요. 약속이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룰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 - 옛날의 약속이고 그것이 이루어졌기에 이제 다시 신약 -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읽고 신약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약속을 이루셨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약의 약속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신약성경 속에서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에서 예언을 읽고 신약에서 그 이루어진 실상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그것이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예언이 있습니다. 바로 신약입니다. 신약 곧 새 언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오늘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는 사건일 것입니다.
일단 한 가지 예를 봅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구약의 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보겠습니다. 마 1 :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 처녀 마리아가 남편이 될 요셉으로 말미암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였습니다. 그래서 처녀 마리아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잘 아는 대로 어디서 태어나실 것도 약속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약속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약속은 장래의 일을 말한 것이기에 다른 말로 ‘예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언하셨고 또 그 예언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서로 짝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 34 : 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물론 이 글의 첫째 의미는 짐승의 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도 하나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도 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며 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맞습니다. 요1서 4 : 8절과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 : 16) 그러나 그 하나님이 불법과 불의까지 사랑하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심판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심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심판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 이야기를 오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요? 잘 알지요? 거울을 삼으라고. 고전 10 : 5 - 6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그들이 당한 그런 일들을 우리 또한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지 아니하도록 경계를 삼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심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을 하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오는 심판은 불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비슷한 말씀도 있습니다. 벧후 3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어 12절에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래서 우리는 지난 세기 지나오며 특히 핵전쟁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이 핵전쟁으로 뒤덮이고 불바다가 되어 이 지구가 결국은 박살이 나지 않을까 얼마나 마음 조리며 살았는지요. 물론 아직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언제고 그럴 것이라 믿고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목자들도 많고요. 그럴듯하지요.
여전히 심심하면 이상한 종말론자들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겁주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미혹을 해서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도 성경도 그것을 경계합니다. 마 24 :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엡 5 :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결국 영을 분별하라고 경계하십니다. 왜냐하면 미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사단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요1서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거짓 선지자 즉 거짓 목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들어있는 사람의 말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는 말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분별하기도 전에 우리 교회 목사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냥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목자도 자신 안에 어떤 영이 함께 하고 있는지 분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확신할 뿐이지요. 예수님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 : 44)
이제 ‘불’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렘 5 : 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무엇이 불입니까? ‘나의 말'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지요. 즉 말씀을 불 삼고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로 삼아 사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5 :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런데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라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우선 진리가 무엇입니까? 길게 설명하지 ㅇ낳겠습니다. 간단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7 : 17) 그러면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서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으십니까? 이방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딥니까?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진리를 구하는 자가 있답니까, 없답니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는데요? 하나님의 눈에 그들이 어떻게 비쳤는가 보겠습니다. 렘 5 : 11 - 12절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이 내게 심히 패역하였느니라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우습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재앙도 없고 칼도 기근도 없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안이한 신앙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3절 봅니다.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선지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말씀 전하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전한다는 말씀이지요? 거짓을 전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그 말을 듣는 백성들은 안심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하는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합니다. 재앙도 칼도 기근도 없다, 뭘 걱정하느냐? 말세, 말세 2천 년 동안이나 말세 타령했지만 말세가 오더냐? 걱정 말고 오늘이나 잘 살아라 그겁니다.
하나님 백성의 이런 꼴을 보니 참 목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의 마음이 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며 왜 화가 납니까? 한번, 두 번, 세 번,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화가 나지요. 남의 자식이 말 안 들으면 그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듣거나 말거나 아닙니까? 그러나 내 자식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잘못되었으면 말해주어야 하고 정 말을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고쳐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화가 너무 치솟으면 ‘불같다,’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예레미야를 통하여 폭발합니다. 렘 6 : 11 -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가까운 사람이 배신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합니다.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분노가 치밉니다. 렘 23 :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 말씀이 불입니다. 말씀이 불이 되어 그 백성을 사르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심판이 선고됩니다. 말 4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풀무불이 무엇입니까? 쇠도 녹이는 불입니다. 그 불이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들을 태울 것입니다. 뭣 같이? 초개 같이. 쇠도 녹이는 불이 지푸라기를 태우니 얼마나 순식간에 타겠습니까?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장이 났습니다. 그러나 2절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아멘! 그 의로운 해로 누가 오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즉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지막 선지자로 온 세례 요한이 선포합니다. 마 3 : 11 - 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잘 아는 대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리고 진리가 없는 쭉정이를 불에 태우십니다. 그러면 이 불이 의미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찬송가를 부릅니다.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찬송가 178장) 무엇으로 태웁니까? 성령의 불길로.
우리가 심판이라고 하면 자꾸 육적인 심판을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육적인 심판을 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것을 잘 압니다. 모두 실제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려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죄가 들어와서 세상이 마귀 손에 들어갔고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구원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는 길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성경에 담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약속한 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한 세기 살다가 죽는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에게 영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앞에서도 본 바 일단 아들 곧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 천당!’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천국 영생이 세상 학교 입학하는 것만도 못하다는 말입니까? 생명이 그렇게 우스운 것입니까? 천국이 그렇게 하찮은 곳입니까? 한 예로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다 들어갔습니까? 그 약속의 땅은 오늘날 우리가 들어가야 할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종 모세를 믿고 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 중 성인 가운데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고전 10 :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왜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까? 입으로는 주여! 불러도 마음은 다른 데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좁은 문’입니다.(마 7 : 13)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누구를 심판하시는가? 불신자들,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러셨고 마지막 때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도 약속(신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요 1 : 11)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답니다. 눅 12 :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불이 무슨 불입니까? 풀무불입니까? 번갯불입니까? 그런 불이 아닌 줄 압니다. 육적인 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불이지요. 성령의 불인 줄 믿습니다. 그 불이 붙으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므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말씀은 다시 말해서 말씀을 사람 마음에 주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의 소문이 있을 때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했습니다. 그 길에 누가 나타납니까? 예수님이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풀어주시지요. 함께 밤을 지내기 원했는데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눅 24 :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의 불이 붙은 것이지요. 언제?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말씀이 불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말씀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2 :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그러므로 불 심판이라고 해서 육적인 불, 눈에 보이는 불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벧후 3 : 10 - 13절을 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아멘! 이는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옵니다. 그런데 과연 지구가 폭발하고 산산조각 날아가 버리고 새 하늘 새 땅, 새 별이라도 나타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육으로 풀면 하나님 뜻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 : 53) 말씀하시니까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지요?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똑같은 잘못을 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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