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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體)와 용(用)의 論理 (1)
박성배/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교 비교학과 불교학 교수
이 글은 1993년 1월 27일 뉴욕에서 미주현대불교사가 주최한 제1회 <미주현대불교월례강좌>에서 박성배 교수의 불교사상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체,용>이란 사물의 본체와 그 활동 및 응용, 다시말하면 니타나지 않은 근본과 나타난 그 활동이란 뜻입니다. <체.용의 논리>란 동양사상의 핵심논리로 불경의 구석 구석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논리입니다. 본지에 두번에 걸쳐 연재 될 박성배교수의 이 글은 독자여러분에게 <체. 용의 논리>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1938년, 북경대학의 탕융탄(湯用彤) 교수는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漢魏兩晋南北朝佛敎史)라는 두툼한 책을 출판했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체용의 연구가 동양사상연구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상당히 자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로부터 서양의 동양철학자들은 체용의 논리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토(京都)대학의 중국철학자인 시마타 켄지 교수(島田虔次) 는 체용의 논리를 순환의 논리요 범신론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동양이 서양에 비해 침체한 원인을 체용의 논리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학자들의 체용의 논리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시마타 교수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관심이 사라진게 아니고 사실은 다른 학자들도 체용의 논리를 사마타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미국의 동양학자들도 시마타 식 체용관에 사로 잡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미국에 있는 명문대학의 불교학 교수들도 그들의 불교학 강의에서 아예 체용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들은 솔직하게 말합니다. 체용을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일 뿐이라고. 한국의 동양학자들도 체용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젖은 탓인지 모르지만 이러한 현상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탕융탄 교수가 일찌기 잘 지적한 것처럼 체용의 논리는 동양사상을 다룬 모든 철학적인 저술의 어디에나 발견되며 동양적인 사유형식의 기본골격을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이전에 그것의 정체를 먼저 밝혀 놓아야 할 것입니다. 체용의 논리를 순환의 논리라고 비판하는 것은 학문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체용에 관한 연구를 철저히 하지도 않고서 언급조차 안하려고 하는 것은 동양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탓이거나 아니면 동양사상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용의 논리는 동양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동양에서도 특히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있는 중국, 한국, 일본같은 동아세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체용의 논리에는 동아세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나 가치관을 모르면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대목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양문화권안의 <사람살이>를 관찰하는 것이 체용의 논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여기서 '사람살이'란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고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람살이는 가정을 단위로 해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형제자매의 관계와 같은 끊으려고 해야 끊을 수 없는 핏줄의 관계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한 지붕밑에서 함께 살고, 한 솥의 밥을 먹으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는 , 가장 기본적인 생활공동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이러한 사람살이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 서로 화목하고 협조하는 분위기입니다. 서로 참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이해하려는 분위기는 가정생활의 생명입니다. 가정 구성원 사이의 사랑과 가정의 평화는 사람살이의 핵심입니다. 체용의 논리는 이러한 가정적인 분위기와 사회적인 풍토속에서 체용의 논리는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체용의 논리에는 가정의 평화를 중요시하는 동양사람들의 윤리의식이 짙게 배여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들의 체용연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끊으려고 해야 끊을 수 없는 인간관계속에서 우리들이 깨달아야할 것은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참고 양보해야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동아세아 사회의 사람살이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정파괴적인 언행은 삼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가정이 중요한 체가 되고 개개인은 가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체용이라는 말의 뜻부터 먼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체는 몸이라는 말이고, 용은 그 몸의 작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체와 용'이라는 漢字를 우리말로 쉽게 말하면 '몸과 몸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사람은 체가 허(虛)해서는 안된다'든지 또는 '매사는 그 체가 튼튼해야 된다'는 말을 무수히들었습니다. 몸이 있으면 몸짓이 있기 마련입니다. 믿음직한 몸짓은 튼튼한 몸에서 나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곧잘 자기의 몸이 허약해 있는 것을 돌보지 않고 자기의 몸짓만을 튼튼한 듯이 꾸미려 합니다. 여기서 여러가지의 병이 다 생깁니다. 속은 착하지도 못하면서 겉으로 착한 척한다든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한다든가, 알지도 못 하면서 아는 척 한다든가, 속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겉으로 허장성세를 부리는 경우들이 모두 똑같은 병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튼튼하지 못한 체를 실(實)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겉으로 용만을 튼튼한 것 처럼 꾸미는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말을 앞세우지 않고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과묵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동양사람들이 이러한 논리를 즐겨 구사하게 된 배경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을 하되 말장난으로 떨어지지 말고 항상 중요한 인생자체로 되돌아 와야한다는 진지성과 성실성은 체용논리의 숨결과 같은 것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자세가 그들로 하여금 드디어 '체용의 논리' 즉 '몸과 몸짓의 논리'를 만들어 내게 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체용의 논리가 담당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것은 '무엇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냐?'를 따지자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하고 명백한 몸과 몸짓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보다 더 중요한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몸이 없는 몸짓은 없습니다. 몸짓이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항상 있는 것이며 일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몸이 중요하냐 아니면 몸짓이 중요하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문입니다. 답변은 생각하지 않아도, 따지지 않아도,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체용의 철학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렇게도 분명한 것을 사람들은 깜박 깜박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을 중요한 것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버려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인간입니다. 몸짓이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온통 정신을 몸짓 꾸미는데에만 쏟고 거기에 집착하여 막상 중요한 몸이 상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을 떠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동양철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체용의 논리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바입니다마는 몸짓보다는 몸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자는 것이 체용논리의 핵심입니다.
'몸짓만 꾸미려 하지 말라'
'몸짓만 잘 꾸미는 것은 속임수다.'
'몸짓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니 일시 조작으로 그렇게 꾸밀수 있다. 그러나 몸은 그렇게 안된다. 몸은 하루 24시간 쉴 사이없이 계속되는 <정진>이 아니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마음 속에 딴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짓고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이려 말라.
겉이란 아무리 꾸며 놓아보았자 마침내는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 겉단장, 겉치레, 백날 해 보았자 소용없다. 그런 것 보다는 몸을 튼튼히 함만 못하다.
몸을 훌륭히 잘해 놓으면 그 까짓 몸짓이야 꾸미지 않아도 그때그때 저절로 잘 되는 법이다.'
'몸과 몸짓의 논리'를 다루는 대목에 이르르면 이상과 같은 말들이 무수히 나옵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몸과 몸짓의 논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노릇 제대로 하게 하는 논리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람되게 하는 논리'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로 생각하고,올바로 판단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행동하게 하는 논리입니다. 시비하고 싸움질하는 것은 몸짓들이 하는 짓이지만 이러한 시비의 해결은 몸짓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동양의 옛 철인들은 이럴 때, '체로 돌아가야 해결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몸짓에 신경을 쓰는 차원에서, 몸짓이 나오는 몸 자체에 신경을 쓰는 차원으로 사람의 인격이 한 차원 더 높여져야 해결이 난다는 말 일것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을 놓고 말할 때, 웃는 얼굴이건 우는 얼굴이건 모두 몸짓에 불과합니다. 기쁜 표정, 슬픈 표정, 모두 몸짓입니다. 따뜻한 손길, 무서운 손길 모두 손길입니다. 사랑스러운 포옹, 차가운 냉대, 모두가 몸짓입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몸짓일까요? 물론 전자가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어찌 웃는 것이 좋다하여 항상 웃고만 있을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자기의 부모 형제를 죽였는데도 웃고만 있을 것입니까? 그러면 병신이지요. 화내야 할 때는 화를 낼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우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졌다는 말은 웃을 자리에서는 웃고, 울 자리에 가서는 울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때 그때 적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몸짓에 신경쓰지 말고 몸을 건강하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적절히 잘 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몸과 몸짓의 논리'가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체용논리의 유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원래 농업민족이였던 우리 조상들이 농사를 지을 때, 보이는 가지나 잎사귀와 보이지 않는 뿌리와의 관계를 몰랐을리 없습니다. 보이는 가지나 잎사귀를 건강하게 하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농경생활을 통해서 이런 이치를 철저히 터득했으리라 믿습니다. 「맹자」라는 책에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웃의 벼농사가 자기집 벼농사보다 더 잘된 것에 화가 난 어리석은 농부가 자기 논에 뛰어 들어가 벼를 모두 조금씩 뽑아 올려 놓았습니다. 자기 벼를 이웃의 벼보다 좀 더 크게 해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온 그 어리석은 농부는 오늘 자기가 큰 일을 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수상하게 여긴 식구들이 논에 나가보니 자기집 벼가 모두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뿌리를 튼튼히 해줄 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즉각적인 승부를 가리려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보이는 가지나 잎사귀보다는 안 보이는 뿌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 농부는 알아어야했습니다. 맹자에서는 안 보이는 뿌리가 몸이요 보이는 가지는 몸짓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시비에 말려들 때가 많습니다. 무엇때문에 싸우느냐 또는 누구하고 싸우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싸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시비를 하는 이상,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항상 승부가 문제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되게 하는 <몸과 몸짓>의 논리에서는 승부란 안 보이는 뿌리같은 <몸>에서 나는 것이지, 보이는 가지같은 몸짓에서는 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승부를 보이는 몸짓의 차원에서 내려말라'
'어리석은 농부의 과오를 되풀이 말라'
<체용의 논리> 즉 <몸과 몸짓의 논리>를 적용한 교훈적인 이야기는 무수히 많습니다. 동양의 철인들은 인간세상의 모든 일들을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따져 보았습니다. 무엇이거나 보다 더 중요한 뿌리같은 것은 「체」즉 〈몸>이라 불렀고 덜 중요한 가지같은 것은 「용」즉 <몸짓>이라 불렀습니다. 보이는 현상계의 일들은 모두 '용'이라 했고, 안 보이지만 사실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모두 '체'라 불렀습니다. 이리하여 체용의 논리는 인간사에서 <보다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따지는 사고훈련의 논리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여기서 체용의 논리는 윤리, 도덕과 철학, 종교의 담을 훨씬 뛰어 넘어 거의 무제한으로 동양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로 폭넓게 파급해 나갔습니다. 글 짓는 문인이나 나라살림하는 정치인들은 물론이요, 그림, 그리고, 조각하고, 도자기 굽고, 집 짓는 일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 체용의 논리가 스며 들어 갔습니다. 무사들의 칼 쓰는 일, 바둑두는 일, 풍수들의 명당 잡는 일 등등 사람이 하는 일 치고 체용의 논리로 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몸의 차원과 몸짓의 차원을 구별하고, 뿌리같은 안 보이는 차원과 가지같은 보이는 차원을 구별하고, 여기서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이며 더 중요한 일인가를 묻는 체용의 논리를 쓸 데 없는 것을 따지고 앉아 있다든가 단순한 순환논리라고 비난하는 것은 체용논리의 핵심인 '精進'을 하기 싫어하는 현대학자들의 병적인 푸념으로 밖엔 따로 볼 길이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도 평합니다. 자꾸만 더 중요한 일만을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엔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상적인 일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 오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입니다. 체용의 논리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굳이 밝히는것은 그것이 단순한 관념의 철학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문제삼는 행동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항상 질서를 요청하며 따라서 선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후의 개념에는 필연적으로 가치론적인 대소의 개념이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 가려면 보아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일도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보아야 할 것을 먼저 보고,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합니다. 이것이 〈선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할 것인가? 물론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야 하지요. 이것은 <대소의문제>입니다. 여기서 행동적인 선후의 문제는 지식상의 가치론적인 대소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게 됩니다. 구체적인 인생을 사는 우리의 현실이란 가치론적인 대소의 문제와 행동상의 선후의 문제가 서로 교차하는 십자로에 서 있는 듯한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자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합니다. 눈으로는 보다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구별할 줄 알고 마음으로는 더 중요한 일을 추구하면서 행동으로는 현실세계에서의 일의 순서상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일을 먼저 하는 경우가 생기게됩니다. 이 세상에는 덜 중요한 일을 더 중요한 일보다 먼저 해야할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양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부모를 받들고 가족을 보살피는 일 이상으로 더 중요한 일이 없지만, 그 일을 제쳐놓고 돈벌이 하러 나가는 것도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덜 중요한 일을 먼저 하고, 더 중요한 일을 나중에 해야할 때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덜 중요한 일을 먼저 하다가 결국엔 더 중요한 일을 못하게 되고 마는 경우에는 한사코 버텨야 합니다. 기본축말이 되거나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덜 중요한 일을 하다가도 적당한 선에서 끊는다든가 아예 처음부터 그런 일은 손도 대지 않는다든가 여러가지 편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덜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만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그런한 경우엔 덜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경우엔 덜 중요한 일이 곧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체용의 논리는 우리들이 하루 24시간 잠시도 떠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체용의 논리의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뿌리와 가지를 구별할 줄 알고 따라서 뿌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공식에 사고 잡히지 않고 가지를 잘 가꾸는 것입니다. 무가치하다고 얕잡아 보면서 가꾸는 것이 아니라 마치 뿌리를 소중히 다루듯 그렇게 가지도 소중히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은 확실히 높은 수준입니다. 체용의 논리로 오랜 세월을 두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다음이 아니면 잘 실천되지 않는 높은 경지라는 말입니다.
체용의 논리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사적인 역사서적인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인간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자상으로 내려 가려고 할 때, 아버지 환인은 말합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弘益人間)하라"고. 홍익인간. 이것은 분명히 체용의 논리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인간세상을 다스림은 용입니다. 용은 체를 튼튼히 할 때 저절로 잘 됩니다. 여기서는 모든 인간을 두루두루 이롭게한다는 정신이 체입니다. 환인은 환웅에게 정치의 체가 무엇임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13세기 고려의 지눌스님이 "이치는 단박에 깨달을 수 있지만 이 세상의 일은 그렇게 단박에 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을 두고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도 체용의 논리로 풀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체요 닦음은 용이라는 말입니다. 16세기 조선조의 퇴계선생이 평생 씨름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이나 「(이귀기천설)理貴氣賤說」도 똑같은 문제를 똑같은 정신으로 풀어 나간 것입니다.
사단이란 인간속에 있는 네가지의 성인이 될 수 있는 성품입니다. 칠정이란 사람이 현실세계를 살아 나갈 때 어찌 할수 없이 생기는 일곱가지의 감정입니다. 사단은 우주적인이치임으로 귀하고 칠정은 개인적인 육체의 작용임으로 이치의 감독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퇴계선생의 신념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치는 <체>이고 칠정같은 기는 <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모르고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인욕을 천리로 잘못아는 오류'를 막는 일은 퇴계사상의 핵심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인간은 누구나 나와 나 아닌 것의 대립이나 인과율(因果律) 같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습니다. 현대생활에서는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거래하는 은행의 창구라고 생각합니다. 은행창구에서는 너와 나의구별이 없다든가 10원을 주고 100을 요구하는 식의 논리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은행창구의 논리는 현대생활의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너와 나가 엄격히 구별되는 육체를 기준으로 매사를 생각할 때 이러한 논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과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철학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二元論의 극복을 주장하고 나섰으며 그래서 불이 (不二)의 論理를 발전시켰습니다. 일체중생이 바로 네 몸이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이라든가,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아시불(我是佛)사상이 모두 不二思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를 기준으로 보면 너와 나를 하나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무의미한 경우가 있습니다. 인과율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과율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설명못할 것 같은데 어떤 경우엔 인과율을 가지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는 흔히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결코 남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을 보면 인과율을 넘어선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읽으면 부처님은 자비로운 분이였고 지혜로운 분이였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그러한 자비와 지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없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은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의 자비를 가지고 있고 우리들 중생은 부처님이 아니니까 부처님의 자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간단하게 답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안이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왜 저렇게 훌륭한 부처님이 되었으며,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 중생으로 남아있는지?' 그 까닭을 캐는 것이 불교입니다. 도대체 부처와 중생의 구별은 어디에서 생겨 나왔는가? 누가 이런 구별을 만들어 냈는가? 이러한 의심들이 끝없이 생겨납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아무도 그런 구별을 만들지 않았고, 오직 네 스스로 그런 구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구별을 얼마든지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구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우선 양자간에 구별이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는다는 식이여서는 안됩니다.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모르는가?' 또는 '어느 대목이 믿어지지 않는가?'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부처님이 양자간에 구별이 없다고 말씀하실 때 어째서 구별이 없다고 하시는지 그 까닭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그 까닭을 부처님은 아시고 중생은 모릅니다. 이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당신의 몸으로 삼지만 중생은 자기의 몸만을 몸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과 중생의 다른 점입니다. 중생의 경우, 자기가 자기의 몸을 위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하는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중생을 당신의 몸으로 삼는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위해서 자비롭게 일하는 것은 당신도 모르게 저절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부처님이 되려면 먼저 우리도 일체중생을 우리의 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과 똑같은 자비와 지혜가 우리에게서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체중생을 나의 몸으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중생은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몸은 나의 몸이지 남의 몸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남의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몸은 남의 몸이 아니며 남의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체 중생의 몸을 나의 몸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을 파묻을 수 없고, 나의 팔이 가려운데 남의 팔을 긁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어떻게 일체중생을 나의 몸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 몸은 하나이고 일체중생의 몸은 한없이 많은데 어떻게 일체중생의 몸을 내 몸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나와 일체중생의 몸은 원래가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綠起의 이치>라고 합니다. 흔히들 연기라는 말을 인연으로 생겼다가 인연으로 없어지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이런 해석은 연기를 생멸을 설명하는 원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기는 하나와 여럿의 관계를 설명하는 원리이기도 하고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연기로 공(空)을 설평하기도 사고, 때로는 중도(中道)를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식(唯識)과 유심(唯心)의 뜻을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가(禪家)의 깨침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연기의 뜻은 한량이 없고 깨치지 않고는 짐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체중생을 내 몸으로 삼는다는 말은 한없이 많은 일체중생의 몸을 내 몸속으로 넣는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의 몸을 쪼개어 일체중생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행동이전에 사실의 확인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내 몸과 일체중생의 몸이 원래 하나인 사실의 확인,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확인되는 것을 「깨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깨침을 통해서 내 몸 하나만을 생각하는 상태에서 일체중생을 내 몸으로 생각하는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와 여럿이 대립하는 상태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쇠사슬처럼 우리를 구속하는 상태도 아닙니다. 하나와 여럿이 함께 그 속에 있는 상태이며 원인과 결과가 함께 그 속에서 일하는 특수한 성격의 넓은 공간과도 같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체로 돌아간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공화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공은 특수한 공이여서 일체중생이 모두 각각 개개의 특성을 살리면서 유기적으로 함께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부처님의 깨친 상태이며 이를 불교학자들은 연기의 세계, 중도의 세계, 유식의 세계,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참선할 때, 우리들이 '이 뭐꼬?'의 화두를 제대로 들을 때, 우리는 공화의 작업을 거쳐 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체용의 논리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져 있습니다. 거의 인멸직전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인멸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생생히 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체용의 논리를 날마다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쓰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의식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식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논리와 모순되는 것이 들어와도 그것을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혼동이요 혼란입니다. 한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잡탕이란 말은 현재 우리들의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일런지도 모릅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기가 잡탕인 것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아서 잡탕이 아님니다. 옛날에 철인들도 모르는 것 없이 많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을 관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비극성은 '그 관통하는 것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날카롭게 지적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겐 지금 구슬같은 지식은 많은데 이를 꿰어 매는 하나의 실이 없습니다. 아니, 실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다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 가지 없는 것은 꿰어매는 작업을 안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뒤죽박죽이고 혼란혼돈입니다. 속은 체용의 논리이면서 겉은 체용의 논리와 모순되는 논리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갈등이 많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앞뒤가 안 맞고 겉과 속이 다릅니다. 이러고서 괴롭지 않을 장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고서 힘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때로는 종교에 접근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인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종교도 또한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합니다.
이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오락을 찾는다, 운동을 한다, 여행을 떠난다 등등 별에 별 짓을 다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할 뿐 영원한 해결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짖궂게도 또 찾아옵니다. 해결은 논리의 이중성을 극복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체용 연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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