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밴드에서 모셔옴-
이하영이 찹쌀떡 장수였고 , 최초로 왈츠를 추었고 ...
당시에는 미천한 출신이었던 그가 어떻게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한 나라의 외교를 좌지우지하는
외부대신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하영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미국인 선교사 알렌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1884년에 우연히 조선으로 들어오는
같은 배를 타게 되면서 친분을 쌓아
알렌 밑에서 일을 하며 영어를 배우게 됩니다.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당시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 영어에 남들보다
일찍 눈을 떴습니다.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은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조정의 실력자 민영익을
치료해주고 고종의 눈에 들어서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당시 궁궐 내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지라 알렌은 이하영을 자신의 통역관으로
삼고 벼슬을 받도록 주선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찹쌀떡 장수에서
외부대신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하영의 말년은 어떠했을까요?
1910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게 되자
이하영은 친일파로 변절합니다.
일제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이하영은
일본식 고무신을 개량한 조선식 고무신을 개발하였고
1922년 65세의 나이로 자본금 50만 원
(현재가치 500억)의 대륭 고무 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업가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이하영 개인은 인생역전에 성공하며
안락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잘해 출세가도를 달린 첫 번째 한국인은
‘이하영’이다. 영어실력 하나로 ‘이하영’은 구한말인
대한제국 때 미국공사와 일본공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역임할 수 있었다.
이하영은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인
1858년 경상도 동래군 기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이 매우 구차해 동생과 함께
찹쌀떡 행상을 다녔다. 한마디로 촌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하영은 당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오던 미국인 의사 알렌과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돼 그의 요리사가 됐다. 그는 알렌의 요리사가 돼
‘영어’를 익힐 수 있었다. 이 후 조미수호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은 미국공사를 파견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은 없었다.
때문에 이하영은 미국공사관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미국공사를 거쳐
외부대신에 올랐다.
촌부로 태어나 미국인 의사와 연을 맺고 요리사로 들어가 벼락출세를 한 이하영은 어마어마한 부(富)도 축적했다. 그는 서대문 합동에 99칸짜리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의 집은 큰 한옥 외에 양옥이 따로 있었고 사랑채와
행랑채가 딸려 있었다.
행랑채엔 수십 가구의 하인이 살았다. 대지 1500평에
달하는 집안엔 조그마한 인공 동산까지 만들어 놓았다.
ㅡ 행상 시절에 결혼해서 얻은 큰아들 이규삼이 모르핀을 수시로 흡입하여 헌병대에 끌려가, 벌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마약류를 충량한 국민이
되는데 방해된다, 열심히 일하는데 방해된다며 전면 금지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하영의 큰아들 이규삼은
모르핀을 맞다 검거되었다.
이후에도 이규삼은 여러번 모르핀, 아편 등을 흡입하다가 체포, 검거되었다. 만년에는 주소지와 본적지를 동래군
기장면에서 시흥군 수암면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924년 4월 18일 중추원 찬의에 재임명되었고,
1925년 3월 12일 중화민국의 지도자 손문이 병사하자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는 3월 20일 손문의
사망을 추모하는 조전을 난징으로 보냈다.
1926년 5월 19일에는 동생 이준영의 양자
이규종(李圭鍾)이 그가 재산을 사취했다며
경성지방법원에 1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기도
했다. 1927년 6월 3일 중추원 고문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대륙고무공원회사 사장, 중추원 고문 등으로
있다가 1929년 2월 27일 사망했으며 그의 작위는
아들 이규원이 습작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
(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동막골 장상저수지 위쪽에 안장되었다.
윤치호(尹致昊)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가 낮은 학식으로 갑자기 출세한 것을 비꼬기도 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윤치호 일기, 1929년 2월28일자)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ㅡ 같은 가문의 사람들
이시영
이종찬(손자)
이하영
이항복
이회영
이종걸
ㅡ 사진아래 추가 자료 있습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