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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버리고 떠나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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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 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관저를 내놓으셨다 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제가 인사이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부끄럽고 자신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다음에는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 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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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진정한 자유인, 진정한 주인인 나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욕심 부려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데
옥심을 부리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는 거지요.
우리말에 돈이 사람을 쫓아야지 사람이 돈을 쫓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나를 위해 있어야지 내가 돈을 위해 있으면 안 되지요.
돈의 진정한 주인은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어야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은 돈의 진정한 주인도 아니고 자유인도 아닌 종입니다.
돈뿐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고 자유인도 아니며
그에게 매여 있는 사람이며 그의 종입니다.
하느님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나의 주인이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 보면 하느님도 나의 주인이 아니고 실은 나를 위해 계시는 겁니다.
사실 내가 없으면 있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에
나는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고 하느님도 이런 뜻에서 나를 위해 계시는 분이니
인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인간에게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말아야겠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어제 우리가 하느님의 밭이요 건물이며 성전이라고 하며,
이런 우리를 가꾸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자신도 아폴로도 케파도
당신 협력자로 주셨는데 어째서 나는 바오로 파다, 아폴로 파다 하느냐 나무랐지요.
바오로 파라는 것은 바오로 파에 속해 있다는 뜻이고,
바오로에게 매여 있고 구속을 받는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자신도 아폴로도 케파도 우리의 것이라고 하며
어디에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아폴로에게도 케파에게도 구속받지 말라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성전인지를 인식하며
함부로 성전인 자기를 악령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 이외에
누구에게도 내주지 말아야 한다고 오늘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 이외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
욕심 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누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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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에 오는 가 봅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드나 봅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 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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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컴퓨터 게임을 잘 못하지만 예전에 해 보았던 게임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자’입니다. 왕자가 긴 여정을 겪으면서 갇혀있는 공주를 구하는 것입니다. 등급이 7가지가 있는데 저는 늘 2번째 등급에서 끝났습니다. 본당 청년들 중에는 7등급까지 가서 게임을 끝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게임에 큰 취미도 없고, 등급이 어려워지면서 흥미를 잃었습니다. 영어 공부를 할 때도 문법을 배우는 책이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에 접한 것은 ‘성문기본영어’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성문해법영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문종합영어가 있었습니다. 학원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성문기본영어에만 머물다가 졸업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웠습니다. 철학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자연철학, 중세철학, 근대철학,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흥미가 있었지만 등급이 올라가면서 어려웠습니다.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철학을 배워야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서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구름도, 하늘을 나는 새도, 아름다운 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행복한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는 지식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지식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면 곧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이름도 구별하게 됩니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열린다는 것도 압니다. 이렇게 지식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세상에 질서와 조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의 눈이 질서와 규범을 만든다면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공감의 눈입니다. 아픈 사람, 슬픈 사람,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 때문에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트리곤 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눈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눈입니다. 식별의 눈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눈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눈만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도 옳고 그름을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신앙의 눈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과 같습니다. 마치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네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오빠 라자로 때문에 슬퍼하는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빠 라자로는 죽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 부활의 때에는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시련과 고통도 모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천신도, 악신도 그 어떠한 것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9월의 첫날입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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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동차 주행 중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컴퓨터는 절대 할 수 없다.”
“복잡하고, 감성적이며, 모호한 의미가 담긴 말을 컴퓨터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컴퓨터를 이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냐면서 이 글을 쓴 사람의 무지를 탓하며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2000년 초에 나왔던,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한 사람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프랭크 레비 MIT 교수와 리처드 머네인 하버드 교수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말이었지만 분명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았고, 또 깊은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의 말이 사실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계속된 변화의 속도를 우리 인간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스스로 잘난 체한다고 남이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남이 알아주고, 남이 알아서 그 사람을 높여줍니다. 그래서 나의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어느 순간에서도 겸손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려고 한다면 무조건 겸손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밤새도록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베드로도 어젯밤에 다 해 본 일이었지요. 그러나 존경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순명합니다.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도 복종시키는 이 분 앞에서 형편없는 자기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베드로에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합당한 자격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격이 없음을 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께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은 겸손의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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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야말로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이즈미야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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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삶의 여정
-만남, 회개, 발견, 추종-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
오늘은 순교자 성월 9월의 첫날이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참 오늘의 느낌이 각별합니다. 자연보호가 얼마나 절체절명의 현 인류의 선결적 과제인지 통감하는 오늘입니다. 기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전 인류 공동체의 생태적 회개가 얼마나 절박한지 절감하는 요즈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난 2015년 8월10일 제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은 올해로 여덟 번째입니다. 벌써 “찬미받으소서” 회칙이 발표된지 만 7년이 됩니다. 21세기 혜성같이 등장한 현대판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구자적 역할은 정말 눈부십니다. 교황님에 관한 문헌 13권 전부를 수도형제가 구입해줘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제는 주로 공동의 집인 지구에 관한 책 3권을 정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책 뒷면의 소개글이 아름다워 소개합니다.
1.“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이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 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찬미받으소서’ 책의 소개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요, 저 역시 프란치스코 수도명입니다. 애초부터 매료된 성인으로 세례명에 이어 수도명도 똑같습니다. 원장수사도 프란치스코 세례명에, 아브라함 수사의 세례명 역시 프란치스코 똑같아 웬지 친족감親族感을 느낍니다.
2.“오, 자비의 하느님, 저희를 용서하시어 저희가 우리 공동의 집에 당신 자비를 온전히 전하게 하소서. 찬미받으소서. 아멘”-‘우리의 어머니인 지구’ 책의 소개글입니다.
3.“사랑하는 꽃과 강물, 아마존을 가로지르는 큰 강 아마존 숲속에서 약동하는 모든 생명, 이 모든 것이 지닌 아름다움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로 나타나시어 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사랑으로 보호하소서.”-‘사랑하는 아마존’ 책의 소개글입니다.
그리고 오늘 8회째 맞이하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입니다. 정말 모두를 담고 있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명문名文의 앞부분만 소개합니다.
4.“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피조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는 올해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 주제이자 초대입니다. 교회 일치적 기념의 시기는 9월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시작하여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에 끝납니다. 이 시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고자 함께 기도하고 생태적 회개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특별한 때입니다.”-교황 성하의 담화문.
모두가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라는 절박한 호소의 책들에 담화문입니다. 아, 이제 사랑의 2중 계명은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지구의 자연 사랑’의 3중 계명으로 바뀌어야 절체 절명의 시기같습니다. 제 렉시오 디비나의 지론도 생각납니다. 성독의 대상은 ‘신구약 성서’에 이어 ‘자연성서’, 그리고 우리 ‘삶의 성서’에 까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의 축복은 봄-여름-가을-겨울, 일년 사계절과의 살아 있는 ‘자연성서’와의 만남일 것입니다. 어제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 앞뜰에 샛노랗게 피어난 달맞이꽃을 보며, 쓴 “하루하루가 축제다”라는 고백시를 나눕니다. 자연성서를 렉시오 디비나한 결과의 산물이겠습니다.
“자리탓하지 않는다, 환경탓하지 않는다.
여기가 꽃자리, 천국이다
어둔 아침 환히 밝히며
날마다 축제로 시작되는 하루
청초한 사랑
샛노란 달맞이꽃들 별무리같다
비오는 날도 여전히
아침마다 감동을 선사하는구나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다.”
만남중의 만남이 우리 사랑하는 파스카의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축제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단 성서聖書와 성사聖事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성서를 통해서도 이처럼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났기에 “하루하루가 축제다”라는 시도 탄생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만남, 회개, 발견, 추종의 여정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에 회개요, 참나의 발견이요, 평생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영적 어둠에서 탈출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불림 받기전에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은총처럼 제자들에게 다가오셨고 시몬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주님이 없는 캄캄한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밤같은 삶을 살아온 시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일 미사후 낮기도 대신 바치는 시편 126장 앞부분의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도 은혜를 베푸심이로다.”
잘 때에도 주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았기에 새벽 일찍 일어나 쓰는 강론입니다. 이어지는 시몬의 주님과의 참만남이 극적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회개와 동시에 자기를 발견한 시몬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결국 참 자기와의 만남의 여정과 일치함을 깨닫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참나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스승님’ 호칭에서 ‘주님’으로 바뀝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흡사 주님 앞에서 고백성사를 보는 시몬같습니다. 주님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죄 많은 자신의 얼굴을, 참자기를 발견한 시몬이요 이어 이뤄질 정화와 성화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죄인으로서의 참나의 얼굴을 발견하고 이어 정화와 성화로 이어져 주님을 닮은 참나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 참나의 발견에 이어 주님을 따르는 추종입니다. 평생 계속되어야 할, 만남-회개-발견-추종의 여정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시몬에게 주신 말씀에 이어, 시몬의 일행은 배를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의 여정에 오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획기적 전환점의 구원 사건인지요!-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이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께 불림받아 요셉수도원에 오지 않았다면, 또 미사에 참석하신 분들 역시 주님께 불림 받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다인 랍비, 신비가 여호슈아 헷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 불림 받음으로 존재감 충만한 참나를 살게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대각大覺함으로 참 자기를 발견했기에 바오로 사도의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저는 여기에 지구와 자연을 넣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지구도, 자연도, 생명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인 지구요 자연인듯 하나,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느님의 것이기에 지구도, 자연도 형제로 여겨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삼 사랑의 이중 계명에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지구의 자연 사랑”의 사랑의 삼중 계명 시대에 돌입했음을 깨닫는, 구체적 생태적 회개의 실천이 급박한 절체절명의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주님은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닮아 새로워진 우리 모두를 지구와 자연의 ‘보호자’와 ‘지킴이’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자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시편24,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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