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東文選 제24권
교서(敎書)
1.경효대왕(敬孝大王)을 부묘(祔廟)하고 공신을 배향하는 교서[敬孝大王祔廟配享功臣敎書]
2.교 판후덕부사 한수(敎判厚德府事韓脩)
3.교 판삼사사 정도전(敎判三司事鄭道傳)
4.교 예문춘추관 태학사 정총(敎藝文春秋館太學士鄭摠)
5.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륜(河崙)이 악장(樂章)을 올렸기에 그에 답(答)하는 교서[答領司平府事河崙進樂章敎書]
6.재이(災異)로 인하여 말[言]을 구하는 교서[因災異求言敎書]
7.정 대마도 교서(征對馬島敎書)
8.유 대마주서(諭對馬州書)
9.재유 대마도서(再諭對馬島書)
10.교 졸 성녕대군 모서(敎卒誠寧大君某書)
11.건주(建州)야인(野人)을 정벌(征伐)한 뒤에 파고(播告)하는 교서[征建州野人後播告敎書]
12.폐 세자빈 김씨 교서(廢世子嬪金氏敎書)
13.휼형 교서(恤刑敎書)
14.계주 교서(誡酒敎書)
15.권농 교서(勸農敎書)
16.수양대군 공신 교서(首陽大君功臣敎書)
……………………………………………………………………….
1.경효대왕(敬孝大王)을 부묘(祔廟)하고 공신을 배향하는 교서[敬孝大王祔廟配享功臣敎書]
권근(權近)
왕은 말하노라. 삼년상을 마쳤으니 신주를 종묘에 승부(升祔)하여야 하고, 만세에 전할 만한 공이 있으면 신하를 묘정(廟庭)에 배향하는 것이니, 예(禮)는 고금에 서로 전해온 것을 따르는데, 은혜가 어찌 유명(幽明)간에 간격이 있겠는가.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 왕후(王煦)는 풍채와 의범(儀範)이 단정하고 고상하며, 기국과 도량이 넓고 깊었다. 일찍이 충숙왕(忠肅王)은 총애로 대우하고 자식같이 여겨 성(姓)까지 주었으며, 나중에 충목왕(忠穆王)은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작질(爵秩)은 친척과 같이 두텁게 하였고, 영화는 다른 사람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평소에 행한 일을 살펴보건대 전시대의 어진 이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임금을 섬기매 능히 몸을 바치고 보좌하여 추대하기에 전심(專心)하였고, 나라를 다스리매 손가락을 놀리듯 하여 경륜(經綸)의 업적이 풍부하였다. 이에 겸병(兼幷)하는 무리를 미워하여 장차 정리하는 방법을 펴려 하였다. 간흉들이 바야흐로 낙담하게 되려 하였는데 먼저 죽어 백성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말이 여기에 미치매 감개되는 바가 깊다.
계림부원군 이제현(李齊賢)은 덕을 지닌데다가 작위와 나이까지 겸하였고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뚫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서방을 순행할 때는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서 갖은 고생을 다 겪었고, 경고(敬考)가 즉위한 뒤에는 국정을 손에 쥐어 능히 공로를 나타냈다. 충성과 근로로 여섯 조정을 대대로 섬겼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조를 변하지 않았다. 네 번 상부(相府)에 올랐으나 겸손해 하는 미덕을 몸에 지녔고, 두 번 고시(考試)를 맡아서 선발의 공정으로 이름이 났다. 다스려졌을 때에 어지러움을 생각하고 편안할 적에 위태함을 생각하여 항상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가졌고, 높아도 교만하지 않고 가득 차도 넘치지 아니하여 신중히 몸을 보존하는 기틀을 지키었다. 영화(英華)는 피어나서 문장(文章)이 되고, 경술(經術)은 모든 사업에 활용되었다. 큰 내를 건널 적에는 배의 역할을 했고, 의심을 결단할 적에는 시귀(蓍龜)처럼 힘입었다. 혜택은 우리 백성에게 젖었고, 명성은 중국에까지 떨치었다. 남긴 풍교(風敎)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영세토록 잊기 어렵다.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조익청(曹益淸)은 뜻을 세움이 순수하고 몸가짐이 근신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 10년 동안의 잠덕(潛德)을 힘껏 도와서 오늘의 아름다움에 이르렀고, 만민이 함께 우러러보는 지위에 처하여 충실히 예전 법을 좇았다. 혁혁한 국가의 석보(碩輔)요, 당당한 사직의 중신(重臣)이다. 길이 맹세한 것은 단서(丹書)에 나타나 있고, 거룩한 공렬은 청사(靑史)에 기리어졌다.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 이공수(李公遂)는 모나고 엄하고 미덥고 후하며, 넓고 크며 너그럽고 밝았다. 원(元)나라 황태자의 외척으로서 지극히 귀한 몸이었으나 마음을 더욱 낮추어 능히 검소하였고, 서얼인 덕흥군(德興君)이 틈을 엿보는 변을 만났으나 뜻이 더욱 굳어서 돌이킬 수 없었다. 충성된 말은 임금의 잘못을 다루는 데 절실하였고, 의로운 모습은 아래 사람을 거느리는 데 나타났다. 하는 것이 있고 지키는 것이 있는 학문이요, 경외스럽고도 본받을 만한 위의였다.
서흥군(瑞興君) 유숙(柳淑)은 지조가 맑고 고상하였으며, 학문이 넉넉하고 풍부하였다. 일찍이 중전의 부탁을 지키어 공민왕을 따라 오랫동안 외저(外邸)에서 고초를 겪었다. 몸을 바쳐서 두 마음이 없었고, 충성을 다하여 30년이 넘었다. 친근히 유악(帷幄)에서 모시면서 조용히 차저(借著)의 꾀를 내었고, 말마다 시서(詩書)를 일컬어 간곡히 경계하는 모훈(謨訓)을 아뢰었다. 특별히 심복의 신임을 받아서, 우뚝이 후설(喉舌)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므로 말을 하면 들어 주고 계교를 내면 시행되어, 공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완전함에 이르렀다. 이미 본병(本兵)의 부서를 거쳐서, 정령(政令)을 내는 자리에 승진하였다. 장자방(張子房)이 신선을 따르겠다는 것이었으매 나는 그 지혜를 가상히 여겼고, 공야장(公冶長)이 비록 옥에 있었으나 모두들 죄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니 어찌 그 공을 정표(旌表)하여 분함을 씻어 주지 않으리오.
내가 잔약한 자질로 큰 터전에 의탁하매, 바야흐로 믿고 의지할 곳 없는 슬픔에 잠기어 오직 공순하고 근신하는 마음뿐이다. 여러 선조가 물려 준 책임을 맡기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경들과 같은 사람을 얻어서 함께 도모하기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배향의 반열에 오르게 하여, 공로에 대한 보답을 보이는 것이다.
아, 공이 높은 사람을 기록하여 차례로 제사 지냄은 주고(周誥)의 공정(共貞)과 거의 같고, 성왕(成王)과 고후(高后)께 아뢰어 상서를 내리게 함은 은반(殷盤)만을 아름답게 하지 않음이다. 경들이 명령을 받아서 독실히 돕는다면, 나는 편안히 앉아서 성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지실(知悉)할지어다.
[주-D001] 경효대왕(敬孝大王) :
경효대왕은 공민왕의 시호이다.
[주-D002] 덕을 …… 겸하였고 :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천하에 공통으로 높이는 것이 셋인데 연치와 벼슬과 덕이다.” 하였다.
[주-D003] 시귀(蓍龜) :
점을 치는 데는 시초(蓍草)로 괘를 뽑는 것과 거북 껍질을 불에 지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나라에 의심나는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점을 쳐서 결정한다. 나라 일을 원로(元老)에게 자문하는 것을 거기에 비한다.
[주-D004] 차저(借著) :
젓가락을 빌린다는 뜻으로, 한(漢)나라 장량(張良)이 한왕(漢王)이 밥먹을 때에 젓가락을 빌려 달라 하여 계책을 진술한 일이 있다.
[주-D005] 장자방(張子房)이 …… 것 :
자방(子房)은 장량의 자이다. 장량이 공을 이룬 뒤에, “나는 이만하면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세상일을 버리고 신선을 따라 가겠다.” 하고 화식(火食)을 끊었다.
[주-D006] 공야장(公冶長)이 …… 말하였다 :
공야장이 죄명(罪名)을 쓰고 옥에 갇혔는데 공자는, “그가 비록 옥에 들어갔으나 죄가 없다.” 하고 사위로 삼았다.
[주-D007] 공정(共貞) :
함께 바르게 한다는 말로, 《서경 낙고편(洛誥篇)》을 보면,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바르게 하자.” 한 말이 있다.
[주-D008] 성왕(成王)과 …… 않음이다 :
《서경 반경편(盤庚篇)》을 보면, “너의 조상이 고후(高后)께 아뢰어 상서를 내리게 하리라.” 한 말이 있다.
2.교 판후덕부사 한수(敎判厚德府事韓脩)
권근(權近)
왕은 말하노라. 사생(死生)의 이치는 음양에 통하나니 이것은 인물(人物)의 정상적인 도(道)요, 군신(君臣)의 의는 시종이 독실하나니 이것은 국가의 일정한 규칙이다. 하물며 친히 섬긴 스승이요 거유(鉅儒)니, 특별히 은례(恩禮)를 가해야 할 것이다.
고(故) 수충찬화공신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 한수(韓脩)는 학문은 주염계(周濂溪)와 정자(程子)의 전통을 받았고, 필법은 종유(種繇)와 왕희지(王羲之)를 이었다. 일찍이 나의 선왕인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곧 대언(代言)의 직책을 맡았는데, 들어가 임금께 고하면서는 반드시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을 말하였으므로, 신중히 동료 중에서 선택하여 나의 스승으로 삼으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어린 나이로, 가르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재앙을 내리매, 나는 많은 고난을 이길 수 없었다. 중간에 변고를 만나 폐척(廢斥)되어 한가하게 지내었지만, 마침내는 등용되어 반드시 도유(都兪)의 정치를 이루리라 여겼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우리나라를 돕지 못하였다. 말이 여기에 미치매, 마음 아픈 슬픔이 한이 없다. 이제 밀직사지신사 우문관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지전리사사(密直司知申事右文館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知典理司事) 염정수(廉廷秀)를 보내어 술을 가지고 가서 전(奠)을 올리게 하노라.
아, 기운이 모이고 흩어짐이 있으므로 경은 물화(物化)를 따라 선뜻 갔지만, 사람은 노성한 이가 없으니 나는 나라가 병들 것을 생각하여 유감스럽게 여기노라. 상기도 곧은 넋이 이 은총의 글월을 받을 줄 믿는다. 이에 이와 같이 교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주-D001] 도유(都兪)의 정치 :
《서경》을 보면, 순(舜)이 신하들과 정치를 의론할 때에 도(都)라 유(兪)라 하였는데, 도는 칭찬하는 말이요, 유는 그렇다 하는 말이다.
[주-D002] 물화(物化) :
물(物)이 마침내는 변화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죽음을 말한다.
3.교 판삼사사 정도전(敎判三司事鄭道傳)
권근(權近)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올린 일을 자세히 살피어 알았다. 대개 들으니 왕자(王者)가 덕(德)을 교대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면, 반드시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역사를 편수하게 하였다. 이는 오직 한 시대의 전장(典章)을 갖추는 것뿐 아니라, 또한 만대에 권계(勸戒)를 남기는 것이다. 왕씨(王氏)의 세대를 상고하여 보건대, 고려(高麗)의 명칭을 이어 받아서 능히 삼한을 통합하여 일통(一統)을 만들었다. 연조의 오랜 것은 5백 년이나 되었고, 대수를 전한 것은 30대가 넘었다. 흥쇠와 치란의 자취와 선악과 득실의 단서는 기록된 것이 많으나 빠진 것도 또한 심하다. 만일 훌륭한 사가(史家)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어떻게 온전한 글을 이룰 수 있으랴.
경은 학문은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지식은 고금을 관철하였다. 정당한 의논은 모두 성현의 말에 근본하였고, 인물의 선악에 밝음은 반드시 충사(忠邪)의 취향을 분별하였으며, 나를 도와 개국하여 큰 공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꾀는 정교(政敎)의 시행을 보충할 만하고, 웅장한 필치는 제작(制作)의 책임을 부탁할 만하다. 온화한 유자(儒者)의 기상이요, 준수한 대신의 풍도이다.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 나는 경의 유용한 학문을 알았다. 이에 상신(相臣)의 반열에 있게 하고, 또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관직을 겸하게 하였는데, 과연 섭리(燮理)하는 여가에 편수하는 공효를 이루었다. 역년(曆年)을 표시하여 일의 머리를 삼았고, 간략한 것으로써 자상한 것을 만들었다. 변(變)과 상(常)이 있으매 취사(取舍)한 것은 모두 대체에 관계되었고, 찬양하고 폄삭함에 있어서 시비(是非)는 전현(前賢)에 어그러지지 않았다. 사건은 본말(本末)이 구비되었지만 번잡하지 않고, 문장은 간질(簡質)을 귀히 여겼으되 저속하지 않았다.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찬(贊)을 기다릴 것 없고, 울연히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기풍이 있다. 펼쳐 읽어보매 탄복하여 마지 않겠는 바, 마땅히 나누어 주는 은총을 내려서 편찬의 근로를 표창하여야 하겠다. 아, 우(虞)나라 사관이 요전(堯典)을 지으매 이미 그 직필(直筆)을 시행하였고, 은(殷)나라의 감계(鑑戒)가 하후(夏后)의 세상에 있으니 마땅히 전철을 경계하여야 하겠다. 이제 경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주노니, 이르거든 받으라. 이에 이와 같이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주-D001] 섭리(燮理) :
《서경》을 보면, “삼공(三公)은 나라를 경륜(經綸)하고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한다.” 하였다.
[주-D002] 자유(子游)와 …… 없고 :
공자(孔子)가 《춘추》를 짓는데, 자유와 자하의 무리가 감히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하였다. 자유와 자하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다.
[주-D003]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 :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지었고, 반고(班固)는 《한서(漢書)》를 지은 큰 문장가이었다.
[주-D004] 은(殷)나라의 …… 하겠다 :
앞 역사를 거울삼아 경계하는 것이니, 하후(夏后)의 임금이 정치가 잘못되어 망한 것을 그를 대신한 은(殷)나라가 경계로 삼는다는 말이다.
4.교 예문춘추관 태학사 정총(敎藝文春秋館太學士鄭摠)
권근(權近)
고려 국사(高麗國史) 37권을 올린 것을 자세히 알았다. 전세(前世)의 흥하고 쇠한 자취는 반드시 후인을 기다려서 글을 이루고, 후왕(後王)의 권장하고 경계할 사단은 전사(前史)에 실려있어 거울이 되는 것이다. 저 왕씨는 고려를 차지하여 삼한을 통합해 한 집을 만들고, 오계(五季)때로부터 중국을 섬기었다. 세대가 이미 오래이매 기록이 심히 호번하나, 여러 번 난리를 겪음으로 인하여 없어진 채 갖추지 못한 것도 있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손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매 소략함과 상세함이 같지 않고, 혹은 여러 가지 말이 있어서 곡직과 사정을 분별하기가 어렵다. 만약 일대(一代)의 실록(實錄)을 이루려 하면, 반드시 재주와 학문과 식견을 구비한 재주를 얻어야 하겠다.
경은 기질이 순수하고 맑으며 학식이 깊고 풍부하다. 언사는 간질(簡質)하여 믿을 수 있고 문장은 전아(典雅)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다. 피리(皮裏)의 춘추(春秋)는 능히 근엄하여 지킴이 있고, 가슴속의 권도(權度)는 사뭇 정밀하여 어긋나지 않았다. 내가 개국하는 때를 당하여 경의 협모(協謀)하는 힘을 입었다. 정령(政令)을 내는 부서에 승진하였고 사필(史筆)을 잡는 직책을 겸하게 하였다. 이미 정치의 보좌에 힘을 다하였고 또 사서(史書)의 찬술에 마음을 기울였다. 공양씨(公羊氏) 삼세(三世)의 일로써 사마광(司馬光)의 편년(編年)의 규례를 본받아, 전서(全書)를 완성하여 후세에 보여주게 하였다. 의논은 《당감(唐鑑)》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추함은 《한서(漢書)》에서 나지 않을 것이다. 변(變)과 상(常)이 있으니 필삭의 뜻이 나타났고,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하니 선악의 효과가 분명하다. 내가 마음으로 아름답게 여기어 상을 후하게 내리노라. 아, 화려해도 번다하지 않고 질박해도 저속하지 않으니 양사(良史)의 재주가 있다 하겠고, 다스림과 같이 하면 반드시 흥하고 어지러움과 같이 하면 반드시 망하는 것이니 어찌 전대의 일을 살피지 않겠는가. 이제 경에게 갖가지 물건을 주노니 이르거든 잘 받으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주-D001] 오계(五季) :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나기 전 후량(後粱)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의 오대(五代)가 있었는데, 이것을 오계(五季)라 한다.
[주-D002] 피리(皮裏)의 춘추(春秋) :
진(晉)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평하기를, “계야는 껍질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갖추어 있다.” 하였다. 그것은 겉으로 말을 잘하지 않으면서도 속에는 시비(是非)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주-D003] 공양씨(公羊氏) …… 일 :
공양고(公羊高)는 춘추(春秋)를 해설하는데, 난세(亂世), 승평(升平), 태평(太平) 세 가지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주-D004] 사마광(司馬光) …… 규례 :
역사 서적에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가 있는데,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편년체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고려사(高麗史)》는 기전체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편년체이다.
[주-D005] 당감(唐鑑) :
송나라 범조우(范祖禹)가 《당감(唐鑑)》을 지어서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것을 논평하였다.
5.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륜(河崙)이 악장(樂章)을 올렸기에 그에 답(答)하는 교서[答領司平府事河崙進樂章敎書]
권근(權近)
왕은 말하노라. 대개 들으니 군신(君臣) 간에는 경계하는 말을 드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성악(聲樂)의 도는 성취한 것을 상징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구서(九敍)의 노래에서 우(禹) 임금이 이미 경계하였고, 갱재(賡載)의 노래에서 고요(皐陶)가 또한 말하였으니, 이것은 우(虞)나라 조정의 군신이 서로 경계하여 지극한 정치를 일으킨 것이다. 성주(成周)에 이르러서는 그 도가 차츰 구비되어 아(雅)와 송(頌)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귀에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경은 자품이 명민하고 학술이 정미하며, 보는 것은 옳아서 우뚝 높고 지킴은 확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들어와 계책을 진달하매 반드시 규간(規諫)과 보익(補益)을 다하였고 나가서 정사를 베풀매 반드시 정밀하고 자상하였다. 일찍이 힘을 다하여 사직을 안정시켰고, 또 정성을 다하여 천명을 도왔다. 큰 공적을 아름답게 여기어 두 번이나 맹서를 함께 하였고, 백료의 어른이 되어 나의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지금 바친 근천정(覲天廷)ㆍ수명명(受明命)이라는 악장(樂章) 두 편을 보니, 다만 노래하고 읊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계함에 있어서도 가장 절실하다. 내가 명(明)나라 조정에 들어가 조회한 것은 신하의 직분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명령을 받은 것은 천자의 은혜가 다행히 미친 것이다. 부덕한 나에게 노래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경이 시가(詩歌)를 지어서 경계하는 뜻을 붙였다. 이는 대개 길이 창업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그 성취한 것을 영원히 보존토록 하자는 것이니, 충의의 정성이 아련하여 참으로 가상하다. 더구나 그 사의(辭義)가 청아하고 성기(聲氣)가 화평하여, 옛날의 작자와 짝이 될 만하고 또 후세에 전할 만하다. 관람하는 사이에 참으로 감동되고 부끄러움이 깊었다. 이미 유사(有司)로 하여금 관현(管絃)에 올려서 연향사(宴享祀)의 음악으로 쓰게 하였으니, 규계(規戒)하는 말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아, 칠덕(七德)의 춤과 노래는 비록 사업과 공적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우나, 오언(五言)을 출납하여 다스려지고 게으름을 살피어 허물이 없어야 하겠다. 글월로 보내게 되니 뜻이 고루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주-D001] 구서(九敍)의 …… 경계하였고 :
《서경》을 보면, 우(禹)가 순(舜)에게, “구덕(九德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ㆍ곡(穀)ㆍ정도(正徒)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이 이미 순조롭게 되었으니, 그것을 노래할 만합니다.” 하였다.
[주-D002] 갱재(賡載)의 …… 말하였으니 :
갱재(賡載)는 계속하여 화답한다는 말인데, 《서경(書經)》에 순(舜)이 노래를 지어 부르니, 고요(皐陶)가 계속하여 부르기를, “원수(元首)가 밝고 신하가 어질면 모든 일이 편안하고, 원수가 자질구레하고 신하가 게으르면 모든 일이 타락되오.” 하였다.
[주-D003] 칠덕(七德)의 춤과 노래 :
《춘추좌씨전》을 보면, “무(武)에 7덕이 있다.” 하였는데, 금포(禁暴)ㆍ전병(戰兵)ㆍ보대(保大)ㆍ정공(定功)ㆍ안민(安民)ㆍ화중(和衆)ㆍ풍재(豐財) 등이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그 뜻을 취하여 칠덕무(七德舞)를 만들었다.
[주-D004] 오언(五言) :
《서경》을 보면, “음률(音律)은 정치의 다스려지고 게으름을 살피는 것이며, 또 오덕(五德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知)ㆍ신(信))의 말을 출납하여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다.” 하였다.
6.재이(災異)로 인하여 말[言]을 구하는 교서[因災異求言敎書]
권근(權近)
왕은 말하노라. 박덕한 내가 한 나라 신민의 위에 의탁되매, 위로는 태상왕(太上王)의 창업이 쉽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지키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하였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아래 사람의 심정이 위로 통달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신문고(申聞鼓)를 두어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건만 어리석은 나는 덕에 밝지 못하여, 즉위한 이래로 재앙과 변괴가 겹쳐 왔다. 이에 두 번 교서를 내리어 바른 말을 들려 주기를 구하였던 바, 모두 쓸 만한 말이었으나, 다 거행하지 못하여 미더움을 잃은 것이 많았다.
근자에 큰 바람이 나무를 뽑고 오랜 비가 곡식을 해치고 산이 무너지고 집들이 떠내려 갔으니, 음요(陰妖)의 재앙이 오늘날보다 더 참혹할 수 없다. 화기가 상하고 재앙을 부르는 것은 그 허물이 실상 내게 있으매, 스스로 아프게 책망하여 깊은 못에 떨어지는 것 같다. 이지러진 내 덕을 어떻게 닦아야 하며, 잘못된 국정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시설(施設)과 영위(營爲)를 어떻게 하면 하늘 뜻에 합할 수 있으며, 향사(享祀)를 어떻게 하면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전례(典禮)가 어찌하여 다 차례대로 되지 못하고, 기강이 어찌하여 다 밝지 못하며, 쓰고 버리는 것이 어찌하여 다 마땅함을 얻지 못하고, 청탁하는 것이 어찌하여 다 행해지지 않도록 하지 못하는가. 전형(銓衡)하여 뽑는 것이 어찌하여 막힘이 있으며, 소송이 어찌하여 오래 지체되며, 풍속이 어찌하여 아름답지 못하며, 부역이 어찌하여 고르지 못한가. 강포한 자가 법을 흔드는 것을 어찌하면 없게 하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횡포한 짓을 하는 것을 어찌하면 없게 하며, 형벌을 어찌하면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게 하며, 법령이 어찌하면 부산스럽게 고치는 것이 없게 하겠는가. 원망과 허물이 형체가 없는 속에 숨어 있어 밖으로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인가. 재앙과 혼란이 소홀히 여기는 곳에 감추어 있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가. 말이 여기에 미치매 깊이 두렵도다. 재앙을 오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재앙을 없애는 방법은 어디 있는가?
너희 대소 신료와 시산(時散)의 육품(六品) 이상은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 어리석은 나의 과실로부터 아래로 생민의 이해에 이르기까지 꺼리지 말고 숨김없이 직언을 올리되, 권세 있고 고귀한 사람이라 하여 기탄하지 말고, 소회를 낱낱이 진술하여 숨김 없이 다 말하라. 내가 가려서 받아들여 정치에 이롭게 할 것이요, 비록 맞지 않는 말이 있을지라도 또한 넉넉히 용납할 것이다.
아, 덕을 잃는 것이 재앙을 오게 하는 까닭이니, 마땅히 자기를 허물하고 반성하여야 한다. 대개 말을 구하는 것은 장차 허물을 고치고자 함이니, 어찌 감히 허심탄회하게 듣지 않겠는가. 각각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내 정치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7.정 대마도 교서(征對馬島敎書)
어변갑(魚變甲)
왕은 말하노라. 무력만 일삼는 것은 성현이 경계하는 바이나 죄를 성토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의 부득이한 일이다. 옛적에 성왕(成王)과 탕왕(湯王)이 농사일을 버리고 하(夏)나라를 쳤으며, 주 선왕(周宣王)이 6월에 험윤(玁狁)을 쳤는데, 그 일이 비록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죄를 성토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은 마찬가지다.
대마도(對馬島)라는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험하고 궁벽하며 협소하고 누추한 곳이므로 왜노가 웅거해 사는 것을 들어 주었던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에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어서, 경인년 이후로부터 변경에서 방자하게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군민을 살해하고, 우리 백성의 부형을 잡아가고, 가옥을 불태운 탓에, 고아와 과부들이 바다 섬 속에서 울고 헤매지 않는 해가 없었다. 이에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치며 분통이 터져서, 놈들의 살을 씹어 먹고 놈들의 살가죽을 깔고 자려고 생각한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용비(龍飛)의 운에 응하여 위엄과 덕을 사방에 입히어 신의로 무마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그 흉하고 탐내는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여 병자년에 동래(東萊)에서 우리 병선 20여 척을 약탈하고 군민을 살해하였다.
내가 대통(大統)을 이어 즉위한 이후에도 병술년에는 전라도에서, 무자년에는 충청도에서, 배에 실은 양곡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병선을 불사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만호(萬戶)까지 죽이기도 하여 그 포학이 극도에 달하였고, 두 번 제주(濟州)에 들어와서 살상한 것이 또한 많았다. 이것은 사람을 탐내는 성낸 짐승이 간교한 생각만 품고 있는 것으로,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런데도 내가 오히려 그 죄악을 용서하여, 함께 따지지 않은 굶주린 것을 진휼했으며, 통상(通商)도 허락하는 등, 무릇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 주어 함께 살아갈 것을 기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또 이제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는 몰래 비인포(庇仁浦)에 들어와서 인민 3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는 병선을 불태우고 장사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황해(黃海)에 떠서 평안도(平安道)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장차 명나라의 지경을 범하려 하였다. 그러니 은혜를 잊고 의를 배반하고 천상(天常)을 어지럽힌 것이 어찌 심하지 않은가.
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으면 오히려 천지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왜구가 제 마음대로 탐욕과 해독을 부리어 백성을 살육하여, 스스로 하늘의 앙화를 불렀다. 그런데도 참고서 정벌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겠는가. 지금 농사 때를 당하여 장수를 명하고 군사를 내어 그 죄악을 치는 것은 또한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 아, 간흉을 쓸어 버리고, 백성들은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여 이렇게 이해(利害)를 열거하여 내 뜻을 신민에게 알리는 것이라.
[주-D001] 천상(天常) :
천리(天理)에서 나온 떳떳한 도리인데, 군신(君臣)ㆍ상하(上下) 등의 질서를 말한 것이다.
8.유 대마주서(諭對馬州書)
변계량(卞季良)
선지(宣旨)를 다음과 같이 한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낼 때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었고, 이치도 역시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를 내리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옛날에 제왕들이 하늘의 도를 받들어서 백성에게 농사짓는 것을 가르쳐 오곡(五穀)을 심어 그 형체를 기르게 하며, 고유한 의리에 따라 개발을 지도하고 인도하며 그 마음을 착하게 하였다. 만일 강하고 사나워 도리를 좇지 않고 재물을 탐하여 사람을 죽이며, 조금도 제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개인에겐 형육을 가하고 집단에겐 정벌을 행하였다. 요(堯)ㆍ순(舜)ㆍ삼왕(三王)의 사람을 다스리는 도는 이와 같을 따름이다.
대마도(對馬島)는 경상도 계림(鷄林)에 예속되어 본래 우리나라 땅으로 문적에 실려 있어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왕래가 곤란함으로 인해 백성이 살지 않았었다. 이에 제 나라에서 쫓겨나서 돌아갈 곳이 없는 왜놈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서 소굴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틈을 타서 몰래 쳐들어와, 백성들을 협박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빼앗아 가고, 학살을 자행하여 남의 처자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며, 남의 가옥을 불태워 없애는 등 흉포하고 극악한 짓을 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응하여 혁명하고 국가를 창조하였는데, 저자도 바뀌지 않고 대업이 이미 안정되었다. 성ㆍ탕과 무왕(武王)의 성덕(盛德)으로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국세가 크게 떨치고 병력이 막강하여 바다와 산악도 관통할 수 있고, 하늘과 땅을 날고 뛸 수도 있었는 바 우람하고 성대하여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모두가 두려워서 굴복하였다. 이런 시기에 한 편장(褊將)을 명하여 대마도의 조그마한 무리를 섬멸하는 것은, 이는 마치 태산(泰山)으로 계란을 누르고, 맹분(孟賁 중국 제(齊)나라 때 역사(力士)의 이름)과 하육(夏育 옛날의 장사)이 어린아이를 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우리 태조께서 문덕(文德)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둬들여 은혜와 신의로 회유하는 도를 보여 주었다.
나는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래로 선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무마하고 불쌍히 여기었다. 이에 비록 절도의 행위를 저질러 공손치 못한 짓을 하였으나,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아비 정무(貞茂)가 덕의를 사모하고 충성을 바친 것을 생각하여, 죄를 범하여도 관계하지 않았으며, 신사(信使)를 접대할 때마다 관사를 주어 머무르게 하고, 예조에게 명하여 후하게 위로해 주게 하였다. 그리고는 또 생계가 어려움을 생각하여 상선(商船)의 왕래를 허하였으며, 경상도의 쌀과 조를 대마도에 보낸 것도 해마다 수만여 석에 달하였다. 그만하면 그 형체를 길러 굶주림을 면할 수 있고, 그 양심을 키워서 절도 행위를 부끄럽게 여겨 천지 간에 함께 살 수 있을만 하였는 바,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근자에 와서 은혜를 잊고 의리를 거역하며 스스로 화의 근원을 만들어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그러나 평소에 귀화하였거나, 장사와 통신(通信)을 목표로 하여 온 자나 근래에 위풍을 바라보고 항복해 온 자는 모두 죽이지 않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살게 하고 옷과 음식을 주어서 그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거느리고 나가 그 섬을 포위하여, 땅을 휩쓸어서 항복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섬 사람들이 아직도 고집하고 깨닫지 못하니, 내가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다.
섬 속의 인구가 아마도 수천 명이 될 터인데 그 생계(生計)를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속의 땅이 대부분 돌산으로서 비옥하고 넓은 땅이 없어서 곡식을 심을 곳이 없는 탓에 틈을 타서 몰래 침입해 남의 재물과 곡식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대개 평소부터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유계(幽界)에서는 천지 산천의 신명이 재앙을 내리고, 양계(陽界)에서는 좋은 말과 큰 배와 예리한 병기와 강한 군사로 수륙(水陸)의 방비가 지극히 삼엄하다. 그러니, 어디 간들 주륙 되는 근심을 면하겠는가. 다만 생선을 잡고 미역을 따고 매매하는 일이 생계(生計)의 바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미 은혜를 배반하고 의리를 등졌다. 이는 제 스스로 끊은 것이요, 내가 먼저 끊을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어 버리면 굶주림을 면치 못하여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이 점에 대해서 계책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선뜻 뉘우치고 깨달아 다시 몰려와서 항복한다면 도도웅와(都都熊瓦)는 좋은 벼슬과 후한 녹을 줄 것이고, 그 부하 관원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例)와 같이 하겠으며, 그 나머지 하찮은 무리들도 역시 모두 의복과 양식을 넉넉히 주고, 비옥한 땅에서 농사 짓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과 똑같이 보고 똑같이 사랑하여, 도적의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며, 의리가 좋은 것임을 모두 알게 할 것이다. 이것이 그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길이요, 살아 나가는 길일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온 섬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또한 무방한 일이다.
만일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내게 항복하지도 않고, 여전히 도적질이나 하려는 흉계를 품고 계속 섬에 눌러 있는다면, 마땅히 크게 병선을 준비하여 군량을 가득 싣고 가서 온 섬을 에워싸고 공격할 것이니, 시일이 오래되면 반드시 그 속에서 자멸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또 용감한 군사 10만 명을 뽑아서 곳곳에서 쳐들어간다면, 주머니 속의 물건이 어디로 가겠는가. 반드시 부녀자 어린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땅에서는 까마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울 것이 의심없는 일이다. 그러니 어찌 깊이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는 화가 오고 복이 되는 길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아득하여 추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화복이란 모두 자신이 구하는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열집 밖에 없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지금 대마도 온 섬 사람들도 모두 타고난 착한 성품이 있으니, 어찌 시세를 알고 의리를 깨달은 자가 없겠는가. 병조는 대마도에 공문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소회를 유시하여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고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여, 나의 생민(生民)을 아끼는 뜻에 부응하게 하라.
9.재유 대마도서(再諭對馬島書)
변계량(卞季良)
선지(宣旨)를 다음과 같이 한다. 하늘이 내려 준 떳떳한 성품은 사람마다 다 같이 가진 것이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사람마다 같은 마음이다. 온 천하 사람들이 그 언어와 습관은 비록 다르나, 하늘에서 내려준 떳떳한 성품과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다른 것이 없다.
지금 대마도 왜인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고 도둑질을 자행하다가 여러 번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기탄함이 없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재주가 달라서가 아니라, 작은 섬인 대마도는 대개가 돌산으로 되어 있어 토지가 척박하여 농경에 적합하지 않고, 또 바다 가운데에 막혀 있어서 겨우 어곽(魚藿)을 가지고 무역에 상통하는 것도 계속하기 어려운 형세라서 대부분 해채(海菜)와 초근(草根)을 식량으로 삼기 때문에 굶주림에 허덕이어 그 양심을 상실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으로, 내가 심히 민망히 여기는 것이다.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아비 종정무(宗貞茂)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지혜가 있으며, 도의(道義)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하여, 무릇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두 요청하였다. 일찍이 진도(珍島)ㆍ남해(南海) 등 섬으로 자기 민중과 더불어 와서 살고 싶다고 청하였으니, 자손 만대를 위한 염려가 이 얼마나 깊은가.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어 그 소청을 들어 주려 하였는데, 정무(貞茂)가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도도웅와가 만일 나의 인애(仁愛)하는 마음을 체득하고, 제 아비가 후사를 위해 염려한 계책을 생각하여, 그 무리에게 효유하여 빠짐없이 와서 항복하게 하면, 큰 벼슬과 인신(印信)을 주고 후한 녹과 전택(田宅)을 주어서 대대로 부귀의 낙을 누리게 하겠다. 그리고 그 부하 관원들은 모두 차례로 벼슬과 녹을 주어 후한 예로 대접하며, 나머지 작은 무리들도 또한 모두 소원에 따라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각각 농사 지을 준비를 마련해 경작의 이익을 얻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양심을 길러서 모두 착한 일은 마땅히 해야 하고 악한 것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알아서, 지난날에 물든 더러운 버릇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예의의 풍속으로 변하여 함께 무궁토록 복을 누리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농사는 시기를 늦출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농업을 하려 하면, 12월을 당하여 먼저 섬 안의 일을 주관하는 자를 보내어, 나의 지휘를 들어서 농량(農糧)과 농기구와 종자 등을 미리 준비하여야만 농사철을 당하여 결함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때를 놓치면 뒤늦는 것이니, 억지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청한 바 지난번에 나누어서 안치한 왜인들은 모두 여러 도로 하여금 관가에서 의복과 식량을 주어 그 생계를 유지하게 하고, 너희들이 와서 항복하는 날을 기다려서 곧바로 함께 모여 살게 하여 이산(離散)하는 근심이 없게 하겠다. 만일 그 부형이나 자제 중에 속히 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일을 주관하는 자가 나와서 장차 데리고 나가면 편리할 것이다.
아, 문덕(文德)을 펴서 사방을 회유하는 것은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본심이다. 무위(武威)를 떨치어 복종하지 않는 자를 섬멸하는 것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겠는가. 부득이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조에 명령하여 글월을 써 보내어 나의 지극한 생각을 유시함과 동시에,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어 길이 갱생의 희망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니, 나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뜻에 부응하게 하라.
10.교 졸 성녕대군 모서(敎卒誠寧大君某書)
변계량(卞季良)
왕은 이르노라. 수요(壽夭)가 고르지 못한 것은 타고난 천명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부자간의 지극한 정리(情理)는 천성에 박혀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심의 고유한 것이요, 기수(氣數)가 미리부터 정하여진 것이다. 네가 을유년에 나서 지금 열 네 살이 되도록 하루도 나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밥을 먹으려 하면 네가 반드시 먼저 맛보며, 내가 활 쏘는 것을 보려 하면 네가 반드시 수행하여 언제나 기거할 적에는 반드시 너와 같이 하였는데, 이제는 다 끝났다. 어떻게 마음을 잡으랴. 아, 슬프다. 너는 얼굴 바탕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조금도 부족한 데가 없고, 총명하고 온아하여 효도하고 공순하였다. 글을 읽어 때때로 익히며, 활쏘기를 배워 여러 번 맞추었다.
아내를 맞이하게 하고 또 대군(大君)을 봉하여, 장차 성인(成人)이 되어서 나의 늘그막을 위로하려 하였더니, 아,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네가 처음 병이 났을 때에 아이들의 보통 일로 생각하였더니, 병이 이미 위독하게 되고서야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빌지를 않은 까닭인가, 치료를 잘 못한 까닭인가? 희고 흰 네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있고, 낭랑한 네 말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있구나. 아, 슬프다.
나와 네 모친이 너를 통곡하는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의 효성으로 운명할 때도 부모를 생각하였으니, 황천(黃泉)에서도 한(恨)을 머금은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네가 내 자식으로서 효성 있고 또 재주 있어서 자식된 직책에 부족함이 없었다. 길고 짧은 명수(命數)는 하늘에서 전해진 것이니, 네 죄가 아니다. 네가 무엇을 한하겠는가.
나는 네 아비가 되어서 염습할 때에 의금(衣衾)도 살펴보지 못하고, 초빈할 때에 관도 어루만지지 못하며, 묻을 때에 광중(壙中)도 드려다 보지 못하여, 천승(千乘)의 임금이면서도 도리어 필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도 못하였으니, 내가 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나의 한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 슬프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너의 자급을 높이고 네게 시호(諡號)를 주었으니, 은수(恩數)가 융숭하여 상례(常例)와 다르다. 이제 근신을 진관사(津寬寺)에 보내어, 수륙(水陸)의 여러 물품을 베풀어 명복을 빌고 또 박전(薄奠)을 베풀어 제문으로써 권한다. 슬프다. 말에는 한이 있으니 할 말을 다해도 정은 다할 수 없다.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11.건주(建州)야인(野人)을 정벌(征伐)한 뒤에 파고(播告)하는 교서[征建州野人後播告敎書]
윤회(尹淮)
왕은 말하노라.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하늘의 운수에 응하여 개국한 다음, 안으로는 덕을 닦고 밖으로는 적을 물리쳐서, 우리 동쪽 나라를 편안히 하매, 북쪽 변방의 야인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여, 마치 개가 꼬리를 흔들 듯이 하면서 어여삐 여겨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 때문에 국경 안에 밥짓는 연기가 서로 연하고 사람과 가축이 들에 퍼져서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경보가 없었다.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대통(大統)을 잇고 기업(基業)을 지키면서는, 포용해 주고 고루 덮어 주어서 다른 종족을 길들여 복종시키매, 섬 오랑캐와 산 오랑캐가 모두 복종하였다.
부덕한 나로도 조종(祖宗)의 모훈(謀訓)을 이어 받들어 야인을 기르고 대우함에 특별히 불쌍하게 여겨 때때로 그들의 굶주리고 궁핍함을 구제하여 주었다.
근자에 파저강(婆猪江) 근처에 사는 용주(龍主) 이만주(李滿住)가 명나라의 반적(叛賊) 양목답올(楊木答兀)과 서로 결탁하여, 요동(遼東)개원(開原) 방면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로 만들었는데, 노비가 된 자들이 혹독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보존하려고 우리나라로 도망하여 오는 것이 연하여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나는 사대(事大)의 정성으로써 모두 상국으로 돌려 보냈는데, 야인들이 이것을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우리 강토를 엿본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선덕(宣德) 7년 11월에 국경이 공허한 틈을 타서 강계(江界) 여연구자(閭延口子)에 돌입하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사람과 가축과 재산을 약탈하였으니, 베푼 은혜를 배반하고 극도로 흉악하게 죄가 있어 죽임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도리어 속여 말하기를, “홀자온(忽刺溫)이 멀리 와서 도둑질함으로 약탈하여 가는 인구와 마필을 탈환하여 머물려 두었다.” 하고 우리를 속였다.
이에 조정에서 이미 적도들의 정세를 갖추어 명나라 천자에게 주달하고, 금년 4월에 장수를 명하여 죄를 물음과 동시에 길을 나누어 함께 진군하여 적의 본거지를 부수게 하였다. 그러면서 병기(兵器)를 쓰지 않는 무(武)와 죽이지 않는 인(仁)을 생각하여 여러 장수에게 시키기를, 저것들이 만일 손을 들고 항복하거든 곧 항복을 받고, 특별히 위엄을 보이어 뉘우치고 두려워하게 하며, 보복을 가하여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이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저것들이 늑대의 성질을 고치지 않고 짐승의 마음이 변함이 없어서, 벌처럼 뭉치고 개미처럼 모이어 감히 항거하였다.
이에 우리 군사가 곧 쳐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것이 모두 5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죽음을 겨우 벗어나 혼이 달아난 자들이 모두 무너져 달아나고 숨어 엎드려서 적의 무리가 평정되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병기(兵器)는 비록 어지러움을 구하고 사나운 자를 베는 기구이기는 하나, 겨울과 여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군사를 움직일 때가 아니다. 그러나 주 선왕(周宣王)이 6월에 정벌한 것은 험윤(玁狁)이 몹시 치열하였기 때문으로 일이 위급한 경우에 부닥치면 사람들이 포학이라고 하지 않는 법이다. 어리석은 저 오랑캐가 지형이 험한 것만을 믿고 천리(天理)를 거역하여 내 변방 백성들을 마구 학대하였으니, 저들의 화(禍)는 자초한 것이고, 나의 노함은 부득이한 것이다.
군사를 내는 것은 명분이 있어야 하고, 군은 곧은 것이 굳센 것이다. 조종의 위령을 힘입어 군사들이 용감하고 날카롭게 전진하였다.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전군(全軍)이 저들의 지경으로 쳐들어갔다. 아, 깊숙한 소굴이 깨트러졌으니 정히 적의 무리가 전멸되는 때요, 강토가 깨끗해졌으니 한 번 수고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공효를 거두게 되었다. 만방에 포고하여 모두 들어 알게 하라.
12.폐 세자빈 김씨 교서(廢世子嬪金氏敎書)
윤회(尹淮)
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대개 들으니 서로 배필이 된다는 것은 생민(生民)의 첫 출발로, 운조(運祚)의 길고 짧은 것과 국가의 성하고 쇠하는 것이 여기에 매어 있다. 옛적에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성녀(聖女)사씨(姒氏)를 얻어 배필로 삼았는데, 화답하여 우는 요조(窈窕)의 덕으로 늘어져 굽어서 아래에 미치는 인(仁)을 베풀어 아들이 많은 응험을 부르고 자손을 위한 계획을 남겼으니, 아,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세로 내려와서는 순후한 풍속이 차츰 무너지고 여자에 대한 훈계가 전해지지 않아서, 후비(后妃)와 빈어(嬪御)가 간혹 부부간의 도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총애를 다투어 미도(媚道)를 끼고 염승(厭勝)을 행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이 있다. 경적(經籍)을 상고하여 보면 안방 은미한 곳의 말이 대개 애매한 것이 많지마는 만일 정상과 형적이 완연하게 드러나서 가리고 덮을 수 없다면, 이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이 심히 엄정하여 매양 내조(內助)를 얻었다. 내가 지난 해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씨(金氏)가 누대 명가(名家)이므로 간택하여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뜻밖에도 김씨가 미도(媚道)와 염승(厭勝)을 행하여 그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곧 궁인을 보내어 심문하였더니, 김씨가 이리이리 대답하였는데, 말과 증거가 명백하여 옛적의 애매하고 의심스럽다는 일들과 비교가 안 되었다. 아,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슬프다.
세자를 책봉하고 배필을 택하는 것은 장차 종사를 받들고 모의(母儀)를 이루어 만세의 운조(運祚)를 누리려 함이다. 김씨가 세자의 배필이 된 지가 두어 해도 못 되었는데 꾀를 내어 감히 요사한 짓을 한 것이 벌써 이와 같다. 그러니 어찌 투기하는 마음이 없고 단정하고 온화한 덕을 나타내어서, 닭이 울었다고 세 번 고(告)하는 것을 이루고, 종사(螽斯)의 시(詩)와 아들이 백이나 되는 상서[祥]를 읊게 될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실로 조종(祖宗)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요, 내전(內殿)에서 용납되지 못할 일이니, 사리가 폐출하는 것이 합당하다. 내가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미 선덕(宣德) 4년 7월 20일에 종묘에 고한 다음, 김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책봉한 인(印)을 회수하며, 사제(私第)로 추방하여 덕행이 엷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가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뜻에 영합하여 순종하고 아첨하여 죄악을 저지르게 한 시녀 호초(胡椒)는 해당 법관에게 맡기어 극형에 처하였다. 생각건대, 이 이상한 일은 실로 나라 사람의 보고 듣는 것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대소 신료들이 그 본말을 자세히 알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이에 교유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주-D001] 화답하여 …… 덕 :
《시경》에, “관관(關關)한 저구새는 하수 언덕에 있네. 요조(窈窕)한 숙녀(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왕(文王)의 부부를 읊은 것이라 한다.
[주-D002] 늘어져 …… 인(仁) :
《시경》에, “아래로 굽은 나무에 칡덩굴이 매었네.” 하는 시가 있는데, 이것은 후비(后妃)가 질투하는 마음이 없이 여러 첩을 잘 거느리는 데 비유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주-D003] 미도(媚道) :
여인들이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무당의 방술로 자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주-D004] 염승(厭勝) :
여인이 질투로 남을 저주(詛呪)하는 요망스러운 처방을 말한다.
[주-D005] 닭이 …… 것 :
《시경》을 보면, 어진 후비(后妃)가 같이 자는 임금에게, “닭이 울었소. 신하들이 조회하러 모였소.” 하는 시가 있는데, 그 시가 삼장(三章)으로 되었다.
[주-D006] 종사(螽斯)의 시 :
후비(后妃)가 질투하지 않아서 여러 첩에게서 자식이 많이 나는 것을 읊은 시이다.
[주-D007] 아들이 …… 것 :
《시경》을 보면, “태사(太姒)가 덕이 있어 아들이 백이나 된다.” 한 시가 있다.
13.휼형 교서(恤刑敎書)
무명씨(無名氏)
형벌이라는 것은 정치를 돕는 기구로서 비록 옛적에 좋은 세상에서도 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순 임금이 천자가 되자 오직 형벌이 공정치 못할까 근심하였고,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자 오형(五刑)을 밝혀 오교(五敎)를 도와서 능히 화평의 정치를 이루었으니, 아, 거룩도 하였다. 그 뒤로 진시황(秦始皇)에 이르러서는 잔인하고 포학한 것만을 숭상하였고, 조고(趙高)의 무리는 혹독하고 급한 것만 힘써서, 법에는 어짐과 은혜가 전혀 없음으로 해서 2대 만에 망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는가.
대개 옥(獄)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사에 관련되는 것이다. 만일 그 진정(眞情)을 얻지 못하고 채찍과 종아리채로 추궁하여, 죄 있는 자가 요행으로 면하고 죄 없는 자가 죄에 빠지게 한다면 형벌이 엄중하지 못하여 원통함을 머금고 굴욕을 짊어지고서도 끝내 신원할 수가 없게 되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고 수한(水旱)의 재앙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고금의 공통된 근심이다. 내가 매우 불쌍하게 생각하여 전대(前代) 형옥(刑獄)의 변고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그 중의 현저한 것만을 들기로 한다.
진(晉)나라 때에 임치현(臨淄縣)에 한 과부가 있어서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나이 젊으므로 개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며느리는 수절하여 개가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민망히 여기어 몰래 자살하였다. 친족들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죽였다고 고발하여 관에서 국문을 하매, 과부가 혹독한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자복하여 옥사(獄事)가 결정되었다. 그때 마침 조여(曹攄)가 현령(縣令)이 되어서 과부의 원통함을 알고 다시 심문하여 실정을 모두 알아내니, 그 세상 사람들이 명관(明官)이라 일컬었다.
당(唐)나라 때에 회서(淮西)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임금이 병사(兵事)를 모두 승상 무원형(武元衡)에게 맡기어 토벌하게 하였다. 성덕(成德)왕승종(王承宗)이 사람을 보내어 중서성(中書省)에 나와서 오원제를 위하여 유세(遊說)하였는데, 말뜻이 불손하므로 원형이 꾸짖어 내쫓았다. 그러자 왕승종이 또 글을 올려서 무원형을 헐뜯었다. 무원형이 죽게 되니, 왕사측(王士則)이 고하기를, “왕승종이 군사 장연(張宴)을 보내어 죽인 것이다.” 하므로, 잡아서 국문한 바, 장연의 무리가 모두 자복하여 드디어 목을 메었다. 그 뒤에 평로(平盧) 이사도(李師道)가 명을 거역하다가 복주되었는데, 그 문서를 조사하여 보니 무원형을 죽인 자에게 상을 준 것이 있어서 비로소 무원형을 죽인 자가 왕승종이 아니고 이사도란 것을 알았다.
송(宋)나라 때 전약수(錢若水)가 동주(同州)의 추관(推官)이 되었는데, 어떤 부잣집의 어린 여종이 도망하여 간 곳을 알지 못하므로 여종의 부모가 고을에 하소하였다. 그래서 녹사(錄事)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는데, 녹사는 일찍이 그 부자에게 돈을 빌리려다가 빌리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에 녹사가 탄핵하기를, “부민(富民) 부자(父子) 몇 사람이 함께 여종을 죽이고 시체를 물속에 버려서 그 시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니, 부민이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무복(誣服)하였다. 고을 관원이 자세히 심사하여 보고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전약수만이 홀로 의심하여 그 옥사를 며칠 동안 머물러 두고 결단하지 않았다. 그러자 녹사가 약수에게 욕하기를, “네가 부잣놈의 돈을 받고 죽을 죄인을 석방하려 하느냐.” 하였다. 전약수가 웃으며 사정하기를, “지금 두어 사람이 죽을 판이니 조금 더 두고서 그 옥사를 자세히 살펴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그리고는 열흘 동안을 보류하였다. 그 고을 원이 여러 번 재촉했으나 결제하지 않으니, 아래위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전약수가 어느날 아침에 고을 원에게 나가서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내가 그 옥사를 보류한 것은 비밀히 사람을 시켜서 그 여종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야 찾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비밀히 사람을 시켜 여종을 원에게 보냈다. 원이 발을 치고 여종의 부모를 불러다가 묻기를, “네가 이제 네 딸을 보면 알겠느냐.” 하니, 그의 대답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하므로, 발 안에서 여종을 끌어내어 보이니, 여종의 부모가 울며, “제 딸입니다.” 하였다. 이에 부민 부자를 모두 석방하니, 그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아니었다면 제가 멸족을 당할 뻔하였습니다.” 하였고, 원은 말하기를, “이것은 추관(推官)의 은덕이다.” 하였으며, 송 태종(宋太宗)이 그 사실을 듣고 곧바로 표창하고 발탁하였다.
또 호북시(湖北市)에 내외(內外)만 사는 집이 있었는데, 아내가 예뻐서 그 남편과 맞지 않았다. 우연히 점치는 자가 그 집에 기숙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그가 씩씩하고 잘난 것을 사모하여, 드디어 남편을 죽이고 실정을 고하며 함께 딴곳으로 가서 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점치는 자가 그 여자의 불의(不義)한 행동을 분하게 여기고 거짓으로 그 남편의 시체를 보자 하고 함께 나가서 시체에 꽂힌 칼로 그 여자를 죽이고 가버렸다. 아침이 되자 항상 그 집에 와서 일하던 일꾼이 와서 보니, 두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워 유혈이 땅에 가득하므로 혹시 자기에게 누가 될까 두려워하여 곧 도망하였다. 조금 뒤에 이웃 사람들이 비로소 발견하고 그 일꾼을 붙잡아 관청에 알리니, 그 자는 다시 변명도 못하고 무복(誣服)하게 되었다. 점치는 자는 떠나서 전과 같이 날마다 저자에서 점을 치고 있다가, 그 일꾼이 장차 정형(正刑)에 처해진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여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헌사(憲司)에서는 점치는 자가 제 남편을 죽인 아내를 죽였으며, 또 자수하였으니 의(義)로운 사람이라 하면서 일꾼과 함께 석방하였다.
또 임강(臨江)에 왕삼랑(王三郞)이라는 사람이 있어 강물을 굽어보는 높은 누각에 살고 있었는데, 그 아내가 난간에 기대어 과일을 먹다가 우연히 과일 씨가 그 밑의 배[舟] 안에 있는 소년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소년이 머리를 들어 쳐다보고 아마 그 여자가 자기를 유혹한 것으로 생각하여 어둘 녘에 그 집에 들어가니, 집안이 고요하여 인기척이 없었다. 이에 할 수 없이 다시 배로 돌아왔는데, 어쩐지 신발이 축축하므로 부뚜막에 놓아서 말렸다. 그날 밤에 왕삼랑이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아내는 피살되어 있고 피가 흘려서 땅에 가득하였다. 아침에 이웃 사람들을 모아서 탐색한 결과 피 묻은 발자국이 곧장 배 안으로 들어간 것을 발견하고 드디어 소년을 붙잡아서 관청에 넘기니, 소년이 다시 변명도 못하고 무복(誣服)하였다. 다만 여자의 신과 죽인 칼이 보이지 않았는데, 옥리(獄吏)가 강정(江亭) 근처에 있는 패자(牌子)를 가리키며 물건이 있는 것 같다 하므로, 가서 보니 과연 신과 칼이 있어 죄목(罪目)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옥급(獄級)으로 있는 진청(陳靑)만 홀로 의심을 가지고 있다가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는데, 아침 일찍 강가를 지나갈 적에, 왕삼랑의 이웃집 여자가 옥사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진청이 대답하기를, “배 안의 소년을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진짜 범인은 아무 옥리이다.” 하니, 진청은 사리(司理)에게 밀고(密告)하였다. 사리가 옥리를 불러 심문하여 그 실정을 갖추어 알았다. 이에 소년은 석방하고 옥리는 사형에 처하였다.
원(元)나라 때에 원주(袁州) 평향(萍鄕)에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고개 북쪽에 사는 장씨(張氏)가 고개 남쪽에 사는 주씨(周氏)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아내가 친정에 다녀 올 적에 장씨가 그 아우를 시켜 마중을 나가게 하였다. 오는 길에 고개 마루에 이르러 아내는 피곤해서 잠깐 앉아 쉬고 아우는 먼저 어린애를 안고 돌아왔다. 오래되어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장씨가 아우와 함께 앉았던 곳에 가 보았으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주씨의 집으로 가보니, 거기도 없었다. 주씨와 함께 다시 고개에 올라서 찾아보니, 아내는 덩굴 속에 죽어 있었다. 주씨가 장씨의 아우를 묶어 가지고 관청으로 갔다. 아우가 난행을 하려다가 순종하지 않으므로 말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죽인 것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었다. 아우가 드디어 무복하였다. 관(官)에서는 도관(都官)에게 독촉하여 머리와 칼을 찾아 들이라고 하니, 도관이 머리와 칼을 바쳤다. 이에 아우는 사형에 처하였다. 1년이 넘어서 장씨의 이웃에 사는 두 사람이 그 아내를 건강(建康)의 여관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로 보고 깜짝 놀라서 이웃 사람이 그 사실을 얘기하였다. 아내가 울며 말하기를, “원통한 일이다. 그때 고개 위에 앉아 있노라니 어떤 수염 난 사람이 채롱을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왔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자 칼을 빼 가지고 나를 위협하여 내 의복과 신을 빼앗아 채롱 속에 있는 여자를 불러 내어 입히었다. 그런 다음 그 여자의 목을 잘라서 채롱 속에 넣고 시체는 덩굴 속에 밀어 넣은 뒤, 나를 채롱 속에 들어가게 하여 짊어지고 갔는데, 반 달이나 넘어서 이곳에 왔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수염 난 자가 나타났으므로 두 이웃 사람이 그 자를 묶어서 관청에 알렸더니, 그 자는 곧 두말 없이 자백하였다. 형부(刑部)에 상신(上申)하여 명을 받아 수염 난 자를 사형에 처하고, 사건을 맡은 관원은 아우의 목숨으로 대살(代殺)하고, 고을 아전은 각각 자자하고 적몰하였으며, 읍재(邑宰)와 사리(司理)와 검복관(檢覆官)은 모두 강등하고 파면하였다. 처음에 도관(都官)이 관사(官司)의 독촉에 못 견디어 어느 부인의 관(棺)을 훔쳐서 열고 목을 잘라다가 바친 것이었다. 그도 역시 사형에 처하였다.
또 서울에 사는 재목국(材木局)의 목공(木工)이 공장(工長)과 다투었는데, 공장이 잘못인데도 승복하지 않으므로 목공이 드디어 끊고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다른 목공들이 말다툼한 것이니 큰 혐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술과 안주를 추렴하여 목공에게 주면서 공장의 집에 가라고 강권하여, 마침내 그 집에 가서 화해하고 저물 녘에 술이 취하여 돌아왔다. 원래 목공의 아내는 음탕하여 진작부터 간부(間夫)와 더불어 남편을 죽이려고 했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날은 원한을 진 사람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돌아왔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죽였다. 그런데 창졸간에 시체를 감출 곳이 없어 방 구들장을 뜯고서 그 속에 넣고 구들장을 전과 같이 덮었었다. 날이 밝자 목공의 아내가 공장의 집에 가서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남편이 어제 돌아오지 않았으니 반드시 네가 죽인 것이다.” 하고, 경순원(警巡院)에 고소하였다. 경순원에서는 공장이 목공과 원수간임을 알고 잡아다가 고문하니, 공장이 독한 매를 이기지 못하여 무복하였다. 경순원에서 공장에게 시체 둔 곳을 캐물으니 구덩이 속에 버렸다고 하므로 오작(仵作) 두 사람에게 책임지워 구덩이 속에 가서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형부어사(刑部御使)와 경윤(京尹)이 서로 옥사를 갖추기를 재촉하면서, 매우 급히 서둘렀는데, 열흘, 이레, 닷새, 사흘로 기한을 연장하면서 네 번이나 태형(笞刑)을 당하기까지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기한이 더욱 절박하여지자 두 사람이 딴 사람을 죽여서 명령에 응하기로 작정하고, 저녁 때 물가에 앉아 있었다. 그때 어떤 늙은이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므로 그를 물속에 밀어 넣고 나귀는 놓아 보냈다. 그런데 생긴 모양이 같지 않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곧바로 내놓지 못하였다. 또 두어 번 태형을 당하면서 십여 일을 끌다가 늙은이의 얼굴이 썩어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되어서야 경순원에 바쳤다. 경순원에서 목공의 아내를 불러 살펴보게 하니, 목공의 아내가 어루만지며 통곡하여 말하기를, “틀림없는 내 남편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남편의 옷을 가지고 구덩이 위에 가서 혼(魂)을 부르고 비녀와 귀거리를 빼어 관곽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 옥사도 드디어 작성되어 경순원에서 공장(工長)의 사형안(死刑案)을 처결하여 올렸으나, 허가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나귀 탄 늙은이의 가족은 사방으로 늙은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나귀 가죽을 지고 길로 지나가는데 분명히 자기네가 기르던 나귀의 가죽이므로, 그 사람을 붙잡아서 고을에 고소하였다. 그 사람 역시 참혹하게 고문을 당하여 무복(誣服)하기를, 늙은이를 겁박하여 죽이고 시체는 아무 땅에 감추었다고 하였다. 이에 시체를 찾아 보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고쳐 말하기를 아무 땅이라 하여 말을 몇 번 변경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나귀 가죽을 지고 가던 자는 옥중에서 말라 죽었다. 1년이 넘어서 공장의 사형 허가가 내렸다. 여러 목공들이 공장의 원통함을 분하게 여겼으나 변명하여 줄 길이 없었고, 공장은 마침내 참형을 당했다. 목공들이 더욱 불쌍히 여기고 한탄하여 두루 그 사건을 캐어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드디어 돈 1백 정(定)을 모아서 곳곳에 광고를 붙이기를, “아무 목공의 죽은 실상을 알아내면 이 돈을 주겠다.” 하였다. 하루는 어떤 도둑이 남의 집 물건을 훔치려는데 시간이 아직 일러서 컴컴한 속에 목공 아내의 집 담에 기대 자정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술 취한 자가 비틀거리며 들어가 술주정을 하면서 성이 나서 여자에게 욕을 하고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하였는데 여자가 감히 아무 소리도 못하였다. 취한 자가 잠이 들자, 여자가 촛불 밑에서 종알거리며 푸념하기를, “너 때문에 내 남편을 죽여서 시체를 방구들 밑에 둔 지가 2년이 넘었으나, 방에 불도 땔 수 없고 또 고쳐 바를 생각고 못하고 있다. 내 남편은 다 썩었는지 안 썩었는지도 모르는데, 이제 나를 학대하는구나.” 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도둑이 들창문 밖에서 자세히 듣고 속으로 기뻐하며, “도둑질을 해서 무얼 하느냐.” 하고 날이 밝자마자 목국(木局)에 들어가서 여러 목공들에게 외치기를, “내가 이미 아무 목공의 죽은 실정을 알았으니, 속히 내게 돈을 주라.” 하였다. 그리고는 또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빨리 자기를 따르라 하고는 여자의 집에 들어가 방구들을 떠드니 시체가 보였다. 여러 목공들이 뛰어 들어가 여자를 데리고 관청으로 갔다. 여자가 사실대로 토설하였는데, 술취한 자는 그 간부였다. 관(官)에서 다시 구덩이 속의 죽은 사람의 내력을 추궁하니, 오작(仵作)이 공술하기를, “어떤 나귀 탄 늙은이를 물속에 떠밀어 죽였다.” 하였다. 그래서 오작도 참형을 당하고, 여자와 간부는 저자에서 찢어 죽였다. 그리고 먼저 공장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형리는 모두 종신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관에서는 물속 늙은이와 옥에서 말라 죽은 자의 일을 알았으나 이를 들추어 내면 형리 두어 사람이 또 죄를 당하게 될 판이므로 그대로 덮어두었다. 이에 나귀 가죽을 가지고 가던 사람의 원한은 마침내 밝혀지지 않았다. 목공의 죽음에 있어서 죄를 받을 자는 그 아내와 간부뿐이었는데, 연루되어 너덧 사람이 죽었다. 이것은 사변(事變)이 얽혀져서 알아낼 길이 없었던 까닭이다. 역사책을 읽다가 이런 일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다.
또 우리나라 근래의 일로 말하면 임인년에 본궁(本宮)의 여종 원장(元莊)과 그 아들 개오미(介五彌)가 고하기를, “선군(船軍)임성부(林成富)가 우리 집에 와서 무도한 말을 하였다.” 하였다. 선천 군수(宣川郡守)가 곧 임성부를 잡아다가 곤장을 때려 심문하기를 세 번이나 한 연후에 자복을 받았다. 사헌부가 복심(覆審)하면서는 두 번을 때리면서 심문하였으나, 그래도 실정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개오미가 복룡(卜龍)을 보고 임성부가 한 말을 이야기한 것은 선천 군수에게 고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복산(卜山)과 이야기한 것에는 임성부가 이런 말을 했다는 말이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어긋나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추문해 밝혀서 두 가지 말이 일치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만 임성부가 실지로 이런 말을 하고서도 승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추측하여, 드디어 다시 따져보지 않고 임성부를 죽을죄로 몰아 넣었다. 내가 정부와 육조의 대신들로 하여금 회의하게 하였으나, 역시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만 하였다. 그래도 나는 어쩐지 의심이 나서 그 옥사를 의금부에 옮기어 임성부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캐묻게 하였다. 그랬더니 원장(元莊)이 이에 자복하기를, “임성부와 틈이 나서 죄에 몰아 넣어 태형(笞刑)을 받는 꼴을 보려고 한 짓이었다. 성부가 이런 말을 한 일은 없다.” 하였다. 그래서 임성부는 죄를 면하고 원장 등이 드디어 죄를 당하였다. 만일 죄안(罪案)을 복심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였다면, 임성부가 죽음을 당하였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기유년 어느날 어둔 밤에 도둑이 왜통사(倭通事) 이춘발(李春發)을 노상에서 죽이고 몽둥이를 버리고 갔다. 춘발의 사위가 고발하기를, “여자 무당 주연(住連)과 그 아들 사자(獅子)가 본래 저의 장인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인이 사자의 집 앞에서 죽었고, 종을 데리고 가 사자의 집문을 두들겨도 나와 보지도 않았으니 정적(情跡)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잡아 국문하니, 사자의 아우 코끼리[象伊]가 말하기를, “제 형이 이웃사람인 김작은고미[金小古彌]와 김매읍똥[金每邑同] 등과 함께 춘발에게 원한을 품고 항상 쳐죽이려고 하였는데, 이제 힘을 합하여 죽인 것입니다.” 하였다. 옥관(獄官)이 또 그 몽둥이를 가지고 사자의 집에 가 보니, 사자의 집 울타리에 장목 한 개를 뽑아 낸 자리가 있는데, 가지고 간 것을 그 구멍에 박아보니 꼭 맞고 그 길이도 또한 틀림이 없었다. 옥관이 주연ㆍ사자ㆍ작은고미ㆍ매음똥을 혹독하게 고문하여 무릎 꿇는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래도 승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끼리가 말한 것이 의심이 없고 또 몽둥이의 증거가 있으므로, 옥사가 장차 성립되게 되었다. 이에 내가 중한 상금을 걸고 춘발을 죽인 자를 고발하게 하였는데, 마침 변상(邊相)이 고하기를, “홍성부(洪成富)와 김생언(金生彦)이 춘발과 전부터 혐의가 있었으니, 춘발을 죽인 자는 아마도 이 무리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곧 두 사람을 체포하여 극문한 바 두 사람이 과연 승복하였다. 김생언에게 공모자가 누구냐고 국문하니, 생언이 진범은 숨기고 함부로 왜노(倭奴) 보수(普守)와 비부(婢夫) 간충(干冲)을 끌어댔다. 두 사람이 곤장을 참지 못하고 모두 생언과 함께 손을 써서 죽였다고 무복하였다. 더구나 간충의 공술에는 숨어서 엿보던 곳과 손을 쓴 형태와 춘발이 공격을 당하여 머리와 발로 땅을 두들기던 모양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였다. 옥관이 춘발이 죽은 장소로 끌고 가서 현장검증을 하여 보니 참으로 잘 들어맞았다. 그러다가 손을 쓴 진범 이득(李得)을 잡아서 캐어 물은 뒤에야 보수(普守)는 원래 모의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사자(獅子)의 일당과 함께 죄를 면하였다. 간충(干冲)은 원래 정상을 알지 못하고 다만 생언의 말을 듣고서 춘발을 길로 불러내기만 하였을 뿐이요, 죽이는 데는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사형은 감하였다. 홍성부(洪成富) 등 세 사람은 논죄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만일 변상(邊相)의 고발이 아니었더라면 사자 등이 극형을 받았을 것이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영흥부(永興府) 관고(官庫)에서 도적을 맞았는데, 어떤 사람이 익명서를 만들어 고발하기를, “관노(官奴)연만(延萬)ㆍ가똥(加叱同)ㆍ내은달(內隱達) 등이 한 짓이다.” 하였다. 부사가 그것을 믿고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으나 그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여 석방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군기고(軍器庫)에 불이 났다. 감사가 방화한 자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끝내 누구 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연만과 내은달은 도망가고 없으므로 부사는 군기고에 방화한 자가 이놈들이라 의심하고, 가똥을 잡아서 혹독한 형벌로 문초하였다. 그러자 가똥이 고초를 견디지 못하여 무복하기를, “연만ㆍ내은달과 공모하여 방화하였다.” 하였다. 부사가 드디어 부리(府吏)를 시켜 다시 국문하게 하니, 부리가 곤장을 때려 신문하기를 더욱 혹독하게 하였다. 감사가 따로 차사원(差使員)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였으나, 역시 모두 억지로 공술을 받았다. 연만 등 두 사람이 스스로 옥에 나와서 변명하려고 하자, 부사가 심히 국문하고 부리를 시켜 또 국문하고, 차원이 또 국문하였다. 그러나 모두 과도한 형벌로 공사(供辭)를 받아 가똥의 말을 사실로 만들었다. 내은달은 곤장 수백 대를 맞고 죽었다. 감사가 다시 다른 차사원을 보내어 추문하니, 연만ㆍ가똥 등이 죄를 벗어날 기회라고 생각하여 방화한 일이 없다고 간곡하게 고하였다. 그러나 옥안(獄案)을 다시 번복시키기 싫어서 곤장 신문을 더욱 급하게 하고 이어서 무릎꿇이를 세 차례나 하여, 옥사(獄辭)를 꾸몄다. 감사ㆍ형조ㆍ정부가 차례로 복심(覆審)하였으나, 또한 옥사에 대한 기록을 올리지 않고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사건의 발단이 형적이 없어 애매하여 밝히기 어려웠기에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형관을 보내어 조사하고 그 옥사를 의금부에 옮기어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사실이 없었다. 그래서 형조 이하 관리의 죄를 논하고 곧 가똥ㆍ연만 등을 석방하였다. 옥안을 훑어 보니 가똥은 곤장 1천 3백여 대를 맞았고, 연만은 거의 4백 대를 맞았으니, 모진 매 밑에 불지 않을 자가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금년 여름에 수구문(水口門) 밖의 초막에 사는 중이 명화적(明火賊)에게 피살되었는데, 그때 살아난 중 해전(海田)이 동네에서 돌을 캐는 자들의 한 짓이라고 고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이들을 잡아다가 국문하니, 김경(金經)의 비부(婢夫) 막산(莫山)이란 자가 공술하기를, “4월 9일 초저녁에 서중(徐重)ㆍ박연(朴延)ㆍ두지(豆之)ㆍ부존(夫存)ㆍ이마이(尒亇伊) 등 다섯 사람과 함께 수구문 밖의 벌아고개[伐兒峴]에 있는 초막 북쪽에 나가서 엿보고 있다가 밤 이경에 부존이 부시를 쳐서 쑥으로 맨 불자루에 불을 붙여 가지고 초막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중이 밖에 나와서 소변하는 것을 보고, 박연이 조그마한 몽둥이로 쳤는데, 땅에 거꾸러져서 죽은 것 같았습니다. 부존이 불자루를 법당 속에 던지니, 중이 나타나서 그 불자루를 도로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부존이 또 초막을 덮은 풀을 빼어 불을 살라서 법당 속에 넣고 조약돌을 마구 던지며 중들에게 공각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 전부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면 너의 무리를 씨도 없이 죽이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중들이 살려 달라고 애걸하며 재물을 모조리 내주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중 두 사람이 도망하여 나가므로 우리가 쫓아가서 한 중을 건천(乾川)에서 붙잡았습니다. 박연이 몽둥이로 그 중을 치자, 중이 또 쓰러지므로 박연과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돌로 머리와 얼굴을 쳤습니다. 또 한 중을 시식대(施食臺) 밑에서 붙잡아서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꼭꼭 묶어 놓고 마구 때렸습니다. 그리고서 밭두둑 사이로 들어가서 흩어져 누워 있다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함께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막산(莫山)이 또 공술하기를, “도둑질하여 뺏은 장물은 주인 집 다듬잇돌 옆에 묻었는데, 아내 소근(小斤)과 이마이(尒亇伊)의 처 장미(薔薇)가 봐서 압니다.” 하였다. 이에 장미를 때려 신문하니, 공술하기를, “초열흘날 이마이가 장물을 보자기에 싸서 대장간 불무판 밑 빈 구멍 속에 감추기에, 그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이마이가 말하기를, ‘네 알 바 아니다,’ 하고 또 쉬쉬하며 아무 말도 말라고 하였으며, 그날 저녁밥을 먹은 후에 이마이가 도로 그 장물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하였다. 장미가 또 공술하기를, “초열흘날 이마이가 장물을 가지고 나갔다고 아까 말한 것은 잘못 말한 것입니다. 사실은 11일 날 옥관(獄官)이 주인 집에 와서 수사하고 간 뒤에 제가 더욱 의심이 나서 곧바로 이마이가 감추어 둔 장물을 갖다가 부엌에서 태워버렸습니다.” 하였다. 초막 근처에서 돌 캐던 자 열두 사람을 모두 체포하여 뜰 밑에 늘어 세우고 해전(海田)으로 하여금 도둑놈을 가려 내게 하였다. 해전이 김경(金經)의 집 종 부존과 박연ㆍ서중ㆍ두지 등 네 사람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내가 본 도적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또 다른 사람 20명을 뜰에 늘어 세우고 부존 등으로 하여금 옷을 바꿔 입고 그 사이에 끼어 있게 하였다. 해전이 또 네 사람을 지목하고 또 박연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 중에서 저 자가 때리기를 더욱 심히 한 자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박연의 얼굴빛이 달라지며, 두려워하는 모양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해전이 또 고하기를, “도둑놈들이 나를 결박할 때에 내가 우연히 돌멩이를 주어서 도적을 때렸으니, 그놈의 발 위에 응당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도둑놈이 간 뒤에 버리고 간 가죽으로 꿰멘 미투리를 주웠습니다.” 하였다. 옥관이 여러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서 살펴보니, 부존의 발 위에 마침 상처가 있었고, 또 미투리의 주인을 물으매, 모두 말하기를, “부존이 신고 다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옥관은 더 의심할 바가 없어서 옥이 거의 이루워지게 되었다. 4월 19일에 진범인 도적 박만(朴萬)ㆍ망오지(亡吾之) 등이 연서역(延曙驛)에서 잡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게 되어 실정을 다 토설하였는데, 흉도가 대단히 많았고 또 진짜 장물이 나왔다. 그제서야 막산 등의 공술이 모두 거짓말임을 알았다. 그래서 막산 등을 석방하였다. 막산 등의 공술은 실정이 아니고 매를 면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박만(朴萬) 등이 잡히지 않았다면 막산 등이 중한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옥사를 결단하는 데 그릇됨이 없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지난 일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혹 이와 같은 것이 있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항상 이것을 생각하면 더욱 한심하다. 내가 중외(中外)의 옥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을 보면, 처음에 국문한 문안(文案)이 이루어지면, 다음에 복심하는 자는 거의가 이미 이루어진 문안을 수식할 뿐, 참고하고 증험하며 자세히 따져서 실정을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코끼리[象伊]와 막산(莫山) 등의 옥사는 가깝게 도성(都城) 밑에서 있었고, 법사(法司)와 대간(臺諫)이 위관(委官)이나 대언(代言)과 함께 의금부에 모여 심문하였음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하물며 다른 것이야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참형을 받은 자는 목이 다시 이어질 수 없으니, 만일 혹시라도 한 번 실수하면 뉘우친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불쌍히 여기고 근심하여 잠깐 동안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집법관(執法官)이 된 중외의 관리들은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하게 하며 또한 허심탄회하게 하라. 그리하여 자기 한 사람만의 소견을 고집하지 말고, 선입견만을 주장하지도 말며 남이 한 대로 따라서 전철을 밟지도 말고, 옥사(獄辭)가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제일로 알지도 말라. 여러 방법으로 힐문하고, 거듭거듭 조사하여, 죽는 자로 하여금 구천에서 원한을 머금지 말게 하고, 산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한을 품지 않게 하며, 인정(人情)이 서로 기뻐하여 옥이 텅 비게 하고, 화한 기운이 사방으로 흘러서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모두 때에 맞게 되도록 하라. 너의 형조는 나의 이 지극한 생각을 체득하여 안팎에 효유하라.
[주-D001] 오형(五刑) :
옛날의 형벌에 입묵(入墨)하는 것, 코를 베는 것, 발을 베는 것, 거세(去勢)하는 것 등 시형 다섯 가지가 있었다.
[주-D002] 오교(五敎) :
맹자(孟子)는 이 오교(五敎)를 오륜(五倫)으로 해석하였다.
[주-D003] 조고(趙高) :
진(秦)나라 이세 황제(二世皇帝)에게 혹형(酷刑)으로 대신(大臣)과 군수(郡守) 등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기를 권하였다.
[주-D004] 오작(仵作) :
형상(刑傷)을 검사하는 아전[委官]. 옥사(獄事)를 맡은 관원.
14.계주 교서(誡酒敎書)
유의손(柳義孫)
대개 들으니 예적에 술을 만든 것은 그저 마시려고만 만든 것이 아니라, 신명(神明)을 받들고, 빈객(賓客)을 대접하고, 늙은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로 인해서 마실 때는 헌수(獻酬)를 절차로 삼고, 활을 쏨으로 인해서 마실 때에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을 예로 삼았다. 향음(鄕飮)의 예는 친목(親睦)을 가르치는 것이요, 양로(養老)의 예는 치덕(齒德)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술은 세 순배를 돌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종일토록 술을 마시어도 취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선왕(先王)이 술에 관한 예를 제정하여 술의 화를 방비한 것이 지극하였다.
후세로 내려오매 풍속과 습속이 옛날과 달라서 오직 술에 빠지기만을 일삼으므로, 금주(禁酒)하는 법이 비록 엄하나 마침내 그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대개 술이 화가 됨은 심히 크다. 어찌 곡식을 없애고 재물만 허비할 뿐이겠는가.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잃어서,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며,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바,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우선 경계가 될 만하고 법이 될 만한 것을 한두 가지 지적하여 말하고자 한다. 은(殷)나라의 주(紂)와 주(周)나라의 여왕(厲王)이 이것으로 자신의 나라를 망쳤고,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이것으로 남의 나라를 망쳤다. 정(鄭)나라 대부(大夫)백유(伯有)가 굴속의 집에서 밤에 마시다가 마침내 자철(子哲)이 불에 타서 죽었고,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매양 손님을 대접할 적에는 문득 문을 잠그고 손님의 수레바퀴의 비녀장을 우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해를 입었다. 후한(後漢)의 사예교위(司隸校尉) 정충(丁冲)이 자주 여러 장수에게 들려서 술을 많이 마시다가 창자가 썩어서 죽었고, 진(晉)나라의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주의(周顗)가 능히 한 섬의 술을 마셨는데, 우연히 옛날 상대자가 오자 흔연히 함께 마시고 대취하였다가 술이 깨어서 살펴보니, 손님이 이미 옆구리가 썩어 죽어 있었다. 후위(後魏)의 하후사(夏侯史)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않으면서 막걸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아우와 누이는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였으며, 그 역시 술에 취하여 죽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경계할 일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고(酒誥)란 글을 지어서 은(殷)나라 백성을 훈계하였고, 위 무공(衛武公)이 빈연(賓筵)의 시를 지어서 스스로 경책(警責)하였다. 진 원제(晉元帝)가 가끔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하므로 왕도(王導)가 간절히 말하였더니 원제가 술잔을 엎어버리고 드디어 술을 끊었고, 원 태종(元太宗)이 날마다 대신들과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매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술 거르는 틀에 달린 금구(金口)를 가지고 태종의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 쇠도 술에 상하여 이렇게 되었는데, 하물며 사람의 오장이야 손상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곧 신하에게 명령하여 하루에 술 세 종지만 올리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도간(陶侃)이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정한 한계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조금 더 마시라고 권하니, 도간은 한참 동안 슬픈 빛을 띠고 있다가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술로 실수한 적이 있어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약속을 하였으므로 감히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하였다. 유곤(庾袞)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항상 유곤에게 술을 경계하라고 하였는데, 뒤에 매양 술에 취하면 곧 자책하기를, “내가 아버님의 훈계를 폐하였으니 어떻게 남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아버지의 묘 앞에서 스스로 매 20대를 맞았다. 이것은 참으로 법받을 만한 일이다.
또 우리나라의 일로 말하면 옛적에 신라(新羅)가 포석정(鮑石亭)에서 무너졌고, 백제(百濟)가 낙화암(落花岩)에서 망한 것이 모두 술 때문이었고, 고려(高麗)의 말세에 위와 아래가 서로 본떠서 술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다가 마침내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것도 역시 은감(殷鑑)이 멀지 않은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태조께서 큰 기업을 이룩하시고 태종께서 이어 받아서 정교(政敎)를 닦아 밝히어 법을 만세에 남기셨는데, 떼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법령으로 금하여 지난날의 물든 풍속을 고치고, 새로운 교화를 이루게 하였다. 부덕한 내가 외람되게 대통을 이어서 밤이나 낮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치안(治安)을 도모하였다. 그러면서 옛날의 엎어진 수레를 거울삼고, 조종의 법을 좇아서 예로써 보이고 법으로써 규명하였으니, 내가 애를 쓰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 신민들이 술로써 덕을 잃는 일이 가끔 있다. 이것은 전조(前朝)의 쇠망한 풍습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다.
아, 술이 화를 빚어내는 것이 이렇게 비참한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 이 또한 무슨 심사인가. 비록 국가를 염려하지는 못할망정 자기 한 몸의 성명(性命)조차 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조신(朝臣) 중에 유식한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여항의 백성들이야 무슨 짓은 못하랴. 옥사나 송사도 대부분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초에 삼가지 않으면 말류의 폐단이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예와 이제를 들어 여러 번 되풀이하여 알려 주고 깨우쳐 주는 바이다.
너희 안팎 대소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체득하고 전 시대 사람들의 득실을 보아서 오늘날의 권계(勸戒)로 삼아라. 그리하여 술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폐하지 말고, 지나치게 마시어 병이 되게 하지 말며, 각각 네 행동을 조심하여 무이(無彛)의 훈계를 따르고, 강하게 술을 억제하여 거의 오변(於變)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 너 예조는 나의 이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안팎에 효유하라.
[주-D001] 무이(無彛)의 훈계 :
《서경》에 나오는 무이주(無彛酒)의 준말로, 노상 술을 마시지 말라는 뜻이다.
[주-D002] 오변(於變)의 풍속 :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였다는 뜻이다.
15.권농 교서(勸農敎書)
하위지(河緯地)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농사라는 것은 의식의 근원으로 국정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이 생민의 목숨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겪게 되는 것이니, 윗사람이 성심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농사에 힘써서 생생의 즐거움을 이루게 하겠는가.
옛적의 신농씨(神農氏)가 처음으로 따비와 쟁기를 만들어서 천하를 이롭게 하였고, 소호씨(少昊氏)가 구호(九扈)를 명하여 농사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성신(聖神)이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표준을 세워서 억조 창생을 위하여 명(命)을 세운 것이다. 요(堯) 임금이 희화(羲和)에게 명하여 공경히 천시(天時)를 기록하여 백성에게 주었고, 순(舜) 임금이 십이 목(十二牧)에게 이르기를, “식(食)이란 것은 오직 때를 잃지 아니해야 한다.” 하였다. 하후씨(夏后氏)는 관개에 전력하였으며, 상종(商宗)은 소민(小民)의 의지하는 것을 알았다.
주(周)나라에 이르러서는 농사로써 개국(開國)하여 빈풍(豳風)의 시(詩)와 무일(無逸)의 작(作)이 모두 가색(稼穡)의 어려움에 권권(眷眷)하여 장구한 치안의 업을 이루었으니, 거룩도 하다. 한 문제(漢文帝)는 자주 조서를 내리어 해마다 갈고 심는 것에 전력하게 하였고, 조세(租稅)를 농민에게는 감하여서 천하가 풍성하게 하였다.
당 고조(唐高祖)는, 목(牧)과 재(宰)에게 조서를 내려서 간략하고 조용하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 때를 잃지 않게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의식(衣食)을 경영하는 데는 때를 잃지 않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쌀 한 말에 삼 전(錢)씩 하게 한 효과가 어찌 까닭이 없었겠는가. 송(宋)나라 제도는 권농사(勸農司)를 두고 연말에 가서 상과 벌을 주었으며, 또 각 고을의 관장으로 하여금 매년 봄에 술을 싣고 들에 나가서 부로들을 접견하고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지으라는 뜻을 유시하게 하였으니, 대개 여기에 내다보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운에 응하여 기업을 열고서는 가장 먼저 전제(田制)를 정리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서 농사를 짓는 이익을 누리게 하였는데, 그 권장하고 고과하는 조목이 모두 법령의 제 일조에 있었다. 태종(太宗)께서 계승하시어서는 더욱 농사일을 부지런히 함과 동시에 특히 어리석은 백성들이 심고 가꾸는 방법에 어두움을 염려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말로 농사에 대한 서적을 번역하여 안팎에 널리 펴서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덕이 적은 내가 대통을 이은 뒤로는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우러러 전대(前代)를 따르고 조종(祖宗)을 법받으려 하였다. 농사에 대한 일은 마땅히 백성을 가까이 하는 관리를 책망하여야 하므로 신중히 선택하고 친히 권유하였으며, 또 각 고을을 두루 방문하게 하여 각 지방에서 이미 시험한 결과에 의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집해서 전야(田野)의 백성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였으며, 농사에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껏 연구하고 시행하여 사람마다 그 힘을 다하여 버려두는 땅이 없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도 백성이 저축한 곡식이 없어서 한 번만 흉년이 들면 문득 주린 빛이 있다. 이것은 관리가 나의 가르침을 힘껏 받들지 않고 일하는 것이 아직 적은 까닭이라, 나는 몹시 염려한다.
일찍이 옛날의 어진 수령들을 보건대, 능히 한 지방에 이익을 일으켜서 백성으로 하여금 크게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은 모두가 부지런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공수(龔遂)가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서 힘써 농상(農桑)을 권하였는데, 백성이 칼을 차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팔아서 송아지를 사게 하며, 봄에는 농사터에 나가도록 권하고 겨울에는 거둬들인 것을 고과(考課)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족하여졌다. 소신신(召信臣)이 남양(南陽) 태수가 되어서 백성을 위하여 흥리(興利)하기를 좋아하여 친히 농경을 권하고 논밭에 드나들며 편히 앉았을 때가 없이 돌아다니면서 수원(水源)을 살피어 도랑을 개통하여 관개를 넓게 하니, 백성들이 이익을 얻어서 모두 농사에 힘썼다.
임연(任延)이 구진(九眞)의 원이 되었는데 그 고을 풍속이 활을 쏘아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소를 부려 농사 짓는 것을 알지 못하여, 항상 곤궁하고 빈핍하게 지내었다. 이에 농기(農器)를 만들게 하여 개간하는 것을 가르쳐서, 해마다 농지가 넓어지매 백성들이 충족하여졌다. 신찬(辛纂)이 하내(河內) 태수가 되어서 농상을 독려하고 친히 검사하여 부지런한 자는 비단으로 상을 주고 게으른 자는 죄를 주었다. 주문공(朱文公 주자(朱子))이 남강(南康) 의원이 되어서는 방문(榜文)을 인쇄하여 백성을 권면하되 쟁기로 가는 것, 거름을 주는 것과 풀을 베는 절차에서부터 삼과 콩을 심고 저수지를 수축하는 일에까지 세밀하게 갖추어 친절히 효유하며 때때로 친히 들을 순시하여, 가르치는 대로 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었다.
무릇 이런 것이 어찌 이유없이 번거로운 일을 좋아하였기 때문이겠는가. 대개 보통 인정(人情)이란 위에서 이끌면 노력하고 놓아두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이다.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한낱 선비라고 참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사람에게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물며 지금 감사나 수령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모두 이룩할 수 있는 권병(權柄)을 쥐고 있어서 한 지방의 잘 살고 못사는 것이 자기 한 몸에 매어 있다. 그러니 만일 성심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 준다면 어찌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대저 농가의 일은 시기를 일찍 서두르면 소득이 역시 이르고, 힘을 많이 쓰면 수확도 역시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농정의 요체는 오직 때를 어기지 않게 하고, 인력을 빼앗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백곡을 심는 것이 각각 때가 있으니, 때를 한 번 어기면 끝내 뒤질 수밖에 없다. 백성의 몸이 하나인 이상 힘을 나눌 수 없는데, 관에서 빼앗아 간다면 어떻게 농사에 힘쓰라고 책할 수 있는가. 진실로 사람이 할 일만 다한다면 비록 천운(天運)이 순조롭지 못하더라도 또한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윤(伊尹)이 밭을 구획한 것과 조과(趙過)가 해마다 밭을 교대한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근일에 경험한 것으로 말하면, 정사년에 후원(後苑)에서 시험삼아 농사를 짓고 인력을 다하였는데, 과연 가뭄을 만났으나 재앙이 되지 않았고 벼가 꽤 여물고 익었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연한 천재(天災)는 인력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傳)에 이르기를, “민생은 부지런한 데 있으니 부지런하면 먹을 것이 절핍되지 않는다.” 하였고,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게으른 농부가 편안한 것만 취하고 부지런히 애써서 농사에 종사하지 않으면 나중에 서직(黍稷)의 수확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차라리 근로에 지나칠지언정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개 백성이 아무리 부지런하려 하여도 제때에 시키지 못하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망종(芒種)이라 칭한 것은, 인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모두 일찍 심지 못하더라도 이때까지만 심으면 오히려 가을에 성숙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절후(節候)를 한정하여 시기에 뒤져서 농사를 실패하는 것보다는 이 시기를 맞추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보인 것이요, 반드시 이 시기를 기다려서 파종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농서(農書)에도 역시 이르기를, “대개는 일찍 서두르는 것이 좋다.” 하였다.
지금의 수령들은 묵은 습관에 젖어서 비록 파종할 시기를 당하더라도 망종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전답(田畓)의 소송(訴訟)에 관한 것을 바로 처결하지 않으며, 곡식 종자를 꾸어주고 식구의 양식을 진휼하는 것도 항상 서두르지 않고 항상 느리게 하여 제때를 잃게 한다. 비록 급히 서둔다 해도 수령은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호조에 공문을 내어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사유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서로 왕복하는 동안에 망종(芒種)이 지나버리는 일도 있다. 혹은 갈고 심는 적기를 알지 못하고 한갓 권과(勸課)하는 명목만 힘써서 파종하는 것을 너무 일찍 독려하기 때문에 싹이 살지 못하여 도리어 농사를 망치게 하는 일도 있다. 혹은 참으로 절기의 이르고 늦음을 알지 못하여 계획이 소홀하여 사기(事機)를 잃는 경우도 또한 있다. 이것이 어찌 근심을 나누고 백성을 사랑하는 본의라 하겠는가.
나와 함께 정치를 하는 사람은 내가 위임하는 뜻을 체득하여, 조종의 백성에게 후하게 하는 법전을 따르며, 전현들의 농사를 권과(勸課)하는 규정을 살펴보아라. 풍토에 적합한 것을 널리 물어보고 농서(農書)에 실린 것을 참작하여, 미리 조치하여서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 더욱이 다른 일을 시켜서 농사 때를 빼앗아서는 아니된다. 각각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근본에 힘쓰도록 인도하고 농사에 진력하게 하여,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하게 하라. 그리하여 우리 백성의 생명을 연장하고, 우리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예양(禮讓)의 풍속을 일으키며, 시절이 화평하고 해가 풍년들어 함께 희호(熙皞)의 낙을 누리게 하라. 너희 호조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아서 안팎에 효유하라.
16.수양대군 공신 교서(首陽大君功臣敎書)
유성원(柳誠源)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사직을 위하여 어진 이를 내니 대개 기수(氣數)에 관계가 있고, 임금이 벼슬과 땅을 주어 명을 내리니 진실로 훈공(勳功)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에 일정한 법규에 의하여 뚜렷이 상전(賞典)을 보인다.
숙부(叔父)는 삼광(三光)과 오악(五嶽)의 정기로 태어나고, 바람과 서리에 절개를 가다듬었다. 기우(器宇)와 국량은 준엄하고 깊었으며, 지조와 기개는 확고하고 엄정하였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 박혔고 충성과 의리는 지성에서 우러났다. 호걸의 재주요, 성현의 학문이었다. 기운은 한 세상을 덮었고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다. 덕망은 종친 가운데 무거웠고, 풍채는 조정의 반열에 뛰어났다. 착한 일을 가장 좋아하여 부귀나 성색도 그 마음을 흔들 수 없고,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이험(夷險)과 종시(終始)에 그 지조를 변하지 않았다. 우뚝하여 나라의 성(城)과 같고, 확고하여 대절(大節)에 임하였다.
어린 내가 가운(家運)이 불행함을 만나 어렵고 큰 일을 널리 구하려는 생각으로 기무를 신하들에게 위임하고 바야흐로 보필을 기대하여 융성과 태평을 도모하기를 기약하였다. 이때에 있어서 용(瑢)이 지친의 처지에 있으면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축적하였다. 과인이 어려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간계를 쓰면 왕위를 혹시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후하게 은혜를 베풀어 사람에게 명예를 구하고 여러 소인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사사 집에서 당파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부도한 흉계를 품어서 만 가지로 노려왔다.
간신(姦臣)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이양(李讓)ㆍ민신(閔伸)ㆍ조극관(趙克寬) 등은 내가 총애하여 맡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몰래 흉악한 화란을 일으킬 계책을 품어 음으로 당(黨)과 후원을 만드니 모두들 흡연히 따라 붙었다. 나의 나이 어리고 약함을 멸시하여 나의 위엄과 복을 도둑질하였다.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은혜를 사사로 팔았다. 벼슬은 함부로 친척과 인척에게 돌리고, 뇌물은 공공연하게 안팎에 행하였다. 부역이 번거로워서 공사(公私)가 함께 곤하고,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어 재물과 힘이 다하였다.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임금의 덕택을 막아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도(公道)는 일식(日食)이 일어나듯이 어두워지고, 사의(私意)는 홍수(洪水)처럼 흘러 넘쳤다. 하늘이 위에서 노하여도 내가 알지 못하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여도 내가 깨닫지 못하였다.
숙부가 일찍이 그 연고를 분하게 여기어 글을 올려 항쟁하였으나 내가 또한 심상하게 여기어 살피지 못하였다. 대개 용(瑢)에게 붖좆는 것이 저와 같으므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것이 이와 같았다. 흉한 꾀가 더욱 깊이 들어가서 매일 밤 사사로이 모이었다. 안으로는 근시(近侍)와 환관을 통하여 동정을 살피고, 밖으로는 방진(方鎭)과 장수를 달래어 몰래 날짜와 시기를 약속하였다. 도당(徒黨)이 이미 많아지매 형세가 날마다 치성하였다. 큰 간흉(奸兇)이 뿌리를 단단히 박아서 뽑을 수가 없는데, 과인의 몸은 고립이 되었으니 무엇을 하겠는가. 종사와 국가의 편안하고 위태로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었다.
숙부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를 갈고 마음을 썩혔다. 천지가 용납하지 않으니 군흉(群兇)들의 악역(惡逆)을 참을 수 있으며, 사직(社稷)이 기뻐하실진데 어찌 일신의 사생을 돌아보겠는가. 웅대한 결단과 영명한 계책으로 정의(正義)와 용맹을 분발하여, 이 충의(忠義)의 장사를 거느리고 저 흉악한 무리를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쓸어버리니 조정이 서로 경하하고 길가는 사람이 다투어 기뻐하였다. 나라의 근본이 거의 흔들렸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고, 신기(神器)가 장차 기울어지려다가 다시 안정되었다. 이것은 대개 꾀를 단단히 하고 마음을 깊이 가져, 정성은 귀신을 감동시키고 충성은 일월(日月)을 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흉(群兇)을 능히 잠깐 사이에 베어 하루아침이 지나기 전에 맑아졌다. 공렬이 매우 빛나서 고금에 탁월하다. 숙부가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었겠는가. 진실로 천지 조종의 신령이 모르는 가운데 도와서 숙부의 손을 빌려 화란을 평정한 것이다. 그 출생(出生)함이 기수(氣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충성을 권념(眷念)하여 장수와 정승의 권세를 겸하게 하였다.
나는 속마음을 피력하면서 위임하였고, 경은 대신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여 충성을 극진히 하였다. 제왕의 어진 은혜를 권하여 선포하였고 권간의 나쁜 정치를 모조리 개혁하였다. 성색(聲色)에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같이 편안하게 만들었으며, 병과(兵戈)를 쓰지 않고 백성들이 태평을 누리도록 만들었다. 몸이 나라의 기둥이 되매 사람들이 의지하여 무겁게 여기고, 공이 하늘에 덮였는데 스스로 낮추고 겸손해 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고자(孤子)를 부탁하고 목숨을 의지할 수 있는 사직의 중신(重臣)이라 하겠다. 옛적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베어 왕가(王家)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큰 의리가 소소하여 만고에 빛났다. 지금을 미루어 옛일과 비교하면, 세상은 다르나 부합된 것은 같다.
이에 공훈(功勳)을 책정하여 정난(靖難) 일등공신으로 삼아 분충장의 광국보조 정책정란(奮忠仗義匡國輔祚定策靖難)의 호(號)와 식읍일천호 식실봉오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五百戶)를 내리고, 해마다 별봉(別俸) 6백 석, 노비 6백 구, 밭 5백 결, 황금 25냥, 백은 1백 냥, 안장을 갖춘 말 네 필, 안팎 옷감 열 끗, 사(紗)와 나(羅) 각각 다섯 필, 옷 한 벌, 서각대(犀角帶) 한 개, 사모(紗帽)ㆍ갓ㆍ신 등 여러 물건을 내린다. 경의 공은 많은데, 나의 상은 적으니, 경이야 무슨 바람이 있을까마는, 내게 있어서는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지극한 뜻을 생각하여 받아주기 바란다.
아, 경은 주공(周公)의 아름다운 재주가 있고, 또 주공의 큰 공훈을 겸하였으나, 나는 오히려 성왕(成王)의 어린 나이로 또한 성왕의 어려움을 만났다. 이미 성왕이 주공에게 책임하던 것으로 숙부에게 책임하였으니, 마땅히 주공이 성왕을 돕던 것으로 과인을 도우라. 그리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 닦아가면 성공하지 못할 염려가 무엇이 있겠는가. 충렬(忠烈)을 돌아보매 실로 의지하는 마음이 깊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
제24권 끝.
첫댓글 오늘도 남모른 수고가 많으십니다^^*
좋은 자료들 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자료 잘 가져 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