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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3:17-22
우리가 갖고 있는 달력에는 아직도 11월 달력하고 12월 달력하고 두 장이 남아 있습니다만 교회력으로 보면 오늘이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로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즈음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들어가십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처럼 여기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하는 구절이 있는데 출 애굽한 이스라엘을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광야생활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야생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 구원을 상징한다고 하면 광야생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광야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노력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수고한 것이 없고 내가 노력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공짜가 아닙니다. 대가를 치루어야 하고 내가 애쓰고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가야 할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광야생활을 예수님의 시험에서 아주 간단하게 사실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12-13) 광야는 사람이 살지 못하고 들짐승들이 사는 곳입니다. 사람이 살만한 쾌적한 곳이 못됩니다. 광야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광야생활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광야생활은 우리가 어떻게든지 이기고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과정인줄 믿습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광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까지 가는 길은 홍해광야길보다 블레셋 사람의 길이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넉넉잡고 한 달이면 갈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가면 보름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길로 가게 되면 전쟁을 하게 될텐데 전쟁을 만나면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그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스라엘을 광야 홍해 길로 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편하고 아무리 가까워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조금 멀어도 조금 힘들어도 조금 늦게 들어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축복받은 것입니다. 광야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멀어도 광야고 조금 가까와도 광야입니다. 과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거쳐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왜 내가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고 멀고 어렵냐고 불평하면서 조금 쉽고 조금 가깝고 조금은 편한 길을 찾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셔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축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조금 힘들어도 조금 멀어 보여도 이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장 좋은 길이고 가장 축복된 길임을 인정하면서 그 광야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또한 광야생활속에서 잘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홍해 광야길이 조금 힘들어도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빨리 가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편한 길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광야생활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광야를 거쳐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나안땅이라고 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이룰 때 온전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조금 먼 길로도 인도하시고 조금 힘든 길로도 인도하시고 조금 돌아가는 광야 길로도 인도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음을 깨닫고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바라보며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바라보며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전진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이 목적이 이끌어가는 삶입니다. 목적이 이끌어가는 삶을 살아갈 때 찰나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애굽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그곳에 가지 않아야 했습니다. 애굽으로 가면 갈수록 가나안땅은 점점 더 멀어지고 애굽에 대한 미련이 남으면 남을수록 가나안땅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만큼 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미리 미리 예비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길이 가까울지라도 그곳으로 가다가 전쟁을 만나면 애굽을 돌아갈 생각을 할 것을 아시고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만 더 핍박이 오고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홍해바다를 만나서 죽음의 고비를 맞이할 때에 이스라엘은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도 그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있을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물이 떨어졌을 때도 이 말을 하였고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부추와 파와 마늘 같은 것을 먹지 못하였을 때도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사탄은 우리를 넘어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뒤로 돌아가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롯의 처를 향하여 사탄은 뒤를 돌아보라고 유혹하였고 그 유혹에 넘어간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뒤로 돌아가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누릴 수 없습니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조금 힘들고 어렵고 고달파도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땅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구름기둥의 역할은 낮에 정말 뜨거운 햇볕아래 행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불기둥은 밤에 불을 비추므로 길을 갈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할 뿐 아니라 추위 속에서 따뜻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광야생활은 정말 쉽지 않은 생활이었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 쉽지 않은 길을 어떻게 이기며 가나안땅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름기둥이 불기둥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 증거를 보면서 그들은 힘들어도 고달파도 광야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우리 나름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날마다 체험할 때 우리도 어려운 인생길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기도시간에 몇몇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 다 많이 힘들어하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날도 그 십자가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하루였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힘든 만큼 많은 것을 채워주시고 넘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 힘든 일들이 다 사라지고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구름기둥을 체험해야 합니다. 나의 불기둥을 체험해야 합니다. 금년 일 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입니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낮과 밤의 구별이 있습니다. 낮에는 함께 있다가도 밤에는 헤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밤에는 함께 있다가도 낮에는 다시 헤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의 발걸음은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마지막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 하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들 곁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들을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 앞에서 가시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그들 앞에서 가시면서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군대에 가면 앞에 가는 사람들을 첨병이라고 합니다. 첨병의 역할은 길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적은 없는지 살펴보고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본진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첨병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첨병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도록 우리 앞서 가시면서 미리 미리 장애물을 치워주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우리의 길을 정비하여 주셨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먼저 앞서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잘 정비하여 주시고 장애물을 치워주시고 평탄한 길을 만들어주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어느 때는 질병의 장애물을 치워주셨습니다. 어느 때는 사고의 장애물을 치워주셨습니다. 어느 때는 사람의 장애물을 치워주셨습니다. 어느 때는 자연재해의 장애물을 치워주셨습니다.
우리는 금년 일 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을 보내시는 성도 여러분, 지난 일 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2010년 새해를 잘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구원의 길을 가면서 행여 나의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고 고달팠다고 불평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까? 지난 일 년 살아온 것이 여러분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쉬운 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가까운 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능히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하신 더 좋은 주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하는 복음성가를 소개함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가 걷은 이 길이 혹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희망 덧없이 스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 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barnabak
희망의 하나님
출 13: 18-22
희망을 가집시다.
가장 위험한 결정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습니다. 이 연못의 전설은 물이 동할 때 천사가 내려오게 되는데 그때 어떠한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못에 몸을 담그면 몸이 낫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38년 된 중환자가 있었습니다. 소망을 갖고 이 베데스다 연못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에게는 물이 동할 때 그 연못에 몸을 담그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무능력으로 오래된 환자이기 때문에 날렵하게 연못에 뛰어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원망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곁에 있었지만 그는 소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환자는 "물이 동할 때, 나를 연못에 넣어줄 자가 없나이다." 그 때 우리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 남매가 살고 있던 집이 있었습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에게 두 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였습니다. 이 세 남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어서 장사한지 사흘이나 된 이후에 예수님이 이 가정에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상식적 시각을 가지고 그저 문상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 아마 예수님은 소망을 가지시고 죽어 섞어 냄새나는 나사로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의 시각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출애굽의 역사는 긴 역사이며, 이스라엘을 대변해 주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적인 교훈을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사십년 광야 생활을 하고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제 그들이 정복하게 되는 그런 역사적인 과정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자 할 때 모세의 손에는 마른 막대기 하나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자신을 지탱하고 또 사물을 가리키는 지극히 평범한 지팡이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지팡이는 꿈이 있는 지팡이, 능력의 지팡이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상식적인 지팡이였습니다만 이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진 자에게 지금도 길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꿈을 키우시고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희망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희망이 넘치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충만하라.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이 땅을 멸하시고 노아 한 가정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아담에게 주셨던 동일한 말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믿음의 조상이 되라. 내가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축복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축복을 말씀하셨고 사랑을 노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악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할 때 지극히 평범한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요한과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리라"고 희망을 말씀하셨고 십자가상에 돌아가신 이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그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온 세상으로 나아가라. 그리고 주의 말씀을 전하라.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으라. 내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꿈을 말씀하시고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요? 희망이 없는 곳, 더 이상의 기대와 꿈과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장차 이 땅에 오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관심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우리는 들림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될 희망의 사건, 우리 예수님 반드시 이 땅에 오십니다.
지난 1970년대에 독일의 볼트만의 제자 몰트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희망의 신학을 발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그 희망의 공통체가 교회이고 이 교회에 속한 모든 일원들은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하는 희망의 신학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1980년대에 사신의 신학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 신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여러분! 희망의 신학, 사신의 신학 두 신학 가운데 그 신학을 제창했던 자들은 모두 동일하게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면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 역사를 운행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희망의 책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에게 환란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꿈을 갖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가지고 큰 뜻을 성취해 나갔습니다. 그 대표적이 인물로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에게 꿈을 많이 꾼다고 해서 미움을 받아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요셉을 깊은 구덩이 속에 빠뜨렸습니다.
그 구덩이 속에서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도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이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요셉은 그가 팔림을 받았고 구덩이에 빠뜨림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고 노예로 끝없는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그가 믿음과 꿈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리라고 하는 소망을 간직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애굽 땅에서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이 후에 내 뼈를 가지고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하는 유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을 떠나면서 요셉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그 요셉의 꿈,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수하고자 홍해를 탈출할 때 가지고 나가야 할 물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싸고 또 준비해도 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그는 요셉의 썩은 뼈를 추려서 그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광야 40년 동안 간직했습니다
.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뒤를 이어서 요셉의 뼈를 가나안 땅에 묻었습니다. 요셉은 왜 이러한 유언을 남겼겠습니까? 어떠한 실현,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요셉을 보라!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요셉을 보라! 그 요셉이 우리의 조상이요, 요셉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언하고자 요셉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동족에게 그러한 꿈을 예언했고, 그 꿈은 실현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셉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신 요셉을 보라! 요셉이 가졌던 그 아름다운 꿈, 요셉의 그 위대한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고 꿈을 잃지 아니하고 소망을 가진 요셉을 보라!"
성경은 희망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이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이 말씀을 묵상하세요. 그러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꿈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나 한사람을 위한 꿈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의 위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추적해옵니다. 앞에는 뜻하지 아니하게 긴 홍해가 가로 노여 있었습니다. 물러설 수도 없고 전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를 내려 쳐라."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지팡이, 그 가냘픈 지팡이, 마른 막대기에 불과한 그 지팡이를 내려 쳤을 때 그 강이 갈라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낙심 중에 하나님을 바라다보세요. 포기하지 마시고 용기를 가지세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을 도우십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희망의 하나님! 그 희망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 하셨습니다. 사막지대에 일주일 정도면, 길어도 열흘이면 갈 수 있는 목적지를 40년 동안 훈련을 시키셨어요. 무엇 때문에 긴 광야 생활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섭리하셨겠는가?
첫째는 노예근성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고,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 내 본연의 사고를 다 청산하라는 것이에요. 말끔히 다 뿌리째 뽑으라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40년 동안 그러한 과정을 겪게 하셨겠는가? 가나안 족속과 대항하여 싸우고자 할 때 그 강력한 군대와 대항하려고 할 때 훈련과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를 만드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토록 훈련시키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필요로 할 때마다, 두려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민족이 되도록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 죽은 신이 아니고, 도와주지 못하는 신이 아니고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기도 한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마치 봄에 뿌린 씨앗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내용은 허공에 날아가 버린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의탁하세요.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고 할 지라도 그 믿음이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린다는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에게 전 세계를 유임해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셔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큰 일을 행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허락하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희망을 가진 제자들이 이었습니다.
사도바울 한 사람만 소개 해 드리면, 그가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14일 동안 그 지중해 위에 모진 풍랑을 겪게 되었습니다. 선장도, 선원도, 군인도, 여행자들도 그 풍랑 앞에 큰 두려움 앞에 빠져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다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지금 배안에서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27장 25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여러분들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십시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생명은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파손될지언정 여러분들의 생명은 다치지 아니 할 것입니다." 그는 희망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신 행복의 지침서입니다. 하나님의 제자들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메시지를 듣고 그 메시지의 초청에 응답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신앙의 성장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드립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받는 축복에서 주는 축복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한 소년처럼 예수님 앞에 기꺼이 드림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면류관을 받은 그 은혜에서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희망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랍비가 강아지 한 마리와 호롱불 그리고 나귀 한 마리를 이끌고 어느 마을에 유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호롱불이 꺼지게 되었습니다. 캄캄해졌는데도 그 강아지를 무엇이 와서 물어가 버렸습니다. 큰 짐승이 와서 나귀도 물어가 버렸습니다. 긴 밤을 혼자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을을 찾아보았더니 마을이 쑥대밭이 되어있었습니다. 지난밤에 강도 때가 나타나서 그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호롱불이 켜져 있었고, 강아지가 짖고,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주인도 틀림없이 죽었을 터인데`
오늘의 아픔이 있으신 가요? 오늘의 어려움이 있으신 가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하십니다. 진시왕때 한 가정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도망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두고 봐야지요." 얼마 후에 나갔던 말이 또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기뻐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두고 봐야지요." 얼마 후에 이 말이 뒷발질로 외아들을 다치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오랫동안 다리 상처를 가지고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는 통에 많은 젊은이들이 끌려갔습니다. 끌려가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무사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아픔, 오늘의 답답함, 오늘의 상황에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리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도우시는 예수님이 계시는 까닭에 희망을 가지십시다.
희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