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눅 4: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거듭난 모든 사람들 안에는 밖으로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있고(고후 5:17)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려면 누군가 그것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누군가'란 타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일 때 가장 강력합니다. 물론 내가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거나, 들어 보았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남의 믿음보다 더 강력한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이 밖으로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우리의 내면(mind)에 있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인데 그것은 오직 우리가 말씀의 진리로 나의 mind를 다시 세워 올렸을 때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은 다만, 상대의 인간적 단점에 눈이 가린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적 생각이 영적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인간적 단점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영적인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육신적인 정체성만을 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영적으로 판단하려면 먼저 내가 영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판단 기준이란 말씀적인 판단 기준이라는 뜻인데, 아주 쉽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기초로 해서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 안에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미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믿는 판단기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적용에 있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일 뿐, 교단을 막론하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교리일 것입니다(성령의 내주).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제가 우리 한국 교회에게 외치고 싶은 것은 성령을 소유한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복음이고 하나는 율법이니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180도 변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지는 못합니다. mind를 새롭게 할 시간과 과정이 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서 행동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서, 성도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의 평안과 기쁨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우리는 이미 이 평안과 기쁨을 예수님께 받았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알고 믿어야 하며 그럴 때 우리의 감정도 그 진리를 따라 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왜 추구합니까?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그 순서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가졌다는 것을 먼저 알고 믿어야 차후에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뉴에이지에서 주장하듯이 '이미 가졌다.'고 주절주절 되뇌이며 나 자신을 세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틀렸습니다. 간절히 바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어주셨기 때문에 이미 가진 것이고 이미 가졌기 때문에 이미 가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지요.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 마음에 더 각인되기 때문에 그것을 얻게 될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집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이미 예수께 받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해도 바로 그 순간 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이고 저는 그런 분들이 참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뭔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먼저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어서 더 이상 그것을 좇기를 포기하고 나면 차차 감정도 따라 옵니다. 부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미 부요한 자라는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바로 그 순간 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상이 가난하여 부요를 좇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부요해지지 못합니다. 이미 부요한 자아상을 가진 자들만이 끝내 부요하게 됩니다. 시간과 과정이 걸리겠지만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라는 단어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건강, 마음의 샬롬, 부요, 마귀의 영향력에서 자유케 됨, 등등 이 모든 것이 헬라어로 구원, '소테리아'의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루 일과 중 수십만번 이 구원을 붙잡을 것인가 놓을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당도합니다.
'지금 굉장히 우울한 기분이 드는데 그냥 확 받아들일까, 말까.'
'마음이 불안해. 왜 평안이 없지?'
'이놈의 세상, 왜 이모양이야!'
'사촌이 땅을 샀네. 아, 정말 나는 언제 사?'
이것이 전부 생각의 전쟁입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우리의 mind도 열심히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이미 나에게 주신 권세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나의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을 바라볼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나 자신 포함)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영을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모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