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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의지하는 자의 어리석음(시49:1~20) 찬송 ; 544장.
본문은 일종의 지혜시요, 교훈시로서 물질의 유한함과 물질을 좇는 자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1. 지혜로운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1~4).
주의 말씀은 천하 만민, 빈부귀천, 남녀노소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며 사모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영혼을 좌우하는 말씀이므로 모든 인생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물질이 영혼에 한 치의 영향도 줄 수 없습니다(5~9).
우리나라 속담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돈의 위력이 대단함을 과장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별히 너무도 중요한 것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본문 6~7절 말씀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부한 재물을 의지하며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 형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한 치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사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영혼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 예화를 드신 부자의 이야기를 명심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물질의 풍부함에 도취되어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뇨?”라고 반문하셨습니다(눅12:16~21).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물질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가져야 합니다. 욥은 욥1:21절 말씀에서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모든 인생의 죽음은 물질을 허무한 것으로 만들고 맙니다(10~20).
물질을 의지하며 물질에 대하여 소망을 두고 사는 자, 물질로 교만해진 자들의 최후를 가리켜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사망이라는 목자가 형벌의 가시로 울타리를 두르고 자기 양떼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니 이 사망의 목자를 피할 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은 물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물질을 가지고 갖은 악행을 일삼는 악인들이 바로 사망의 목자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은 시23:1~2절 말씀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삶의 철학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재물과 돈을 신으로 삼는 자의 최후는 비참입니다.
인생의 영화가 아무리 아름답고 부러울지라도 그 끝의 허망함을 알았으면 그 길을 좇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의 최고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의 물질관은 복음과 영혼을 살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오늘 죄악의 세상에서 허덕이며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저 무리들을 살려 내기 위하여 재물이 필요하고, 복음 사역을 위하여 돈의 축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는 자리가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상을 개인의 용도를 위하여 욕심을 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가 더 많은 재물과 기업을 가져야 할 이유는 전적으로 지상명령인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의 행복(시50:1~23) 찬송 ; 539장.
본 시편 말씀은 레위 지파로 구성된 예루살렘 성전의 찬양대 대장이었던 아삽이(대상16:4~5) 노래한 것입니다. 49편과 함께 교훈시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예배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심판(1~6).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약관계에 있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때에 온 인류가 듣도록 부르십니다. 그때 하나님은 찬란한 빛 속에서, 그리고 불과 폭풍우 속에서 나타내 보이시며, 하늘과 땅은 함께 부름을 받아 심판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도록 선포하십니다.
천사의 무리가 이스라엘의 심판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백성을 불러 모아 영광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고 불의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의 처소로 몰아넣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2.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책망(7~14).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때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는 것 같고 인간의 양심에 내어 맡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사악한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읽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방자히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즉각 이루어진다고 하면 인간의 삶의 모습은 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모습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옛날 아벨과 가인이 드렸던 예배처럼 예배하는 자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도록 나타난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모습도 좀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고를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드린 제물이 희생제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너무나 종교의식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증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10~12).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는 순결한 마음을 갖고 감사와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3.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환난을 만나면 어디 도움이 없을까? 하고 도움의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거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모두 이 같은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문제를 만나면 인간적인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에는 형식적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11:28절 말씀에서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에 대한 책망(16~20).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믿음의 존귀와 특권을 침해하고 빼앗은 것에 대하여 책망하고 계십니다(16절).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계약을 잘 알고 남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하면서 자신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17절).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훈계를 거절하고 무시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죄인들과 연합하고, 도적을 방조하고 음란자와 동류가 되며(18절),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하였습니다(롬1:3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21절).
그래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범법자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개입하셔서 심판하시지 않으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죄에 대하여 무관심한 분으로 생각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할 수 없는 시기에 다다랐을 때에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정확하게 일람표를 제시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좋든 싫든 간에 자기의 행악에 대한 일람표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21절). 그 후에는 무엇이 뒤따를까요? 예, 심판입니다.
6. 하나님의 경고(22~23절).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권고와 경고를 겸하여 하십니다. 본문 22절 말씀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악한 자는 그 마음을 돌이켜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가 올바른 길을 추구해 나간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평화와 축복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아멘.
죄과를 참회하는 다윗 (시51:1~19) 찬송 ; 215장.
본 시편 말씀은 다윗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오점이 되었던 우리아를 살인한 것과 아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불륜 사건을 배경으로(삼하11장) 하는 참회시입니다.
다윗이 흉악한 죄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던 이유를 우리에게 대변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서 죄인이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회개하는 다윗(1~13절).
첫째,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였습니다(1~2).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할 때 자신의 죄과를 알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회개하였습니다. 본문 1절 말씀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이것이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인생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지 않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죄 가운데서 감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죄를 고백했습니다(3~5절).
죄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고백하는 삶의 개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셋째, 회복과 내적인 갱신이 시작됩니다(6~13).
과거의 죄를 씻어 정결케 되는 것은 영적 생활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영적인 기쁨을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할 때 죄의 도말을 구하였습니다. 도말한다는 것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 도말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십자가의 자비가 있고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에 새로운 마음의 승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2. 회복한 자로서 서원을 드리는 다윗(14~19절).
첫째, 다윗의 간구(14~15).
다윗은 피가 가득한 손으로 기도하면(사1:15)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피 흘린 죄에서 구원받게 될 때에만이 하나님의 의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완전히 회복되는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다윗의 이 같은 간구는 염치없는 행위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간구한 것을 보면 모두 다윗 개인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보지도 마시고 사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에 의지하는 다윗의 확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열심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확고한 신뢰를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다윗이 죄를 범하였지만 죄에 대한 겸손한 인정과 죄와의 완전한 단절을 다짐하는 회개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속죄함을 받은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둘째, 통회하는 마음(16~17).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회개)을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희생제물보다 회개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기 죄를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사죄를 구해야 합니다.
셋째, 백성을 위한 기도(18~19).
올바른 예배는 의로운, 죄가 없는 예배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회복될 때에 진정으로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타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영적인 회복과 변화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뛰고 충성하는 자야말로 영적인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승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위하여 뛰고, 연약한 심령을 도우며,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이 일에 온전히 헌신하여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인의 비극적인 종국 (시52:1~9) 찬송 ; 93장.
본 시편 말씀은 다윗이 사울의 창칼을 피해 도피하던 때에 은혜를 주었던 제사장 아히멜렉이 도엑의 밀고로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삼상21:1~9, 22:6~19). 이 밀고로 대제사장 아히멜렉 일가 85명이 학살됩니다. 무고한 죽음에 대한 악인의 횡포로 몸서리치는 탄식이 그 배경입니다.
1~5절까지는 도엑의 악하고 간사한 행동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하여, 6~7절 말씀은 도엑의 멸망에 대한 의인의 조소에 대해서, 8~9절 말씀은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감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1. 항상 악을 계획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1).
사울은 도엑의 밀고를 받고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일가족 85명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서 차제에 정적 다윗에게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에게 본떼를 보이기 위한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악행의 이면에는 도엑이라는 사악한 자의 간교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도엑은 자신의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잘하는 것을 자랑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의 실력을 자랑하려고 하고, 미모의 여인은 아름다운 자신의 용모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를 자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엑은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기를 즐겼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자랑이 지나치면 좋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듣기 좋은 노래도 세 자리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도엑은 악한 일을 즐겨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으니 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처럼 악한 자는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을 숨겨야 할지를, 그리고 무엇이 수치스런 일인지를 구분 못하는 이성 없는 자들입니다.
2. 악인은 악한 혀를 놀리기를 좋아 합니다(2~7).
다윗은 도엑의 밀고 행위에서 세 치의 혀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도엑의 혀로 대제사장 일가 85명이 죽게 되었으니 그 혀는 실로 2절 말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날카로운 삭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간사하고 험담하기를 좋아하고 악을 도모하는 혀는 바로 그 자체가 생명을 빼앗아 가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말 한 마디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죄인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무고한 생명을 가차 없이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약3:5절 말씀에 보면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특한 자의 입은 그 이웃을 멸망케 합니다. 잠11:7절 말씀에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21:23절 말씀에서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악한 혀를 잘 지키지 못한 자의 받을 화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시52:5절 말씀에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의 안전한 보금자리나 권좌에서 쫓겨나고 생존권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잠17:20절 말씀에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악한 혀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도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악인을 보고 괴로워하거나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8~9절).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인자가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영영히 서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힘의 근원으로 삼는가? 아니면 악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느냐?”를 우리 스스로에게 불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깊이 살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악한 뿌리를 다 뽑아내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앙망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시고 신령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시84:12절 말씀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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