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로, 헌신으로... 달성 해병전우회와 함께한 30년
[달성을 지켜온 사람들] ④ 전 달성군 재향군인회 이종찬 회장
한국 인맥에서 고대(高大)교우회, 해병대전우회, 호남향우회는 인적 네트워크에서 가장 결속력이 강한 단체로 꼽힌다. ‘소가 밟아도 안깨진다’는 이들의 단결력은 한때 ‘한국의 3대 마피아’로 회자되기도 했다.
선후배간에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챙겨주는 끈끈함 때문에 ‘호남 출신으로 해병대 나오고 고려대 졸업한 사람은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농담도 들린다.
이렇게 별나다 싶을 정도의 해병대의 유대감 비밀은 ▶지원-경쟁을 거쳐 입대한다는 점 ▶빡쎄기로 소문난 훈련 강도 ▶모든 해병이 한 곳(포항교육훈련단)에서 배출된다는 점 ▶전 구성원을 기수제로 묶어 놓았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밖에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대’ ‘상승 해병’(항상 승리하는 해병) 같은 자기 최면이 뿜어 나오는 캐치프레이즈도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다.
이번에 소개할 이종찬 전 달성군 재향군인회장은 해병대 DNA를 타고난 사람이다. 수월하고 편한 군생활을 포기하고 굳이 ‘개고생’한다는 해병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하사관으로 만기 전역한 그는 달성군 재향군인회, 해병대전우회에 가입해 ‘해병인’의 길로 들어섰다.
특히 지역에서 해병대 전우회장을 10년 넘게 맡으면서 교통 봉사, 안보 교육, 방범 순찰, 급식 봉사, 농촌 일손 돕기 등 활발한 지역 활동을 펼쳤다. 해병대 출신 자부심을 지역 사회봉사로 쏟아 붓고 있는 이종찬 회장의 ‘해병 인생’을 소개한다.
#. 이 회장의 고향은 달성군 논공읍 북리(지금은 북동). 지금의 달성공단 자리다.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이 회장은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 말썽꾸러기였다. 툭하면 부모님께 돈을 타내 온갖 악동(?) 짓을 다하고 다녔다.
힘깨나 쓰고, 패기 발랄했던 이 회장이 군 입대를 앞두고 해병대를 지원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시에도 해병대는 엄격한 체력 테스트, 면접(국가관, 정신력)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소수에게만 허락된 관문이었다.
1973년 해병대 포항사단에 배치된 이 회장은 신병 복무 중 하사관에 차출돼 7개월간 교육을 받고 하사로 임관했다. 갓 임관한 그를 빡쎄기로 소문난 ‘공수 교육’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해병대 공수교육은 UDT 부대원들이 위탁교육을 진행할 정도로 훈련 강도와 군기가 세기로 유명하다.
도합 14개월 교육을 이수하고 ‘정예 해병’으로 거듭난 이 회장은 바로 1974년 6여단으로 차출돼 백령도 해안 경비에 투입되었다. 백령도 해안 초소가 있던 두무진 포구 바로 앞은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장산곶)이었다.
백령도에 배치된 이 회장의 주요 업무는 백령도 어선들의 조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이었다. 대대본부에서 출항허가가 떨어지면 어선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어로 작업을 감독하고 어민들이 조업을 마치면 호위하여 귀항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백령도 바로 북쪽 해상으로 DMZ가 지나가기 때문에 근처 수역까지 가면 북한의 어선, 군함들이 육안으로도 보인다. 근거리에서 적함과 마주치는 것은 묘한 긴장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회장이 배치되기 바로 1년 전에 ‘동진호’ ‘제 31진영호’가 납북, 피침돼 당시 백령도 해상엔 군사적 긴장이 팽팽하게 흐르던 시절이었다.
#. 이 회장은 1976년 6월, 3년 3개월 백령도 경계근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제대 후 이런저런 사업에 뛰어들었다. 펼쳤다 접은 사업이 열 손가락을 합쳐도 모자라지만 이 과정에서 인생 공부,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 다행히 건축회사에 안전 장비를 납품하는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고, 돈도 좀 벌었다.
땅도 사고, 건물도 올리고 탄탄대로를 걷던 어느 날 부도수표가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현대 비극 중 하나인 1997년 IMF 사태가 터진 것이다. 하나둘 닥치기 시작한 부도수표, 어음이 연달아 밀어닥치자 이내 삶의 의욕이 꺾여 버렸다.
부도 거래처를 수사하던 경찰이 “피해액이 모두 27억 7,600만 원인데 이 회장님 이제 어떻게 먹고사실 겁니까” 해서 그때 부도 금액을 처음으로 알았다.
당시 건축 중인 38억짜리 건물도 공사비를 대지 못해 경매로 넘어갔다. 가진 돈을 모두 끌어 모아 겨우 낙찰을 받아 상가를 겨우 건질 수 있었다. 후에 경제가 회복되자 이 회장은 이 건물을 다시 팔아 모든 빚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그의 해병대 정신이 삶 속에서 나타난 시절로 돌아가 보자. 이런저런 사업에 정신없던 시기가 지나고 1990년대 초반 이 회장은 달성군 해병대 전우회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병대전우회 하면 지역 봉사활동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다소 극성스러울 정도 이들의 봉사 활동은 지역 사회에서 정평이 나 있는데 이 ‘헌신’은 군에서 체득한 ‘해병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유의 촘촘한 네트워크 덕에 해병대의 기동력은 소문이 나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교통경찰보다 먼저 현장에 나타난 건 팔각모자의 해병대전우회였고, 세월호 사고 때 팽목항에도 빨간 명찰들의 호각소리가 제일 먼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지역 사회에서 교통정리, 농촌 일손돕기, 안보 교육, 급식소 등으로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이 회장은 1993년 달성군 해병전우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날개를 달게 된다. 해병대전우회장은 육해공 전우회와 함께 달성군 재향군인회 당연직 부회장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의 활동 반경은 해병대 단일 대오(隊伍)를 넘어 육·해·공 연합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또 달성군의 관변단체에도 등록이 되고 이런저런 직함을 받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 발언권도 있었다.
그러던 2006년 이 회장은 달성군 재향군인회 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그의 해병 인생의 전성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회장에 당선되면서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전국구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중앙회의 인사들과 행정사무, 정책 협의를 하면서 다양한 교분을 쌓았다. 특히 해병대 출신 고위층과 관계를 맺으면서 쌓은 친분은 지금도 그의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가 되고 있다. 그때 만난 분들이 전도봉 사령관, 정도영·강성열·권기하 장군 등이었다. 장군과 하사관의 만남이었지만 계급을 초월한 끈끈한 유대 정신은 그들을 해병 정신으로 묶어주었다.
#. 2006년에 회장에 선출된 이 회장은 내리 3연임을 하며 2015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 회장은 재임 9년 동안 지역 재향군인회 발전과 지역 봉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인접한 고령군 재향군인회와 결연을 맺어 친목 활동을 벌이고 수상보트를 들여와 고령군과 함께 낙동강에서 수상 인명구조 활동을 벌였다.
매년 대구-광주를 오가며 ‘향군 영호남 우정의 만남’ 행사를 주최해 지역 화합에도 기여했다.
달성군 재향군인회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전국 총회에서 단체표창으로는 최고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당시 222개 향군 단체 중 수상 단체는 단 두 곳뿐이라서 이 상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개인 표창으론 2010년에 호국위식 고취, 국가 사회 발전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 ‘국민 포장’을 받았다.
2015년 민간인으로 돌아온 이 회장은 현재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해병대 전우회 직함을 내려놨지만 지금도 동네에 있는 해병대 ‘벙커’(컨테이너)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헤아려 보면 이 회장이 성인이 된 후 절반을 해병대 전우회와 함께 한 셈이다. 이 회장은 “무보수 명예직 회장을 10년 가까이 맡았고, 이 일에 매달리느라 사업도, 가정에도 소홀했지만 ‘8201113’ 군번 앞에 떳떳했기에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