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인 공간 속의 도시인
다시 사진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보자. 사진이 예술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진이 기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예술작품에서 작가의 숨은 초월적 의도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지닌 예술 애호가들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꾸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베냐민은 사진에 주목하였다.
과거에 사람들은 예술작품 속에 예술가가 진리를 숨겨놓았을 것이라 믿고 그것을 발견하고자 했다면, 사진은 그러한 믿음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현실 자체는 공허한 것이며 진리란 총체적인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리가 존재한다면 매우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단정짓고 믿고 있는 것들이 파괴될 때, 그러한 파편 속에서 얼핏 부분적으로 섬광처럼 드러날 뿐이라고 베냐민은 믿고 있었다.
그는 외젠 아제(Eugène Atget, 1857~1927)의 사진에 주목하였다. 아제는 주로 프랑스 파리의 사람 없는 빈 골목을 주로 촬영하였다. 그의 사진은 화가의 그림과 달리 대도시의 전혀 가공되지 않은 공간을 드러낸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사진에 드러난 대도시의 공간이 매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아제의 사진 속 대도시 공간이 초현실적 분위기를 띠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어떠한 질서나 혼란도 넘어선 공허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제의 사진은 비현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초현실적이다. 이는 곧 현실 자체란 공허하며 거기에는 어떠한 의도나 질서도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제, 〈몽마르트, 생 뤼스티크 거리〉 Rue St. Rustique, Montmartre, 1922대도시의 가공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아제의 사진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띤다. 그의 사진이 질서나 혼란 자체를 넘어서 공허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베냐민에게 파리는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대도시가 과거의 전통과 의미를 파편화시켜 파국을 맞지만, 그러한 파편 속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냐민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본질을 아제의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파리는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단편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그림 속의 모든 것들이 파편적이며 어떤 유기적 통일도 이루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그 그림에서 의미가 발생한다면 그저 우연적이고 즉흥적이며 순간적일 뿐이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자신의 시대를 ‘우울(spleen)’이라는 말로 요약하였는데, 이 우울은 대도시가 가져온 전통적인 가치 및 의미의 파괴에서 비롯된 정서와 관련이 있다. 베냐민에게 대도시란 바로 파국의 현장이자 매혹의 현장이다. 대도시는 과거의 전통과 의미를 파편화시켜 파국으로 몰고 가지만 동시에 그러한 의미를 파편으로 남겨둠으로써 무한한 상상의 조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도시를 여행하고 산책한다는 것은 그에게 상상의 미로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의 즐거움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현실적인 공간 속의 도시인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