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 성동리 170번지 임금례 할머니 집에 불이 났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양파밭일 온품 반품 바꾸어 모은 팔십오만 원 빳빳한 저고리 은빛 테두리 두른 단아한 신사임당 한 장씩 장판 밑에 깔아 놓고 늘어진 난닝구 고부라진 등골 부리고 누워도 손주들 학원비도 대주고 용돈도 쥐어 주며 율곡선생을 빌어주는 순간은 알싸한 파스 몇 장이면 무릎뼈 엉치뼈까지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내일 또 어느 밭으로 갈까 노곤달근한 꿈이 깡그리 타버렸다 아침에 나가면서 끓여 먹었던 누룽지 양은냄비 불 끄는 걸 깜빡 잊어버렸던 탓이었다 흙 속에 거꾸로 머릴 박고 살아도 하늘 딛고 땅 속으로 알알차게 살찌우던 양파돈 생각에 연기 자욱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장판 먼저 걷어보고 까맣게 타버린 지폐를 발견하고는 기가 막히게 서럽고 허전하던 밤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동네 노인들 하나씩 하나씩 찾아와 성님 잊어부러야제 어쩌겠소 하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양파 냄새나는 사임당 몇 잎씩 꺼내 쥐어 주고는 엉거주춤 펴지지도 않는 다릴 끌고 흰 달빛 속을 걸어 돌아가더라는 밤새 그러고선 다음날 또 새벽같이 날품 가는 경운기에 동글동글 모여 앉았더라는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 하얀 양파꽃도 무리무리 환하게 피었더라는
- 2020년 <머니투데이 경제> 신춘문예 당선작
◆ 심사평
- 일반문예에 출품해도 뛰어난 작품... 한편의 단편영화 보는 듯
(...) '양파꽃 지폐'라는 다소 생경한 제목의 시가 남았다. 무안군 성동리 임금례 할머니 집에 불이 났던 것 같은데, 그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과 동네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리얼하고도 짠하게 그려져 있다. 이 내용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양파의 알싸한 향 같은 시인의 가슴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다시 갯벌' 등 동반 작품들도 이 작품을 우수상으로 결정하는데 큰 믿음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