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초코파이를 드셔 보셨습니까?"
2013년 한글날을 앞두고 열린 주한미군 대상 한국어 웅변 대회에서 '리샤드 호르네' 소위의 이 "눈물 젖은 초코파이 드셔 보셨습니까?"란 말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눈물 젖은 초코파이"란 말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미국에서 1917년 출시된 '문 파이'를 1973년 미국 출장 중에 맛보게 된 우리나라의 제과 회사 '오리온 (Orion, 당시 동양제과)' 개발팀장은 문 파이와 유사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변형한 과자를 출시하려 1년간 연구를 거듭합니다. 이렇게 1774년에 출시된 '초코파이'는 빵처럼 폭신한 두 개의 과자 사이에 마시멜로를 넓게 깔아서 햄버거처럼 만든 후 과자 겉 전체를 초콜릿으로 덮어 완성되었습니다.
이 초코파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자인 것은 물론, 러시아에 수출되며 러시아의 국민 파이가 되었습니다. 또 개성공단을 통하여 북한 주민들에게도 그 맛을 널리 알렸습니다.
오리온 (동양제과)에서 출시한 초코파이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자 4년 뒤인 1978년, 롯데제과를 비롯하여 1986년에는 해태제과가, 1989년에는 크라운제과에서 자신들의 초코파이를 출시하였습니다. 동양제과는 롯데제과를 비롯한 다른 업체들이 '초코파이'를 상표로 등록한 것을 취소하도록 '상표 등록 취소 소송'을 뒤늦게 제기했으나, 법원에서는 초코파이가 상품명이 아닌 이러한 과자들의 보통 명칭이라며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
오리온은 타사의 초코파이와 차별성을 두기 위하여 1995년부터 '정 (情)'을 붙여 '초코파이 정 (情)'이란 이름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을 나눕니다'라는 광고가 크게 흥행하며, 오리지널 초코파이에는 '정'이 붙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흰색의 마시멜로를 속으로 사용하던 기존의 초코파이를 고집하던 오리온은 40여년이 지난 후 바나나맛이 나는 '초코파이 情 바나나'를 시작하여 녹차, 딸기, 인절미, 초코칩과 같은 다양한 맛을 개발하며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높은 칼로리와 달달한 식감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초코파이는 특히 신병 훈련소에서나 군대 내의 종교활동이나 간식으로 각광받으며 군인하면 떠오르게 되는 과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초코파이는 20대의 가장 꽃다운 나이에 병역의 의무를 지고 2년의 기간 동안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는 젊은 청년들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또 분단 국가이자 휴전 상태인 애처로운 우리 나라와 국민들을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달래주는 먹거리입니다. 알고 보면 깊은 상처를 위로해주고 있던 '눈물 젖은 초코파이'와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은 어떨까요?
독일 출신의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자크 오펜바흐 (Jaques Offenbach, 1819-1880)'는 14세의 나이가 되던 1833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후 평생 파리에서 살며 음악가로 활동하며 이름도 프랑스 식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오펜바흐는 캉캉으로 잘 알려진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오>를 비롯하여 오페레타 <즐거운 파리의 아가씨>,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등을 작곡한 뛰어난 작곡가였습니다.
오펜바흐가 1853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나무의 조화 (Harmonies de Bois, Op.76)'는 첼로와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된 두 작품의 모음곡입니다. 그 중 2번째 곡이 바로 우리에게 '자클린의 눈물 (Les Larmes de Jacqueline)'이라고 익숙한 작품입니다.
100년 가까이 세간에 잊혀졌던 곡이었던 이 작품은 독일의 첼리스트 '토마스 미푸네 베르너 (Thomas-Mifune Werner, 1941-)'가 1986년에 발매한 자신의 첼로 소품 앨범 '저녁의 하모니 (Harmonies du Soir)'의 첫 번째 곡으로 수록되며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베르너는 한 천재 첼리스트의 비극적인 삶을 안타까워하며 이 오펜바흐의 미발표곡을 헌정하기 위하여 '자클린의 눈물'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Werner Thomas-Mifune
카잘스, 로스트로포비치와 같은 세계적인 첼리스트의 가르침을 받았던 영국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Jacqueline Du Pre, 1945-1987)'는 17세가 되던 해 BBC 교향악단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하며 화려한 데뷔를 하였으며, 이 연주 영상은 지금까지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2세의 어린 나이에 젊고 촉망 받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1942-)'과 결혼했습니다.
이 세기의 결혼식이 이뤄진 후 함께 음악 활동을 이어갔던 이들 부부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4년이 지난 1971년입니다. 자클린은 근육에 힘이 빠지는 증상에 병원을 찾았고 다발성 척수 경화증 진단을 받게 됩니다. 2년간 투병에 전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73년, 자클린은 연주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자클린 뒤 프레와 바렌보임
오랜 투병에 지친 바렌보임은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자클린을 떠났고, 자클린은 42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숨을 거뒀습니다.
토마스 베르너는 그녀가 죽기 직전에 앨범을 발매하였고, 이 천재 첼리스트의 안타까운 삶과 깊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오펜바흐의 슬픈 미발표곡에 '자클린의 눈물'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슬픈 비가이며 첼로의 깊은 음색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작품 '자클린의 눈물'은 눈물젖은 초코파이처럼 슬픔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