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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생겨난 국가적 혼란은 조선의 사회적 변동을 불러왔다. 왜란 이후 남발한 공명첩(空名帖)과 그 관리 부실은 조선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신분제도를 문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숙종 때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 중 6%밖에 되지 않았던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정조 대에는 30%에 이르고 고종 때에는 인구의 9할이 양반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양반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렸다.
그런 와중에 사대부와 관료 중심의 조선사회에 새로운 신분 세력이 떠올랐다. 신흥 부유층이다. 종래의 조선사회에서는 부(富)마저도 양반들이 독점했었지만,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면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상(富商)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의관(醫官), 역관(譯官)과 같은 중인층에서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이들이 나타났고, 한성의 중앙관서 아전으로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들도 직책을 이용한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를 하였다.
이러한 신흥 부유층의 출현은 신분이 우선이던 조선 사회가 경제력을 우선시하는 사회로 변모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신흥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양반 못지않은 권세와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벼슬에 오르는 것만은 그들이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신흥 부유층들은 시서화나 풍류(風流)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양반들이 소비했던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과시하였다. 조선 후기에 여항문학(閭巷文學)이 꽃피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뿐만 아니라 농업기술의 발전에 따라 토지생산성이 향상되고 관영 수공업이 아닌 민영 수공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그 혜택이 백성 모두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중심도시였던 한성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로 변모해갔다. 그러면서 한성에는 이전에 조선에 없던 것들이 생겨났다. 주점, 풍류방, 기방(妓房) 같은 것들이다.
주막과 주점은 다르다. 주막이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라면 주점은 유흥시설이다. 조선 초기에도 주점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의 주점은 숫자나 양상이 조선 전기와는 매우 달랐다.
영조 7년인 1731년 영조는 ‘술을 경계하는 글’이라는 <계주문(戒酒文)>을 내렸다
순후(醇厚)한 성품으로써 광패(狂悖)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인데 공격하는 것이 많도다. 더구나 술이 또 뒤따라 해롭게 하는구나. 사람이 싫어하는 바는 악(惡)보다 심한 것이 없고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는 적(賊)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스스로 그 적을 불러들이고 스스로 그 악을 만들어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중략)
그런데 지금은 농사가 큰 흉년이 듦으로 인해 모든 여러 가지 비용들을 아미 다 절감하였는데, 제한이 없는 소비가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나 명령은 마땅히 먼저 해야 하고 법은 마땅히 뒤에 집행해야 한다. 먼저 술을 경계하는 글을 보이고 추후에 술을 많이 빚는 데 대한 금령(禁令)을 내릴 것이다.(하략)
-《영조실록》영조 7년 12월 29일
그리고 영조는 솔선수범하여 자신부터 금주를 실천하였고, 그 후 50년 가깝게 영조의 치세 기간에 조선은 금주령 하에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영조만큼 술에 대하여 엄격하지 않았다. 영조 때의 금주령 속에서도 단속을 피하여 은밀히 그 명맥을 유지해오던 주점은 정조 대에 이르러 그 수나 양상이 크게 변하였다.
정조 때의 대사간(大司諫) 홍병성(洪秉聖)은 탐관오리들을 질책하고 백성들의 식량 부족문제 해결을 위한 상소에서 이렇게 진언(進言)했다.
"국가를 다스리는 계책은 재정을 넉넉히 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는데, 식량을 낭비하는 것으로 술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근래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에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오로지 술 마시는 것만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풍교(風敎)만 손상시킬 뿐 아니라 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물건을 그대로 삼켜버리는 구멍이 되고 있습니다."
-《정조실록》정조 14년 4월 병자일
이에 정조는 “곡식을 낭비하는 것이 비록 폐단이 되나 어찌 온 나라가 술을 마시는 데까지야 이르렀겠는가?”하면서, 오히려 당시 사람들의 술 마시는 풍모나 격조가 예전에 미치지 못함을 걱정했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이전과 달라진 주점의 모습을 정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수십 년 전으로 말하더라도, 술을 파는 집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佐飯) 따위에 불과하였을 뿐이었는데, 근래 민습(民習)이 점점 교활해져서 술 이름을 신기하게 내려고 힘쓰는 것은 차치하고, 현방(懸房)의 육류와 시전(市廛)의 어물은 태반이 술안주의 재료로 들어가서 진귀한 음식과 오묘한 탕이 술동이 사이에 뒤섞여 놓입니다. 여항의 연소한 자들은 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안주를 탐하여, 삼삼오오 떼를 지어 서로 이끌고 술을 사서 마셔서 빚을 지고 몸을 망친 자들이 대단히 많으니, 진실로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그리고 시장의 반찬거리가 날로 값이 비싸지는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되니, 일절 엄히 금지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일성록》정조 16년(1792) 9월 5일
▶ 자반(佐飯) : 한자의 의미는 ‘밥을 돕는 것’이라는 의미. 생선을 소금에 절여 굽거나 찐 것이나 콩자반처럼 나물이나 야채를 간장 등의 양념을 발라 말린 것을 굽거나 기름에 튀긴 반찬을 가리킨다.
▶ 현방(懸房) : 성균관 노비들이 경영하던 푸줏간. 성균관 노비들은 문묘를 지키는 관원들의 사환으로 입역하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위하여 소의 도살판매권이 주어졌었다. 조선시대에 현방 이외의 도살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새롭고 특이한 술을 만들어 파는가 하면 단출했던 술집 안주가 수십 년 사이에 진귀한 음식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조선에 제대로 된 안주를 파는 주점이 생겨난 것은 영조 정조 연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의 주점에서 지금처럼 안주를 상 위에 펼쳐놓고 질펀하게 술을 마셨던 것은 아니었다. 술을 한 잔 시키면 안주 1점이 따라 나왔고, 안주 값은 따로 받지 않았으니 술값에 안주 값까지 들어있던 셈이다.
주점이 술과 안주를 파는 곳이라면 기방(妓房)은 기생이 손님에게 술과 가무(歌舞)를 팔던 곳이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매음(賣淫)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극에 흔히 보이는 상 위에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기생집 풍경은 최소한 조선 말 개항(開港) 전까지는 조선에 없던 풍속이다. 개항 이후 부산에 일본의 ‘요리옥(料理屋)’이 등장하고 그 요리점에서 일본 기생들을 불러 술시중을 들게 하던 풍습이 점차 퍼져 이후 요정문화로 발전된 것으로 본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홍루대주(紅樓待酒)>,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김홍도「사계풍속도병」中 <기방쟁웅(妓房爭雄>>의 원광대 모사본 중 부분
기방(妓房)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에 대하여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대체로 선상기(選上妓)제도가 중지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부(富)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신분계층이 떠오르면서 기생과 그들을 관리하던 지아비들이 돈벌이라는 개념에 눈을 뜨게 되면서 새롭게 태어난 유흥장소가 기방(妓房)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 대에 선상제도(選上制度)가 사실상 폐지되고 장악원 소속 경기(京妓)가 혁파되면서 궁중의 진연(進宴) 행사는 간소화되고 횟수도 줄어들었다. 외연(外宴)과 사객연을 비롯한 궁중 연향에 기생이 출연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여인들을 위한 내연(內宴)에서만 여악의 명맥이 이어졌다.
이때부터 궁중 내연은 대부분 의녀와 침선비들이 맡게 되었다. 의장여령(儀仗女伶)의 역할만 하던 의녀와 침선비들이 직접 정재(呈才)를 공연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의녀와 침선비를 뽑을 때 애초부터 가무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기도 하고 지방기를 뽑아 입역시키기도 하였다. 정조 19년인 1795년 화성(華城)에서의 진찬행사 때 화성의 기생만으로 연향을 준비하기에는 수가 부족하여, 내의원과 혜민서 소속의 의녀와 공조 상방(尙房) 소속의 침선비를 화성에 보내어 기생들과 함께 정재를 공연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의 한양 기생은 이처럼 의녀와 침선비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는 영조 때에 사헌부에서 영조에게 보고한 내용에도 나타난다.
"성곽(城廓) 밖의 이사(尼舍)는 이미 좌도(左道)를 배척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인데, 그 복방(複房)과 유실(幽室)이 문득 여염(閭閻) 과부들이 음분(淫奔)하는 소굴이 되고 있으니, 동대문 밖 교외의 두 이사(尼舍)를 모두 경조(京兆)로 하여금 즉일로 훼철(毁撤)하게 하소서. 근일에 사대부(士大夫)들의 명검(名檢)이 땅을 쓴 듯이 없어졌습니다. 창가(娼家)와 기방(妓房)이 문득 분주하게 출입하는 장소가 되었고, 침비(針婢)와 의녀(醫女)들이 각기 풍류(風流)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여항(閭巷)의 양녀(良女) 가운데 자색(姿色)이 조금 고우면 법종(法從)과 요로(要路)에 있는 몸으로 돈으로 탈취하는 일들이 온 세상에 말이 전파되어 잠신(簪紳)들에게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영조실록》영조 14년(1738) 12월 21일
▶이사(尼舍) : 여승(女僧)들이 사는 집. 이우(尼宇).
▶좌도(左道) : 유교(儒敎)의 종지(宗旨)에 어긋나는 다른 종교(宗敎). 여기서는 불교.
▶유실(幽室) : 조용하고 그윽한 곳에 있는 방(房)
▶경조(京兆) : 서울, 장안(長安). 여기서는 한성부를 가리킴.
▶법종(法從)과 요로(要路)에 있는 몸: 조정 관리와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잠신(簪紳) :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과거 장악원 소속 경기(京妓)들이 궁중에 입번(入番)하지 않을 때 양반 사대부들에게 불려 다녔다면, 조선 후기에는 기생들이 기방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형태로 풍속이 변했다. 그리고 기생과 어울리는 것이 더 이상 양반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조선말기의 국문소설「게우사」에는 당시 기방에 모인 인물들을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청루고당(靑樓高堂) 높은 집에 어식비식 올라가니, 조반에 앉은 왈자 상좌의 당하(堂下) 천총 내금위장(內禁衛將), 소년 출신 선전관(宣傳官), 비별랑(備別郞) 도총경력(都摠經歷) 앉아 있고, 그 지차(之次) 바라보니 각 영문(營門)의 교련관의 세도하는 중방(中房)이며, 각사 서리, 북경 역관, 좌우포청 이행군관, 대전별감 불긋불긋 당당홍의 색색이라. 또 한편 바라보니 나장(羅將)이, 정원사령, 무예별감 섞여있고, 각전(各廛) 시정(市井) 남촌 한량(閑良),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선소리 송흥록이, 모흥갑이가 다 가 있고나.
왈자의 표준어는 왈짜로, 사전에는 ‘말이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럽고 거친 사람’으로 풀이되어 있다. 왈자의 한자표기가 曰子인 것을 보면 요즘 말로는 ‘말발이 있다’거나 ‘입심이 좋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말과 행동이 거칠다고 했으니 무뢰한이나 불량배 또는 근대적 단어로 ‘어깨’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기방에 자주 출입하며 힘 좀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내금위장(정3품), 선전관(정3품 ~ 9품), 도총경력(오위도총부 종4품)과 같은 양반 무관들이 상석(上席)을 차지하고, 이어 한양 관서의 각종 서리(胥吏)들이 망라되고 소리꾼들도 등장한다. 여기서 소리꾼들은 기방의 손님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손님들의 요청으로 불려온 가객(佳客)일 가능성이 높다.
나장이나 사령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의 하나이고 별감 역시 액례(掖隷)라 하여 천직(賤職)이다. 다만 그들의 직무와 소속처로 인하여 민간에서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양반 무관들과 어울릴 신분은 아니다. 경아전(京衙前)의 서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들이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당시 기방의 풍습에서는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이 한데 어울려 기방에 왔을 리는 없다. 각자 찾아온 손님끼리 합석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시대의 기방 풍속을 근래의 요정 문화를 바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김준근 <기생방에 배반(杯盤)나고>, 1894년 이전, 무명에 채색, 28.5 × 35.0cm,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박물관(舊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ㅣ 배반(杯盤)은 술잔과 쟁반 즉, 술상의 뜻
김준근 <기생 권주가 하는 모양>,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박물관
조선시대 기방의 고객을 오입쟁이라고도 불렀다. 오입쟁이는 바람둥이나 난봉꾼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방에서 성매매도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기(官妓)의 기둥서방이 될 수 있었던 각전 별감, 포도군관, 각 궁의 청지기, 하위직 무관을 ‘오입(誤入)쟁이 사처소(四處所)’라고 불렸다. 이들은 한 기생의 지아비인 동시에 다른 기방의 고객으로 실제적으로 조선 후기의 기방을 지배하고 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단가 '명기명창' - 임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