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정치제도
공화정 초기부터 파트리키(Patricii)라는 귀족과 플레브스(Plebs)라는 평민으로 나뉘었다. 왕정이 무너진 뒤 이것을 주도한 브루투스는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아 통치를 맡기는 방식을 고안해 내고 이것은 로마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왕정이 무너진 뒤 귀족에 의한 공동통치가 행해졌고 이는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1] 이라 불리는 집단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6명의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왕과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던 로마의 사정상 통일된 지휘 계통이 필요한 상황이 잦았고 이때마다 독재관을 선출해야 했었다. 독재관의 선출은 예외적인 상황이어야만 특별히 허락되는 일인데 이것이 너무 잦아지자 로마인들은 통일된 지휘계통을 항상 갖추고 독재관의 선출을 줄이기 위해 최고 권력자를 기존의 6명이 아닌 두 명으로 뽑기로 하고 이 두 명의 최고 권력자들을 집정관(consul)이라고 부르게 된다.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나중엔 군단의 대대(Cohors)를 지휘하는 대대장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초기의 집정관은 연임을 무한히 할 수 있었다. 집정관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여 모든 현안을 그들의 재량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뛰어난 인물들이 집정관을 독식하자 또 다른 왕정으로 변신하게 될 것을 우려한 로마의 귀족들과 시민들에 의해 집정관의 연임을 막게 되었고 그 결과 주로 집정관 경험이 없는 뜨내기가 맡는 직위가 되어버렸고 집정관들은 주로 집정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엘리트 집단인 원로원의 조언을 듣고 일을 처리하고자 하였으므로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비대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감찰관의 권력은 매우 강했는데 이 감찰관은 원로원의 의원들 중 명망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대(大) 카토도 감찰관의 직책을 오랫동안 수행하였었다. 이렇듯 원로원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었으므로 이 원로원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시피 하였고 따라서 공화정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지게 된다.
그러나 집정관의 권력이 원로원으로 넘어가도 군사 지휘권(Imperium)은 집정관의 고유권한이였으며 이것만큼은 원로원이 좌지우지 할 수 없었다. 집정관들은 선출되자마자 두 개의 군단(각각 4천 명씩 8천 명)이 주어졌고 해마다 전투를 수행해야했던 로마의 사정상 집정관은 주로 전선에 나가 있는 일이 잦았다. 집정관들은 실질적인 권한이 원로원에게 넘어갔어도 그들이 군사를 통솔해서 싸운다는 것에 열중하였으므로 그다지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정관은 행정에 있어서도 가장 높은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정관은 군단을 지휘하느라 로마에 머무는 일은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에 남아 집정관 대신 행정업무를 처리할 직책이 만들어진다. 이를 법무관이라고 한다.
법무관 아래엔 건축물과 도로들을 관리하는 직책이 있는데 이를 안찰관(조영관)이라 하고, 안찰관 아래엔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회계감사관이 있다. 위의 직책들은 순서대로 역임하여야 하고 이를 명예로운 경력이라 불린다.
주로 상부에서 임명하는 일반적인 관료사회와는 달리 로마공화정에선 저 직책은 모두 선거로 당선되어야만 맡을 수 있다. 또한 로마는 특이하게 상부의 결재를 받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담당관의 재량으로 이루어 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즉 안찰관이 법무관보다 권위가 낮은 직책이긴 하나 안찰관은 법무관의 허락없이 자신의 재량으로 건물을 수리하거나 축제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관료제로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피라미드식 조직이 아니라 각각 담당 분야가 따로 존재하는 선출직 행정관인 것이다.
처음에 이런 집정관, 안찰관, 법무관 등은 귀족에서만 선출되었으나, 로마 초기의 평민 반란 이후에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동등해지면서, 호민관 리키니우스의 주장으로 그 수의 절반을 평민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3. 선거 제도
로마에는 두 개의 집회가 있는데 전통적인 집회인 백인대 집회(Comitia Centuriata), 그리고 평민 집회(Comitia Tributa)가 그것이다. 백인대 집회에선 정부 관료를 선출하는 역할을 하였고 평민 집회는 호민관을 선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백인대 집회에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방식의 투표 방식을 썼다. 우선 모든 시민을 190여 개의 그룹에 할당하였으며 각 그룹은 각각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즉 각 그룹에서 시민들끼리 서로 거수 투표를 하여 우세한 의견이 그 그룹의 의견이 되고 그 뒤 190여 개의 그룹들의 의견을 비교하여 과반수가 승리하는 방식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그룹에 시민들을 할당할 때 재산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였다. 재산의 양은 이미 감찰관에 의해 문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서를 토대로 시민들을 분류한 것이었다. 이때 각 그룹당 자산 요구량은 거의 비슷한 범위로 세분화 되어있었기 때문에 부유층에 해당되는 그룹으로 가면 갈수록 그 그룹에 포함되어 있는 시민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다. 때문에 가장 부유한 그룹의 경우 고작 20명에서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무산자의 경우 한 그룹에 수천 명이 있었다.
그런데 백인대 집회에선 한 그룹이 한표를 행사하는 방식이므로 이 20명의 한 표와 수천 명의 한표는 같은 비중이었다. 따라서 이런 투표 방식은 기득권 층에 엄청나게 유리하였으며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공정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이러한 불공정한 점 때문에 평민들은 그들만의 집회를 따로 만든다. 평민 집회가 그것으로 여기선 공정하게 재산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이 시민들을 각 그룹에 할당한다. 이 그룹을 부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름의 뉘앙스에서 묘사하는 바와는 달리 출신 가문과는 상관없이 주거지별로 시민들을 나누고 각 그룹내의 시민들이 거수투표로 찬반을 가르면 그 의견이 각 부족을 대표하는 의견이 되어 과반수를 가늠하게 된다. 평민 집회엔 총 30개의 부족이 있었다.
4.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
원로원 계급의 로마인들은 이러한 순서로 관직을 밟아 나가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과정과 최소 연령 단계는 대대장(Tribunus Militum)-재무관(Quaestor)(30세)→안찰관(Aedilis)(36세)→법무관(Praetor)(39세)→집정관(Consul)(40세)→감찰관(Censor) 순이다. 원래는 연령제한이 없이 20대에 집정관에 선출되는 것도 가능했지만 또 다른 야심가가 나타나 공화국을 위협하게 될 것을 걱정한 술라의 조치로 인해 최소 연령이 생겨나게 되었다.
위의 경력 외에도 평민만 가질 수 있던 10석의 호민관(Tribunus Plebis), 그리고 두 석의 평민 안찰관(Aedilis Plebis) 직위가 있다. 호민관은 재무관, 안찰관보다 더 높은 경력으로 보았다.
로마 귀족에게 있어 300석밖에 없는 원로원에 진입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영예였는데, 당연히 그런 만큼 원로원 의원이 되는 건 매우 힘들었다. 우선 최소한 저 위의 관직 중 하나를 역임한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 관직 하나 하나가 죄다 선출직이라 수많은 경쟁을 뚫고 당선해야만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고 자리는 한정되었으니 당연히 선대 의원이 사망해야 공석이 생긴다. 원로원은 5년 주기로 뽑았는데, 매 선거마다 평균적으로 공석이 2~30석 정도 생겼고, 명예로운 경력을 밟던 자들 중에 원로원의 감찰관이 원로원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해 통과한 사람만이 원로원 의원이 된다. 그나마도 법무관 8명, 집정관 2명이 우선적으로 원로원이 될 자격을 심사받는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호민관이 되면 자동으로 원로원 입석이 주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로원의 수는 술라의 개혁 이전까지 300석에 불과하였다. 5년마다 공석이 20~30명 가량인데 법무관과 집정관 합쳐서 10명이 먼저 들어갈 확률이 높으니 대략 10~20석 정도가 비는 셈이고, 호민관은 해마다 10명씩 뽑으니 지난 5년간 뽑힌 호민관만 50명이다. 따라서 백여명이 넘는 호민관 경력자와 다른 명예로운 경력을 밟던 자들이 고작 10~20석 가량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라 실제로는 호민관이 되어도 원로원에 입석하는 걸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
때문에 로마 귀족들의 공직에 선출되기 위한 노력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지금의 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유권자에 대한 매수가 횡행해 로마 말기로 진입하면 로마의 정치가들은 매우 부유한 귀족이 아니면 엄청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엄청난 빚을 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이러한 선거를 여러 번 거치면서 생긴 빚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탈리나 역모 사건의 주역인 카탈리나도 카이사르와 맞먹는 빚을 지고 있었으며 또 쿠리오는 고작 호민관에 불과하였으나 집정관 때의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빚을 진 것으로 유명하였다.
어떤 정치가들은 눈부신 군사적 성과로 시민들에게 어필하여 인기를 모아 출세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 29세라는 어린 나이에 집정관이 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뛰어난 군사적 능력 때문에 집정관을 7번이나 역임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대표적이다.
5. 관련 문서[편집]
• 황제(임페라토르) - 제정시대부터
• 원로원
• 민회
• 독재관(Dictator)
• 집정관(Consul)
• 호민관(Tribunus Plebis)
• 감찰관(Censor): 본래 인구조사(census)를 맡은 한직이었으나, 점차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는 권한, 품행이 로마의 도덕 기준에 미달하는 의원을 제명하는 권한, 품행이 좋지 않은 시민의 시민권을 5년 간 박탈할 수 있는 권한 등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 법무관(Praetor): 본래 40세 이상 6명이 선출되었으나, 술라의 개혁 이후로는 8명이 선출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30세 이상으로 자격이 완화되었고, 단순한 명예직이 되었다.
• 안찰관(Aedilis): 조영관이라고도 한다. 서민과 귀족에서 각각 2명씩 선출되었으며, 로마 시의 다양한 업무를 맡아보았다. 도로, 공중 목욕탕, 음료수의 관리, 식량 공급, 축제나 각종 행사의 운영과 공급 같은 일이다.
• 재무관(Quaestor): 군대나 당국의 회계일을 맡았다. 초기에는 4명을 뽑았으며, 뒤에 10명을 뽑게 되었다. 일부는 로마에 남고 일부는 속주의 총독에게 파견되었다. 술라의 개혁 이후로 재무관의 수는 20명으로 늘어났으며 자격을 30세 이상으로 낮췄고, 재무관을 역임한 뒤에는 원로원 의원직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