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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다른 성경』
베드로후서 3:1-18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불신자들의 멸망은 믿지 않음이요 신자들의 멸망은 성경해석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어떻게 믿느냐의 직결되어 있고 어떻게 믿느냐는 어떻게 아느냐로 발전하기 때문이다.(벧후 3:18)
그냥 하나님이나 믿으면 되지 해석이 뭐 그리 중요한가? 하고 말씀하시는 분은 마치 “학생이 학교나 잘 다니면 되지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뭘 해” 하시는 분과 같은 분이다.
학생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학교 다니는 행위 자체에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신자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 다니는 행위나 단지 하나님을 믿는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이다.(본문 결론)
「믿음」은「의심」이란 존재에 무너질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아는 것은 그 반대인 모르는 것 때문에 손해보지 않는다.
믿음과 의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서로 반대말이란 점은 같지만 관계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믿음과 의심은 상대적이라서 믿음이 의심이 될 수도 있고 의심이 믿음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타의에 의해서도 가질 수 있지만(설득 당하는 경우)
아는 것은 나 자신의 능동적 결정에 의해서 되는 것이므로 믿음보다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요사이 시중에서 잘 팔리고 있는「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읽어 본 기독교인들 중에 그 동안 기독교를「믿어온」자들은 이 책의 내용들이 그들의 믿음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심지어 불교 포교당에서는「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타이틀로 걸고 모 대학 교수를 초빙하여 특별 집회까지 열고 있는 판국에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적 사실성만을 믿어온 「믿음신자」들에게는 결정적으로 회의를 일으키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가 지금의 나의 생명이요, 의식주요, 남편이요, 사랑의 대상으로 살아온「아는 자들」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라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이렇건 저렇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말이다.
결혼을 앞둔 처녀에게 있어서는 결혼 대상자의 과거가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이미 자식 낳고 수십 년 살아온 남편에게 있어 총각 때 과거지사가 이렇다 저렇다 뜬소문들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의 차이점은 바로 이런데서 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믿음이 반석과 같은「실존」이었다면 그 믿음이 우리를 지금의 아는 것으로 성장시켜 주었을 것이며 만약 그 믿음이 모래와 같은 개념이었다면 의심의 비바람이 올 때 무너지고 말 것이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었다면(엡 4:13) 사람의 괴술(괴변)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도 않을 것이다.(엡 4:14)
믿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는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알자! 아는 것이 힘이다(고전 4:20, 요일 2:14)
본론에 들어가 보자. 16절에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라는 구절이 있다.
「무식한 자」는「굳세지 못한 자」이다.
무식한 자가 누구인가?
원문에는 άμαθείς(아마데이스), 즉 배우지 못한 자이다.
굳세지 못한 자가 무엇인가?
άστηρικτοι(아스테리크토이)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α와 στηρίζω(스테리조: 확고히 하다. 확고 부동하게 고정하다. 강하게 하다)의 합성어로 ‘우유부단한, 굳세지 못한’ 등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반석 위에 세워진 στηρίζω(스테리조: 확고히 하다)가 아닌 모래 위에 세워진 άστηρίζω(아스테리조: 굳세지 못한)라는 말이다.
이런 자들이 억지로(?)푼다. 그러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풀다」의 원문 ατρεβλοω(스트레블로오)는 「반대로 돌리다」, 또는「비틀다」라는 뜻으로 방향을 뒤로 돌이키는 때 쓰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반대로 해석하다」가 되겠다.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 성경은「곡해하다」로 해석했고 영어성경들은 KJV가 wrest로, 그 외의 성경들이 distort로 했다.
그러면 실제 문제에 들어가 보자.
16절에 보면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주제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베드로후서 3장은 처음부터가 말세(3절)와 주의 강림(4절)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의 강림이 있을 때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천지 개벽이 일어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희롱하는 자들 이야기가 도대체 하늘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는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서 히죽거릴 것이라는 말이다.
과연 오늘날 식의 재림관처럼 하늘은 큰 소리로 떠나 가 버리고 체질은 불에 타서 녹아 내릴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야 불심판에서 면할 것인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바라는 것은 어떤 중대 사실을 “부러 잊으려”는 목적이요 또한 다른 사람도 부러 잊게 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중대 사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고져 원치 아니함이 그들의 원함이다. 고로 하나님은 그 사실을 감추시고, 깨닫지 못하게 하시며 무지하게 하신 것이다.(이 밑줄친 부분은 원문성경 벧후 3:5 처음 부분을 자세히 보시므로 이해하실 것이다. 글로 설명하기에는 좀...)
영어성경의 번역을 대조해 보면
KJV 는 For this they willingly are ignorant of.
NASB만 For when they maintain this, it escaped their notice로 해서 원문의 의미를 잘 살리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είς:‘위하여’도 될 수 있음)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이다.
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여 보존해 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이 알지 못하도록 λανθανει(란다네이: 감추다, 깨닫지 못하게 하다) 하신 것을 3:5절에 처음에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λανθανει Υάρ αυτους τούτο θελοντας(란다네이 가르 아우투스 투토 테론타스)
이 부분이 우리말 성경들 전부와 NASB를 제외한 영어성경들이 오역한 부분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道(ὁ λογος)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하였고 역시 로마서 1:17절과 18절은 이렇게 대조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한다고 했는가 하면 18절에는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도 했다.
또한 고후 2:15에서는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고도 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리에서 그의 하실 일을 이렇게 말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거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혀는 곧 불이요”(약 3:6)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유 23)
등등의 말씀을 연결시켜 자세히 살펴 보라.
부러 잊으려 원하지 않고 알기를 원한다면 “그가 가르치시고...생각나게”(요 14:26) 하실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요3:16참조)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이다.
그래서 15절에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이제는「오래 참으심」의 은혜는 끝났다.
이제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의「그 날」이다.
앞으로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늘과 땅은 창조할 때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가?
하늘과 땅은 그만 두고라도「체질」이 무엇보고 체질이라 하는지 살펴보자.
원문으로는 στοχεία(스토케이아)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안에 7회 인용되었는데 갈 4:3,9, 골 2:8, 2:20 등에서「초등학문」으로, 히 5:12에서는「초보」로 번역이 되었는데 본문에서만「체질」이라고 번역되어 있다.(10절, 12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갈 4:3)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 4:8,9)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골 2:20)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등이다.
「체질」이 아니라「초등학문」이다. 「알곡」이 아니라「쭉정이」라는 말이다.
「풀어진다」의 λύω(루오)는「무너진다」,「헐어버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 ‘초등학문,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유전’은 무너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기 때문이다.(골 2:8) 이것은 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다(골 2:20-23참조)
‘너희는(개역 성경에는 없음)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절)
이 말씀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이 불에 타서 녹아지는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7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다.
결론을 맺자.
15절은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다고 했다.
바울 서신 살전 5:1이하를 보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벧후 3:4참조)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시고는 4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같은 때, 같은 시기, 같은 장소, 같은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 전혀 다른 두 사건이 일어난다.
밤과 낮
빛과 어두움.
자고 있는 것과 깨어 있는 것
깨달음과 무지함.
데려감을 당함과 버려 둠을 당함.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반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다른 성경」이 무엇이며「억지로 푼 것」이 무엇인가?(렘 8:8 필히 참조)
최종 결론은 17절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이것을 미리 알았는가? 그렇다면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덜어질까 삼가라” 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A-μεν
첫댓글 쉐아르님의 글은 저의 입맛(?)에 딱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경계하게 됩니다. 쓴 약이 몸에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물론 달콤한 약이 꼭 나쁘다 거나 쓴 약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가끔 일명 사이비라는 곳의 글을 읽어보는 데 그 곳의 글 중에도 제 입맛에 딱 맞는 글이 많더만요..^^;; 그래서 글이 제 입맛에 맞게 되면 저는 먼저 경계를 취합니다. ^^;;
저는 칭찬도 경계하게 되는데 칭찬은 달콤해서 교만이라는 눔에게 넘어가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쉐아르님의 글은 제겐 참 신선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늘 주님의 은혜로 겸손함을 간직하시게 되기를 빕니다. ^^* 강건하소서!^^*
감사합니다 겸손! 주님의 은혜로 겸손을 입게하소서..
"앞으로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늘과 땅은 창조할 때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쉐아르님 님께서 체질이 풀어진다는 말씀을 눈에 보이는 땅이 불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다라고 설명하신 것처럼 이해됩니다. 제가 님의 이야기를 맞게 이해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