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풋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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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아름다운 한 여인과의 따뜻하면서도 짧은 사랑이 있었다
내 나이 24살!
나는 현대그룹에 공채되어 현대중공업 조선설계부로 발령받아
울산에 한 2년 근무했던 적이있었다.
이 얘기는 그당시 어느 여인과의 짧은 사랑 이야기이다
당시 조선설계부에는 1000여명의 직원이 있었고,
그중에는 나와 같이 서울에서 간 사람이 몇몇 있었다.
자연히 퇴근후에 서울사람끼리 자주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중에 남호걸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특히
언변이 좋아 주위엔 여자 친구들 내지 애인이 많았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쑥맥이라 여자 친구도 애인도 주위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호걸이가 커피를 산다고 울산 시내 어느 다방으로 나를 이끌었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그 다방은 DJ가 신청곡을 들려주는 음악다방이었고,
나이어린 마담과 그보다 더 어린 레지 3명이 종사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다방 레지중에 한명이 호걸이의 애인이었고,
그 둘은 서로 장난처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그 다방을 자주 가게 되었으며, 가끔 나 혼자서 가는일도 있었다.
갈때마다 마담이 유난히 내게 친절을 베풀었고, 우리는 점점 친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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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과 마주할 때면 나도 매우 즐거웠으며,
그 여인의 미모나 인기 또한 그 다방 근처의 전파사나 양화점 주인등
그 동네 유지들의 넋을 잃게할 만큼 뛰어났었다.
다방 마담인 그여인의 이름은 '오합분(吳合分)' 이었다.
본명은 아니었고 얼마전 그 여인에게 반했던 어느 문필가가
그 여인이 외국의 영화배우인 '오드리햅번'과 많이 닮았다하여
오드리햅번을 줄여서 한국식으로 '오합분'이라 예칭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본명도 있지만 그녀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밝힐수가 없고
그녀 본명의 끝자가 '영'이었으므로 이후로는 '영아'로 부르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본명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만 자기의 본명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무언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렇게 숙맥인 내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나는 그녀의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저 아름다운 한 여인과의 시간만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영아는 나에게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향은 강원도 어느 산골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않아,
어린나이에 가정부 생활로부터 보따리 행상등 여러가지 힘든 일과 천대도 받았고,
결국은 어린 나이를 화장속에 숨기고 다방 레지를 수년간 한 끝에
지금 다방 마담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에의한 남자들과의 과거도 있었다는 것...
영아는 그 얘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었고,
나는 애써 숨기려하는 그녀의 눈속에서 언뜻 이슬같은 물기를 느끼고 있었다.
연민이었다.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으나 영아에 대한 과거를 들은 후부터
내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자라고 있었다.
3대 독자로 늘 외롭게 지내온 나에게,
다가온 그녀의 특별한 사랑은 서서히 나를 그녀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넣었고,
서로의 정은 삭막한 울산의 거리를 포근하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아와 내가 만나는 장소는 늘 그녀가 일하는 다방 안이었다.
그때 내가 너무 순진해서 였을까?
둘이 밖에서 만나는 일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늘 그녀는 손님 사이를 오가며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취미 삼아 가지고 다니던 스케치북에 연필로 그녀의 모습을 담아내곤 하였다.
바쁜 중에도 영아는 간간히 내 앞자리에 앉아 주었고,
그리 길지도 않은 토막 대화였지만 잠깐이 몇 시간이나 지나곤 했었다.
나는 그때 그렇게 젊었었고,
영아 또한 고생한 사람 답지 않게 늘 맑고 화사한 모습으로 나를 대했었다.
드디어 초상화 몇장이 완성되었고,
그 중에서 제일 잘 된 그림을 선별하고 액자에 표구하여
어느날 그녀에게 선물을 하게되었는데...
(그 그림을 받고 마치 온 세상을 얻은듯이 좋아하는 영아의 모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서로를 좋아하던 어느날.
그날도 호걸이와 몇몇 친구가 그 다방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참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호걸이가 내게 말을 건넸다.
'수만아, 우리 다음 일요일 이 다방 아가씨들과 놀러가지 않을래?'
( 그당시 나는 기타를 잘 쳤고,
그때 유행하던 이수만의 노래를 곧잘 불렀으므로 내 별칭이 수만이었다 )
'글쎄... 근데, 이 다방 아가씨들이 같이 가줄까?'
'그런건 걱정말아, 이미 내가 다 약속해 놨으니까.'
'누구누구랑 약속했는데?'
'여기 아가씨들 전부'
'여기 마담두?'
'내가 얘기는 했는데... 그건 네가 다시 물어봐라. 아마 네가 가자고하면 같이 갈거야.'
그래서 나는 영아에게 의사를 물었고 마침 그날 다방이 쉬니까 별 문제 없다는 승낙을 받았다.
이어 우리는 돌아오는 일요일날 울산역에서 아침 7시에 모두 모이기로 하고
각자 독신자 숙소로 헤어졌다.
며칠후 일요일.
나는 아침도 못먹고 7시쯤 울산역에 도착하였고,
약 10분쯤 지나 영아가 캐쥬얼 복장으로 나타났는데,
한시간을 기다려도 호걸이와 다른 친구들은 오질 않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여기에는 호걸이와 친구들이 나와 영아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위한
고마운 음모가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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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호걸과 친구들은 장경사로 향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사실도 까맣게 모르는채 울산역에서 약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들이 오지를 않자, 영아와 나는 친구들을 포기하고
한참 궁리끝에,
양산의 내원사를 구경하기로하고, 내원사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때만 해도 가는 길이 거의 비포장이라,
버스의 뒤쪽에 자리한 우리는 요동치는 버스를 따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때마다 영아와 나의 몸이 서로 부딪히기고 하고,
스치기도 하며, 서로에게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직까지 서로 손도 한번 잡아보지 않은 우리는,
약간 멋적기도 하였지만, 영아도, 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고,
오히려 서로의 몸이 닿을때마다 짜릿한 전기 같은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늦은 가을철이라 차창 밖으론 추수를 끝낸,
텅 빈 논과 밭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고, 드디어 우리는 내원사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다.
그때는 거의 점심때쯤 되었는데, 배도 그리 고프지도 않았지만,
주위에 밥을 먹을만한 식당도 없고해서,
우리는 그냥 내원사로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길 양쪽에는 소나무와 상수리,잣나무,밤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숲속으로 이름모를 산새들과 청설모,다람쥐 같은 것들이
가끔씩 걸어가는 우리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었다.
이윽고 내원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뜰에들어선 우리는, 일단 경내를 한바퀴 돌아본후,
대웅전에 들어가 예배를 하고, 서로간에 별 말없이 한참을 법당에 앉아 있었다.
서로간에 말은 없었지만,
분명 영아도, 나도 상대에 대한 생각과 대화의 실마리를 궁리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내원사는 여승들이 수도하는 곳이라 역시 정결하고 조용한 사찰이어서
어쩌면 그 절의 분위기에 동화되었는지도 몰랐고,
폭풍 전야의 고요라할까? 앞으로 다가올 정열의 전조라할까?
아무튼 우리는 오래지 않아 절을 나와 다시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길가에서 도토리묵과 막걸리를 파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나의 제안으로 영아와 나는 숲길 한편의 할머니 좌판 앞에 나란히 앉아
도토리묵과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영아는 술을 많이 못하는 편이라 막걸리 두병을 거의 나 혼자 마신 폭이 되었는데,
두어잔 마신 영아는 얼굴이 발그스레 상기되었고,
나도 몸의 전신에 서서히 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술의 힘이었을까?
자리를 일어선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되었고,
얼마 지나지않아 쌀쌀한 늦가을 추위를 핑계삼아
영아가 나의 겨드랑이에 자기의 팔을 넣었으며
나는 그런 영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버스 정류장까지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정류장에서 한 30분을 기다려 우리는 울산행 시외버스를 탔고,
승객이 별로 없는데도, 우리는 맨 뒷좌석으로 같이 자리했다.
버스는 역시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고,
나는 취기가 있다는 핑계로 영아의 무릎에 머리를 뉘었으며,
그런 나를 영아는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요동치는 버스에서 영아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영아를 올려다보는 그런 자세가 되었는데,
버스의 흔들림 때문인지, 영아와 나의 얼굴은 점점 가까와 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는 점점 더 흔들리고 있었고,
어느새 우리는 길고도 격렬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내 생애의 첫 키스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맨 뒤좌석이라 그런지, 승객들 누구도 우리의 대범한 애정행각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우리는 울산에 도착할때까지 스릴있고도 은밀한 키스를 그렇게 나누고 있었다.
버스는 울산 터미날에 도착하였고,
버스에서 내린 나는 그녀와 함께 시장으로 가 몇몇 반찬거리를 산뒤,
저녁을 손수 지어주겠다는 영아의 손에 이끌려
남자에게는 한번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하게 된다.
나는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그녀의 방에 들어가 앉았다
'수만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가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드릴께요'
미소와 함께 그녀는 부엌으로 나가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고...
얼마후 두부찌게 냄새와 함께 그녀가 조그마한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하느라고 했는데 맛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그녀와 나는 마주하고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마치 신혼의 부부처럼...
저녁을 먹은후 영아는 언제 준비하였는지 맥주와 과일을 작은 소반에 내어온다.
'수만씨 천천히 맥주나 한잔 해요'
늦은 밤이었지만 영아와 나는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고
시간은 자꾸 지나 어느새 나의 숙소로 가는 버스는 끊어지고 있었다...
******************** 4 *******************
영아의 방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주 아담한 방이었으며,
남쪽으로 핑크빛 커튼이 쳐진 작은 창문아래 싱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찻장옆으로 마른꽃 화병이 놓여진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 벽의 한가운데에는
전에 내가 그려주었던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자정쯤 되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만씨 가게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응 이제 가봐야지'
'지금 통금인데 어떻게 갈려구요'
'그래도 가봐야지'
영아는 못내 아쉬운 눈빛으로 나의 옷자락을 잡는다
'통금에 걸리니까, 아예 여기서 자고 가세요'
사실 나도 은근히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해 오길 바라고 있었으나,
남녀가 한방에서 밤을 지낸다는 것이 웬지 쑥스럽고 처음이라
어떻게 처신을 해야할지 몰라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통금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각에 밖으로 나가면 경찰의 단속에 걸릴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영아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럼, 영아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방바닥에서 잘께'
'아녜요, 수만씨가 침대에서 자고 내가 바닥에서 잘께요'
영아는 극구 나에게 침대를 권했고 나는 못 이기는체 침대위로 올라가서 누었다.
밤이 깊어가고 불을 끈 방안에는 창문의 커튼 사이로 달빛이 새어들어와
바닥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애써 잠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사념들로해서 좀처럼 잘을 이룰수가 었었다.
가끔씩 몸을 뒤척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영아도 잠을 못 이루는듯 하였다.
그렇게 둘은 밤새도록 잠을 한잠도 못자고 있었다.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못한채...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영아는 아침밥을 준비했고 우리둘은 출근하기위해서 집을 나섰다.
'수만씨 오늘 저녁에도 우리 집으로 오세요'
'응, 그래'
나는 마치 부부나 된양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서 방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퇴근 시간이 6시였고 그녀의 퇴근은 11시쯤 되니까,
내가 그녀의 집에 7시쯤 도착한다고 하여도
약 4시간 정도는 그녀를 기다려야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나는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혼자 그녀의 침대에 누웠다.
불과 이틀을 그녀의 방에 누워보는데도
마치 오랫동안 그녀의 방에서 같이 살아온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무어라할까 여인의 체취가 물씬 젖은 영아의 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도 전혀 배도 고프지 않았고,
그녀를 기다린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었다.
이윽고 11시쯤 그녀가 돌아왔고, 우리는 전날처럼 맛있게 저녁을 먹었고,
나는 침대에 영아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리고 어김없이 밤은 깊어갔고, 얼마나 지났을까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잠결인체 하며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영아의 잠자리 옆으로...
그리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자는 줄 알았던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 바로 내게 안겨왔다...
사랑을
하는 동안은
세상의
온 천지가
꽃밭이었다
******************** 5 ********************
둘은 한참이나 말없는 침묵속에서 그렇게 서로 부둥켜 안은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어깨에 닿은 그녀의 얼굴이 피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나의 어깨에 무언가 뜨거운 액체 같은 것이 젖어 왔다
눈물이었다
그녀는 동그란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영아야, 지금 울고있는거야?'
'아니'
'울고있는것 같은걸?'
'아녜요, 그냥 조금 눈물이 나왔을 뿐이예요'
나는 그녀를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고,
그녀는 나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영롱한 무지개빛 바다를 밤새도록 항해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십여년동안 간직했던 니의 동정을 주었고,
그녀는 내게 그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희열과 행복을 주었다.
영아와 나는 그렇게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를 보냈고,
그 날들은 진정 꿀처럼 달콤하고 꿈처럼 아련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영아와 내가 약 한달여 동거를 하며,
뜨거운 사랑을하던 어느 초겨울 저녁
그날도 나는 퇴근후 어김없이 그녀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방문을 열고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나의 눈에 하얀 종이가 침대위에 놓여있는것이 보였다
그건 영아가 내게 보라고 놔둔 쪽지였다.
'수만씨 9시쯤 다방 옆 레스토랑에서 봐요, 영아가'
갑자기 무슨일일까.
나는 대수롭지않게 여기면서 그 레스토랑으로 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9시 얼마 지나지않아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아야, 무슨일인데 여기서 만나자고...'
'우선 맥주부터 한잔 해요'
우리는 우선 매주 두병과 마른 안주를 시켜, 서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 이젠 얘기를 하지'
'조금 있다가요'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다르게 무언가 긴장하고 있는것 같았고
얘기할 무언가를 단단히 마음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수만씨, 이제 우리 헤어져요'
순간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우리 헤어지는게 좋겠어요'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말이야'
'서로를 위해서 헤어져요'
'잠깐,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녜요'
'그럼 왜?'
그녀는 긴 속눈섭을 내리깔고 아주 낮은 목소리고 내게 얘기하고자 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수만씨를 너무사랑하기때문에 드리는 것이예요,
그리고 이 얘기를 다 들으신 뒤에는 나의 뜻을 따라주셔야해요.'
나는 대답도 잊은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숨긴 사실이 있는데,
그건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라 미처 말할 틈이 없어서예요'
'나는 오래전에 무슨 일로해서 산부인과 진찰을 받았는데,
그때 의사가 내게 하는 말이
나는 앞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했어요'
'혹시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했지요'
'수만씨가 3대 독자인것도 중요하지만, 나 같이 과거가 있고 학벌도 없는 여자가
수만씨 같이 앞날이 창창한 사람의 걸림돌이 될수는 없어요'
나의 가슴에는 아주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짓누르고 있었다
'그게 헤어지자는 이유인가?'
'네'
'우리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사간이 가면 갈수록 우린 헤어지기가 더욱 힘들거예요'
'아냐,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
살며시 고개를 젓는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일단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태화강변으로 갔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 탓인지, 시간이 너무 늦은 탓인지, 강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영아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고 어두운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 어찌해야 하나...
일단 영아에게 다시 생각을 해보자고 말을 하고, 영아를 집으로 데려다 주자!
그 날 영아는 나를 그녀의 방으로 이끌지 않았고,
나 또한 말없이 돌아서서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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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녀(石女)예요'
영아의 그말이 계속 머리속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석녀라는 말을 처음 접하였으니,
그 전까지만해도 그말의 뜻이 무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은 영화나 드라마에만 있을 것으로 알았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마치 이건 현실이 아닌 꿈 같았고, 차라리 꿈이였으면 하였다
며칠을 꼼곰히 생각한 끝에 나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래, 일단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그리고 서울의 집으로 가서 나는 부모님께 자초지정을 간략히 말씀을 드렸다.
영아가 석녀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처음에는 모두를 말씀 드릴려고 하였으나,
차마 그 얘기만은 할수가 없었다.
내가 3대 독자이기 때문에 2세가 중요하다는 것과,
부모님이과 친척들이 내게 거는 기대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있는 나였기에...
아무튼 나는 부모님의 반 승락을 받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고,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밤 늦은 시간에 영아가 근무하는 다방 길건너에 있는 다른 다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시간에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되었고
테이블 마다에는 양초를 두 자루씩 켜놓고 있었다.
이윽고 일을 마친 그녀가 들어왔고, 나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는 무슨 선물 포장 같은 물건이 들려져 있었다
정전이라 다방안에는 음악도 없이 숨이 멎은듯 고요한 적막이 흘렀고,
손님도 별로 없는 다방 한구석 창가에 우리가 있었다.
'영아야, 모든것 다 잊고 우리 결혼하자.'
'네?'
'내가 집에 가서 다 말씀을 드렸어'
'무슨?'
'영아 얘기 말야'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오는듯 했다
'안돼요'
'절대로 그건 안돼요'
'수만씨와 나는 지금까지의 사랑으로도 충분했어요'
'그리고 우리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게 좋을것 같아요'
어둠속에서 간간히 촛불에 일렁이는 그녀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낄수있었다.
나는 계속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으나, 그녀 역시 나를 강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만씨 이거 받으세요'
그녀가 가지고있던 물건을 천천히 탁자위로 내밀었다
반짝거리는 포장지에 싸인 작은 상자였다
'이게 뭔데?'
'보시면 알아요'
'그리고 이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나는 일단 포장을 풀어보았다. 그건 가죽으로된 허리띠였다
'그래 선물은 일단 고맙고, 만나지 말자니 아직은 안돼'
'우리 오늘이 마지막이예요'
'글쎄, 그런 말은 하지말라니까'
영아는 더이상 말을하지 않았다. 아니 말이 필요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영아의 말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있었다
잠시후 우리는 다방을 나와 태화강둑에 나란히 앉았다
어느샌가 그녀는 아주 나지막이 흐느끼고있었다.
나 역시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어둠을 보고 있었다.
'영아야 걱정마'
'그리고 우리 다시 생각해'
'내일은 우리 밝게 웃는거야'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영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잠깐 영아의 얼굴엔 연한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처럼 각자 헤어져 집으로 갔다.
그것이 영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다음날 영아는 다니던 다방을 그만두었고,
그녀의 방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다
집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날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퇴근후 매일 울산 시내를 미친듯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영아와 알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찾을수 없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여인을 가르쳐 주었고, 사랑의 눈을 뜨게해 준 여인...
그녀는 그렇게 내게서 떠나갔다
그리고 나도 얼마후 울산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왔다.
수십년이 지나 지금도 울산을 지날때면 그 때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 나중에 할아버지 할머니 되거들랑, 꼭 다시 한번 만나요'
******************** 끝 ********************
- 1996. 2. 作 -
첫댓글 ㅎ~ ....... !!!!!!! 자전적 고백이군요...잘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만날 겁니다...^^*~ 나도 오래 전에... 몸이 점점 굳어가는 한 소녀를 만난적이있었지요...반쪽이.귀도 먹어가고... 귀를 먹으면 언어도 상실된다지요...^^*~ㅎ~ 그런 아린 기억이..^^*~
잘읽었습니다. 지나간과거속의 아름다운이야기들은 그때의 그 시간속에 다 묻혀버리죠..다시만난다면? 사랑이란 아음속에 묻어둔 시간속에서 그 잔잔한 빛을 간직 할 뿐 다시는 그 시간은 되 돌릴 수 없는것일겁니다. 그냥 마음속에 아름답게 간직하세요....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