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영화 실미도가 드디어 한국영화 신기록을 세웠다.
전국 관객 835만을 넘어 서서 앞으로 이 신기록이 얼마나 더 올라갈지 모른다고 한다.
너무나 극적이었던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두었던 데에다 영화 자체의 극본 또한 탄탄했고, 홍보 활동을 비롯한 영업 전략도 성공적이었다는 등 각종 찬사가 당분간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많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당시의 실미도 사건과 영화 속의 이야기가 다소 차이가 나는 점이 있어서...
누군가가 한 번은 정리를 해 주어야 사람들의 혼동이 덜할 것 같아서 감히 한 번 정리를 시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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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발단은 영화에서도 잠깐 다루었듯이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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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4 . > 북한, 남파 공작부대 124군부대 창설
-- 총 8기지 2,400명 규모 (1개 기지 병력은 300명씩)
<1968. 1. 5> 북한 124군 제6기지 유격장교 25명, "청와대 습격 모의훈련" 실시
-- 6기지는 서울경기 침투 담당 특수부대임 --
<1968. 1. 14> 25명을 31명으로 증원하여 2일간 마지막 사격훈련 실시
<1968. 1. 17> "경기도 유격사령부" 견장을 단 우리 국군 복장으로 김신조 등 31명이 남쪽으로 출발함
-- 1999년 6월부터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김신조침투로'가 공개되어 안보교육에 활용됨
<1968. 1. 20> 청와대 근방에서 우리 나라 군경과 교전 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많은 수가 사살되었으나 일부는 계속 청와대 방면으로 진출함.
-- 밤 10시 서울 세검동 자하문 초소에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함.
-- 또 이날 밤 전투에서 민간인 5명 사망하고 경찰 2명 부상함.
<1968. 1. 21> 군경 합동 수색단에서 서울 경기 지방의 무장공비 소탕작전 개시.
-- 청와대 뒷산 등에서 계속 작전 수행.
<1968. 1. 23> 원산 앞 바다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게 끌려가는 사건 발생함.
-- 남북한 문제가 연속적으로 며칠간 전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함.
<1968. 1. 31> 무장공비 소탕 작전 종료.
-- 1명(김신조)생포, 27명 사살, 3명(박재경 등) 놓침
<1968. 2>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우리 국군 직할의 북파 공작원 부대 창설 결심
-- 미군 관리의 국군 북파 공작원 부대는 있었으나 우리 군 관리는 없었음.
<1968. 4> 실미도에 공군 소속 제 2325전대 209 파견대(일명 684부대) 창설함. -중앙정보부 예산 지원-
-- 파견대장 김준웅 상사, 소대장 김방일 중사. 훈련병은 김신조 일당과 같은 수로 31명으로 출발함
※ 영화에서는 전원 범죄자 출신이나, 실제는 절반 정도가 범죄자 아닌 보통의 일반인(투검하는 서커스단원, 막노동일꾼 등) 또는 공군 출신이었음
※ 영화 속의 훈련 장면은 극기훈련 수준에 불과한 것임. 실제 훈련 강도는 훨씬 더 강했음
※ 훈련기간 중 사망자는 모두 7명. 나중에는 24명으로 줄어 들게 됨
---- 1명은 바다 수영 훈련 중 익사함.
---- 1명은 상관에게 대드는 하극상 항명 사건으로 몰매 맞아 죽음
---- 2명은 실미도에서 탈출하다가 잡혀서 즉결 처분 처형.
---- 3명은 무의도로 넘어 가서 무의분교의 여교사를 집단 강간하다가 잡혀 와서 총살.
※영화에서는 줄타기하다가 떨어져서 1명이 죽고..
※강간하다가 들켜서 2명이 자결하는 것만 보여 줌. 상당히 축소된 것임
<1970. 10>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실미도 684부대 해체 결정. 예산 지원 중단함.
-- 그동안 지급되던 훈련병 봉급 중단, 부식은 갈비에서 단무지로, 주식은 쌀밥에서 보리밥으로 변경
-- 폭탄으로 고기잡아 구워 먹기도 하고 양귀비 재배하여 부족한 약품을 보충하기도 함
-- 서서히 불만감 고조됨
<1971. 8. 22>일요일. 684부대장 김준웅 준위와 소대장 김방일 중사, 육지로 나와 인천의 모 병원 방문함
-- 실미도 훈련병의 유탄에 부상 당한 무의도 어민에 대한 병 문안이었음.
★ 연안부두에서 실미도행 배가 막 출발했을 때, 김준웅 부대장이 김방일 중사의 약혼녀가 인천으로 찾아 왔다는 무전 전화를 받음
-- ★ “야, 허준호! 아니 김 중사! 너 약혼녀 왔단다. 오늘 그냥 인천 있다가 내일 들어 올래?”
-- ★ 김방일 중사, “넷, 감사합니다!” 바로 바다에 다이빙하여 헤엄 쳐서는 약혼녀 만나러 연안부두로 돌아감. *^.^*
※ 영화에서는 허준호가 높은 사람들 만나러 멋있게 출장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
※김중사의 목숨을 살린 이 때의 다이빙 장면도 "20세기 최고의 다이빙"으로 기록될 만한 멋있는 것이었음
<1971. 8. 23> 실미도 사건 발생
05:00 훈련병들, 일제히 활동 개시
-- 부대장 김준웅의 숙소에 침입, 단검과 망치로 때리고 카빈 총으로 무전기를 박살냄
--※영화에서는 안성기가 멋있게 권총자살함 -
-- 기간병 내무반에 들어 가서 카빈으로 난사, 대부분 자다가 죽음,
-- 1명은 변소 갔다가 총 소리 듣고 똥통 속으로 들어 가서 살아 났고,
-- 1명은 모포 뒤집어쓰고 자는 체질이라, 그 모포 때문에 살아났고,
-- 바다 쪽으로 도망 가던 5, 6명 중 대부분은 총에 맞거나 익사하였으나
-- 그 중 1명은 실미도 앞 돌섬까지 무사히 헤엄쳐 와서 살아 났음.
-- 또 2명은 바닷가 수많은 바위 뒤에 꽁꽁 숨어서 살아남.
-- 용감한 기간병 1명은 훈련병 2명을 사살한 뒤에 총 맞아 죽었고..
06:30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총으로 위협하여 세워서는 배를 타고 실미도를 빠져 나감.
--★ 외박으로 안 돌아 온 김방일 중사에게 일부 훈련병이 쪽지를 남기고 실미도를 떠남
== “소대장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쪽지 내용에서 훈련병들의 착잡한 심경이 보이는 듯함.
=== 기간병 생존자는 이불 속 및 화장실, 바위 뒤와 돌섬에 몸을 숨긴 5명과 간밤에 인천서 안 돌아온 소대장 김방일 중사 등 모두 6명임.
10:00 김재명 대간첩대책본부장 공식 기자회견
- "무장공비 남파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 8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휴전선 및 강화도로 침투한 무장공비 14명 중 10명 사살했다.."
-- 너무 자주 듣는 소리라 많은 시민들은 반신반의하거나 아예 무관심.
-★- 같은 시간에 북한적십자사가 또 다음 내용을 발표함
-- “26일 대한적십자사의 문서를 받을 연락원을 2명 파견할 것이다”--
== 남북관계에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실미도 훈련병들은 불안해 했었다. 실미도를 막 떠난 지금은 신경도 안 쓰지만--
12:10 실미도 훈련병들. 무의도에서 24톤 안강망어선으로 바꿔 타고 송도 초소 앞 500미터 지점 상륙함
-- 얼룩무늬 예비군복 차림에 “중앙 유격사령부”라는 견장을 착용
★ 1. 21 사건 때 북한의 김신조 일당의 견장은 "경기도 유격사령부"였다
-- 상륙 후 송도 해안에서 일부는 해수욕 온 기분도 내 보고 잠깐 놀다가 “이젠 슬슬 가 보자”며 일어 섰다.
---★ 그 때만 해도 인천 송도는 엄청 손님이 많은 해수욕장이었다
--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던 김형운 일병이 용감하게 “누구냐”고 했더니
---- “어떤 놈은 바다를 기며 훈련하고, 어떤 놈은 바닷바람을 쐬며 초소근무하냐”
----“우리는 특수부대인데 해상침투 훈련 중”이라며 다들 중얼중얼대면서 지나갔다는데...
※ 영화에서는 초소 김일병이 총 맞아 죽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의 김일병은 “21명이 지나갔다”면서 2 번이나 착실하게 보고했다.
-- 민가에서 통일화 신발 하나를 그냥 가지고 가려다가 주인이 뭐라 그러자 500원 주고 감.
-- 송도 옥골고개에서 해수욕객 상대 떡장수 할머니(70)에게 떡 1,700원어치 사 먹고 돈 2,000원을 주고 감.
-- 그리고 숲 속에 LMG 총 1정과 실탄 1상자(250발) 숨겨 두고 떠나 감
☆ 이 상자는 곧 동네 아이 이염호 군(16)에게 13시 30분 경 발견됨
12:53 인천 시내로 가던 항도교통 시내버스에게 총을 들고 서라고 함.
-- 경기 영 5-2373 기사 임명오(30), “군인들이 총 들고 장난을 다 치네” 웃으면서 차 세움
-- 실미도 군인 중 대위 계급장을 단 사람이 지휘자인 듯 했다고 함.
-- ★ 이원희(23) 소위, 병력 24명 인솔하여 즉각 출동. 괴한(?)들 버스에 타는 걸 목격.
-- 버스가 500미터 정도 갔는데, 이원희 소위가 버스 뒤에서 주책없이 용감하게(?) 공포탄 2발 발사한다
★★★ 이것이 육지에서의 첫 총소리였으며 앞으로 전개될 대참극의 시작이었다.
☆☆☆ 육지에서마저 그 지겨운 총소리를 들은 실미도 군인들, 눈이 확 뒤집혀졌다
---- 그래도 실미도 군인들, 침착하게 우문국 씨(54. 전 인천박물관장) 등 승객 6명과 버스기사, 여차장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하고서는..
--- 즉각 버스 밖으로 총을 응사한다. 쌍방 500발의 총알이 오고 갔다.
---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던 김은희(5) 총탄에 사망
--- ☆최성기(23) 하사 복부에 관통상, 전용하(24) 병장 왼쪽 어깨에 찰과상
---이 때 버스 안에서 실미도 군인도 2명 사망함.
-- 버스 기사도 오른팔 부상... 실신
-- 실미도 군인 중 공군소위 출신 김종철(29)이 대신 운전함
-- 첫 교전 후 버스에서는 “프린스호텔로 가자”“인천한일은행으로 가자” 설왕설래하다가
-- 모 중학교 2학년 장 모 군(15)에게 “서울로 가는 길이 어디냐”라고 질문을 하기도 함
-- 버스는 학익동- 용현동-숭의로터리-제물포역-석바위까지 갔는데
-- 버스 오른쪽 뒷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자 하차함.
-- ☆ 이 시내버스에는 군복 입은 사망자 2명과 중상자 2명을 남겼음
-- 약 10분간 버스를 기다리다가 서울 방면으로 가는 급행시외버스를 정지시킴
-★- 이 날 제물포고 박정윤 선생(부천 거주),수원여고 양숙자 선생과 함께 이 버스를 타고 가던 안양공고 배대기 선생이 갑자기 "앗, 뭘 놓고 왔다"면서 이 정거장에서 후다닥 일어서서 내렸다는데, 버스에 올라타는 실미도 군인들과 옷깃을 강하게 스침.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난다고 함.(계속 타고 가던 박정윤 선생은 부상 입원, 양숙자 선생은 사망으로 운명이 갈린다)
-- 영등포 경유 수원 가는 이 태화여객 경기 영 5-1681(기사 정영소. 38), 드디어 서울 방향으로 출발함
--운전기사가 고의적으로 천천히 운전하자 실미도 군인(김종철로 추정됨)이 핸들을 잡고 같이 운전, 이를 본 어느 여자승객이 "운전은 그냥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 야단치는 바람에 운전기사가 혼자 운전해 감.
--실미도 군인들, "몇 년간 휴가도 못 가고 보리밥만 먹었다", "후배 군인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는 등 왁자지껄함.
-- “중앙청 가자”“국회 가자”"공군본부 가자"며 자기네들끼리 계속 정처없이 떠들고 있음
★★ 이 버스에서도 실미도 군인들은 승객들에게 일제히 머리를 숙이고 있으라고 계속 당부했다. 바깥에서 날아오는 만약의 총탄에 대비하여 취한 조치이다.
-★- 이 때 어떤 군인이 승객들에게 직업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 제물포고 박정윤 선생이 "나, 제고 선생이요"라 그랬더니 자기 사촌누나가 교사인데 제일 좋아 하는 사람이라면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신경쓰지 말고 머리 숙이고 계세요" 그러길래 머리를 팍 숙이고 있었다.
-- ★ 12개의 경찰지서와 검문소를 통과하여 소사까지 15km 가량을 그냥 신나게 달림.
-- ★ 운전기사 정영소 씨, ‘우리나라 검문체계 왜 이 따위냐’ 속으로 계속 투덜댐.
-- 동인천경찰서 김창원 순경, 사이카로 인천 석바위에서부터 계속 따라 오다가....
-- 소사검문소에서 드디어 버스를 앞질러 용감하게 가로막다가 등에 총을 맞고 즉사함.
13:25 신앙촌입구 검문소에서 또 경찰 1명 부상
-- 제1, 제2, 서울대교는 바리케이드로 차단
-- 군 경 예비군 및 장갑차 1대와 헬리콥터 2대가 동원됨
13:30 "정체불명 무장괴한 20 여명 인천에서 서울로 진입중"이라고 방송에서 보도됨
-- 영등포 문래동 방림방적 앞에서 착실하게 교통신호 기다리던 중.... (이 때 큰 트럭 1 대도 버스 옆에서 함께 교통신호 기다렸음 )
---- 이 때 실미도 군인들 약간 한눈 파는 사이에 운전기사가 비상구를 열고 도망 가서 인근 파출소에 쏙 들어 감.
-- ★ “저를 믿고 버스 탄 승객 분들에게 미안해용” 나중에 기자들에게 사과함.
-- ☆ 참, 그 때 버스는 운전기사석 옆에도 비상구 문이 있었음. --
-- 실미도 군인 중 김종철(29)이 오른 손에 총 들고 왼 손만으로 버스를 비틀비틀 운전하면서 대방동 로터리 방면으로 계속 주행.
14:10 대방동로터리에서 김종철 전 공군소위가 대방동 공군본부 쪽으로 우회전하려는데 길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 때문에 공군본부 쪽은 포기함.그래서 할수없이 노량진 방면으로 직진하려는데 대방파출소 녹지대에서 대기중이던 저격병이 버스를 향하여 총을 쏘는 것으로 또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짐.
-- 자전거 타고 자나가던 노량진시장상인 1명 사망 영등포경찰 1명 부상
-- 운전하던 김종철, 복부 관통상.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계속 운전함,
-- 삼륜차 한 대가 느리게 앞을 가로막는 일이 발생..
-- 한 명이 “왜 이리 방해하냐”며 총으로 쏘려 하자...
-- 승객 이강인 씨(41. 인천 송림동)가 “길이 좁아 그런데 뭘 그러냐” 하면서 말렸더니
-- 화가 난 그가 총부리를 승객으로 들이대어, 이 씨가 다시 “민간인이 무슨 죄가 있냐” 달래자
-- “그렇기는 해요” 하면서 총을 돌렸다는데....
---- 부상한 김종철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운전을 계속하다가...
14:15 결국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버스는 정지되고, 드디어 마지막 순간이 도래함
---- 실미도 군인들 중 4명이 수류탄 안전핀을 뽑은 채 손가락으로 꼭 누르고 위급할 때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가로수에 충돌하여 서는 통에 그 중 1명이 수류탄을 떨어트려 폭발됨.
--그러자 수류탄 들고 있던 나머지 3명도 수류탄을 떨어트려 결국은 4개의 수류탄이 모두 폭발되어 버림. 같이 몰려 있던 군인들 대부분 사망함.
★★아무리 자살여행이라지만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림★★
-- 첫 보도자료에는 모두 "비장하게 자폭한" 것으로 나감.
---- 국방장관이 직접 현장에 나오고, 헬리콥터는 유한양행 옥상에 병력을 내림. 뒤늦게 다들 바쁨.
---- 운전석에 있던 김종철(29) 전 공군소위는 아직 살아 있었음. 잠시후 기자들이 김종철을 지휘자로 간주하고 인터뷰를 했으나 정말로 지휘자였는지는 확인 안 됨..“직속상관 이외에는 말 않겠다”고 기자들에게 밝힘
--복부 관통상을 당한 김종철, 시립영등포병원 갔다가 곧 공군병원으로 이송됨.결국 병원에서 사망함.
-★- 김종철은 1960년 대전고를 졸업하여 1961년에 공군에 입대한 사람임
- ※ 영화에서는 주인공 설경구로 나옴. 김종철은 영화처럼 월북자 아들도, 깡패도 아님.
※ 참, 그리고 영화에서는 설경구가 운전도 안 하고.. 수류탄 10 여 개로 장렬하게 집단 자폭하는 것으로 나옴.
-※ 영화에서는 절규하는 허준호 얼굴이 사건 현장에 보였으나,
---실제 김방일 중사는 이 시간에 배 타러 인천 연안부두 뱃터에 가는 중이었음. "약혼녀 얼굴도 봤으니 빨리 실미도로 돌아가서 근무에 충실해야지잉--"
16:05 실미도 군인 이석천(32), 응급치료 후 군수사기관으로 연행됨
“훈련도 고되고 모든 게 말한 것과 달라 중앙청 높은 사람들에게 따지러 가는 중”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함
★ 이 때 살아남은 실미도 군인 6명 중 김종철 등 2 명은 병원에서 죽고 4명은 나중에 군사재판에서 사형집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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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총 부상자 = 17명>
===민간인(13)
▲박정윤(36-제물포고 교사) ▲조인자(31-송도 탈의장 철시하고 두 딸, 동생과 함께 수원 집으로 가던중) ▲박선아(6-조인자 장녀) ▲김준희(15) ▲박성희(25) ▲신태희(29) ▲이강인(41) <이상 버스 안 7명 시립영등포병원>
▲엄정화(21) <성모병원 입원>
▲임명오(30-항도교통 버스기사) <인천기독병원 입원>
▲주형락(42) ▲김말록(75) ▲김미연(25) ▲염해열(1- 김미연 딸) < 이상 경상자 4명 귀가 조치>
===경찰(2)
▲이무부(32-노량진경찰서 순경) ▲유장희(34-신앙촌검문소 순경)
===군인(2)
▲최성기(23-하사) ▲전용하(24-병장=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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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망자 = 7명>
===민간인(6)
▲김은희(5)<인천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다가 사망>
▲박선주(5-부상 조인자의 딸) ▲양숙자(32-수원여고 교사) ▲여자(23?) ▲여자(20?) <이상 태화버스에서 사망>
▲유진근(31-영등포시장에서 노량진중앙시장 점포로 자전거에 그날 3번째 물건 싣고 지나 가던 중 총탄 맞음)
===경찰(1)
▲김창원(32-동인천경찰서 기동순찰대원)
------- 현장 상황은 이것으로 끝났는데... 다른 곳은 아직도 바쁨..
14:50 비상경계령 발표.. 김포국제공항 폐쇄
15:10 대간첩대책본부에서
-- 송도남쪽 조개고개에 상륙한 무장공비 21명의 서울 진입을 저지했다고 발표
-- 2-3명은 분산도주중(?)이니 시민 협조를 바란다고 당부도 덧붙임
-- 그러나 예상보다 많이 살아 남은 사건 주모자와 피해자 및 목격자들 때문에 정정 발표 불가피, 그리고 인천지역 목격자들 일제히 갸우뚱.. -
16:00 국방부 주변에서 무장공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술렁거림
17:30 김포국제공항 정상화
18:35 정내혁 국방장관이
---실미도 공군 관리 특수범 23명 격리수용중 불만 난동이라고 정정 발표
---대간첩대책본부에서는 “진짜 공비일 경우를 대비한 발표였다”고 궁색한 변명
19:00 정내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사표 제출
---- 같은 시간대에 김방일 소대장, 실미도에 귀대하여 연기 나는 사건 현장을 바라 보며 허탈...
<1971. 8. 24> 새 국방장관에 유재흥 임명,
<1971. 8. 25> 12대 공군참모총장에 옥만호 대장 임명
-- 사고는 중앙정보부에서 일으키고 책임은 엉뚱한 사람들이 지게 됨
★★ 이 사건 이후 국군관리 북파공작원 부대는 자취를 감추었고..
☆☆ 한미연합사령부 관리 북파 공작원 부대는 계속 운영된 것 같은데
☆☆ 그 부대의 구체적인 규모나 임무에 대하여는 공개된 바가 없다.
-- 어쨌든 이 사고 여파로 인천 송도 해수욕객 한 명도 안 보임.
--- 해수욕 시즌이 거의 끝나기는 했지만... 상인들은 모두 울상.
<1971. 8. 26>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연락원들이 문서 전달식을 가지고
---- 남북관계가 갑자기 좋아질 것 같다는 분위기로 언론이 시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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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9. 15> 신민당 국회의원 강근호(당시 37세), 실미도 성격의 특수부대 관련 대 정부 질의
--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각종 선거에서 14차례 낙선, 현재는 전북 군산시장으로 당선되어 근무중임.
<1972. 5. >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비밀리에 방북, 김일성과 만나고 옴
<1972. 7. 4> 평화통일 남북 공동성명.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
<1972. 11. 3> 이후락 정보부장,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문제로 김일성과 공식 회담
<1974. 8. 15> 10시 경, 박정희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 북한 지령 받고 온 일본의 조총련 킬러 문세광에게 총 맞음.
----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적인 지하철 개통식을 함
---- 그리고 몇 시간 후 육영수 여사는 병원에서 죽고 전국은 애도의 물결로 덮임
===== 그 이후 남북문제. 계속 얼었다가 풀렸다가 반복됨
===== "정치꾼들 어떻게 믿냐? 장사꾼이라도 나서야지" 그러면서
===== 현대그룹 왕회장 정주영이 직접 나서기도 함.
*** 뒷 이야기 ***
★★★ 버스에서 사망한 수원여고 양숙자 선생의 제자 중 한 명이 돌아 가신 선생님의 불쌍한 두 아이를 거의 매일 가서 돌봐 주다가, 몇 년 후 진짜로 그 아이들의 새엄마가 되었음.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하나 자신이 실미도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꺼려 하고 있다고 함★★★
<1990. 10> 실미도 소대장 출신인 감방일 준위, 예편되어 군대를 떠남
<1993. > 김방일 씨,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냉난방설비업체로 사업 입문
<1998. 8 > 김방일 씨, “실미전우회” 만들어 당시 기간병 생존자 6명이 정기적 모임 가지기로 함.
<1999. 2.>그 때 실미도 군인들과 옷깃 스친 안양공고 배대기 선생은 1973년 인일여고로 부임하여 이후 제물포고 등 인천의 학교에서만 근무하다가 교원정년 단축으로 대량 퇴직사태가 일어나자 인천에서 평교사로 명예퇴직하였고, 계속 버스에 타고 있다가 부상 당하여 시립 영등포병원으로 실려 갔던 박정윤 선생은 경기도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단축된 정년으로)
<2000. 9. 11> 김용순 조선로동당 중앙위 비서, 서울에 와서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
---- 이 때 수행원으로 온 북한 장성 박재경이 송이버섯을 선물로 전달하고 감.
<2002. 5. > 박정희 딸 박근혜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아들 김정일에게 극진한 대우 받음.
-- 김정일은 “1. 21 사건은 극단주의자들의 짓이었다. 미안하다. 그들은 그 죄를 받았다”라고 함.
---- 언론은 이를 두고 “당시 관련자와 살아서 돌아 온 사람들을 모두 처벌했다는 말”이라고 해석함.
<2003. . > 실미도 영화 개봉 알려지자 북파 공작원 출신자들 집단항의
-- "우리를 더이상 비밀로 다루지 말라"면서 연금 지급 등 처우개선 요구
-- "그리고 영화 내용처럼 우리는 범죄자 출신이 아니다" "기분 더럽다"
-★ 이들의 집단 항의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들 궁금증 다소 해소됨
-- "실미도 말고도 북파공작원이 정말로 또 있기는 있었구나" --
<2003. 12> ※ 실미도 영화 전국 개봉관에서 일제히 개봉됨.
- ※ 김방일 씨, 허준호 때문에 갑자기 유명해져 여기저기 불려다님
==== 관객들 엄청 몰리자 인천 중구 부구청장이 직위해제됨
===== 징계 이유는 "실미도 촬영세트를 무허가건물이라고 철거지시하여
===== 인천지역 관광수입 증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것임
---- 그런데 공교롭게도 징계 받은 부구청장은 제물포고등학교 출신으로, 실미도 사건 때 그 버스에 타고 있다가 부상 당한 제물포고등학교 박정윤 선생(체육)의 제자임... 우째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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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이버섯 갖고 왔던 박재경이 사실은 1.21 사건 때 살아서 도망간 사람이었다”
-- 김신조 씨, 모 송년 모임의 초청 강연에서 충격적 증언. --
"박재경 북한 인민군 대장 총정치국 부총국장이 그 때의 남파 동료였다" (신동아 2004년 1월호 참조)
☆☆ 그렇다면 김정일이 박근혜에게 "죄과를 받았다"고 한 말의 속뜻은?
------ 박정희 암살 특공대 대부분이 여기서 총맞아 죽었는데
------ 죽은 그 자체만을 두고 '이미 죄과를 받았다'고 한 것인지...
------ 정말로 알쏭달쏭하네여
== 으음. 아무래도 우리가 좀 손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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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어쨌거나..
<2004. 1. 31> 영화 실미도 한국영화 관객 동원 최고신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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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정 리>
○ 남북한 특수공작원 비교분석
-- 북한은 2,400명 9개월간 지옥훈련 후 교관급 육군장교 31명을 엄선하여 남파, 27명 사망, 1명 잡히고 3명 생환. 비록 실패했으나 그 용기를 높이 치하하여 돌아온 박재경을 인민군 대장까지 승진시킴.
-- 우리는 공군장교 중심 31명 40개월간 지옥훈련 중 오랜 강훈으로 인한 기력쇠진, 인원자연감소,잦은 정책 변경 등 3대 악재로 제대로 가동도 못해보고 중도에 용도폐기, 대원들의 우발적인 반란 일으킨 후 수습할 길이 없자 "어차피 죽을 목숨 서울구경 한번 해보고 죽자"면서 정처없이 나왔다가 허무하게 자폭
---- 미군 관리 국군 북파공작원 출신자들, 연금 및 보험 혜택 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있기는 있었던 것 같으나 구체적인 규모와 업적은 아직 공개된 바 없음
<실미도 영화>
-- 북파 공작원의 실체 공개가 과연 시의적절한가의 문제 때문에 여러 번 시도 끝에 드디어 영화화에 성공.
-- 실화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너무나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인 데다 전쟁문제, 남북문제에 관한 국민감정도 미묘하게 변화가 되어 가는 시점이라 그런지 이 영화가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을 받고 있는 실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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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 / 수정 : 북파공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