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용기란 겁쟁이와 무모함의 중간에 있다.]
-세르반테스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따자.]
-돈키호테
● 돈키호테 [Don Quixote]
에스파냐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풍자소설.
우리는 그동안 돈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서 참 많이 들어왔었다. 가까이는 최근 힙합노래의 소재가 되기도 했었고 예전의 김범룡이라는 가수가 돈키호테를 소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또한 비록 제작 진행 중에 여러 요인들로 인해 취소되긴 했지만 영화제작도 시도 되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돈키호테하면 풍차랑 산초 로시난테 무모함 이라는 단어들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차근차근 돈키호테라는 작품의 탄생과 배경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작가
세르반테스 [Cervantes (Saavedra), Miguel de, 1547.9.29~1616.4.23]이다.
- 1547년 9월 29일 에스파냐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568년 마드리드에서 로페스 데 오요스의 사숙(私塾)에서 잠시 공부한 것 외에는 학교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다.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아크콰비바 추기경을 섬기고, 이어서 이탈리아 주재 에스파냐 군대에 입대하여 1571년 역사상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가, 가슴에 두 군데, 왼손엔 평생 사용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1575년 에스파냐 해군 총사령관이며 왕제(王弟)인 돈 후안의 표창장을 받고 에스파냐로 귀국하던 도중, 당시 지중해에 횡행하던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1580년까지 5년간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1584년 18년 연하인 카타리나라는 부유한 농가의 딸과 결혼하였고, 1587년까지 20∼30편의 희곡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알제리의 생활》과 《라 누만시아》 등 2편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 후 문학을 버리고 일개 무명의 세금 수금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몇 번인가 투옥당하기도 하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605년 명작 《돈 키호테》 제1부를 출판하였다. 출판과 함께 세상의 갈채를 받았으나, 여전히 빈궁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출판 직후 어느 변사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받아 한때 가족과 함께 구속된 적도 있었다. 그는 1616년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날은 W.셰익스피어 사망일과 같다.
2. 줄거리
돈키호테 동상
돈키호테가 돌격하려 했던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라만차의 풍차
- 돈 키호테는 에스파냐의 라 만차 지방에서 한 시골 귀족이 가정부, 조카, 하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기사 이야기를 탐독하다가 이성을 잃고, 스스로 방랑의 기사가 되어 모험길에 나서서, 천하의 사악한 것을 쳐부수어 공을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자기 말에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붙이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낡은 갑옷을 입었다. 기사의 신분에 어울리는 귀부인으로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은 멋대로 붙인 농가집 딸을 마음속으로 정하였다. 집을 나선 돈 키호테는 다 저녁때에 어떤 여인숙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을 성으로 잘못 알고 여인숙 주인을 성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옆방의 매춘부를 공주로 대접하기도 한다. 밤중에 기사 서임식을 열고 있던 돈 키호테는 물 길러 온 마부와 시비가 붙어 큰 소동이 일어났으나 주인의 주선으로 수습되고, 새벽에 여인숙을 나온 돈 키호테는 상인들과 시비가 벌어져 혼이 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두 번째 여행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이웃에 사는 농민 산초 판사를 설득하여 종자로 삼았는데, 섬을 하나 점령하여 그 곳 태수로 임명해 주겠다는 돈 키호테의 말을 곧이듣고 처자식을 버려 둔 채 따라 나선다. 그들이 들판에 내려서자 커다란 풍차가 여러 개 있었다. 돈 키호테는 이것들이 거인의 무리들이라고 판단하여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하였다. 산초 판사가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 와 돈 키호테는 말과 함께 풍차에 말려 들어가 건너편으로 내동댕이쳐진다. 피스카이아인과의 1대 1 결투, 양치기 오두막의 환대 등을 거쳐 수없이 우스운 짓을 당하지만, 본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를 찾아 나선 마을 사람들 꾀에 넘어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건강을 되찾게 되자 다시 모험길에 나서게 된다. 3차 여행에도 산초 판사는 동행을 하는데, 이번에도 먼저와 같은 실수와 소동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어느 공작 저택에 초대되어 기사로서의 정중한 대접을 받고 마음이 들떴으나, 공작 부처의 장난이었음을 알고 낙담하게 된다. 돈키호테의 여행도 종말에 가까워지자 꿈은 스러지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을 뜬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시골 신사가 되어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3. 작품분석
- 책의 정식표제는 <재기 발랄한 향사(鄕士) 돈키호테 데 라 만차 >이며 세르반테스는 이작품을 쓴 목적을 “당시의 항간에 풍미했던 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듯 그당시 에스파냐에 크게 유행했던 기사도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풍자적이고 회화적이다. 세르반테스는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기사도 문학을 우습게 표현함 즉 패러디 함으로 중세의 가치관을 희화화하고 있다. 돈 키호테의 모든 행동들은 보편적인 사회와 맞지 못하고 늘 삐걱거리고 실패하고 만다. 풍차를 거인인줄 알고 달려드는 모습이나 죄수노예를 풀어주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없다. 돈 키호테는 그가 읽은 기사 담을 현실 속에서 실현해 보고자 하지만 이미 변화되어버린 세계는 그의 모습과 시도를 거부한다. 그를 비웃고 조롱하며 때론 동정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르네상스기에 각각의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나와 세계사이의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여준다. 돈 키호테 속에서도 르네상스 문학의 특징인 연속적인 묘사, 삽화 적인 사건들이 연속되는 구조를 찾아볼 수 있다. 돈 키호테의 집에서 기사 담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친구들과 신부가 책을 버리는 장면에서 각각의 책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는 장면이라든지 돈 키호테가 얼토당토하지 않은 적과의 싸움에서 나뒹굴고 있을 때의 모습을 묘사해 놓은 장면들은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드는 구조이다. 그리고 돈 키호테가 여행 도중에 만나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묘사 또한 한 장의 사진과 다름이 없다.
돈키호테와 그의 애마 로시난테, 그리고 산초
4. 16~17세기 유럽의 역사적 배경
△ 예술의 부흥, 르네상스 (1350-1550)
△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해외팽창
△ 지리상의 발견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1517년)
△ 철의세기 : 1560년에서 1660년까지 서유럽을 “철의 세기”즉 엄청난 혼란과 심각한 시련의 시대를맞음
△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패배(1588년)
5. 16~17세기 유럽의 문학적 배경
△ 르네상스의 문학
- 유럽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과도기에서 인간 중심주의를 구가하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일어난 문학으로 중세를 통하여 동로마제국과 접촉을 가졌던 이탈리아에서 우선 일어나 전유럽에 파급되었다.국왕이 농민의 힘을 빌어 영주를 억압, 일찍부터 절대주의를 확립하고 있었으며, 이 싸움의 목표였던 크리스트교에 의심을 품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이 시대의 에스파냐 문학속에는 중세문학의 기사도적 관념과 서민적 사실주의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종교전쟁으로 이러한 문학은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몽테뉴의 <수상록>, T.모어<유토피아>, 세익스피어등이 출현하였다.
6. 16~17세기 유럽의 사회적 배경
△기사도(Chivarlry)
- 기사도란 봉건시대의 기사계급 또는 기사가 갖추어야할 용맹함과 명예심, 예의바름을 뜻하고, 이단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Chevalier라는 말은 중세봉건시대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기사도의 개념은 12∼13세기때 최고조에 달했으며, 14∼15세기에 들어와서는 사람들은 기사도 정신의 가치를 전투에 직접 나가는 것보다 귀족들의 과시 행위나 공적인 의식에 더 많이 두게 되었다. 그러나 무기와 전술이 바뀌고 기사의 기반인 봉건제도가 무너져 감에 따라 기사의 사회적몰락이 뒤따라 퇴색일로였던 기사도는 후에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고취되어, 기사도의 몰락후에도 변형된 모습으로 전수되었는데 거기에서 서양의 신사도가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기사
△신분제도
- 중세초기의 혼란 속에서 무력이 지배하고 사회의 이익을 독점하는 사회 질서가 탄생하였다 이를 나타내는 표현은 대토지 수여와 기사로서의 군사봉사제공을 양대축으로 하는 봉건적 주종 제도의 성립이다. 이 주종 제도는 귀족계급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방편이자 지배층 내의 상호관계를 연결하고 규정하는 조직이다. 봉건적 계약에 의하여 주군과 종신은 상호간에 의무를 이행하여야만 한다. 원래 주군을 위하여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전투에 참가해야 했으나,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사회가 안정되어서 일정 기간의 군사 의무를 이행하게 되었다. 이는 후에 변화하여 중세 후기에는 군사 의무는 금전을 대납함으러써 대신하였다. 가신에게는 주군의 성을 수비하고 군주가 주재하는 재판에 참여하며 물질적인 부조를 하고 영주의 방문시에는 숙식과 연회를 베풀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가장 중요한 의무는 충성고 군사 봉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중세 신분제의 기반이 되었던 장원의 구조
△ 여성의 지위
- 로마 시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스의 여성들처럼 남편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에 와서는 여성의 지위가 더욱 하락되어 단순히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 때에는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죄가 되는 부정적인 사고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12세기가 끝날 무렵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중세사회에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주로 상류사회에서 생기기 시작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귀족부인들을 존중하여 여성의 성적인 측면을 이상화시키는 의미의 사랑이었다. 낭만적 사랑은 십자군 원정의 결과 십자군 병사들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그들의 전리품에 영향을 받아서 일기 시작하였다.
7. 느낀점
- 그 전는 어렴풋이 알고 지내던 돈키호테에 대해서 제대로 알수 있는 기회였다. 왜 돈키호테가 쓰여졌는지 또 왜그렇게 사랑받았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린아이 때 읽었던 돈키호테와 지금 새로이 알게된 돈키호테 사이에는 정말 큰 차이가 있음도 느꼈다. 단지 동화가 아닌 굵은 뼈가 있는 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난관에 봉착하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대할때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에 대해 나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이 피하거나 좌절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직 젊은 나이기에 세르반테스의 말이 가슴에 남는 것 같다. 물론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도전정신이나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알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점들은 분명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점인 것 같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