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끝에 있는 여서도를 향해 길을 가다가 목포의 고하도에 들렀다.
목포의 높은 산인 유달산 밑에 있어 고하도(高下島)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목포 사람들은 고하도를 흔히 ‘용섬’이라 부른다
산의 형상이 풍수지리설의 용뱀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고하도는 충무공의 혼(魂)과 일제강점기의 한(恨)을 동시에 품고있는 섬이다
목포항에서 서남방 약 2km 지점에 있는 고하도는 목포항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섬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한다.
요즘은 2012년 개통된 목포대교를 통하여 쉽게 고하도에 들어갈 수 있다
목포대교는 2004년 공사를 착공하여 7년 8개월 만인 2012년에 개통되었다.
목포 북항에서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는 총연장 4.129km, 왕복 4차로로 건설되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이 섬을 전략지로 활용, 이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투를 막아냈다.
조선이 개항을 시작할 무렵, 제국주의 국가들은 고하도를 전략 지역으로 삼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충무공유적지~뒷고랑잔등~말바우(정상)~뫼막개~국기봉~용머리....왕복 5.6km
고하도 복지회관 앞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이충무공 유적지'를 알리는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낮은 야산을 돌아가면 선착장이 나타난다.
섬이었을 때는 이곳으로 목포에서 여객선이 다녔던 곳이다.
율도와 외달도 그리고 달리도와 함께 순환여객선이 하루에 6차례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낚시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 몇몇이 보일 뿐 한적하기만 하다.
선착장 윗쪽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모충각으로 들어가가는 홍살문이이 있다
정유재란 때 고하도를 전략기지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경종 2년 1722년 8월에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에 의해 완성되었다.
홍살문을 지나 모충문으로 들어서면 이순신 유허비가 있는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이곳에서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7일 108일간 주둔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이충무공유적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도 유명하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가 썼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져 있던 것을 광복이 되면서 현 위치에 세웠다.
비문은 여기저기 훼손됐지만, 통제사이공(統制使李公). 충무공(忠武公) 등의 글씨는 선명하다
고하도 등산로를 지나 용오름길을 걷기로 했다
정상인 말바우와 전망대를 지나 용오름길을 왕복하면 총 5.6km 거리다
칼바위에서 잠시 쉬어갔다
말바위 가는 길에는 성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자연적인 바위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의 형태이다.
난중일기에 그 건설된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칼바위에서 해안 쪽으로 몇 걸음 내려섰더니 말바위가 반겨주었다.
이 바위는 폭이 150㎝, 높이가 170㎝ 정도이다
고하도에 가뭄이 심해지면 말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형으로 쌓아 올린 전망대가 나타났다.
고하도의 아름다운 해상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1층은 휴게공간, 2~5층은 전망대 및 목포 관광을 소개하는 전시공간이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이 말의 유혹에 넘어가서 전망대 끝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ㅎㅎ
목포대교와 목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11월 답지 않은 날씨 때문에 흘린 땀이 일시에 사라졌다.
고하도와 이웃한 허사도가 눈에 들어왔다.
허사도는 워낙 작아 뒤돌아보면 금방 시야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 탓에 본 게 허사가 됐다 해서 허사도로 불렸다.
지금은 목포 신항이 들어오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머리 위로는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쉴새 없이 오갔다.
목포 시내 북항에서 해상을 지나 고하도에 이르는 국내 최장 케이블카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총 길이 3.23km의 압도적인 탑승거리가 자랑이다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퀸 제노비아호가 멀리 보였다.
전망대에서는 유달산이 눈앞으로 다다왔다.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을 한 곳이다.
고하도에서 보는 유달산의 자태는 또 다르다.
남정네 알통을 닮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솟아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서면 용오름길이 시작되는 해안 데크가 나타난다
길은 용머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고 다시 되돌아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뒷고랑잔등에서는 휘어진 섬 끝으로 용머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용오름길 데크길에는 다양항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유롭게 앉아서 쉬어가거나 간식을 먹을 수 있다.
고하도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혼이 깃들어 있다.
장군의 손가락질에 맞대응하는 여인이 불경하기 짝이없다 ㅋ
해안데크길 난간에 붙어있는 문구들이다
맛의 도시, 낭만 항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쉽다.
용오름길은 좋은 기운을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길이다.
‘고하도는 산행 시 용의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길 입구 안내도에 씌여 있는 문구이다.
길은 용머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고 다시 되돌아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목포의 희망을 담아 하늘에 오르는 용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걷다 보면 발아래 느낌이 진짜 마치 용의 등허리를 타고 걷는 듯하다.
중간중간 투명 유리판으로 바닥을 만들어서 아찔한 느낌이 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일제는 민간인을 징병해 해안 곳곳에 진지 동굴을 팠다.
유달산이 바라보이는 해안가에는 당시에 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 여럿 있다.
이 동굴 진지는 목포항으로 접근하는 적선을 공격하기 위한 ‘자살특공대’를 숨겨놓으려한 것이다
동네 할머니에게 물어물어 ‘조선육지면발상지비(朝鮮陸地綿發祥之碑)’를 찾아갔다
선착장 위에 있는 무화과밭 사이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1904년 고하도에서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되었다고 적혀있는 비석이다
일본 영사인 와카마쓰 도사부로가 고하도에서 최초로 시험 재배 성공 기념으로 세운 비다.
해방이 되자 이 비를 고하도 주민들이 뽑아 버렸다.
그렇지만 아픈 역사도 유산이라 다시 이 자리에 세워 두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정으로 쪼아버려서 글씨는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고하도를 떠나면서 마을 입구에 있는 목화체험장에 잠시 들렀다.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육지면은 문익점이 들여온 재래면과 달리, 원산지가 남미로 따뜻한 곳에 잘 자라는 면화이다.
널따란 목화밭에서는 목화꽃과 목화송이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완도항으로 이동하여 프라하모텔에 여장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