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마음에 안드는 구절과 문장이 있지만 그냥 올립니다. 격식(?)을 갖춘 시평을 쓰기에는 지혜가 모자라고 순전히 느낌으로 좋아했던 시들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리고 세월 흐른 뒤의 감상이란 것에는 쓸데없이 간섭하는 현재의 생각의 꼴들이 틈입하게 마련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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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여행] 신대철 시집 : < 무인도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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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입술을 조금 오므리고 고개를 약간 까딱하면서, "봄!"이라고 불러본다.
금방이라도 개나리떼 뿅뿅뿅∼, 핏빛 진달래 산천이 떠오르고, 부황(浮黃)
난 얼굴로 춘곤(春困)에 겨워 햇살 좋은 담벼락에 기대어 병든 닭처럼 졸
던 유년의 한때와 종이배를 만들어 연초록 미루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수
줍게 바알발 떠는 동구 밖으로 내달리던 유년의 어느 날 정경이 잡혀온
다. 끝 모를 수렁처럼 아찔한 원색으로 아련하게 물들어오던 봄, 봄!
1978년 봄, 시집 읽는 재미에 솔솔 빠져들던 무렵 '은은한 대리석 무
늬'를 바탕으로 한 봄빛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는 그 어느 책보다도 늘
옆에 끼고 다닌 시집이다. 채 90쪽이 되지 않는 정말 예쁜 시집! 일기를
보니, 학교에서 가까운 서점에 들려 문학사상 잡지를 뒤적이다가 마침 거
기에 실린 표제시(表題詩)가 좋아서 그날로 산 시집이다.
(조금 길지만 죄다 인용해 본다. 길게 인용하는 걸 용서하시라! 이것은
앞으로도 시를 인용할 때 아무리 길더라도 全文을 인용하겠다.
어느 분이 '미처 시집을 못 구하거나 읽을 수 없을 때
그 시를 온전히 알 수 있도록 전문을 실어 달라는
말씀에 공감한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관점이다. '시에 관심 갖고
알고싶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넓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다른 뜻은 아무것도 없다).
無人島를 위하여 (全文)
개나리꽃이 피지 않을 걸 보고 봄을 기다린다 (*고딕체)
언 귀를 비빈다.
살아 남아야지.
개나리꽃이 피지 않은 걸 보고 봄을 기다린다.
할 말은 미리 삼키고
生水를 마신다.
바닥 난 하늘을 본다.
흐림.
함박눈이 내리려나?
꼬리를 감춘 사람들이 얼핏 온화해 보인다.
1974년, 無罪? (*고딕체)
제 罪名을 모르시나요?
제 땅에 악착같이 살아 있잖아요?
제 땅에서 죽으려는, 죽을 罪를 졌잖아요?
무슨 소릴, 제 땅이라니? 이 땅은 공동소유야. 넌 無罪야, 罪가 없어.
정말 罪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고마움 저 혼자 가져도 좋을까요?
無人島를 위하여 (*고딕체)
바닷물이 스르르 흘러 들어와
나를 몇 개의 섬으로 만든다.
가라앉혀라,
내게 와 罪 짓지 않고 마을을 이룬 者들도
이유 없이 뿔뿔이 떠나가거든
시커먼 삼각파도를 치고
수평선 하나 걸리지 않게 흘러가거라.
흘러가거라, 모든 섬에서
막배가 끊어진다.
개나리꽃이 핀 걸 보고 봄이 온 걸 아는 것이야 일상인(日常人)의 몫이지만, 개
나리꽃이 피지 않을 걸 보고 보고 봄을 기다리는 것'은 시인(詩人)의 몫이다.
그러나 단순히 주저앉아 '기다리는 봄'은 수십 번 온다해도 의미가 없다.
유독 제 2연의 '1974년, 無罪?'하고 물은 물음이 아프게 찔러온다.
봄은 스프링(Spring)이 튀어 오르듯 약동하고, 새로운 시작으로 생기가
넘치고, 무언가 일을 낼 것 같이 충동적인 이미지와 함께 아직은 죄다 초
록으로 물들지 않고 드문드문 겨울의 잔해를 어설프게 깔아뭉갠 벼랑 같
은 표정이 봄에는 숨어 있다. '1974년에 왜 無罪?'하고 되뇌어보면, 아마
도 이 땅에서 커다란 답답함으로 명치끝을 짓눌러오는 음울한 정경이 있다. '시
월유신(十月維新)'일게다. 해방둥이인 신대철 시인이 그때 나이로 서른
살일테니 그 상황을 지칭하지 않고 무엇이랴! 저 60년대 말에 발표된 이청
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로 냉가슴을 앓아야 했던 세대이며, 최인호의
소설인 <바보들의 행진>에서 '고래사냥 노래'를 막걸리를 마시며 숨죽이
며 부르던 세대이다.
"정말 罪가 없어요?"하고 잔잔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시인의 눈 앞에 그
누가 "그렇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랴. 그런 의미로 제 3연에서 '사람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無人島를 위하여' 읊조리는 시인의 목소리는 비
록 짧지만 커다란 울림을 준다. /바닷물이 스르르 흘러 들어와 / 나를 몇
개의 섬으로 만든다./는 몇 번이고 음미해 볼만한 상징을 표나지 않게(!)
담고 있다.
섬.
태어난 지 올해로 꼭 119년이 되는 '은은한 유채색 미학주의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 1884-1962)'가 섬에 대해서는 이미 그 '이
미지의 분산화음'을 죄다 정의해 놓았듯이 '섬'은 '환상이 건너가서 머문
보이지 않는 가시 공간(可視空間)'이다. 보이지 않는 可視空間? 언뜻 모
순 되는 표현 같지만 '섬'은 그런 공간이다. 이 세상에 '섬'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이미 죄다 보아버린 섬과 다 들켜버린 섬은
섬이 아니라 이미 '뭍'이다. 섬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으로서는 可視空間
이지만, 섬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선 그런 상징이나 어떤 해석
을 위해 '섬'이라는 말을 끌어들인 게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시인들은 '섬
을 동경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대지(뭍)에서 저주받은 자들'의 꿈
꾸기이며 숨통 트기이다. 그러나 이 세상 천지 어디에 호락호락 오지랖을
열어주는 섬이 있으랴!
섬을 꿈꾸는 봄. 그런 봄에 어찌 쉬이 '잠'이 오겠는가. 청춘의 나날
잠 안 오는 '봄밤에 섬을 꿈꾸며' 몇 번이고 신대철의 <무인도를 위하여>
속에 숨어있는 '無/人/島'를 찾아 헤맸다. 열정으로 휘몰아치듯 절규하며
불러대던 가수 김추자(金秋子)의 노래 '무인도'를 불러 제키며…….
수평선이 축 늘어지게 몰려 앉은 바닷새 떼를 풀어 흐린 하늘로 날아
오른다. 발 헛디딘 새는 발을 잃고, 다시 허공에 떠도는 바닷새, 영원히
않을 자리를 만들어 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는 바닷새.
인간이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無人島로 가고 있다. <無人島> 全文
<무인도>(p.24), <무인도를 위하여>(p.59), <다시 무인도를 위하
여>(p.72) 이 3편은 신대철 시인이 '無人島'에 대해 쓴 시의 제목이다.
시집 속에는 앞의 차례대로 띄엄띄엄 징검다리처럼 깔아논 시이다. 따라
서 시집을 읽게 되면 대부분 누구나 보게 되는 맨 앞부분의 한없이 슬
프고 애잔하고 서글픈 인간의 운명을 생각케 하는 시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같은 시의 분위기로 빠져들 '어떤 감상
성(感傷性)'을 '외롭고, 넉넉하고, 고즈넉하게 버티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 편의 '無人島'. 시들에 힘입은 바 크다. 흔히 생각하기로 '무인도'라는
시어가 1차적으로 주는 '외롬, 쓸쓸함, 소외, 단절, 시간의 정지, 버려
짐, 원시성' 등등과 같은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향기를 품고 있다. (흔히
들 하는 대로 연작 형태로 잇달아서 '無人島 3편'을 배치했다면 얼마나 밋
밋하고 맨송맨송했을까? 새삼 '시의 자리 매김과 편집'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는다.
시집을 거꾸로 여행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맨 앞에 실린 슬픈 시를
나직이 읽어본다.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읍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리
를 잡으러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숴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읍니다.
죽음은 슬프지 않다. 그것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한없이 냉정하게
헤아릴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이다. 하늘이 싸가지 없이 푸른 거
라든가 바다에서 무턱대고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다든가 아침에 뜬 태양이
어김없이 서녘으로 지고야 만다든가 하는 지루한 반복의 하나일 뿐! 단
지, 남겨진 자들이 슬픈 것이다.
일찌기 베오톨트 브레히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로 말했듯이,
그 울림의 크기 만한 '슬픔'을 내가 명쾌하게
일컫지는 못해도 '슬픔은 언제나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그것이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는 것으로 연결되는 죽음인 바에야. 죽음은
슬프지 않다. 그러나 죽음은 슬프다. 말로 할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한 울
림은 다 다르다.
1978년 봄 나는 남한강과 금강을 번갈아 가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
때 신대철의 이 시를 마음에 담은 건 아니지만, 흰나비를 잡으러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때문에 절절이 슬펐다. 별리(別離)! (그러나 나는
여기서 사소한 추억의 장단은 풀어놓지 않으련다. 그것은 자칫 신대철 시
집을 여행하는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저어하는 마음에서다. 왜냐하
면 신대철의 시는 전체적으로 보아 비극적 세계관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
다. 그저 담담한 허무와 자연이 단아한 오솔길처럼 나 있다).
낮은 山도 깊어진다.
비안개에 젖어 무수히 피어나는 속잎,
연하디연한 저 빛깔 사이로 섞이려면
인간의 말을 버리고
지난 겨울 인간의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했을까?
핏줄에 붙은 살이 더러워 보인다, 잎과 잎 사이
벌거벗고 덜렁거릴 것 덜렁거리며 서 있을수록……
잎, 잎 무성하거라 무성하거라 무성하거라
한여름 山 속에 미리 들어와 마음을 놓는다.
시 <잎, 잎> (全文)
나는 체질인지 기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시가 좋다. (기형도(奇亨
度) 시인을 두번째 만났을 때, 그가 이 시를 암송하고 있어서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저 반가웠다. 하긴 그의 대학 동문 선배일 테니, 나보다 더
많은 관심이 있었음은 어느 정도 짐작하지만…….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겠
지만, 기형도의 유고시집이 돼버린 [입 속의 검은 잎]을 읽노라면, 어느
순간 신대철 시인의 <잎, 잎>이 생각난다. 기형도 자신이야 살아 자신의
시집을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하고 싶어했다지만서도.....그건 그렇고).
다리품이 필요한 여행이 아닌 손목품이 필요한 [시집여행]이다 보니, 이
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한 시인의 시집(이때 집은 anthology가 아니
라 house)에 너무 오래 머물면, 아마도 머리카락이 하얘질 것이 뻔하다.
그리고 나가는 길을 못 찾아 "시방 여그서 워치캐 나간디유?" 하는 소리를 신대
철 시인에게 들을 것이 뻔하다. 그가 충청남도 홍성에서 나서 공주고등학
교까지 다니면서 들어온 말투로……. 하지만, 거지반 20년이 돼가도록
<무인도를 위하여>와 짝을 이루는 시집을 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국민대
학교 선생님으로 마냥 계실랑가 어쩔랑가는 종내 알 수가 없다.
이 땅의 허다한 묵묵한 시인처럼 신대철 시인의 '침묵'이 그리 싫지 않다.
발표는 않아도, 그 분은 내 즐거운 시 여행의 길라잡이이기에. (그렇지만 시
집 맨 끝에 실린 시 <까욱, 까아욱>을 짧게 인용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꿈틀거리는 침묵보다 아름다운 게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