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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3
12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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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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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crzqKe0CN0
[수원교구 윤영민 요셉 신부 (하우현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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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1)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올겨울은 다른 해보다 훨씬 눈이 흔하군요. 호남지방에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안 그래도 복잡하고 힘든데, 그 위에 또 눈이 퍼부었으니 눈 피해를 입은 이웃들 고초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어릴 적 산골에서 잠시 지낼 때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도 눈은 요즘처럼 내리고 또 내렸습니다. 쌓인 눈을 치우기도 전에 또 다른 눈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눈 내리는 밤은 어찌 그리도 적막했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포근했는지 모릅니다.
유용주님의 설명에 따르면 눈 내리는 밤이 조용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눈은 공기의 예민함을 누그러뜨리고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고 내리기 때문에 조용하다. 먼 마을에 잠든 사람들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길과 들판과 산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런 수려한 표현을 통해 눈처럼 깨끗하게 되어 다시 한 번 새롭게 살아가고픈 염원을 이야기합니다.
“이대로 한 오백년 눈이 내렸으면, 이대로 얼어붙어 모든 생명이 죽고 난 뒤 한 천 년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깨어났으면...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유용주,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솔 출판사 참조)
작가의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진 세월, 인고의 세월을 끝까지 잘 견뎌온 두 노인-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오랜 염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참으로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이승을 하직해야할 고령의 나이였기에, 이젠 하느님 앞에서 지난 삶을 정리해야할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였기에 자식이 생길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포기했어도 벌써 오래 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며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끝났어’ 하며 지레 꼬리를 내렸을 것입니다. 창피해서라도 쉬쉬하고 사실을 감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신뢰했습니다.
두 사람의 육신은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노쇠해져갔지만, 두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 언제나 청춘의 젊음을 유지했습니다. 두 사람의 신심은 어린이들처럼 맑고 투명했습니다. 언제나 자녀다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었지만
자신들의 인생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열렬히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하느님께서 결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라는 고목에서 새하얀 꽃 한 송이를 피어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이젠 끝났다고 여긴 두 노인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새로 쓰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 또 다시 추운 겨울 앞에 서있습니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때로 혹독한 삶이라는 겨울 앞에 또 다시 서있습니다.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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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간의 힘이 다 소진된 끝에 비로소 하느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대림 시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여러 인물들 가운데, 특별한 두 분이 계십니다. 인생을 살만큼 사셨기에, 이제 슬슬 삶을 정리해야 할 순간에 새로운 삶의 희망을 지니게 된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입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셨다.’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두 사람은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올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했으며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두 사람에게 꽤나 큰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에게 늘그막이 되도록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호호백발이 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놀랍게도 노부부가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기에야 겨우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아무리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앞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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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obfXhNOR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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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성야 미사)
<많이 주는 이만이 다 주는 이를 알아본다>+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구유에 뉜 아기가 구세주이심을 볼 수 있는 눈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천사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표징을 볼 수 있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개는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까요? 모릅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인식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알아보려는 이가 사랑하고픈 의지가 없으면 어떨까요? 그래서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여기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착한 뜻”을 가진 이에게 평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착한 뜻은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습니다.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습니다.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게 됩니다.
의족으로 걸어야 하는 아들을 엄마는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라며 모질게 떠납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들은 학교 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엄마는 빨리 일어나 운동회에 가라고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운동회에 가라는 엄마가 밉습니다.
“엄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에게 걸림돌은 비탈진 골목길 계단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오르내리기 어려운 경사의 길을 매일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눈이 쓸려 있었습니다. 앞집 아저씨가 쓸어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하며 눈을 씁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달려간 아들은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 난 목소리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알아보고 말합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학교 가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그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혼자 일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했던 말과 “운동회라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럼 평생 숨어 살아!”라고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어머니가 사랑이셨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겉옷을 벗어서 열심히 눈을 쓰는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안아드립니다. [출처: ‘치매 걸린 어머니가 한겨울에 눈을 쓸고 있었던 이유’, 유튜브 채널, ‘JTBC Voyage’]
만약 아들이 눈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눈 쓰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를 것입니다. 매일 아들을 위해 눈을 쓰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자신도 남을 위해 눈을 한 번쯤은 쓸어보았어야 합니다. 나에게 좋은 뜻이 없다면 하느님의 좋은 뜻을 볼 눈을 잃게 됩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대 주었다.”
이것은 성체에서 제가 들은 소리입니다. 만약 내가 내어 주는 일을 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 주시는 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많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다 주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빛이 없고 어둠만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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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8년 시흥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지역 교육담당 사제’를 맡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본당 일과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겸임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습니다. 주교님은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보좌신부’를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당 일을 나누어서 할 수 있으니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보좌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돌아와서 공지사항 때 보좌신부님이 온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교우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1년 동안 혼자 지내던 저도 보좌신부님과 함께 지낼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숙소와 신부님의 숙소에 필요한 가구들을 마련했습니다. 신부님 숙소는 깨끗하게 청소하였고, 가구도 새로이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교구에서 사제 인사이동을 발표하였고, 본당에는 첫 번째 보좌신부님이 왔습니다. 보좌신부님이 처음 오던 날은 성탄이 가까운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크고, 온화하신 보좌신부님은 성탄선물처럼 왔습니다. 신자들이 반갑게 맞이하였고, 주일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이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의 인도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곳을 향해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이 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동방박사들처럼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순명’으로 주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 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들의 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름의 뜻대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름을 정하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식물들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의미를 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름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이름입니다. 저는 두 개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름들을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이름은 ‘조재형’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균형을 이룬다는 뜻이고,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중용’을 지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름의 의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제게는 소중한 이름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제게는 가장 적합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이름의 의미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세례명이 가지는 뜻을 생각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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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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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전한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보다 요한의 출생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과연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마련하고자 그분보다 먼저 파견된 인물입니다. 말라키서의 예언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오늘 복음은 이 예언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때를 이야기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쓰인 그리스 말 동사(‘에플레스테’)는 어떤 기간이 채워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예고되거나 약속된 바가 실현되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실현되는 때이며, 하느님께서 펼치실 구원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특히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자비와 호의를 베푸신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아이를 얻은 엘리사벳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아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베풀어 주실 주님의 자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 아기는 주님께서 몸소 정하신 이름인 ‘요한’(히브리 말로 ‘여호하난’),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는 뜻의 이름으로 불려야 하였습니다. 이 아기는 커서 이름처럼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회개의 세례로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결정적인 구원의 때에 이르렀고, 이제 그 구원을 완성하러 오시는 분께서 머지않아 탄생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늘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됨을 떠올리고 감사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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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성탄절은 우리에게 누가 오는 날일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그중 몇몇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에 큰 선물 주머니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어쩌면 학생들에겐 더 친근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하면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또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젖어 성탄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안에서 태어나셔서 성당에만 계시는 분이고, 성당을 벗어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와있는 뭔가 의미가 달라진 듯한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림 제4주간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중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을 때 그의 입이 풀렸고, 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있었던 요한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나오는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 40장에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라는 내용처럼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소리로서 하느님께서는 꼭 오시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참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루카 3장 7절의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온전한 투신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합니다.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절제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온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촉구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6-28)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고,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며, 그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십니다. 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진리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도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주님 성탄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요한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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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구약 성경의 마지막 권인 말라키서는 대예언서에서 소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수렴합니다. 특히 “나의 사자”라는 뜻인 말라키 예언자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말라키서의 메시아 관련 내용에 감명을 받고, 말라키가 기다렸고 또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읽어 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키의 예언은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주님 성탄이 되면 가려질 조연이지만 그는 분명 대림 시기의 주인공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키는 갑자기 도래할 주님의 날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아직 구원의 때는 이르지 않았으나 언젠가 주님의 날이 오면, 인간의 죄는 종식되고 의인들이 구원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예언은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인 셈입니다.
따라서 주님 성탄을 곧 앞두고,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의 이웃들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주님의 사자요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에게 지녔던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을 사는 우리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질문을 되새겨야겠습니다. 이 아기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18 참조)
성인이 된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처럼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요한 1,19-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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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이야기(루카 1,5-25 참조)에 이어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 1장 57-58절이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은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와 잉태 보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뒤 아홉 달이 지났음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은(1,24.26.36.56 참조)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보도는 짧습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1,61; 1마카 2,1-2 참조)
그러나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한’은 천사가 알려 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사회 규범 사이의 충돌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기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였고, 이러한 의심으로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18-20 참조)
즈카르야는 의심과 불순종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뒤늦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분을 찬양합니다.(12월 24일 아침 미사 복음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을 마주하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 상반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저마다 과거에서 현재로 변화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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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1,60)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에 먹칠을 한다.’라는 표현이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들은 어느 대갓집 여인들 못지않게 기예와 글솜씨에 능했다고 합니다. 비록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던 여인네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서로에게 불문율 같은 약속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다른 동료 기생의 남자를 엿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여 동료 기생의 남자를 유혹한 기생이 있다면, 그 기생의 이름을 기방妓房 앞에 크게 써 놓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이름에 먹칠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게 그들에게는 가장 큰 모욕이며 징벌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름은 기생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기에 그 징벌이 가장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우리도 세례 성서를 받을 때, 자신의 주보 성인을 닮는다는 말처럼 본명을 지을 때 분명히 자신이 지을 본명의 성인이 누구인지를 미리 알아보고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 저의 주보 성인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저도 제 주보 성인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싶습니다. 저는 제 가족 중에서 맨 처음 세례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의 본명이 모니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1,57) 고 시작하며, 이를 들은 이웃과 친척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하는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모든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며 경사이겠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웃과 친척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다 그렇게 이웃과 친척들의 축하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한의 탄생 순간은 온 동네가 시끌벅적할 만큼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태어났지만, 6개월 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이방인 동방박사들 이외에는 어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쓸쓸히 태어난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왜냐하면 복음은 단지 이 순간만이 아니라 다른 순간, 천사의 예고에 따른 차이(=즈카리야와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과 만남 역시도 동일한 맥락에서 복음사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발단은 바로 요한의 탄생 여드레째 되는 날 곧 할례와 함께, 이름을 짓게 되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관례에 따라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 시작은 어머니 엘리사벳이 나서서,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고 말하는 그 자리에 왔던 사람들은 전통과 관례를 무시한 엘리사벳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지금껏 말문이 닫혀 있던 즈카리야가 서판에 또렷하게 “그의 이름은 요한”(1,68)이라고 쓰는 순간,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말문이 막혀있던 즈카리야의 입이 열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더 놀랐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이 일로써 왜 즈카르야가 말문이 막혔으며 그리고 이제야 말문이 열려야 했나를 당사자인 즈카리야는 물론 그들 모두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당사자인 즈카리야는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과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향한 하느님의 놀라운 초대이며 가르침이었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놀라움과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1,65~66) 고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있음”(1,66)을 알아본 사람들은 이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요한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나 끊임없이 주목하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아직도 옛 질서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의 존재가 거북하고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오늘 말라키 예언자는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3,24) 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는 굳이 조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불렀을까요? 물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천사가 알려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뜻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요한은 한 가문을 마감하고 한 가문의 새 시대를 열면서 새롭게 열리는 가문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지배하는 가문이 될 것임을 이미 그 이름에서부터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끝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한없는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외칩니다. 그러니까 그가 외치는 내용이 곧 그의 이름의 의미였으며, 그가 외치는 내용이 사실 요한의 존재 이유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으며, 우리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내용이 바로 우리의 이름에 걸맞으며, 자신의 있음을 드러내고 있나 늘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이 먹칠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고, 존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나 용맹한 하느님이라 불리리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입당송, 이사9,5;시72,17참조)
** 저희 수도회 전 진 도밍고 신부의 부친이신 전옥철(세베로) 님께서 21일 귀천하셨습니다. 장례미사는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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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가 아니라 생각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생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실재이며, 생각과 같은 가상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예로 들며 생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카페 안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의 스트레스가 대단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카페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은 갓 볶아낸 신선한 커피 향을 즐기며 평화롭게 다른 사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제는 카페 안이지만, 이 두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 차이는 바로 생각 안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 안에서 우리는 지금을 전혀 다르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생각을 실제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밉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까요? 그와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한 노력, 이것이 지금을 잘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자기 실제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멀리하라고 강조하셨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으로 바꾸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지금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꿔야 할 생각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잉태 소식을 믿지 못해서,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였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적었을 때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으로 생각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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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로움>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새로움>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63)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늘마다 새하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땅마다 새땅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날마다 새날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길마다 새길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사람마다 새사람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세상마다 새세상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이름마다 새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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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감사하였고,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으며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가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 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하며 구세주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전통에 따른 이름을 붙이려고 했지만 '안 됩니다' 하며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을 증거한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36).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그에게 몰렸지만 이제 새로운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탈랜트만큼 최선을 다해서 일할 뿐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분수를 아는 사람이요, 주제 파악을 잘하여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확실히 지켰습니다.
아마도 그가 자기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보고 그 열매까지 먹으려 했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은 물러설 때를 알고 구원 사업은 하느님께서 내 도움이 없이도 언제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 방법, 내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파견된 사람임을 자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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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늘 오늘 지금 여기서 따뜻한 “봄의 사람”이 되어 삽시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대림 제2부 마지막 7일째 12월23일 “O후렴”도 기막히게 좋습니다. 만민이 갈망하는 구원이자 만민이 갈망하는 주님께서 오실 날도 가까왔습니다. 오늘은 이런 저런 따뜻한 일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기 수도원만 오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사람한테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뜨거움입니다.”
“주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멀리 김포에서 인천에 들러 친한 자매를 태우고 오전에 별내성당에 도착하여10시 미사 후 주님이 차려주신 동지 팥죽을 먹고 수도원 따뜻한 성전에 와서 오후 내내 머물다 고백성사를 본 후 끝기도를 하고 간 자매의 고백입니다. 왕복 4시간 거리에도 불구하고 주님 만날 뜨거운 기쁨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은 것입니다.
“신부님, 어제 고해본 자매입니다. 고해성사의 기쁨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따뜻한 면담고해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갑자가 방문하여 면담고백성사를 앞둔 두 분의 메시지입니다. “따뜻한”이란 말마디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연일 강추위가 계속됩니다.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는 사람입니다. 따뜻한 집, 따뜻한 방, 따뜻한 밥, 따뜻한 사람, 따뜻한 대화, 따뜻한 위로, 따뜻한 공동체, 따뜻한 책등 끝없이 따뜻함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참 따뜻한 고전을 발견했고 모두 들어다 집무실에 놓았습니다.
좋은 책만 보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냥 행복해 집니다. 모든 욕심은 비워지고 충만한 기쁨에 따뜻한 마음이 됩니다. 비매품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전” 15권까지 시리즈로 나왔는데 12-14권까지 지니게 되었고 원장수사와 메시지를 나눴습니다.
“12-14권 까지는 있는데 1-11권까지는 없네요. 구입할 수는 없는지요?”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보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네요.”
“그러면 책을 컨테이너로 사드려야겠네요.ㅎㅎㅎ”
이 말이 얼마나 제 마음을 따뜻하게 했는지요! 순간 떠오른 생각에도 감사했습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네요!”
정말 날로 주님 사랑하고 싶은 청정욕淸淨慾 하나뿐 다른 욕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기도요 공부요 봉사요 회개이지 죽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까운 시간 부수적인 일들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질적인 일에 써야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 생각없이 많이 만나기 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쓰레기 같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보기보다는 정말 따뜻한 고전같은 책을 선별해 보는 이치와 똑같은 사람들간의 만남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나 참 좋은 책은 만날 때 마다 좋고 새롭고 따뜻합니다.“그리스도교 신앙 원전” 책권마다 표지 글도 깊고 좋고 따뜻했습니다.
“오래고도 새로운 아름다움!(Pulchritudo amtiqua et nova!)"
-교부문헌이 탄생한 자리는 책상머리가 아니라,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로 누벼진 민중의 애달픈 삶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교부들의 많은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이고, 힘이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특히 사회교리나 교회생활에 관한 탁월한 가르침은 현대교회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성 아구구스티누스(설교56,10,14)의 간명한 이 아름다운 말씀도 얼마나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지요! 이 한마디 안에 모든 답이 다 들어있네요! 아주 오래전 자작시도 불현 듯 떠오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꽃자리이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사랑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계속되는 강추위 겨울인데 벌써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입니다. 그러니 강추위속에서도 따뜻한 봄같은 사람이 되어, 겨울속의 봄을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희망을, 사랑을 둘 때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되어 살 때, 그때에 맞게 “봄의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기다리고 참아내며 일상의 일에 깨어 지극히 충실하며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모든 시간이 하느님 손안에 있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라기 예언은 어김없이 다시 오는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을 통해 실현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말라기 예언은 그대로 복음의 참 따뜻한 사람, 즈카르야-엘리사벳 부부를 통해 실현됩니다. 때가 될 때까지 자기 꽃자리에서 일상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충실하며 묵묵히 견뎌내고 버텨낸 두 부부가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작명 문제로 의견이 분분한 때, 때가 되자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니, 바로 우리가 날마다 아침성무일도 때마다 바치는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바로 요한의 이름뜻은 얼마나 좋습니까. 말그대로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때가 되어 아들, 세례자 요한을 낳았을 때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모두 함께 기뻐했다니 모두의 마음이 참 밝고 따뜻해졌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야 말로 주님의 희망과 기쁨의 표지가 되어 밝음과 따뜻함의 샘이 된 것이지요. 이런 분위기를 접한 사람들은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심을 느꼈고 고백합니다.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은총의 대림시기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늘 출생한 세례자 요한은 물론 우리를 향한 물음일 수 있습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묵상하며 오늘의 때에 맞게 겨울속의 봄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우리 모두 강추위속에서도 따뜻한 봄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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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운명은?>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까?”
세례자 요한의 특별한 탄생을 지켜보며 친척들은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아이의 운명이 하느님 손에 있음을 부모들은 알기에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으려고 하지만 친척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기 관습대로 지으려 하고, 아이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요한의 특별한 탄생과 운명을 보면서 요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묵상합니다. 우리의 탄생과 운명도 실은 같은 것이라는 묵상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부모의 뜻에 의해 시작된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우리의 탄생이 부모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불신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시작이 이러하니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운명이 전부 다는 아니어도 많은 것이 탄생 때 이미 결정된 거라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다른 부모가 아니라 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제 아버지의 결정이나 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의 태어난 날이나 혈액형이나 성향이나 이런 것들도 다 저의 결정이 아니고, 그렇다고 제 부모 뜻대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향적인 자기 성격이 싫어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려 하고, 부모도 자기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키우려고 했지만 내 뜻대로도 부모 입맛대로도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내 뜻이나 부모의 뜻과 다르게 나의 인생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주어진 운명이라고 느끼지요.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것이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도 그 존재가 하느님 뜻과 사랑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렇기에 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하느님 뜻대로 정해졌는데 그것이 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순종이요 순응이겠습니다.
즈카르야는 처음 하느님의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였고, 그래서 의심을 퍼트리는 말문이 막혔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게 되고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짓자 말문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의심의 말문은 막히고 찬미의 말문은 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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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63)
<세례자 요한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57-66)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한 대로 예수님 탄생에 앞서 세례자 요한이 출생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알려준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이렇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1,16-18)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이 사명이 구약성경의 끝말씀인 오늘 독서(말라3,1-4.23-24)에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使者)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1.23-24)
며칠 전 본당 판공이 있는 날, 저도 수도회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성찰과 고백을 통해서 마음을 다잡은 것은 '지나친 열정(욕심)을 모두 내려놓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울 본당을 보면 성탄을 앞두고 세례자 요한의 일을 열심히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쉬는 교우들과 아픈 이들, 그리고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인도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쁩니다.
'쉬는 교우들, 영적 육적으로 아픈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사회적 약자들!'
변함없이 이들에게로 저의 마음이 향해 있기를 주님께 간청드리면서, 이들에게로 향해 있는 사목에 더 충실할 것을 다시금 다짐해 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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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PHHqP75T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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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 66)
저마다에게
필요한
희망을
챙겨주시는
희망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희망의
자녀들입니다.
희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의 기쁨 또한
누리고
담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탄생의 의미는
기다림과
기대라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탄생은
마주하는
하느님의
엄청난
희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감사하는
희망의
시간입니다.
드디어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낳습니다.
아기
울음소리는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됩니다.
탄생을 통하여
얻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입니다.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며
희망의 참의미를
성찰해 봅니다.
희망을 여는
희망의
발걸음이
작지만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장 좋은
희망의 울림이
우리 내면을
울립니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울림이
가장 생생한
하느님의
체험입니다.
살아 있고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살게하는
하느님의
가장 밝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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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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