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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지식을 더 신뢰할지 몰라 혼란스럽고, 신학 교육을 위한 학교와 기관은 많지만 신학생 수가 급감하며, 수많은 기독교 서적이 출판됨에도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빈곤이 여전히 문제시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 앞에 서 있다. AI가 여러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활동의 비중이 증대되는 현대사회에서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오랜 매체인 책을 읽으며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물어봐야만 한다.
근대가 도래하며 인쇄술이 발달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며 목회자나 신학자만이 아니라 누구나 성경만이 아니라 설교집과 기도서, 신학 서적, 논문 등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 기간 신학은 양적으로 풍성해졌고, 학문적으로 단단해졌으며, 담론은 다양화됐다. 그런데 변화된 21세기의 환경은 근대 세계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신학 공부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사회가 급속도로 변해도 예부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에서 중요한 권위로 작동했던 성경과 전통을 자의적으로 버리거나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신학의 발전과 신앙의 성숙을 위해 ‘무엇’을 공부하는가뿐만 아니라, 성경과 고전과 현대 서적을 ‘어떻게’ 읽을지가 현대 그리스도인이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 독서와 그리스도인의 삶
지금껏 기독교 출판계에 신학이란 어떤 학문이고, 어떻게 신학을 공부할지 알려 주는 입문서는 적잖게 선보였다. 선배 신학자가 후배 신학도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들려주는 작품도 간혹 있었다.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텍스트를 접할 때 일어나는 이해란 어떤 것인지 분석하는 해석학 관련 서적도 꾸준히 출판됐다. 신학이 인간의 다른 문화적 활동과 어떻게 대화하고 공명을 이룰지에 관한 실험적인 시도도 호기심을 꾸준히 자극해 왔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 권의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최근 우리말로 번역·소개된 켄트 아일러스의 2022년 작품 《슬기로운 신학 독서》는 이러한 바람과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 책은 신학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참신하고 친절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신학 서적을 지혜롭게 읽을 수 있을지를 건축, 예술, 영화, 소설, 기도 등의 구체적 사례를 들며 소개한다. 그리고 각 장이 끝날 때가 되면 지금껏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성찰과 토론을 위한 질문을 만들어 놓으며, 독서에 영적 깊이를 더해 줄 저자 자신의 기도문을 제공하고, 신학적 상상력을 풍성하게 하고자 사고의 실험 기회도 마련해 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원서 부제대로 신학 독서를 위한 “하나의 실천적 입문”(A Practical Introduction)이자, 한국어판 표지 문구처럼 “신학책 제대로 읽는 법이 궁금한 당신에게” 주저함 없이 권할 만한 작품이다.
《슬기로운 신학 독서》와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된 아일러스는 다소 낯선 저자일지 모른다. 그는 미국 칼빈대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하고, 덴버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박사 공부를 위해 스코틀랜드 애버딘대학교에 진학하고 현대 독일 루터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신학에서 ‘하나님의 화해 활동’(God’s reconciling act)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다. 2009년 그는 미국 인디애나 주 헌팅턴대학교에 부임한 이래 지금까지 조직신학과 윤리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구원론(특히 성화론)과 기독교 전통의 중요성, 신학 교육 등에 관한 다수의 연구물을 출간했다. 복음주의언약교회(Evangelical Covenant Church)에서 신앙생활을 한 그는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United Brethren in Christ)와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를 포함한 여러 개신교회 전통과 관계를 맺었고, 2017년에 북미성공회교회(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다채로운 신앙적·지적 배경을 가진 만큼 그의 저술은 복음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대의 여러 지적 담론과 문화적 현상과 대화에 임하고, 교회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특정 전통에 매이지 않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성화론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학자답게 아일러스는 독서가 단지 신앙인의 의식만이 아니라 ‘삶 전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문제의식과 집필 의도를 잘 응축한 서문의 일부를 다소 길더라도 인용하고자 한다.
“신학 독서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그분과 교제 가운데서 기쁨을 더 깊이 누리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참된 자아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조금 더 예수님처럼 이웃을 바라보게 하고, 정의와 자비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신학 독서가 우리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게 이끌 수 있고, 분열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어떨까요?”(p. 11).
이처럼 신학 독서가 성화와 여러모로 어우러져 있기에,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꼭 필요한 활동이다. 하지만 무작정 신학 서적을 읽는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예배, 기도, 자아 발견, 정의와 자비의 사역,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하는 일”(p. 12)에 곧장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경험적으로도 잘 알 듯 책을 읽다가는 쉽게 피로해지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한다. 재밌는 동영상도 많고 실용적인 글도 많은 세상에서 굳이 딱딱하고 어려운 신학 서적까지 읽으려 하니 동기부여가 쉽게 되지도 않는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 중에 성숙하고 모범이 되기는커녕 오만하고 분열을 일삼는 이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지혜롭게’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일러스는 슬기로운 독서법을 알려 주고자 책을 건축물에 비유하면서, ‘머물기’(inhabitation)라는 은유를 가지고 책 읽기를 상상해 보자고 제안한다.
책의 세계에 머물기, 저자처럼 보기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만큼 자신이 속한 맥락을 초월하여 보편적 관점에서 글을 쓰거나 읽을 수는 없다. 신학 책 저술과 읽기 역시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자기만의 신념과 선입견과 경험과 기대치를 투영하며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아일러스는 신학 책 읽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학 독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중인 교회의 동료 지체로서 저자의 의미 세계와 살아 있는 만남을 갖는 것이다”(p. 21).
신학 독서에 관한 새로운 정의는 신학 서적의 저자와 독자에 대해서도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우선, 저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몸을 가지고 공동체에 속한 지체로서 그 역시 성화의 길을 걷는 과정 중에 책을 집필한다. 그런 만큼 아무리 좋은 신학 서적이라도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가 깔끔한 명제의 형태로 순수하게 보존돼 있지는 않다. 책에는 저자가 “하나님을 알고자 추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른 모든 것을 알고자 추구”(p. 67)하면서 형성한 ‘의미 세계’가 투사돼 있다. 즉 독서할 때 독자가 만나는 것은 단지 순수한 관념이나 체계적 정보가 아니라 저자가 만들어 놓은 담론 공간이다. 독자는 이 공간에 머물며 저자처럼 생각하거나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이로써 지금껏 익숙했던 자아나 일상 세계로부터 낯설어지는 경험을 한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동적 만남이 가진 의미를 분석하려면, “신학 책 뒤에 있는 세계, 신학 책의 세계, 신학 책 앞에 있는 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p. 97). 우선, ‘신학 책 뒤’에는 역사적 존재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저자가 속한 그만의 세계가 있다. 책의 탄생 배경인 만큼 책 뒤의 세계는 저자의 의미 세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책 안에’ 단어와 문장, 자료, 수사학, 양식 등을 가지고 자신의 의미 세계를 형성한다. 책이라는 공간에서 독자는 책의 각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전체를 파악하게 되고, 전체를 조망함으로써 각 부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끝으로, 독자들은 ‘신학 책 앞’의 세계, 즉 자기가 속한 고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책을 읽는다.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기에, 독자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텍스트는 고정됐지만 같은 책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혹은 역사적 요청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이유다. “신학 저작은 하나의 세계를 투사하고 여기로 독자인 당신을 초대해서, 저자가 보는 것처럼 보고 그에 따라 살아가라고 권유한다. … 그 책의 모든 부분은 당신이 저자가 보는 것처럼 보고, 그러고 나서 거기에 가서 살게 하려고 거기에 존재한다”(p. 241).
신학 독서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책을 읽는 목표와 책을 대하는 자세도 변하게 된다. 저자는 우리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연약한 인간이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웃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듯 교회의 한 지체인 저자가 쓴 책도 우리가 통달하거나 꿰뚫거나 정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상상력은 도끼를 휘두르는 바이킹처럼 정복하고 전리품을 취하는 독서 대신 손님으로서 머물라고 한다. 우리는 약탈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받아들이기 위해 읽는다”(p. 88). 즉 독서는 단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 행간에서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 냄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자신의 세계로 환대하는 저자의 초청에 응답하고, 또 저자를 나의 세계로 환대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독서는 힘들다. 그렇기에 신학 독서는 열린 마음과 성숙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독서하게 해 주십시오”(p. 35).
신학 책 읽기의 기쁨과 떨림
아일러스는 자신이 건축한 아름답고 섬세한 공간인 《슬기로운 신학 독서》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그 안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도 신학을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슬기롭게 독서를 하는 지혜도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일러스가 우리를 자신의 의미 세계로 환영하고 있으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형제요 이웃인 우리가 그의 책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며 초대에 응답할 차례다.
《슬기로운 신학 독서》가 출간되자마자 신학을 전공한 지인들에게 소개했더니 이런 책으로 신학 입문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은 어느 정도 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지금껏 무엇을 배웠고 올바른 방식으로 책을 읽는지 돌아보는 데 요긴한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도 이 책에 적잖은 매력을 느낄 것이다. 교재로 쓰기에 적합하기도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교육 경험, 여러 문화적 소재를 사용한 사례, 상상력 훈련법, 신학 공부를 위한 덕목 등 교사에게 필요한 지혜를 책의 공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참신한 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독자가 저자의 세계 안에 머무는 ‘공감적’ 읽기를 강조하다 보니, 신학 공부의 위험 혹은 공감적 읽기의 한계를 어떻게 대할지에 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해석학 이론을 신학과 결부하다 보니 신학 입문에서 다룰 법한 기본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입문서에 지나치게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도 슬기로운 독서를 위한 절제의 지혜일지 모른다. 특히, 이 책이 꽉 찬 설명을 제공하는 종결된 작품이라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책의 여백을 채워 나가는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글을 마무리하자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 독서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성화의 영역에 포함된다면, 성령은 신학 서적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빚어 가신다. 성령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저자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믿음은 신학 독서가 가져올 예기치 못할 새로움에 대한 개방성의 근거다. 자유로운 영이신 성령의 활동을 인간이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기에, 신학 서적을 읽는 행위는 놀라움도 불편함도 불러낼 수 있다. 놀라운 만큼 신학의 지평을 보는 우리의 안목은 넓어질 것이고, 불편한 만큼 나의 선입견과 아집으로부터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슬기로운’ 신학 독서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중인 모든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값진 선물이 아닐까.
첫댓글 오늘 교회에서 가져온 책 4권~^^
열심히 읽어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