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믿음의 소원대로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사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확신과 아울러 겸손과 인내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데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 병 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는 점은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다.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 부장의 믿음만 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두 경우 모두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백 부장과 가나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오히려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 개념이 신약 개념으로 옮기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적인 선민론을 암시하고 있다. 여자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 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조차도 부정한 메시아를 참 메시아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도 그 구원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도록 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하신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된 것이다. 각종 난관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빌 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시는 분임을 시사한다는 그렇다고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적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계획과 성취에 있어서 그 모든것을 인도하시되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시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일지 모르지만, 바울이나 성경이 명백히 증명하는 교훈이다. 굳게 믿는 마음으로 거의 같은 뜻으로는 주로 사용되는 곳은 다르다. 신심은 주로 종교 쪽에서, 신념은 철학 쪽에서 주로 사용된다. 인간의 지식과 신념들의 종합적인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뜻이 확장되어 여러 매체에서 거의 가치관, 좌우명, 이념 등을 대변해 주는 것이 되었다. 현실에서 말하는 신념 신념을 가지고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자신의 신념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신념도 이해와 존중을 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신념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사고하거나 자신의 신념에서 자신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용기 있게 인정하고 극복해나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이런 자세가 없는 신념은 신념이 아닌 아집에 불과하며, 이런 신념이 현실에서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결합하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 신념은 나쁜 것인가?
신념은 어떠한 개인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결정하며, 신념이 없는 삶은 매우 우유부단하고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신념이 없는 인간은 그날그날 되는대로 욕구에 따라 본능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며,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순간이 오면 결정을 판단할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려워서 그냥 아무렇게나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목적의식 없는 결정은 결정을 많이 내릴수록 서로 모순되게 되거나 흐지부지되며 이러한 경향은 확실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도덕적, 윤리적인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신념 없는 이들은 항상 최악의 수동적인 자세로 삶을 살거나, 물질주의나 사회적 평판, 일반 대중의 얕은 도덕 등 막연하고 모호한 사회적 가치가 신념을 대체하고 자아를 왜곡하게 된다. 역사에서 깊은 신념이 없는 자의 최악의 경우는 다만 개인의 신념이 사회의 질서와 정의, 평화를 위협하거나 반사회적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신념이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