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종단 국가 인정이 잡탕불교 시작”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스님 “정화 주체는 ‘계율’”
“비구승들이 세 번 피 흘려 정화를 이뤘다. 궁지에 몰린 대처승들이 종단을 만들겠다며
정부에 인정해달라고 했다. 이것이 한국불교가 잡탕불교가 된 망조가 됐다.”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스님은 20일 부산 한화리조트에서 열린 한일불교유학생협회 동계
세미나에서 기조연설 ‘조계종의 정화이념’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스님은 정화운동 당시 대법원을 찾아가 할복한 6비구 가운데 한 명이다.
이날 스님은 1950년대 시작해
1969년 끝난 정화운동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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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스님은 정화운동을 되살려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4불교닷컴 |
“7000 대처 물리친 350 비구 정신 어디 갔나”
스님은 “‘불법에 대처 없다’던 은사 금오 스님과 선배스님들 가르침에 따라 정화운동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스님들이 큰스님·수좌스님들 뜻을 따랐을 뿐 학문적으로 조계종
연원을 쫒아 정화운동을 하지는 않았다”며 “한일불교유학생회가 최근 발간한 <조계종사 연구
논집>을 통해 심부름하듯 했던 정화운동의 뿌리를 알게 됐다”고 했다.
스님은 1954년 선학원에서 조실이던 금오 스님을 위원장, 적음 스님을 부위원장으로 전국선원
수좌대표자대회 발기인회가 열린 것이 본격적인 정화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대처승을 친일매국 집단으로 인식하자 1953년 통도사 전국교무자회의에서
비구승들에게 삼보사찰을 비롯한 18사찰을 주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비롯됐다.
스님은 “금오 스님에게 들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금오·보경·월하 스님 등 비구대표 5명을
불러 ‘내가 도울 테니 비구스님들이 고유불교를 찾으시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가 독립운동을 하다 삼각산 문수사로 피신했을 때 스님이 숨겨주고 밥도
준 고마움 잊지 못한다’고 했다”고도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비구스님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비구·대처승이 살던 사찰 환경이 대비됐던
것이 주효했다. 이 대통령이 대처승이 주지인 신흥사(現 흥천사)를 찾았을 때 절에서는 기생
잔치가 한창이었다. 비구승이 주지인 경국사를 찾았을 때는 아름답고 절 다웠다는 것.
당시 경국사 주지 보경 스님은 대통령에게 “한국불교는 대처 때문에 망했다.
한국불교를 살려 달라”고 했다.
이후 1954년 6월 “대처승 물러가라. 속인으로 돌아가라”는 1차 유시가 나왔다.
비구스님들은 치안부·문교부 도움을 받아 8월 24일 승려대회 후 조계사를 점령했다.
비구·대처 각 대표 5인과 정부 대표들은 대통령 유시에 따라 정화를 진행키로 하고
대처승은 출퇴근 했고, 유시 나오다 보니 대처승 힘 빠졌다.
비구·대처 각 5인과 정부 담당자 만나 대통령 유시에 따른 정화키로 했다.
승려자격 8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독신일 것.
둘째, 삭발염의 할 것.
셋째, 비불구자.
넷째, 백치가 아닌 자.
다섯째, 살도음망 하지 않는 자(4바라이를 범하지 않은 자).
여섯째, 불주육초(술·담배·고기를 먹지 않는 자)
일곱째, 승려 3인 이상과 단체생활 하는 자.
여덟째, 25세 이상인 자(비구계를 받고 3년을 넘긴 자)이다.
승려대회를 열고 대중 공의를 모으려 했으나 대처승 측이 반대했다.
비구·비구니 350여 명이 승려대회를 위해 단식하는 현장을 대처승들이 덮쳤다.
50여 비구승이 크게 다쳤다.
호법이던 지효 스님이 자기 책임이라며 법당에서 할복했다.
정화운동에서 첫 번째 흘린 피였다.
월탄 스님은 “법당 안에 낭자한 선혈을 본 경찰들이 대처승을 몰아내고 비구승을 보호해줬다”고 했다.
두 번째 흘린 피는 구산 스님의 혈서였다.
스님은 4m 종이에 425자 혈서(탄원서)를 썼다.
스님의 혈서로 비구스님들이 정법수호 의지를 다지며 승려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끝난 줄 알았던 정화는 4·19로 전기를 맞았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중 반감은 대처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대처승들은 정화가 강제였고 세속인의 힘을 빌린 것이라며 비구 측에 재판을 걸었다.
1심 비구 패소. 2심 비구 승소. 3심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대처승 측이 승소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불법에 대처 없다’는 파사현정의 외침을 위해 월탄 스님 등 6비구가 대법원에서 할복을 했다.
세 번째 흘린 피였다.
“통합종단 3개월 만에 파경”
월탄 스님은 “출가한 지 5년, 세납 25세 혈기왕성한 나이에 은사 금오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정화운동을 했다. 해인사 분규 때 달려가 비구승에게 사찰을 돌려줬고, 오대산도 대처승에게서 지켜줬다. ‘정화하면 정금오 스님. 사찰정화는 유월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스님은 대법원을 찾아 여섯 비구가 할복한 후 여론이 다시 비구편을 들었다. 이듬해 5·16이 터져 상황이 또 변했다.
군사혁명 후 사회 안정에 주력하는데 비구·대처가 계속 싸우니 국가재건위원회에서 “중단하라”고 했다. 다시 비구·대처 대표가 모였고 통합종단이 출범했다고 했다.
통합종단 지도부는 비구·대처가 소임을 나눠 가졌다. 3개월 지나니 비구와 출퇴근하고 머리도 기른 대처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었다. 대처승들이 다시 비구승을 상대로 재판을 걸었으나 1·2·3심 모두 비구가 이겼다. 스님은 “1969년 대법원 판결 후 대처승들이 정부에 ‘통합종단을 인정할테니 대처승이 만드는 종단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스님은 “정부가 대처종단을 인정한 것을 시작으로 불교종단만 360여 개가 됐다. 비구승 하다가 어려우면 다들 대처로 종단 만들어 나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당시 대처승들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 정통불교를 고집했다면 오늘날 한국불교가 잡탕불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기복에 머물면 조계종 생명 끝나”
스님은 “정화의 주체는 계율”이라고 했다. “조계종은 선종이라면서 통불교”라며 “1600년 한국불교를 통틀어 하려면 어느 전통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기복으로 끝나서는 조계종 생명은 끝나고 만다”고 했다. 스님은 “유학까지 다녀온 어른스님들이 잘못된 종단 풍토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계종 승려로서 사명감을 갖자. 대처승에게 맞아 평생 불구로 살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비구스님들을 생각해서라도 바른 불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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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불교유학생협회는 20일 총회를 열고 새 회장에 홍선 스님을 추대했다. ⓒ2014불교닷컴 | 한일불교유학생협회 새 회장에 홍선 스님
이에 앞서 한일불교유학생협회는 총회를 열고 새 회장에 홍선 스님(범어사 교수사)을 추대했다.
홍선 스님은 13세인 1953년 지효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5년 경남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하나조노대, 붓쿄대 석박사 과정, 도쿄대 연구생 등으로 일본에서 13년간 공부했다. 1980년 도미해 시카고 불타사를 중창한 스님은 1992년 귀국해 중앙승가대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범어사 교수사이다.
스님은 “한일불교유학생협회가 정화운동에 대해 조명하는 등 조계종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반드시 지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하지 않으면 역사에 죄를 짓고 만다”며 “이런 논의가 종단 발전의 청량제가 돼 한국불교와 우리 사회를 밝고 맑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현해·인환·혜남·오인·선주·화랑·도경·혜능·원두·해운·선행·마성·대각·각문·무용 스님(이상 무순), 신규탁·김광식 교수 등 한일불교유학생협회 회원과 부산 범어사 부주지 범산 스님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한편, 한일불교유학생협회는 "이날 월탄 스님의 연설은 기조연설이 아닌 초청법문 성격이었다. 대표 주제발표는 김광식 교수의 것이다. 한일불교유학생협회 의도와 다르게 비구ㆍ대처간 분쟁을 촉발하는 듯한 내용이 보도돼 유감이다. 이날 행사는 범종단적으로 정화운동의 바른 조명에 나서자는 취지였다"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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