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작철학
이 효 석
1
내리 찌는 복더위에 거리는 풀잎같이 시들었다. 시든 거리 가로수(街路樹) 그늘에는 실업한 노동자의 얼굴이 노랗게 여위어가고 나흘 동안―바로 나흘 동안 굶은 아이가 도적질할 도리를 궁리하고 뒷골목에서는 분 바른 부녀가 별수 없이 백동전 한 닢에 그의 마지막 상품을 투매하고 결코 센티멘털리즘에 잠겨본 적 없던 청년이 진정으로 자살할 방법을 생각하고 자살하기 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테러리스트 되기를 원하였다.
도무지가 무덥고 시들고 괴로운 해이다. 속히 해결이 되어야지 이대로 나가다가는 나중에는 종자도 못 찾을 것이다. 이 말할 수없이 시들고 쪼들려가는 이 거리, 이 백성들 가운데에 아직도 약간 맥이 붙어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정주사네 사랑일까? 며칠이나 갈 맥인지는 모르나 이 무더운 당장에 그곳에는 적어도 더위는 없다. 대신에 맥주 거품과 마작과 유홍이 있으니 내리 찌는 복더위에 풀잎같이 시든 이 거리, 서늘한 이 사랑에서는 오늘도 마작 판이 어우러졌던 것이다. 삼 간이 넘는 장간방¹의 사이를 트고 아래윗방에 두 패로 벌인 마작 판을 싸고 전당포 홍전위, 정미소 심참봉, 대서소 최석사, 자하골 내시 송씨, 그 외에 정체 모를 수많은 유민들이 둘러앉아서 때 묻은 마작 쪽에 시들어가는 그들의 열정을 다져서 마작 판을 탕탕 울린다.
“펑!”²
“깡!” ³
그러나 흥겨운 이 소리가 실상인즉 헐려가는 이 계급의 단조한 생활을 상징하는 풀기 없는 음성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천 끗에 맥주 한 병씩을 걸고 날이 맞도록 세월없이 마작판을 두드리는 그들의 기력 없는 생활의 자멸을 재촉하는 단말마적 종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펑!”
“깡!”
“홀나!”⁴
양동이에 얼음을 깨트려 넣고 그 속에 채운 맥주를 잔 가득 나누고 마작 쪽이 와르르 흩어지니 판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오늘이나 소식이 있을까.”
판 한 모에서 대전하고 있던 정주사는 마작과는 관계없는 딴생각에 마음을 은근히 앓으면서 홍중(中) 쪽을 정성스럽게 모아들였다. 그는 끗수의 타산으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어쩐 일인지 흥중을 좋아하고 백(白)판을 극도로 싫어하였다. 홍중으로 방을 달면 길하고 백판으로 달면 흉하다는 이 비논리적 저 혼자의 원리에 본능적으로 지배를 받으면서 이것으로써 은근히 마음먹은 일을 점치던 것이다. 그 심리는 마치 연애에 빠진 계집아이가 이기든지 말든지 간에 남몰래 트럼프의 화투장을 정성껏 모아들이는 그 심리와도 흡사하였다.
정주사는 오늘도 아들의 편지를 고대하면서 홍중으로 방 짜기에 애를 썼다. 그러나 재수 없는 백판만 여러 쪽 들어오고 홍중은 판판이 한 쪽도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추근추근히 세 쪽이나 들어온 백판을 헐어 내버리면서도 수중에 한 쪽도 없는 홍중을 한 장 두 장 판에서 모아들이기에 헛애를 썼다.
결과는 방 달기가 심히 늦고 남이 벌써 “홀나!”를 부를 때에도 그는 방은커녕 엉망진창인 수많은 마작 쪽을 가지고 미처 주체를 못해서 쩔쩔매었다. 그러나 물론 그는 “홀나!”를 바라는 바도 하니요, 맥주를 아끼는 터도 아니었다. 다만 홍중으로 훌륭하게 방 한 번 달기가 원이었다. 그러나 종일 마작 판을 노려도 홍중은 안 들어오고 편지는 안 오고―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우울하였다.
“에, 화난다!”
마음 유하게 판에 앉았던 정주사도 나중에는 화가 버럭 나서 마작 쪽을 던지고 벌떡 자리를 일어났다.
“운송(정주사의 호), 요새 웬일이오?”
같이 놀던 친구들은 정주사의 은근한 심정은 모르고 그의 연패하는 것이 보기 딱해서 그의 손속⁵ 없는 것을 민망히 여겼다.
“최석사, 대신 들어서시오.”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최석사에게 자리를 사양하고 정주사는 윗목에 서 있는 넓은 침대에 가서 몸을 던지고 마작 소리를 옆 귀로 흘리면서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 잠겼던 것 이다―정주사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일확만금을 꿈꾸고 새 실업을 꾀하여 동해안으로 떠난 것은 벌써 작년 봄이었다. 대학을 마친 풋지식을 놀려두기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수년 전부터 동해안 일대에 왕성히 일어난 정어리업에 기울였던 것이다. 바다 일이라는 것이 항상 위험하기는 위험한 것이나 천여 석지기의 자본을 시세 좋은 정어리업에 들이밀면 만금이 금시에 정어리 쏟아지듯 쏟아질 것이다―고 생각한 그는 대번에 삼백 석지기에 넘는 옥토 은행에 잡히고 이만여 원의 자본금을 낸 것이다.
십여 척의 어선과 어부를 사고 수십 채의 그물을 사고 해변에 공장을 세우고 기름 짜는 기계를 설치하고 공장 노동자와 수백여 명의 능률 노동자를 써가면서 사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얼떨떨한 흥분과 모험감으로 일 년 동안을 계속하여 분추한 어기(漁期)를 지내놓고 연말에 가서 이익을 타산하여보았을 때에 웬일인지 예측과는 딴판으로 수지가 가량없이 어긋났다.
결국 이만여 원을 배와 공장에 곱게 깔아놓았흘 뿐이요, 한 푼의 이익도 건지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른 법없는지라 첫 사업의 첫해인 만큼 모든 실패를 서투른 수단과 노련치 못한 풋지식의 탓으로 돌려보내고 금년에는 일 년 동안에 얻은 경험을 토대로 사업을 확대하여 또 삼백여 마지기의 옥토를 같은 은행에 잡히고 이만여 원을 내서 배를 늘리고 공장을 늘려서 한층 더 큰 규모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금해금이 단행되고 금융계와 모든 사업계에 침체가 오자 무서운 불경기의 조수는 별수 없이 정 어리업에까지 밀려오고야 말았다.
물화 상통과 금전 융통의 길이 끊어지니 정어리의 시세는 대중없이 폭락되었다. 닷 말들이 한 자루에 이 원 육십 전 하던 정어리가 금년에 들어와서는 일 원 삼십 전으로 폭락되고, 기름 한 통에 이원 팔십 전 하던 것이 금년에는 일 원 오십 전으로, 정어리 비료 한 관 시가(一貫時價) 오 원이 이원 오십 전으로ㅡ도대체 반값으로 폭락되었다. 이 대세는 도저히 막아내는 장사가 없었다.
정주사는 앞도 못 내다보고 공연히 사업을 확대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저질러놓은 것을 이제 와서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흥하든 망하든 하던 데까지는 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애처로운 것은 그의 아들의 고생하는 꼴이었다. 유약한 몸으로 편안한 집을 떠나 낯선 해변에 가서 폭양에 쪼여가면서 갖은 신고를 다하리라고 생각하매 아버지의 마음은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자기 혼자 시원한 사랑에서 친구들과 맥주 내기 마작을 울리는 것이 죄스럽게도 생각되었다. 게다가 요사이는 어찌 된 일인지 아들에게서 한 장의 소식도 없었다.
이 어려운 시세에 고기라도 많이 잡혀야 할 터인데 과연 많이 잡히는지, 배와 공장에도 별 고장이 없는지, 더위에 몸도 성한지 모든 것이 퍽도 궁금하였다. 봄에 잠깐 집에 왔다 간 지 벌써 넉 달이나 되었으니 이 여름에 또 한 번쯤 다녀가도 좋으련만 이 바쁜 시절에 그것도 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저래 정주사는 요사이 매우 걱정이다. 마작의 홍중을 모아 친구 몰래 은근히 점쳐보았으나 오늘도 역시 길괘는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침대에 누운 정주사는 괴로운 심사와 가지가지의 무거운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바로 누웠다 돌아누웠다 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펑!”
“홀나!”
어우러진 두 패의 마작 판에셔는 마작 울리는 소리가 맹렬히 들렸다.
‘밤이나 낮이나 모여서 펑들만 찾으니 우리네 살림에노 멀지않아 펑이 날 것이다!’
침대 위에서 마작에 열충된 친구들을 내려다보는 정주사에게는 돌연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 순간 가련한 친구들과 자기 자신의 자태가 머릿속에 전광적으로 번적였다.
‘오, 악몽이다!’
정주사는 우연한 이 생각에 스스로 전율하고 불길한 환영을 떨쳐버리려고 애쓰면서 돌아누워 시선을 문득 푸른 하늘로 옮겨버렸다.
2
종일 동안 들볶아치던 포구는 밤이 되니 낮 동안의 소란과는 반비례로 심히 고요하였다. 하늘도 어둡고 바다도 어둡고 뽀족한 초승달이 깊은 하늘에 간드러지게 걸리고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정어리 공장 사무소 창에서 흐르는 등불이 어두운 해변의 한 줄기의 숨소리와도 같다. 규칙적으로 몰려오는 파도의 소리가 쇄 ― 쇄 ㅡ 들려올 뿐이다.
‘정구태 온어(溫魚)⁶ 공장 사무소’ 라고 굵게 쓰인 간판 달린 언덕 위의 공장 사무소 안에는 젊은 주인공이 등불을 돋워놓고 이슥하도록 장부 정리에 열중하고 있다. 옆방 침실에서는 공장의 감독 격으로 있는 최군과 서기 격으로 있는 박군의 코 고는 소리가 높이 들렸다. 코 고는 소리에 이끌려 건듯하먼 저절로 내리감기는 두 눈을 비벼가면서 낮 동안의 피곤도 무시하여버리고 그는 장부 정리에 열중하였다. 장부의 숫자를 대조하여가는 동안에 정신도 차차 맑아갔다.
등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검어 무뚝뚝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이태 동안이나 해변에 서서 바닷바람과 폭양을 쏘였으므로였다.
연전에 서울 있어서 카페에나 돌아다니고 기생들과 자동차나 몰고 할 때에는 그도 얼굴빛 희고 기개 높은 청년이었다. 그것이 두 해 여름이나 해변에서 그슬고 타고 하는 동안에 이렇게 몰라볼 만큼 풍골이 변하였던 것이다. 카페에서 술 마시면 울고 기생 앞에서 발라맞추던⁷ 연약하던 그의 성격도 껄끄러운 뱃사람들과 접촉하는 동안에 어느덧 굵직하고 거칠게 변하였던 것이다.
장부에 가늘게 적힌 숫자와 주판 위에 나타나는 액수를 비교하여 가는 그의 얼굴은 차차 흐려지고 암담하여갔다.
“괴상한 일이다!”
까만 주판알을 떨어버리고 다시 놓고 또다시 놓아보아도 장부의 숫자와는 어림없이 차가 났다.
“이 수지의 차는 어데서 생겨났는가?”
이것을 궁리하기보다도 그는 먼저 이 너무나 큰 차이에 다만 입을 벌리고 놀랐다. 그러나 주판에 나타난 수는 엄연히 그를 노렸다.
작년 봄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한 그의 서재 책상 위에서 주판을 잘각거리고 장래를 응시하였을 때에 그의 얼굴에는 상기된 미소가 떠올랐다. 서재 책상 위에서 잘각거리는 주판은 미인의 눈맵시와도 같이 사람을 항상 황홀케 하는 법이다. 뜨거운 차에 혀를 꼬부리는 그의 얼굴에는 흥분된 혈색이 불그스름하게 빛났으니 주판의 까만 알이 화려한 그의 미래를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성공―일확만금, 사치한 문화주택, 피아노, 자가용 고급차 ‘하드손’ 한 대, 당당한 청년 실업가, 화려한 꿈의 전당이 그의 머리 속에 끝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주판의 농간을 그 어찌 알았으랴.
서재 책상의 주판은 그를 온전히 속여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 년 전에 그를 황홀케 하던 주판은 이제 이 해변 사무소에서 그를 비웃고 있다. 끝없이 화려하게 전개되던 꿈의 전당은 이제 그의 눈앞에서 와르르 헐어져버렸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파산, 몰락, 장차 닥쳐올 비참한 이 과정 이 그의 눈앞을 캄캄하게 가렸다.
그는 장부와 주핀을 던져버리고 책상에서 머리를 들고 몸을 펴서 교의에 징긋이 전신을 의지하였다. 눈앞에는 창밖으로 캄캄한 어둠만이 내다보였다.
‘나의 앞길도 이렇게 어두우렷다!’
하는 생각에 잠겼는지 그는 뚫어져라 하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요 들리는 것은 늠름한 파도 소리와 옆방에서 나는 최군과 박군의 코 고는 소리뿐이었다. 일 년 전의 그 같으면 이 애타는 마음에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못생기게 울지 않았다. 이것 하나가 바다에 와서 얻은 득이라면 득일까.
창밖에서 시선을 옮기고 그는 교의를 일어서서 담배를 태워 물고 잠 안 오는 울울한 마음에 사무소를 나왔다.
언덕을 내려와서 해변으로 걸어가는 그의 다리는 맥없이 허전허전하였다.
기울어진 초승달 밑에서 사만금을 집어삼킨 검은 바다는 탐욕의 괴물같이 이빨을 갈면서 그를 향하여 으르렁거렸다.
일순 그는 불쾌하여서 바다에서 몸을 돌려 포구를 향하였다. 잠들어 고요한 포구는 그를 대하여 으르렁거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그의 ‘적’은 기다리고 있으니 그를 상대로 살아가는 수백 명의 부녀 노동자들과 공장 노동자는 임금 문제로 그와 다투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그러나 하늘 역시 그에게는 적이었다. 북으로 모여드는 검은 구름―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위험한 날씨이니 한바탕 장황히 쏟아지기만 한다면 정어리가 바다에서 끓는다 하더라도 배는 낼 수 없는 터이다.
하늘을 우러러도 바다를 향하여도 포구를 대하여도 어느 것 하나 그에게 적 아닌 것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적의 배후에는 시세의 농간을 부리는 더 큰 괴물이 선웃음 치고 있는 것을 그는 당장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이 모든 적을 상대로 싸워나갈 생각을 하니 앞이 아득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터이니 싸울 데까지는 싸워보아야겠다고 그는 이를 갈고 ‘거룩한 결심’ 을 하였다.
촉촉한 모래를 밟으며 으슥한 해변을 거니는 그에게는 낮 동안에 무심하던 해초 냄새가 이제 새삼스럽게 신선하게 흘러왔다. 신선한 해초 냄새에 그는 문득 오래간만에 건강한 성욕을 느꼈다. 서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의 생각이 간절히 났다. 뒤를 이어 오랫동안 소식 안 보낸 아버지의 생각도 났다.
3
해변의 낮은 길고 북국의 바다는 쪽잎같이 푸르다. 푸른 바다를 향하여 반원형으로 열린 포구는 푸른 생활을 싣고 긴 하루 동안 굿을 하듯이 들볶아친다.
바닷물 찰락거리는 넓은 백사장ㅡ그곳은 포구 사람들의 살림터로 아울러 싸움터이니 거기에서 그들은 종일 동안 부르짖고. 땀 흘리고, 청춘을 허비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일생을 계산한다.
무거운 해와 건강한 해초의 냄새를 맡으면서 적동색으로 건⁹ 수백여 명의 부녀 노동자는 백사장 군데군데에 떼를 짓고 정어리 배가 들어오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배가 들어와야 그들에게는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니 어부가 잡아들인 정어리를 그물코에서 따서 어장에까지 나루는 것이 곧 그들의 노동인 것이다.
“어째 배가 애이 들어오?”
“마ㅡ.”
“저게 들어옵네. 우승기 날리며 배 들어옵네.”
“옳소, 옳소!”
먼 수평선 위에 나타난 검은 일 점을 노리던 수백의 눈은 일시 빛나고 백사장에는 환희와 훤조¹⁰가 끓어올랐다.
검은 일 점이 그의 정체를 드러내놓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거의 반시간이 넘어서야 그럴듯한 선체와 붉은 돛과 선두에 날리는 우승기가 차차 드러났다. 남풍에 휘날리는 붉은 돛을 감아 내리더니 배는 노를 저어 포구로 향하였다. 선두에는 우승기 외에 청기 홍기가 휘날렸다. 청기 홍기는 어획의 풍산을 의미하는 것이니 백사장에는 새로운 환희의 소리가 높이 났다.
“뉘 배요?”
“명팔이 배 애이요”
“우승기 달고 우쭐했소!”
“저 ―기 또 배 들어오―.”
“저거 애이요. 하나 둘 서 너……”
“야 ―.”
수평선 위에는 연하여 검은 점이 나타나더니 그것이 차차 커지며 일정한 거리에 와서 일제히 돛을 내리고 굵은 노를 저으면서 역시 포구를 향하여 일직선을 그었다.
기다리던 배가 들어옴을 볼 때에 정구태 공장 사무소에서도 각각 출동의 준비를 하였다.
젊은 공장주도 어젯밤 우울은 씻어버린 듯이 새로운 기쁨을 가지고 밀짚모자를 쓰고 고무장화를 신었다.
박과 최를 거느리고 사무소를 나와 언덕을 내려왔을 때에 배는 쌍쌍이 뒤를 이어 포구 안에 일렬로 노를 저었다.
배는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모두 구태네 배였다. 그는 금년 봄에 사업을 확장할 때에 그의 영업 정책상 포구 안에 산재하여 있는 수많은 군소 어업자의 태반을 매수하고 배와 공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여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 포구 안의 정어리 업자라면 정구태가 첫손가락에 꼽혔고 백사장에 모이는 주인 없는 수백여 명의 부녀 노동자들도 기실은 정구태에게 전속하여 있는 셈이었다.
“공장주 나옵네.”
떠들고 뒤끓던 부녀 노동자들은 젊은 공장주를 위하여 길을 틔웠다.
그들 사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 떠돌았다. 그것은 배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날마다 몇 차례씩 당하는 일이지만 이 기쁨만은 언제든지 변치 않고 일어나는 것이니 해변 사람 아니면 맛 볼 수 없는 기쁨이다. 허연 고기를 배 속에 그득히 잡아 싣고 순풍에 돛을 달고 쌍쌍이 노를 저어 들어올 때 그것은 서로 이해관계는 다를지라도 뱃사람 자신들에 게나 공장주에 게나 부녀 노동자들에게나 똑같은 기쁨을 가져왔다. 생산의 기쁨이라고 할까ㅡ속일 수 없는 기쁨이다.
포구 안에 들어온 배가 차례차례로 해변 모래 기슭에 바싹 대었을 때에 그들은 벌떼같이 일제히 그리로 몰렸다.
검붉게 탄 웃통을 드러내는 뱃사람들은 배에서 내려서 뱃줄을 모래밭 기둥에 든든히 매놓고 모래 위에 부대 조각, 멱서리¹¹ 조각 등을 널찍하게 펴고 배와의 사이에 널판으로 다리를 놓고 그 위로 고기 달린 그물을 끌어내려 육지로 옮겼다. 한데 이은 여러 채의 그물이 한 줄에 달려 내려와서 부대 조각 위에는 허연 고기의 산을 이루었다. 이 고기 더미를 둘러싸고 부녀 노동자들은 그 주위에 각각 알맞은 곳을 차지하고 물동¹² 안에 원을 그렸다.
―부녀 노동자 가운데에는 열두어 살씩 먹은 소녀가 가장 많으나 그 외에 열 칠팔 세 되는 처녀도 있고 삼십을 넘은 부녀도 있고, 혹은 육십에 가까운 노파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순전히 일한 분량에 의하여 임금을 받는 것이니, 즉 그들은 대개 동무들과 몇 사람씩 어울리거나 혹은 두 모녀가 어울려서 함지에 고기를 따 담아 가지고 감독 있는 어장까지 날라서 큰 나무통에 한 통씩 채우는 데 대개 십오 전씩의 임금을 받으니 이것을 어우른 동무들과 똑같이 분배하는 것이다.
그러니 배가 잘 들어오고 고기가 잘 잡혀서 하루 종일 일하게 된다 하여도 한 사람 앞에 물과 몇십 전의 임금밖에는 배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전히 이것으로 생활을 도모하여나가는 그들에게는 한 푼이 새롭고 아까운 것이다.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능률을 올려서 서로 다투어가면서 재치 있게 부랴부랴 일을 하는 것 이다……
여섯 척의 배에서 내린 여섯 개소의 그물 더미로 각각 분배되니 수백여 명의 노동자는 거의 다 풀렸다. 백사장 위에 일렬로 뭉친 여섯 개의 떼는 꿀집을 둘러싼 여섯 개의 벌떼와도 흡사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쉽게 여섯 개소로 뭉치기는 뭉쳤으나 일은 즉시 시작하지 않았다. 오늘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어이 공장주와 다질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임금 문제였다. 이때까지 한 통 임금 십오 전씩 하던 것을 오 전을 내려 십 전씩을 공장주 측에서 며칠 전부터 굳게 주장하여 나중에는 어업 조합에까지 걸어서 결정적 시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정어리 시세가 떨어졌으므로라는 ‘당연한 이유’ 를. 내세우나 이 ‘당연한 이유’ 가 부녀 노동자들에게는 곧 주림을 가져온다는 것을 공장주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며칠 동안 십 전 임금에 복종하여왔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현저히 생활에 위협을 받는 그들은 더 참을 수 없어서 오늘은 공장주와 철저히 다져볼 작정이었다. 비록 아직 통일적 행동으로 동원되도록 조직은 못 되었으나 그들은 똑같은 항
의를 다 같이 가슴속에 감추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한 통에 얼매요?”
그들은 공장주를 붙들고 임금 결정을 요구하였다.
“조합에서 작정한 것이 있지 않소. 십 전이오, 십 전.”
젊은 공장주의 태도는 픽도 빽빽하였다.
“십 전 아이 되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항의하였다.
“이 무서운 세월에 십 전도 과하오.”
“야 이 나그네, 십 전 통에 이 숱한 사람이 굶는 줄은 모르는가! 오 전 더 낸다고 당신네야 곧 굶어 죽겠슴나?”
“굶든지 마든지 조합에서 정한 것을 내가 어떻게 한단 말요.”
“조합놈 새끼들 마사¹³놓겠다!”
수백 명은 일시에 소란하여지면서 분개하였다.
“자, 어서들 일이나 하시오.”
“십오 전 아이 주면 아이 하겠소.”
“일하기 싫은 사람들은 그만두시오.”
“옳소! 그만두겠소꼬. 누가 꿀리나 두고 봅세. 야들아, 오늘은 일들 그만두어라!”
극히 간단하였다. 공장주의 거만한 태도에 분개한 그들은 둘러쌌던 원을 풀면서 벌떼같이 어지럽게 백사장에 흩어졌다.
“일하는 년들 썩어진다!”
집안 형편이 하도 딱해서 그런대로 여기서 일하여볼까 하던 부녀들도 이 위협의 소리에 겁이 나서 자리를 비실비실 떠나버렸다.
노동자가 헤져버린 백사장에는 손대지 않은 여섯 개의 그물 더미가 노동자를 기다리면서 우뚝우뚝 서 있을 뿐이다.
그들의 집단적 행동에 공장주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이렇게 뻣뻣하게 나올 줄은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을 다시 부르자니 같지 않고 그들 대신에 새 노동자를 불러들이자니 이 포구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요 그는 어쩔 줄 모르고 황망히 날뛰었다.
*
그날 저녁 야학은 다른 때보다 일찍이 끝났다.
맨 뒷줄에 앉아 하루 동안의 피곤을 못 이겨 공책 위에 코를 박고 있던 순야는 소란한 주위의 이야기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백여 명의 학생들―이라고 하여도 십여 명의 사내아이를 제하면 전부가 낮 동안에 해변에서 볶아치던 부녀 노동자이었다―은 공책을 덮고 자리에서 수군거렸다.
―우리는 왜 가난한가
―정어리 삯전 십 전 절대 반대
―……
국문으로 칠판 위에 크게 쓰인 이 토막토막의 글을 순야는 눈을 비벼가면서 공책 위에 공들여 베꼈다. 국문을 가제 깨친 그는 이 단순한 글줄을 읽고 쓰는 데 오 분이 넘어 걸렸다.
"그럼 이 길로 바로 장개 앞 해변으로들 모이시오.”
순야가 칠판의 토막글을 다 베끼고 나자 강선생은 그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였다. 그가 졸고 있는 동안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별안간 장개 해변으로 모이라는 이 분부에 순야는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소란한 이 자리에서 그는 어쩐지 알 수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백여 명의 야학생들은 제각각 감동과 홍분을 가지고 교실을 나와 마당에 쏟아졌다. 그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즉시 장개 해변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강선생의 명령이라면 절대로 복종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어디서 들어왔는지 고향조차 모를 강선생을 퍽도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눈이 매섭고 영악한 한편에 강선생은 학생들에게는 극히 순하고 친절하고 의리가 밝았다. 어디로부터서인지 돌연히 이 포구에 나타난 지 벌써 일 년이 넘도록 그는 한 푼의 이해관계도 없는 수많은 그들을 모아놓고 충실히 글을 가르쳐주어왔다. 그는 어쩐지 조합 사람이나 면소 사람들과보다도 뱃사람이나 노동자들과 더 친하게 굴었다. 새빨간 표지의 툽툽한 책과 깨알 쏟듯 한 꼬부랑 양서를 열심으로 공부하는 반면에 그는 간간이 해변에 나와 바람을 쏘이며 이런 사람들과 오랫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에 잠길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만 되면 학생들을 모아놓고 열심으로 글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이런 촌구석에 와서 박혀 있을 사람이 아닌 이 정체 모를 강선생은 그들에게는 알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그는 가령 말하면 젊은 공장주 정구태와 같이 이 포구로 돈 벌러 온 것은 아니다―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아무 관련도 없으나 가끔 이렇게 강선생과 공장주를 비교하여보았다. 한 사람은 그들을 위하여주고 한 사람은 그들을 어르고 빼앗아 간다. 즉 강선생은 그들의 동무요, 정구태는 그들의 원수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판단하여왔던 것이다.
―순야는 이제 이렇게 강선생에 대한 가지가지의 생각에 잠기면서 동무들과 휩쓸려 고요히 잠든 포구의 앞 모래밭을 지나 약 삼 마장가량 되는 장개고개로 향하였다.
“진선아, 이 밤에 장개에 가서 무스거 한다디?”
길 가운데서 순야는 동무에게 물어보았다.
“너 괴실 (교실이라는 말)에서 선생님 말 아이 들었니. 정어리 삯전 올릴 운동을 한다드라.”
“운동이 무스기야?”
순야는 ‘운동’ 이라는 말의 뜻을 몰랐다.
“정어리 뜯는 삯전을 요즈막에 십 전씩 아이 했니. 그것을 되로 십오 전씩으로 올려달라고 재주(공장주)와 괴섭 (교섭)하기로 했단다.”
“재주가 왜 장개에 있다니?”
“재주에게는 내일 말하기로 하고 오늘은 장개에 가서 우리끼리만 의론한단 말이다. 나래(이따가) 가보면 알 일이지.”
동무의 설명에 순야는 이 밤에 장개로 가는 목적이 대강 짐작되었다. 그리고 아까 칠판에 쓰였던 토막글의 뜻도 알 듯하였다. ‘정어리 삯전 십 전 절대 반대’의 ‘절대 반대’라는 말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이제 대강 그 뜻이 짐작되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발소리를 고요한 밤하늘에 울리면서 흥분된 일단이 장개고개를 넘어서니 먼 어둠 속에 장개의 작은 마을이 그럴 듯이 짐작되었다. 고개 밑 넓은 해변 모래밭에서는 붉은 횃불이 타올랐으니 그곳이 곧, 그들의 목적하고 온 곳이다. 파도 소리 은은한 캄캄한 해변에 붉게 타오르는 횃불을 멀리 바라볼 때에 그들의 가슴은 이유 모를 감격에 울렁거렸다. 오늘 밤에는 파도 소리조차 유심히도 은은하다.
고개를 걸어 내려 모래발까지 다다랐을 때에 그곳에는 벌써 횃불을 둘러싸고 백여 명의 동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야학생들뿐이 아니라 낮 동안에 해변에 나와 같이 일하는 부녀 노동자들의 거의 전부가 망라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선생도 물론 벌써 와 있었고, 그뿐 아니라 역시 정구태 공장에서 일하는 군칠이와 중실이, 그 외 그들과 같이 일하는 여러 명의 남자 노동자들도 와 있었다. 전부 이백여 명이 넘는 그들은 횃불을 중심으로 모래밭 위에 첩첩이 둘러앉았다.
“올 사람 다들 왔소?”
바로 횃불 밑에 선 강선생은 좌중을 휘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밤이 이슥한데 미안은 하나 오늘 이곳까지 이렇게 모이게 한 것은 다른 것 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정어리 삯전 문제에 대하여 의론하고 앞으로 밟을 길을 작정하려는 생각으로였소.”
이것을 서언으로 하고 그는 숨을 갈아 쉬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요건에 들어 갔다.
“공장에서 일하는 분은 나중으로 밀고 정어리: 따는 이들 중에 한 통 십 전에 반대하는 이들 손 들어보시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수많은 손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그들은 다 손을 들었고 가운데에는 두 손을 한꺼번에 든 사람도 있었다. 그럴 줄 모르고 강선생이 이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하여나가는 순서상 그들의 다짐을 더 한 번 굳게 하려고 그렇게 질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손들 내리시오.”
“십 전 삯전에는 절대로 반대합시다. 대체 남의 사정 모르는 것은 재주이니 아무리 시세가 폭락하였다 할지라도 어디서 그 벌충을 못 대서 하필 가난한 노동자들의 간지러운 삯전을 줄여버리니 이 얼마나 다랍고 추접한 짓이오. 그의 욕심은 만금을 벌자는 무도한 탐욕이요 여러분의 욕심은 다만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자는 정당한 요구가 아니오? 시세의 폭락도 그에게는 다만 만금을 못 벌게 하는 폭락이지만 오 전 삯전 내리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곧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오? 이 가련한 노동자의 사정은 못 살피고 가증스런 재주 편에만 가담하여 그의 말만 솔곳이 듣고 수백 명의 삯전을 멋대로 작정하는 어업 조합 놈들도 죽일 놈이오. 이것은 참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우리들의 조합이 아니기 때문이오. 여러분! 여러분은 재주와 같이 이 조합에도 철저히
대항하여야 되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고 애쓰면서도 그는 이보다 더 쉽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족하였다. 그들의 가슴을 울리는 ‘아지’ 의 효과는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옳소!”
“강선생님 말이 맞았소!”
“십 전 반대, 십오 전 좋소꼬!”
그들은 비록 박수는 할 줄 몰랐으나 이런 찬동의 소리가 뒤를 이어서 맹렬히 들렸다.―
“십 전 반대, 십오 전 찬성! 이 여러분의 요구를 실시케 하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여야 되겠소?”
강선생은 이렇게 반문하여놓고 차근차근 그 방법을 설명하였다.
“이때까지 이왕 일하여준 것은 그만두고 내일로 즉시 여러분은 재주에게 이 요구를 들어달라고 담판하여야 할 것이오. 그러자면 여러분이 제각각 떠들기만 해서는 효과가 없으니 여러분 가운데에서 몇 사람의 대표를 추려서 그가 직접 재주에게 가서 정식으로 교섭을 하여야 할 것이오.”
말이 끝나자 또 찬동의 소리가 뒤를 이어서 요란히 들렸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난관이 있으니 그렇게 정식으로 교섭을 하여도 재주가 요구를 안 들어주는 때에는 여러분은 어떻게 할 터이오?”
강선생은 침착하게 그들의 열정의 도를 시험하였다.
“안 들어주면 일을 아이 하겠소꼬!”
“재주 썩어지지!”
“조합을 마사놓겠소꼬!”
그들은 열렬하게 의기를 토하고 결심의 빛을 보였다.
“재주가 요구를 안 들어주면 일하지 않겠다는 분은 그 자리에 일어서 보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이백 여 명의 노동자는 일제히 그 자리에 일어섰다. 물론 한 사람도 주저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손을 들고 맹세하시오!”
서슴지 않고 손들이 일제히 높이 들렸다. 이만하면 유망하다고 은근히 기뻐하는 강선생은 그들을 그 자리에 다시 앉히고 침착한 어조로 그들의 결심을 다졌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서하였소! 이 중에 한 분이라도 비록 굶어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이 맹서를 어기면 안 될 것이오. 무릇 어떠한 사람과 대적할 때에는 일치와 단결의 힘이 필요한 것이오. 하나보다는 열, 열보다는 백, 백보다는 천―이렇게 수많은 것이 한데 굳게 뭉치면 자기의 생각지 못한 큰 힘이 생기는 법이니 그 힘 앞에는 제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필경은 몰려 넘어질 것이오. 여러분도 이것을 굳게 믿고 맹서를 어기지 말고 끝까지 버티어나가야만 여러분의 뜻을 이룰 것 이오!”
횃불을 발갛게 받은 수백의 얼굴이 강선생의 말이 끝나기까지 조금도 긴장을 잃지 않고 결의와 맹서에 엄숙하게 빛났다.
―이렇게 하여 으슥한 이 해변에서는 포구 사람 잠자는 동안에 비밀 회합이 무사히 끝났던 것이다.
끝으로 강선생은 그들 속에서 네 사람의 교섭원을 뽑았다. 공장의 군칠이, 중실이, 부녀 측에서는 임봉네와 일순네―이 네 사람은 모든 사람의 환영 리에 기쁜 낯으로 책임을 맡았다. 내일 아침 배 들어오기 전에 네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가지고 재주와 직접 담판하기로 하였다.
一. 정어리 뜯는 임금 한 통에 십오 전씩 하소.
一. 기름 짜는 임금 육 두¹⁴ 한 통에 십 전씩 하소.
一. 비료 가마니 묶는 임금 매개에 삼십 전씩 하소.
나중에 일어날 여러 가지 시끄러운 장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조목을 구두로 담판하기로 하고 요구서는 작성치 않았던 것이다.
질의를 다 마친 그들이 강선생을 선두로 긴 열을 지어 장개고개를 넘어 다시 포구로 향하였을 때에 밤은 어느덧 바다 멀리 훤한 새벽을 바라보았다.
*
이튿날 아침 ―.
포구 앞 백사장에는 일찍부터 수백의 부녀 노동자들이 모여 수물거렸다. 전날 밤의 피곤도 잊어버리고 그들은 이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장 사무소로 담판 간 네 사람의 교섭위원과 공장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백사장에 끌어올린 빈 배를 중심으로 혹은 배 속에 앉기도 하고 혹은 기대기도 하여 별로 말들도 없이 그들은 언덕 위의 공장 사무소만 한결같이 바라보고들 있었다.
강선생도 그들과 연락을 취하려고, 그러나 보기에는 아무 연락도 없는 듯이 혼자 떨어져서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아즈바이네 나옵네!”
언덕 위를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일시에 부르짖었다. 사무소를 나와 부지런히 해변으로 걸어 내려오는 네 사람을 바라보는 그들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찌 됐소?”
“무스기랍데?”
해변에 다다르기가 바쁘게 네 사람을 둘러싸고 결과를 묻는 그들은 그러나 이미 불리한 결말을 짐작하였다.
“야, 과연 도모지 말을 아이 듣습데.”
중실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분개하였다.
“한 가지도 아이 들어줍든가?”
“들어주는 게 무스기요. 저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꾸 조합에만 밉데.”
임봉네는 괘씸하여서 입에 거품을 품겼다.
그러나 언덕 위에서는 조급하게 사무소를 나오는 공장주가 보였다. 그는 그러나 해변으로는 내려오지 않고 어디론지 포구 쪽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어디 옐 가는가. 이리 오쟁이코.”
“마, 알 거 있소…… 엥가이 밸이 뿌릇 나야지. 그 자리에서 볼을 콱 줴박을까 했소.”
군칠이는 멀리 공장주를 향하여 헛주먹질을 하였다.
“그래 아즈바이네 무스기랬소? 모다 일 아니 하겠다고 했소?”
“야, 그러니 우리보고 무스기라고 하는고 하니 어전 공장 일은 그만두랍데.”
공장주는 몇 사람 안 되는 공장 노동자쯤은 포구 안에서 즉시 새로 끌어 올 수 있다는 타산 아래에서 중실이와 군칠이 외 수 명의 공장 노동자를 전부 해고시킨 것이었다.
“일 있소? 일 아이 하면 그만이지!”
네 사람을 둘러쌌던 부녀 노동자들은 흩어지면서 제각각 수물거렸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은 어젯밤에 맹서한 것같이 이 자리를 움직이지 말고 공장주가 여러분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결코 일을 하여서는 안 될 것이오. 그리고 이따 배 들어온 뒤에 몇 사람은 공장으로 가서 새로 들어올 노동자에게 우리의 뜻을 알리고 결코 일을 하지 말도록 권유하도록 할 것이오!”
강선생은 수물거리는 그들을 통제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진을 친 채 끝까지 공장주와 대항하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아침 배가 들어왔다. 여러 척의 배는 전날에 떨어지지 않는 풍부한 수확을 싣고 쌍쌍이 들어와 해변에 매였다.
포구에 갔던 공장주는 다시 사무소에 가서 감독을 거느리고 해변으로 내려 왔다.
그들의 뒤를 이어 주재소의 부장과 순사 세 사람이 역시 해변으로 따라 내려오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일로 인지 그들은 도무지 생각지 않던 영문 모를 일이었다.
“삯전은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단연코 한 푼도 올리지는 않겠으니 그런 줄들 알고 일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싫은 사람은 그만 두시오. 그것은 당신네 생각대로들 하시오.”
백사장에까지 이른 공장주는 노동자들을 보고 비웃는 듯이 의기 있고 다구지게 말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것도 들은 체 만 체하고 다만 결의의 빛을 보일 뿐이요 요란하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말에 관심을 갖기보다도 더 시급한 일이 목적에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공장주를 따라온 부장과 순사는 말도 없이 강선생과 중실이, 군칠이, 임봉네, 일순네, 즉 네 사람의 교섭위원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들은 자꾸 다섯 사람을 끌기만 하였다.
영문 모르게 장수를 빼앗기는 수백의 군중들은 불길한 예감에 겁내면서 이 장면을 둘러싸고 실랑이를 쳤으나 아무 소용도 없이 다섯 사람은 불의의 × 의 손에 끌려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제 아까 공장주가 급한 걸음으로 포구로 향하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재소에 가서 꿍꿍이수작을 대고 모든 것을 꼬여 바친 공장주의 비열한 행동을 알아챈 그들은 이제 극도로 분개하였다.
“그놈 새끼 더러운 짓을 한다이.¨
“행세가 고약한 놈이오.”
“그 썩어질 놈 쳐 죽이오!”
“공장을 마서버리오!”
격분에 타오르는 그들은 아무에게도 지휘는 안 받았으나 마치 지휘를 받은 듯이 두 패로 풀려 한 패는 해변 공장주에게로, 또 한 패는 언덕 공장 사무소로 맹렬히 밀려갔다. 너무도 격분된 그들은 분을 못 이겨 폭행에 나왔던 것이다.
감독의 제재도 아무 힘없이 언덕 위에 밀린 파도는 사무소를 둘러쌌다.
“돌을 줍어라!”
“사무소를 마서라!”
그들은 좍 흩어졌다.
돌이 날았다.
사무소 유리창이 깨트려졌다.
빈 사무소 안에 와르르 밀려 들어간 그들은 책상을 깨트리고 장부를 찢어버 렸다.
“조합으로 몰려가오!”
사무소 습격이 끝나자 그들은 또다시 일제히 어업 조합으로 밀려갔다.
거기서도 사무소에서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돌이 날았다. 창이 깨트려졌다.
“썩어질 놈들, 처먹고 배때기가 부르니 한 통에 십 전이 무스기야.”
“한 사람이 부자 되고 이 수백 명 사람은 굶어 죽어도 괘이찮단 말이냐.”
돌연한 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사와 감독과 서기들은 조합 사무실 안에서 날아 들어오는 돌과 고함에 새우 새끼같이 오그라졌다.
그들은 다시 해변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요번에는 산산이 흩어지지는 않고 무의식간에 긴 행렬을 지었다. 전날 밤에 강선생을 선두로 장개고개를 넘어올 때 같은 긴 행렬을 지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슴은 이제 복수의 쾌감에 끓어올랐다. 다행히 주재소가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그들은 별로 피해도 입지 아니하고 사무소와 조합을 습격하여 계획하지 않은 시위 행동을 즉흥적으로 보기 좋게 하였던 것이다. 행렬의 열정에 발맞추는 그들의 가슴은 높이 뛰었다.
해변에 이르렀을 때에 거기에는 동무들만 수물거리고 공장주와 감독은 어디로 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허연 그물 더미가 모래 위에 여러 더미 노동을 기다리며 척척 무져¹⁷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노동을 제공하지는 않고 도리어 발길로 고기 더미를 박차버렸다. 요구가 관철되기 전에는 고기가 썩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노동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발길에 차인 정어리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4
달포를 두고 내리 찌는 장마는 마침 오 년 이래의 기록을 깨트려버리고야 말았다. 집이 뜨고, 사람이 상하고, 마을이 흐르고, 백성의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마작꾼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니 재동 정주사 집에서는 이 긴 장마 동안 하루도 번기는 법 없이 낮상 밤상으로 마작이 울렸고 장마가 지나간 이제까지 변치 않고 계속 되어왔던 것이다. 빈 맥주병이 가마니 속으로 그득그득 세 가마니를 세이고 아침마다 사랑마루에는 요리 집시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러나 정주사에게는 이 긴 장마가 스스로 다른 의미를 가졌으니 그는 장마와는 무관심으로 마작을 탕탕 울리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마작꾼과 떨어져 침대 위에 누워서 신문을 뒤적거리는 정주사의 가슴속은 심히 안타까웠다. 그것은 그러나 집이 뜨고 마을이 흐른 것을 슬퍼하여서가 아니라 보다 더 중한 이유로이니, 즉 시골서 경영하는 정어리업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달포지간의 장마는 고기잡이를 온전히 봉쇄하여버렸고 그 위에 폭풍우는 바다에 나갔던 다섯 척의 어선과 어부를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집어삼켜버렸던 것이다.
―어선 오 척 유실.
오늘 아침에 정주사는 아들에게서 이런 전보를 받았다. 다섯 척이면 여러 천 원의 손해이다. 그리고 달포 동안 고기잡이 못 한데서 생긴 손해 역시 막대할 것이다. 그나 그뿐인가. 그는 달포 전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는 아들에게서 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받았던 것이다.
(○ ○는 入)¹⁶
짐작하건대 이 파업에서 생긴 손해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손해 위에 폭락된 시세는 여전히 계속되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정주사는 기가 막혔다.
신문을 던지고 한숨을 지으면서 정주사는 드러누운 채 끙끙 속을 앓았다.
“홀나!”
마작 판에서는 흥겨운 소리가 나더니 뒤를 이어 요란한 훤소와 마작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작 쪽은 잘그닥 잘그닥 하고 경쾌한 뼈 소리를 내면서 다시 쌓였다.
“운송, 내려오시오. 한 상 합시다.”
최석사가 판에서 빠지자 심참봉은 침 대 위의 정주사를 꾀었다.
“필경 망하기는 일반 아니오. 망해서 빌어먹게 될 때까지 짱이나 부릅시다그려!”
심참봉의 자포자기의 이 말은 정주사에게는 뼈저리게 들렸다. 역시 불경기의 함정에 빠져 여러 해 동안 경영하여오던 정미업을 마침내 며칠 전에 폐쇄하여버린 심참봉의 요사이의 태토와 언사에는 어두운 자포자기의 음영이 떠돌았었다. 그는 폭리를 바란 바 아니었으나 드디어 오늘의 파산을 보고 정미소의 문까지 닫쳐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의 전도를 암시하는 듯도 하여서 정주사는 심참봉의 자포적 언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였던 것이다.
“내려오시오, 운송!”
“어서들 하시오.”
정주사는 억지로 사양하여버리고 침대 위에서 돌아누웠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생각이 피어올랐다.
―규모 무섭던 심참봉이 드디어 저 꼴이 되고 말았다. 나의 앞길은 며칠이나 남았을까. 멀지 않아 같은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니 심참봉과 나뿐만이 아니라 쪼들려가는 우리의 앞길이 모두 그럴 것이 아닌가. 요사이 종로 네거리에 나서면 문 닫히는 상점이 나날이 늘어감을 우리는 볼 수 있고, 손꼽는 큰 백화점에서도 종을 울리며 마지막 경매를 부르짖는 참혹한 꼴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다시 남촌으로 발을 돌릴 때에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곳에는 그래도 활기가 있다. 큰 백화점이 더욱 번창하여감을 본다. ‘히라나’ 와 ‘미쓰꼬시’ 의 대진출을 본다. 작은 놈은 망해가고 큰 놈은 더욱 커지며 한 장사가 공을 이루매 만 명 병졸의 뼈 말리는 격으로 수만의 피를 뽑아 몇 놈의 살을 찌게 하니 이것이 대체 무슨 이치인고.
정주사가 좀 센티볜털한 마음에 자기 자신을 비참한 경우에 놓고 이리저리 뒤틀어 여기까지 생각하여왔을 때에 밖에서 별안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낯선 젊은 양복쟁이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정주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마작하던 친구들도 조심스럽게 마작을 중지하였다. 맥주병이나 혹은 돈푼을 거는 관계상 그들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박태심이라는 사람 오지 않았소?”
양복쟁이는 마작놀이는 책하지 않고 마작하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 개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리어 자리를 일어서는 박씨의 얼굴은 어쩐 일인지 금시에 빛이 변하였다. 그것을 보는 친구들도 알지 못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나는 종로서에서 온 사람이오. 일이 좀 있으니 이 길로 바로 서에까지 같이 갑시다!”
양복쟁이는, 아니 형사는 어쩐 일인지 박씨를 날카롭게 노렸다.
평소에 말이 많고 선웃음 잘 치던 박씨는 이 자리에서 별안간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친구들은 똑똑히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방 안에서 떨면서 주저하는 박씨를 형사는 다시 노렸다.
“무슨 일인지 가봐야 알지. 제가 진 죄를 제가 몰라? 괴악한 사기한¹⁹ 같으니!”
파랗게 질린 박씨는 다시는 아무 말 없이 허둥지둥 두루마기를 걸치면서 뜰로 내려섰다.
그 잘 떠들던 박씨가 이제 고양이 앞에 쥐처럼 숨을 죽이고 형사의 앞을 서서 문을 나가는 것을 보는 친구들은 몹시 딱한 생각이 났다.
“대체 무슨 일일까?”
친구를 잃은 그들은 의아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 친구의 일을 궁금히 여겼다.
‘괴악한 사기한’ 이라니 그가 무슨 사기를 하였단 말인가. 하기는 며칠 전부터 그는 돈 백 원이 꼭 있어야 하겠다고 말버릇처럼 하여오기는 왔었다. 그리고 직업도 없고 수입도 없는 순진한 유민인 그가 대체 어떻게 나날이 살아왔는지 그것이 친구들에게는 한 수수께끼였었다. 오늘의 형사는 말하자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한 갈래의 단서이었던 것이다.
즉 기적적으로만 알았던 그의 생활의 배후에는 그 어떤 불순한 수단이 숨어 있었던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암담한 동시에 친구의 일이 자기들의 일과 다름없이 불안하여졌다. 사실 이 남아 있는 그들 가운데에 박씨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보증할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결국 마작꾼을 또 한 사람 잃었구나!”
심참봉의 자포적 탄식에는 헐려가는 이 계급의 운명이 역력히 반영되어 있는 듯하였다.
*
정주사는 그날 밤에 오래간만에 다방골 첩의 집을 찾아갔다. 비도 비려니와 이럭저럭 마음이 상해서 그는 이 며칠 동안 첩의 집과 발을 끊었던 것이다.
“왜 그동안 안 오셨어요?”
첩은 전날에 기생의 몸이었던 것만큼 아양과 애교를 다하여, 그러나 남편이 며칠 동안 자기를 버렸다는 것이 괘씸하여서 샐쭉하면서 정주사를 책하였다. 그러나 기실 속 심정으로는 퍽도 반가웠던 것이다. 그만큼 그날 밤 식탁에는 손수 그의 공과 정성을 다 베풀었다. 그의 어머니―인 동시에 어멈인―를 시켜서 사 온 고급 위스키 한 병까지 찬란한 식 탁 위에 올랐던 것이다.
“오늘 보험 회사에서 왔다 갔어요.”
식탁 옆에 앉아 그에게 술을 따라 바치던 첩은 문득 생각난 듯이 일어나 의걸이²⁰ 서랍에서 한 장의 종잇조각을 집어내어 남편에게 보였다.
“다 귀찮다!”
종잇조각을 펴본 정주사는 그것을 다시 구겨 옆으로 던져버리고 술잔을 쭉 들이켰다. 그것은 ‘일금 팔십오 원’의 생명보험료 불입고지서였다. 연전에 첩을 새로 얻었을 때에 그는 지금의 이 조촐한 와가²¹ 한 채를 사서 모녀에게 맡기고 홋홋한²² 살림을 따로 벌이는 동시에 첩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에 비싼 보험료를 치르면서 첩을 생명보험에까지 넣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와서는 모두 그에게 귀찮았다. 사실인즉, 팔십오 원이란 돈도 그에게는 지금 아까웠던 것이다.
“술은 그만 하시고 일찍 주무시지요.”
첩은 보험료에 관하여서는 더 말이 없이 얼근한 남편을 위로하면서 술상을 치웠다. 그리고 어머니는 건넌방으로 쫓고 안방에 두 사람의 잠자리를 툽툽하게 펐다.
정주사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옷 벗은 첩의 몸을 품 안에 안았다. 흥분의 절정에서 눈을 가늘게 뜬 첩은 법열을 못 이겨서 그의 몸 밑에서 정열이 벰같이 탄력 있게 굼틀거렸다. 그러나 정주사는 별로 신기한 기쁨과 새로운 흥분은 느끼지 않았다. 늘 맡던 그 살 냄새, 늘 느끼던 그 감촉, 늘 쓰던 그 기교, 그뿐이요, 그 외에 신기한 자극과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만 허락된 이 절대의 순간에서도 정주사는 오히려 사업과 재산 생각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던 것이다. 심참봉의 밟아온 길, 오늘 박태심이가 당하던 꼴, 그에게 닥쳐올 장래―술과 계집에 마음껏 취하여보―리라고 마음먹었던 이 밤의 정주사는 이제 품 안에 아름다운 계집을 안은 채 이런 무거운 가지가지의 생각에 천 근 같은 압박을 한결같이 느꼈던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깊어가니 고기잡이는 바야흐로 번창기에 들어갈 때이다. 늦은 가을의 도시기 ―그것은 여름 동안 해변에서 수백 리 떨어진 먼 바다에 흩어져 있던 정어리떼가 해변으로 와글와글 몰려 들어오는 때이니 정어리업자가 생명으로 여기는 일 년 중의 가장 중한 때이다. 모든 손해와 타격 가운데에서 한 줄기의 희망의 실마리를 붙이는 것도 곧 이때이다. 배 속에 퍼 담고 또 퍼 담아도 끊임없이 뒤를 이어 와글와글 밀려오는 고기떼, 그물이 모자라고 배가 모자라고 사람이 모자라는 판이니 해변 사람들의 흥을 가장 북돋우는 때이다. 그러나 대자연의 장난과 해류의 희롱을 그 뉘 알랴. 무슨 바람 어떤 해류의 장난인지 이해의 바다는 도시기에 이르러도 고기떼를 해변으로 와글와글 밀어 들이지는 않았다. 여러 해 동안 정들었던 정어리 영업자들을 바다는 돌연히 배반하여버렸던 것이다. 바다는 푸르고 하늘은 유유하고 파도는 찰락거리고―모두 여전하다마는 포구의 활기만은 여전하지 않았으니 지나간 해의 가을같이 활기 있게 들볶아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언덕 위 공장에서는 가마가 끓고 고기가 짜이고 해변 모래밭에서는 정어리 뜯는 소리가 끓어오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도시기의 활기 그것은 아니었다.
애타는 마음에 해변에 나가지 않고 공장 사무소에 앉은 채 해변을 바라보는 공장주의 가슴에는 일 년 동안 받은 수많은 상처가 이제 또다시 생생하게 살아 나왔다.
―시세 폭락, 폭풍우, 노동자들의 파업, 활기 없는 도시가…… 그중에서도 폭풍우와 도시기의 천연적 대세에서 받은 상처보다도 시세 폭락과 파업에서 받은 상처는 더욱 컸던 것이다. 강선생을 괴수로 일어난 수백 노동자의 파업 에 공장주는 사업의 불리를 각오하면서도 세부득 한 걸음 물러섰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이 굳었고 이 포구에서는 불시에 그들을 대신할 노동자들을 끌어 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별수 없이 그들의 세 가지의 요구 조건은 벼락같이 관철되고 파업을 일으킨 다음 날부터 노동은 다시 활기 있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공장주는 파업에서 받은 경제적 타격을 애석히는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제 파업이라는 행동을 다른 의미, 다른 각도로 해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단결에서 생기는 위대한 힘! (중략) 두려운 한편 부러운 힘이다……
또 한 가지 그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시세 폭락의 배후에 숨은 농간의 힘이었다. 불같이 닥쳐온 어유 시가의 대중없는 폭락은 서구 ‘노르웨이’ 근해에서만 잡히는 고래 기름의 풍족한 산액이 조선 정어리 기름의 수출을 압도하는 자연적 대세라느니보다 실로 일본에 있는 대자본의 회사 합동유지(合同油脂) 글리세린 회사의 임의의 책동인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이 폭락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도(道) 당국과 총독부 수산과에서는 각각 기술자를 보내어 실정을 조사시키고 정어리업 대표들을 참가시켜 어비제조 간담회니 폭락 방지 대책 협의회니 등을 열었으나 결국 정어리 업자들에게는 그럴듯한 유리한 결과는 지어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대재벌의 힘, 무도한 것은 이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노동자들이 그를 미워한 것같이 그는 이제 이 대재벌을 미워하였다. 노동자에게서 미움을 산 그는 실상인즉 대재벌의 손에 매여 있고 꿀려 있는 셈이었다. 위에서는 대재벌, 밑에서는 노동자의 대군, 이 두 힘 사이에서 부대끼는 그의 갈 길은 어디이던가. 위 아니면 밑, 이 두 길 중의 한 길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윗길을 못 밟을 바에야 그의 길은 뻔한 길이 아닌가.
이렇게 명상에 잠기면서 한결같이 해변을 바라보는 공장주의 눈에서는 이제 눈물이 푹 솟았다. 그러나 그것은 감상의 눈물도 아니요, 분함의 눈물도 아니요, 감격과 희망의 눈물이었으니 해변에서 떼를 짓고 고함치며 노동하는 수많은 노동자들ㅡ그 속에서 그는 새로운 철학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는 사업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그다지 원통치는 않았다. 더 큼 마음과 넓은 보조로 앞길을 자랑스럽게 밟으려고 결심한 그가 이제 흘리는 눈물은 흔연한 감격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바른길을 뙤어준²³ 이태 동안의 해변 생활, 그것은 대학에서 배운 사업의 이론과 비결 이상 몇 곱절 그에게 뜻있는 것이었다.
강선생! 그는 오래간만에 문득 강선생 생각이 났다.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오늘 밤에는 서울로 떠날 것이다. 떠나기 전에 강선생과 만나 이야기라도 실컷 해보겠다는 충동을 느낀 그는 이제 자리를 일어나 눈물을 씻고 사무소를 나갔던 것이다.
재동 사랑에서 한 사람 두 사람 줄어가는 마작꾼 숲에서 정주사가 흩어지는 마작 쪽에 ‘헐려가는’ 철학을 절실히 느낀 것은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
-끝-
2016년 6월 13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