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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누구 짓인가
이계홍 작가, 언론인2019. 9. 27. 13:42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5>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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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귀국선 우키시마호 (1)
교토현 가라쓰 만에 면한 조그만 어촌마을.
새벽이면 짙은 안개가 해적선처럼 소리없이 스며들어 바닷가를 휘감고 있고, 물결소리마저 잠잠했다. 멀리 마이쓰루(舞鶴) 군항에는 산덩이 같은 군함들이 웅크리고 있고, 제비처럼 날렵하게 생긴 함선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저만치 멀리 만의 끝쪽에 굴딱지처럼 낮게 엎디어 있는 어촌은 딴 세상처럼 조을 듯이 평화롭다.
마이쓰루만 시모사바가 앞바다는 절벽같은 산이 바다에 맞닿아있으나 그곳으로부터 이어진 이십 리쯤 떨어진 마을 바닷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활처럼 길게 뻗어있다.
미후라 상은 새벽이 되자 여느때처럼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새벽 바닷가를 거니는 것은 소년시절부터 노인이 된 지금까지 일관된 그의 습관이었다. 긴 해안선을 따라 몽환처럼 펼쳐진 안개낀 바다를 거닐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때로 바닷가로 밀려온 고기들을 주울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좋았다. 어떤 때는 상어가 모래톱에 올라와 숨을 할딱거린 경우도 있는데, 어느핸가 돌고래를 한 마리 건져올린 적도 있었다. 그걸 바라고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부수입도 간간히 생겨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백사장을 걷는 행복감에 젖었다.
이날도 그는 멀리 마이쓰루 산 중턱에 솟은 가라쓰성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머리를 숙여 절하면서 행운의 하루를 바라고 바닷가 모래톱으로 나갔다. 마이쓰루 군항은 학이 날개를 펴고 춤을 추는 지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만 깊숙이 자리한지라 요새였고, 미항이었다. 청일전쟁 승리 배상금으로 건설한 항구였다. 요코스카(橫須賀), 구레(吳), 사세보(佐世保)와 함께 일본 4대 군항 중 하나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나 비밀리에 운영됐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과도 별로 인연이 닿지 않은 항구였다.
미후라 상은 모래밭을 걷다 말고 저 멀리에 떠있는 검고 흰 물체를 발견했다. 큰 물고기 같은 물체들이 바닷가에 밀려와 모래밭에 얹히거나 얕은 바닷물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무슨 고기가 저렇게 떼로 밀려왔나. 그는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곧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물체는 하나같이 사람들의 시체였던 것이다. 다가갈수록 어린아이, 아녀자, 나이 먹은 노인은 물론이고 중년노무자 복장의 사체들이 바닷물에 밀려와 있었다. 밤새 떠밀려온 모양이었다.
바다 가운데서 파도에 출렁거리며 떠밀려오는 시체도 있었다. 미후라 상은 탄식하듯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겁이 덜컥 나 돌아서서 마을을 향해 뛰었다. 뒷골이 땅겨서 그는 초주검이 된 상태로 달려 마을의 초입 공회당에 이르러 외쳤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빨리 나와 보소! 바닷가에 시체들이 널려있다!”
절규에 가깝게 외치자 아침을 준비하던 아낙네들이 뛰쳐나오고 어망을 손보던 어민들이 뛰어나왔다.
“바닷가, 바닷가!”
그는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하고 같은 소리만 외쳤다.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모두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에 넋을 잃었다.
“저 아이는 엄마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죽어있군요.”
“저쪽 보세요. 남정네가 여자를 끈으로 동여맨 채 밀려와 있어요.”
“어허,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어허....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왜 이런 변고를 당했을까요.”
“배가 난파된 게 아닐까요?”
“이 많은 사람들이 탔다면 작은 배가 아닐텐데, 그런 배가 어찌 사고를 냈을까요. 바람도 드세지 않았는데....”
“차림새들이 모두가 초라하군요. 불쌍해서 어쩔까나.”
저 멀리서 물결에 떠밀려오는 것이 거적대기거니 여기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머리가 물위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시체들이었다. 다른 방향으로 떠밀려가는 사체도 보였다.
“건져내서 혼이라도 달래주어야지요. 불쌍해서 어찌 그냥 두겠소.”
마을 사람들은 시체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체는 200구가 넘었다. 그들은 해안선 한쪽에 시체들을 모아두었다가 소각했다. 여름의 한 복판인지라 시체 썩는 냄새가 고을에 진동해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래도 일부 성한 사체들은 태우지 않고 이불 호청이나 삼베, 거적으로 덮었다.
행정 당국은 이때까지 얼굴을 내비친 사람이 없었다.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모습이 뚜렷했다. 나라의 패망과 함께 그동안 잘 짜여진 조직체계가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패닉상태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중절모를 눌러쓴 남자가 이시하라 겐조 상 집 마당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거리낌없이 들어서는 것으로 보아 이 집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뒤에는 얼굴이 새까만 청년이 륙색을 메고 뒤따르고 있었다.
“이시하라 상 계십니까.”
이시하라 상의 집은 젊은 사관생도들이 빠져나간 뒤라서 집안은 썰렁할 정도로 적막했다. 그래서 중절모의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컸다. 서재에 묻혀있던 이시하라 상이 귀를 기울이다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강태선씨 아니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이시하라 상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래, 때맞춰 잘 왔소. 도선(渡船) 때문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서 들어오시오.”
그러나 강태선은 마루로 들어서지 않고 엉뚱한 얘기를 했다.
“선생님, 난리가 났습니다. 배가 두 동강이가 났습니다.”
“배가 두 동강났다고? 어디서?”
강태선이 말을 잇지 못하더니 뒤따라온 청년을 향해 말했다.
“현용대씨가 인사하고 말씀하시게. 말씀드리던 이시하라 선생님이시네.”
청년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강 사장, 무슨 일이 있었소?”
이시하라 상이 답답해서 물었다.
“허허.”
강태선은 돌하르방이란 별명을 가진 제주도 출신 사업가였다. 소형 선박을 가지고 제주-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하고 있었지만, 한때는 제주-오사카 항로를 운항하던 구룡환 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
제주와 오사카 간의 직항로는 황금항로였다. 독점 항로라서 일본인 선박업자는 멋대로 승선료를 인상하는 횡포를 부렸다. 제주도 사람들은 서울보다 오사카·고베·후쿠오카·시모노세키를 더 빈번하게 내왕하고 있었다. 본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섬놈이라고 업신여기고 차별이 심했다.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제주도로 부임해온 관리들도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주민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제주는 육지의 또다른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그런 차별의식이 몸에 밴 그들은 본토 대신 일본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본도 차별이 있었지만 육지 사람이나 똑같이 차별을 받아서 상대적 박탈감은 적었다.
서울 한번 가려면 목포나 부산으로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열 몇 시간을 가야 했지만 일본땅은 배 한번 타면 도착하니 이웃과 같았다. 마음의 거리도 육지보다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장사가 잘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생업이 돼오다시피 했던 제주-일본 간의 중간무역이 활발했다.
도민들 중 상당수가 일본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들은 항만 하역작업 등 노가대로, 여성들은 방직공장, 과자공장, 해녀는 물질을 하거나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제주도의 어획물, 즉 방어 감성돔 해삼 멍게 낙지 문어 등 생물을 일본에 내다 팔고, 대신 신발, 의복, 모자 등 생필품을 들여와 고향에 팔았다. 일부 선박들은 목포 여수 마산 부산까지 드나들며 중간무역을 했고, 여객선을 이용한 보따리장수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정기여객선이 배 삯을 갑절로 올려버렸다. 독점사업이라서 꼼짝없이 선사가 요구하는대로 승선료를 내고 일본을 드나들 수밖에 수 없었다. 강태선은 불만을 가진 제주도민들과 함께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여객선 구룡환을 취항시켰다. 값은 일본인 선박보다 반값을 받았다. 그러자 일본인 선박업자가 승선료를 더 인하해버렸다. 구룡환을 도산시킬 목적으로 가격경쟁을 한 것이었다. 제주 도민의 자치선은 적자운영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임대기간도 연장되지 않았다. 결국 이년만에 도산하고 일본인 선박의 독점운항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본인 업자는 승선료를 다시 배 이상 인상해버렸다.
강태선은 조합원들을 이끌고 오사카 부두의 일본인 선박회사를 습격했다. 그는 사장을 반죽음이 되도록 두둘겨 패고, 사무실 집기를 부수는 등 분풀이를 했으나 현장에서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고 감방신세를 졌다. 이때 이시하라 상을 만났다.
강태선은 이시하라 상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만민 평등을 주창하는 지식인이었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감옥을 사는데 일가붙이가 없는지 옥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강태선은 면회온 고향의 처녀를 소개해주었다. 제주 처녀 양영자는 군수품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다. 이시하라 상은 그녀와 옥중결혼 했다.
만기 출소한 뒤 이시하라 상은 사상계몽운동을 폈고, 강태선은 소형선박을 이용해 제주-일본을 오가는 조그만 무역 사업을 폈다. 이시하라는 무명 사상가이자 철학자였지만 어떤 누구보다 조선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고마워서 강태선은 여윳돈이 생기면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우키시마호라는 해군 수송선이 폭침되었습니다. 교토 인근 마이쓰루 군항에 입항하다가 폭발했답니다. 조선인 승선자가 적게는 8,000명, 많게는 10,000명이라고 합니다.”
“뭣이라고? 팔천명 내지 만명이라고?”
“그렇습니다. 승선자 대부분 징용자나 그 가족이라고 합니다. 이천 명 정도만 어찌어찌 살아남고, 육천 내지 팔천 명이 바다에 빠져죽거나 불에 타거나 배에 갇혀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언제쩍 일이요? 사고가 났다면 방송에도 나고, 신문에도 나야하지 않겠소?”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이시하라 상은 거푸 물었다.
“열흘 전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왜 열흘 전 일이 이제야 알려졌소?”
“보도관제가 된 것이지요. 어제 신문에 조그맣게 났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찾아와서 알게 됐고요. 제주도가 고향인 청년입니다.”
“나쁜 놈들!”
이시하라 상이 누구에겐가 저주의 눈빛을 보내며 한숨을 꺼져라 토해냈다. 현용대는 마치 잘못인 것처럼 목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사고가 열흘이 지나서 신문에 나다니. 그게 말이 되오? 이건 분명 흑막이 있는 것 같소.”
“그렇습니다. 세계 해난사고 사상 최악의 사고가 났는데도 쉬쉬하고 있으니, 그리고 가만 있으라... 그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죽었는데도 가만 있으라, 세상에 알려지는 것 귀찮으니 가만히 있으라, 구조하지 않은 것이 들통나니 가만 있으라, 일본인 피해가 아니니 가만 있으라... 이거 말이 됩니까. 희생된 사람들이 모두 귀국선을 탄 조선사람들이라는군요.”
“천벌을 받을 놈들!”
이시하라 상이 무릎을 꿇고 한동안 기도를 올렸다.
교토현 마이쓰루 군항 앞 해상에서 조선인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것은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30분경이었다.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군항에서 출발한 지 이틀만이었다. 배가 폭발해 선체가 심하게 꿀렁거리며 요동쳤다가 화염에 싸여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은 시각은 그로부터 세시간 반 후인 밤 아홉시경이었다.
배가 완전 침몰하기까지 세시간 여 시간이었다면 거리상으로 700m쯤 떨어진 마이쓰루 군항에 주둔해있던 일본군 타이라 해병단 병력이 출동해 조난자를 구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태풍이 분 것도 아니고,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물위에 떠있기만 하면 보트를 저어가 조난자를 건져올릴 수 있었다. 군이 구조 매뉴얼대로만 움직였다면 희생자를 훨씬 더 줄일 수 있었다. 민간 어선들이 노를 저어가 조난자를 구하고, 외출나온 수병과 어촌마을 청년들이 작은 배를 타고 가서 구했지만 마이쓰루 군항에 주둔해있던 타이라 해병단의 구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조 명령이 하달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회피한 인상이 짙었다. 그러나 구조 명령이 떨어지든 떨어지지 않든, 아군이든 아니든 난파선을 먼저 구해놓고 보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해방이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 귀국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기쁨에 젖어 오미나토 군항으로 몰려들다 보니 정원이 훨씬 초과되었다. 소문을 듣고 홋카이도, 사할린 4개 도서에서 온 징용자들까지 포함되어서 승선자는 배에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승선자들이 밑창까지 빼곡이 들어찬 배 안은 한 여름 더운 열기와 지독한 땀 냄새로 숨막힐 지경이고, 먹고 자는 것, 배설에까지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불편이야 수많은 날의 강제노역에 비하면 하잘 것이 없었다. 그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희망과 환희에 젖어 그런 불편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
귀국자들은 배가 부산으로 가는지 원산으로 가는지 행선지를 알지 못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확신만으로 기쁨에 젖었다. 해군 승조원들의 말이 섞갈렸어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에 가슴 부풀어 있었는데, 항해 이틀만에 폭발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뒤늦게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우키시마호는 연합군이 해난 사고가 잦다는 이유로 연안 항로로 운항할 것을 지시해 마이쓰루 군항으로 잠시 들어가던 도중 해상에 설치한 미군 기뢰에 의해 폭발했다. 이 사고로 한인 승선 인원 3,735명(일본 해군 255명) 중 524명이 사망하고, 일본인 희생자는 해군 25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승선 인원이 전연 체크되지 않아 그 숫자를 믿을 근거가 없었을 뿐아니라 사고의 편린이라도 제공하는 행정책임자 하나 없었으니 누구나없이 장님이 어둠속을 헤매는 꼴이었다. 항로 변경 이유, 폭발(폭침) 원인, 승선 인원과 희생자 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으니 의혹만 증폭되었고, 신문 보도도 간단히 해난사고가 났다는 정도만 나올 뿐이었다. 당시 보도 통제는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무한 허용되었고, 패망했어도 그 기조는 유지되었다. 일본 당국의 발표가 미진한 것이 많았지만, 의문을 품거나 후속 보도로 진상을 밝히려는 신문사는 없었다.
우키시마호가 운항 허가를 받은 것은 1945년 8월 19일이었다. 일본 해군성 수송본부로부터 출항 허가를 받은 오미나토 해군경비부는 출항준비를 서둘렀고, 현지 한인과 가족들에게 “부산으로 가는 귀국선은 이번 뿐이다. 승선하지 않은 조선인은 앞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고, 배급도 없을 것이다“라고 가두방송하면서 귀국선에 모두 승선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인 가족들은 앞뒤 살펴볼 것없이 다투어 배에 올랐다.
1945년 8월 22일 19시20분 일본 해군 운수본부장이 우키시마호 선장에게 내린 ’항행금지 및 폭발물처리’ 관련 전보 문서에 따르면, △1945년 8월 24일 18시 이후 출항중인 모든 배는 항행 금지하라 △각 폭발물의 처리는 항행 중인 경우 무해한 해상에 투기하라 △항행하지 않은 경우 육지 안전한 곳에 폭발물을 넣어두라(격납고)”고 지시했다.
우키시마호는 폭발물을 처리하지 않은 채 8월 22일 밤 10시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항했다. 그리고 8월 24일 교토 마이쓰루 만 해상에서 대형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사고가 난 지 47년이 지난 1992년 김문길 우키시마호폭침 한국인희생자추모협회 고문은 한 일본인으로부터 우키시마호 ‘발신전보철(發信電報綴)’이라는 일본 방위청의 문서를 받아보고, 이를 토대로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다.
김 고문은 “그 발신 전보철에는 (선내에)폭발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유족들이 한결같이 부르짖는 폭발설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우키시마호 유족 등이 1992년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진행된 재판과정에서 증거 자료로 제출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 문서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배상 소송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판결로 결론났으나 이와 관련된 여러 소송은 현재 진행중이다.<http://blog.daum.net/ksk3609/12400088/일부 인용>
세계 해난사고 사상 최악의 우키시마호 폭발 사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극비의 기밀 사항처럼 무덤속 같은 침묵에 잠겨버렸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은 수명을 다했고, 살아있다 하더라도 어떤 상처로, 그리고 감추는 자의 치밀한 회피책과 관련 자료를 찾지 못해서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혔다. 뜻있는 사람들이 밝혀낸다고 해도 진실의 한 조각일 뿐, 전모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 최악의 해난사고는 1912년 4월 14일 밤 11시40분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뉴욕 항으로 가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 뉴펀들랜드 해역을 항해 중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40분 만에 침몰한 사고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는 그보다 최소 네 배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엄청난 선상 폭발사고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해방공간의 서울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피해상 어떤 한 가지도 풀어줄 능력과 의지가 없었다. 미군정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해방 정국 관리 대책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나라의 주인인 지도자들은 협상자로 나서지 못한 채 엉뚱하게 서로 피투성이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한반도 운명의 주인이 남의 잔치집에 온 손님처럼 신생조국의 설계 테이블에 나서지 못하고 궁벽하게 싸우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키시마호 폭발사고 같은 최악의 해난사고가 났어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조선총독부 오카 정무국장은 헛웃음을 쳤다. 먹을 것 없는 생선뼈다귀 하나 놓고 싸우는 고양이 꼴을 보고 가소롭기만 했다. 나라가 패망하던 날, 기를 쓰고 도망가려고 했던 지난 날의 일들이 창피할 정도였다. 쩔쩔맬 이유라곤 없는데 놀라서 허둥댔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반도가 두 토막이 났다. 반신불수의 처지에 서로 으르렁거린다. 이런 상황을 관리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우키시마호 같은 대형 해난사고도 묻어버려도 끄떡없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미군 태평양사령부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너무도 행복한 귀국길이었다.
“조선은 미 제국주의 식민지가 아닌가. 우리 식민지로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분단도 막고, 그대로 영토를 보존했을텐데 반 토막이 나버렸으니 병신이 돼버렸어. 아마도 우리가 지배했던 시절을 그리워할지 모르겠어. 종당에는 지들끼리 내전 속에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질 것이고....”
오카는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속으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오민균과 조병헌, 장지성이 외출에서 돌아오자 우키시마호 폭침 소식을 들었다. 시내에서 소문을 들었지만 배에 직접 승선했던 현용대를 만나고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배가 어느 크기입니까.”
“5천톤(4,740t)급 일본 해군 군함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조선인들의 폭동을 우려해 조선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던 중 일어난 사고라면서요?”
“내막은 잘 모릅니다. 다만 고국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허겁지겁 달려가 승선했을 뿐입니다.”
사고를 당한 당사자는 사고의 내막을 잘 알지 못한다. 보고 느낀 조각만 아는 정도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승조원이 있을 리 없고, 은폐하는 것을 능사로 알았기 때문이다.
“연안을 타고 남하하면 되는데 왜 마이쓰루 군항으로 들어갔습니까.”
“승조원들이 일본 연해를 타고 남하한 것은 유류와 물,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배가 출항하게 되면 생필품은 미리 준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고 원인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만내(灣內)에 부설한 기뢰와 충돌해서 폭침되었다고 일본측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배에 있는 폭탄 등 물질을 방치해서 일어난 폭발설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다 책임이 따르죠. 현용대씨, 현장에 폭발물 같은 게 없었습니까?”
“선실이 비좁아서 갑판에 올라가 있었지요. 한 수병이 배 밑창까지 전기선이 늘어져있는 걸 보고 절단하려고 했지요. 얼기설기 어지럽게 깔려있는 전기선이었습니다. 그런 얼마후 배가 폭발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개새끼들!”
조병헌이 비분강개했다. 보나마나 빤한 것이다. 폭탄을 탑재하고, 위험물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징용자를 방치한 것이다.
일본은 항해 지휘부가 남하하던 배의 진로를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정선(停船) 명령에 따른 것이며, 배가 침몰한 것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 때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이중 사망자 524명, 실종자 미상으로 발표했으나, 조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은 바닷가에 떠밀려온 시신만도 1,000구가 넘는다고 했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2,000명 정도였으며, 승선자는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정확한 숫자가 잡히지 않았으나 배 밑창까지 빼곡이 들어찬 것을 보더라도 최소 8,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승선자 명단이 없었습니까?”
“워낙 많이 밀려드니 명부 작성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나 역시 명부를 작성하지 않았고, 승선하라고 하니까 탔을 뿐입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운항 시 한두 번의 위험신호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이상징후가 없었나요?”
이시하라 상이 물었다.
“배가 오미나토 군항에서부터 이상한 말이 들려오긴 했습니다. 배가 조선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요. 조선인들은 며칠전부터 부둣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천여 명에 달했지요. 숙박업소는 만원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뒷골목에 골판지 박스를 깔아놓고 기다린 것입니다. 배를 놓치면 영영 고국에 못간다는 말에 모두들 그렇게 오미나토로 나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폭발했던 상황이 그려지지 않나요?”
“배가 불쑥 물 위로 치솟았다가 가라앉을 때, 고래가 물 위로 솟았다가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본능적으로 사고다 여기고, 마스트로 올라가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다에 빠졌는데 물이 회도리치는 지점에서 대부분 수장되었습니다. 나도 빨려들어가 허우적거리는데 요행히 물속을 박차면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동안 익힌 수영 솜씨가 나를 살려냈습니다. 바다에 깔린 까만 기름 띠를 뒤집어쓴 채 헤어나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육지로 올라오자 숲속에서 지키고 있던 일본 해병이 우리를 체포했지요. 생존자들은 모두 마이쓰루 군항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승조원들은 구조 작업을 펴지 않았습니까.”
“승조원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리 보트를 타고 마이쓰루 군항으로 들어갔지요.”
이시하라 상이 나섰다.
“승조원은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기본 수칙 아닌가? 침몰한 배에서 그릇을 건져 팔아먹는 자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지지 않다니. 세계 최강의 일본 해군이 이건 말이 안되지. 그런데 총각은 어떻게 해서 아오모리까지 진출했소?”
“홋카이도로 끌려가서 오미나토 비행장에서 강제노역했습니다. 3년 동안 일했지요. 그곳에서 고향 출신 해녀를 만났는데 지금 그 사람과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그보다 다섯 살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아오모리 해안에서 해녀로 일하던 고길자가 귀국선의 소식을 듣고 오미나토 부둣가로 나왔다. 현용대는 그녀가 메고 있는 테왁을 보고 단박에 고향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이 재질인 테왁은 다른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생김새를 가진 제주 해녀만의 부력(浮力) 기구였다. 이들은 며칠 함께 지내는 사이 고향에 가서 살림을 차리기로 약속했다.
“길자씨도 헤엄쳐서 나왔는데 지금은 수용소에 갇혔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사고가 났습니다. 수십 명이 폭사했습니다.”
“뭐라고? 거기서도 사고가 났다고?”
“네. 생존자들은 모두 타이라 해병병단 부로수용소에 수용되었지요. 수용인원은 천여 명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인 모를 폭발사고가 났습니다. 30여명이 폭사하거나 불에 타죽고, 부상자도 오십 명이 넘습니다.”
이 사고는 우키시마호 폭침사고에 묻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사고 또한 컸다.
수용소 주변에는 다이나마이트, 총포탄 등 위험물질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것이 관리되지 않았다. 절도있다는 일본군의 기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대는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절규가 수용소를 울리는데도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선 병사들이 없었다.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몸을 건졌는데 육지에서 불에 타 죽을 것같았다. 그는 식당으로 쓰는 반달집(퀀셋)으로 달려갔다. 식당에는 고길자가 취사반에 투입되어 있었다. 고길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용대씨 빨리 나가서 이 소식 알려. 돗도리 항에 고향사람들이 살고 있어. 이러다 다 죽어.”
현용대는 밤이 되자 뒷산 절벽을 타고 넘어 수용소를 탈출했다.
“해난 사고에 비해 부로수용소 화재는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본놈들은 조선인을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된다는 태도야. 그 새끼들은 패전의 책임회피를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나쁜 새끼들이 책임회피하는 거야.”
조병헌은 씁쓸한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약소민족의 수모와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이시하라 상이 말했다.
“일본군은 생화학무기로 생체 실험을 하고, 학살 고문 따위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이오. 그자들은 어떤 짓도 하는 자들이오. 방치로 학살을 방조하는 것이오. 나쁜 놈들. 731부대나 난징대학살은 잔혹성의 한 조각일 뿐, 그보다 더한 야만성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소. 일본의 막부 이후 살육의 시대로 접어든 건 여러분들이 잘 알겠지. 인륜의 깊이가 없는 왕이란 자는 전쟁 장난만 하다가 신이 되었는데, 그것이 이번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을 맞은 원인이 되었소. 그것으로 아시아에서 저지른 광란의 범죄행위를 갚기엔 너무나 가벼운 징벌이오.”
“존경스럽습니다.”
이성유가 감격한 나머지 고개를 숙였다.
“승선자는 여전히 노예이고, 그런만큼 미물처럼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좋다는 중세 영주의 못된 주인의식이 그들에게 있소. 하인 하나 죽여도 끄떡없다는 사고방식. 승선자 모두 순박하고 무지한 그들의 소유물이니까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괜찮다는 태도요. 조선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요. 지구적 재앙을 당하고도 침묵하다니, 이것이 지도자들인가? 제국주의자자들은 앞으로 계속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할 거요. 그런 식으로 식민지 관리를 해왔으니까. 언론은 협력자요. 조선은 규명을 요구할 힘도 없고, 지도자도 없으니 경황없이 넘어갈 거요. 억울한 사람들을 대신할 지도자가 없다는 게 더큰 충격이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생명 보호할 수밖에 없소.”
이시하라 상이 갑자기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얼굴을 찡그렸다. 수형생활 때부터 바늘 같은 것이 뇌를 콕콕 찌르는 증세가 있었는데, 충격을 받으면 증세가 재발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소.”
그가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수형생활 얘기를 할까요?”
그는 도피생활 중 어느날 몰래 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젊은 아내는 며칠씩 사라졌다가 숨어들어온 그를 향해 의심한 나머지 물었다.
“당신 도둑질 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었군요? 난 도둑과 살 수 없어요. 신고할 거예요.”
“말해줄 수 없지만, 나는 아니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그는 황망히 집의 뒷담을 타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남편 어디다 숨겼나?”
“몰라요.”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남편 행선지를 대지 않으면 잡아간다.”
실제로 경찰은 그녀를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가두었다. 일주일, 또는 열흘동안 감금되었다. 경찰은 이시하라를 잡기 위해 어린 아내를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그는 갇힌 아내를 끄집어내기 위해 자수했다. 그리고 3년형을 언도받고 만기 출소했다. 벌써 세 번째 수형생활이었다.
“경찰국가의 통치 기법이 뭔지 알겠소? 민심이 불안하면 늘 양심세력을 역도로 몰아 일망타진 캠페인을 벌이지. 민중이 깨어난다 싶으면 더 큰 시국사건을 만들어 위협하오. 그렇게 폭력적으로 인민을 묶소. 공포감의 야만이 시중을 지배하오. 그러나 관리하고 싶지 않은 것은 또 방치하지. 우키시마호도 그렇고, 부로수용소 폭발사건도 마찬가지요. 노예를 얌전히 실어다준다는 예의는 그들에게는 없지. 패망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노예를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게 불쾌하지 않겠소?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 해군이 이런 사고를 냈다는 것은 믿기지 뭘 말하겠소. 귀찮으니 버린다는 것이오. 방관하고 침묵하면 이런 만용은 반복될 것이요.”
“원인이 규명되고, 책임소재가 분명해지고,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고, 피해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따져야지요.”
오민균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만, 저들은 벌써 은폐에 나섰소. 한줄 난 신문기사 보면 알지 않겠소? 자, 봅시다. 일본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의 신이오. ‘신의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는 일본국 헌법 제1조에 있소. 신이라니?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모욕적 상징조작 아니겠소? 그는 수백 만명을 희생시킨 전범자이자 사디스트일 뿐이오. 나는 그런 자를 용납할 수 없소. 내 양심이 가르치는 바, 따를 수 없소. 우키시마호 침몰사고를 보고 더욱 절실하게 느꼈소. 그는 광인이오. 그런 자에게 열광한다? 열광의 대가가 패망의 길로 쳐박았는데도 열광한다? 천황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상징조작으로 식민지 백성을 끌어다 짐승 부리듯 해왔소. 사전적 정의로 말하면, 주어진 자기 땅에서 나뉨없이, 다툼없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시아 공영권 아니겠소? 그런데 전쟁목표를 달성하는 소모품으로 사용했단 말이오. 그래놓고 전쟁이 효용성이 사라지니까 나 몰라라 한단 말이오. 어디서 무슨 사고가 나고, 목숨을 잃어도 관심 사항이 아니오. 이제는 그들 자신의 무지로 책임을 돌리오. 왜 그들이 무지한데? 교육받을 기회 박탈하고 축생처럼 부려먹은 책임이 없소? 한반도의 수난은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오. 만행이 자행됐음에도 상응한 조치와 진상조사 하나 요구하지 못하는 무지가 생겼소. 지금이라도 눈을 뜨지 못하면 계속 당하게 되어있소. 현재 조선의 지도자들 보시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시대의 장님들이오. 결국 젊은 여러분이 나설 수밖에 없소.”
그의 거침없는 말 가운데는 이념과 국경이 없었다. 조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생도들은 확인했다. 그가 더 조선인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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