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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성(安興城) / 태안(泰安)
☞ 충청남도(忠淸南道) 태안군(泰安郡) 안흥성(安興城)
▶ 안흥성(安興城) 위치
안흥성(安興城) 위치 <참고자료>
안흥성(安興城)은 충청남도(忠清南道) 태안군(泰安郡) 근흥면(近興面) 정죽리(程竹里) 해안의 안흥성마을 뒷산에 있는 진성(鎭城)으로, 처음에는「안흥진성(安興鎭城)」이었으나 후에 「안흥성(安興城)」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진성(鎭城)이란 주로 수군(水軍)들이 전투를 위하여 해안 근처에 쌓는 성곽으로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로 태안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태안군은 전체가 서해를 향해 돌출되어있어 그 자체가 반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만큼 육로 교통보다는 해로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삼남(三南: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세곡선(稅穀船) 및 조운선(漕運船)이 안흥성(安興城)에 정박하거나 안흥량(安興梁)을 지나 개경(開京: 개성)과 한양(漢陽: 서울)으로 운송되는 조운(漕運)항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315km의 근거리로 뱃길이 가장 빠른 곳이었던 안흥성(安興城)은 조선시대 중국 명나라에서 오가는 사신을 맞이하고 환송했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이와같은 지형적 여건때문에 고려, 조선시대에는 해구(海寇) 출몰이 잦았습니다. 당시 해적이나 왜구(倭寇)들의 피해가 가장 심하였던 충청, 전라, 경상 지역에는 진성(鎭城)이 각 해안의 중요 장소에 설치되었습니다. 안흥진성(安興鎭城) 역시 서해안을 지키는 관문인 안흥량(安興梁)에 위치하며 남, 서, 북면[현재는 간척지]이 바다와 접해 있어 서해가 훤히 내다보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要衝地)로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 안흥량(安興梁)
안흥량(安興梁) <참고사진>
안흥량(安興梁)은 충청남도 태안군 신진도(新津島)와 마도(馬島)를 거쳐 관수각(官首角)과 가의도(賈誼島)에 이르는 해역(海域)을 말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예로부터 난행량(難行梁: 선박의 통행이 어려운 곳)이라 불려왔는데 바닷길이 험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여러 번 뒤집혔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쳤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한편 잦은 난파사고로 인해 무사 항해를 비는 뜻으로 한동안 안행량(安行梁)으로도 불렀다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원래대로 안흥량(安興梁)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지 언론기사
안면곶 착항의 기원
원래 안면도는 태안의 백화산을 발원으로 한 지맥이 남으로 치닫으면서 서편으로는 황해 대양과
동편으로는 천수만을 끼고 낮은 구릉으로 굽이굽이 130리 길 안면곶의 남단 영항까지 뻗어내린
안면반도였다.
지금으로부터 약350년전인 조선조 제 16대 인조임금 때 그 안면도의 2/5지점이자 가장 좁은
목이 되는 이른바 굴항포(堀項浦) 또는 별칭 ‘목탄개’라는 곶(串을) 잘라 섬이 되게 하였다고한다.
다만 이런 기록은(서산대관)이나(서산군지)에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즉, 안면도의 착항은 영호남의 세곡선 운항에 편의를 도모하여 조선조 인조때에 영의정
김류가 착통케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연하고도 희미한 기록과 전언은 뜻있는 이곳 주민으로
하여금 항상 회의를 갖게 하였다. 굴항포(목딴개,목탄개)의 착항 내력, 즉 착항 연대, 착항 위치
착항공사과정 등의 문제가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굴항포 운하가 역사적 흔적 남아
원래 안면곶이었던 것을 삼남지방의 조곡을 운반하던 조곡선들이 풍랑에 유실되는 쌀과 곡물 등이 많이 유실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장 조곡선의 난파가 심했던 지역인 태안반도의 안면곶을 굴착 섬으로 만든다.
조선 인조 16년 (1638년)에 안면곶을 착항해서 지금의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의 창기리 서북단의 판목 불탄개, 옛지명 굴항포(掘項浦)를 착항했다는 조선왕조 신록에 기록이 나타나 있다.
안면도는 육지와 이어졌던 태안군 남면 신온리의 마을 남단과 안면도 창기리의 판목 마을을 인공으로 잘라서 만들어진 인공섬인 것이다. 지금도 천수만 내쪽으로 운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면곶 굴항포 운하 공사는 선조 당시에 논의 되었고,광해군때 안면곶이 안면도로 이미 굴착되어 섬으로 육지와 분단되었습니다. 굴항포의 위치도 제방공사가 안흥진 서쪽 지령산과 관된된 것으로 보아 현재의 위치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대륙의 장강가에 위치한 안면도입니다.
. 고전번역서 > 동국여지지 > 동국여지지 제3권 > 충청도 > 최종정보(효종(孝宗) 7년1656년 출간)
안면곶(安眠串) 예전의 안면소(安眠所)이다. 군 남쪽에 있는데, 육로로 100리 되는 곳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포구가 마주 보고 있다. 형상이 마치 띠를 풀어 놓은 것과 같은데, 바다에 둘러싸여 70여 리 이어진다. 거주민은 모두 염호(鹽戶)이고, 고려 시대부터 재목(材木)을 길러서 궁실과 배의 재목을 모두 여기서 가져다 쓴다. 태안군(泰安郡)에도 보인다.
> 고전번역서 > 만기요람 > 군정편 4 > 해방 > 최종정보(1808년)
안민곶(安眠串) 작은 봉우리가 둘러섰고 계곡이 매우 많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엔 경치[境]가 매우 아름답고 금모래가 있으며, 석웅황(石雄黃)ㆍ청등(靑藤)이 생산된다. 고려 시대부터 재목을 길러 궁궐과 선박의 재료에 많이 썼다. 어민이 수천 호에 이르고 남북을 왕래함에는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게 된다. 이지함(李之函)이 일찍이[嘗] 이 섬의 산수를 좋아하여 며칠 씩 머무르며 구경하다가, “뒤에 반드시 이 뒷줄기를 파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말하였는데, 그 뒤에 태안군 이방(吏房)인 경령(景齡)이 감영에 건의하여 육지에 붙은 데를 파내서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다 ㆍ요아량(要兒梁)수군절도사가 군병을 나누어 여기에 주둔시켰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7년 을축 > 10월 9일 > 최종정보
세종 27년 을축(1445) 10월 9일(경술)
27-10-09[03] 하삼도 도순찰사 김종서가 각지의 목장 적임지에 대해 아뢰다
태안군(泰安郡) 서북(西北)에는 지령산(知靈山) 포구(浦口)로부터 파치도(波治島)까지 20여 리를 횡단하여 목장을 쌓으면 좋으나, 그 사이에 살고 있는 백성이 거의 4백 호나 되어서 옮기기가 대단히 어려우니, 전(前)의 지령산(知靈山)ㆍ대소산(大小山)ㆍ이산곶(利山串) 세 목장을 인습하여 지금 또 독진곶[禿津串]ㆍ신곶[薪串] 두 목장을 증설하면 4백 필은 놓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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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세조 3년 정축 > 1월 16일 > 최종정보
세조 3년 정축(1457) 1월 16일(신사)
03-01-16[04] 하삼도 도순찰사 박강 등에게 행해야 할 일들의 조목을 아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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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청도의 안면곶이[安眠串]는 바다에 들어가기가 1백 20리(里)나 되니, 인민(人民)이 모여서 거주하기가 적당하지 못합니다.
> 고전번역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도 > 최종정보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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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는 서산군(瑞山郡) 경계까지 12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군 경계까지 65리이고, 서쪽으로는 소근포(所斤浦)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는 서산군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소태(蘇泰)로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본군 사람 환자(宦者) 이대순(李大順)이 원 나라에 총애를 받았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한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군명】 성대혜(省大兮)ㆍ소태(蘇泰) 혹은 소주(蘇州)라고도 한다. 순성(蓴城).
【산천】 백화산(白華山) 군 북쪽 3리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다. 군 북쪽 13리에 또 백화산이 있는데, 역시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어 두 산이 서로 유사하다. 내산(柰山) 군 서쪽 23리에 있다. 금굴산(金堀山) 군 북쪽 13리에 있다. 물금산(勿金山) 군 동쪽 10리에 있다. 안흥량(安興梁) 군 서쪽 34리에 있다. 옛날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러왔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누차 치패(致敗)를 보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령산곶(知靈山串) 군 서쪽 25리에 있다. ....
○ 고려 인종(仁宗)이, 안흥정(安興亭)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또 암석 때문에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蘇泰縣)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鄭襲明)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뒤에 종실(宗室) 왕강(王康)이 건의하기를, “예전에 파던 도랑은 깊이 판 곳은 10여 리나 되고, 파지 않은 곳이 불과 7리인데, 만약 마저 다 파서 바닷물로 하여금 유통하게 한다면 매년 조운(漕運)할 때에 안흥량 4백여 리의 위험한 물길을 경유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인부를 징발하여 다시 파니, 돌이 물 밑에 깔려 있었고, 또 조수가 왕래하여 파는 대로 이를 메워버리므로, 끝내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본조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安哲孫)을 보내어 시험하였던 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았다. 부포(釜浦) 군 서쪽 30리에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에 부포의 물이 피로 변하였다 한 것은 바로 이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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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영】 풍회도서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落照) 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니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포(浦)를 판 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산에서 온 한 줄기 끊겼다가 다시 연했구나. 뉘 능히 나에게 조운(漕運)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통 앞에서 취하여 망연(惘然)히 잊고만 싶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7년 신해 > 7월 22일 > 최종정보
영조 7년 신해(1731) 7월 22일(계미) 맑음
07-07-22[26] 정세와 병세로 인해 직임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체차해 줄 것을 청하는 형조 참판 홍현보의 상소
신이 직접 왕패를 살펴보니 선묘조(宣廟朝) 때 동양위방(東陽尉房)에 사급한 것으로, ‘충청도 태안 서면(西面) 지령산(知靈山) 아래 안흥성(安興城) 밖의 마장(馬場) 기지(基址) 안에 대하여 모두 입안(立案)을 작성해 준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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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번역서 >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 별집 제11권 > 정교전고 > 최종정보&1776년(영조 52) 이전)
○ 고려 때부터 안흥량(安興梁)의 수로는 여러 갈래의 물결이 거세고, 또 험한 바위가 있어 조선(漕船)이 많이 엎어지고 부서져서 당시의 논의가, “소태(蘇泰 태안(泰安)) 현경(縣境)으로부터 도랑을 파서 통하게 하여, 매년의 조운이 안흥량의 험한 길을 거치지 않게 하자.” 고 했으나, 끝내 시공하지 못하였다.
○ 효종조에 우의정 김육(金堉)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조운은 국사 중 가장 중한 것입니다. 양호 백성의 목숨이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는 데에 있사온데, 호남의 수로는 신이 익숙하게 알지 못하오나, 호서의 수로는 신이 목격한 바입니다. 서산(瑞山)ㆍ태안(泰安)의 땅이 서해로 달려들어가 안흥(安興)의 동협(東峽)이 되었사온데, 양남의 세선이 돛을 날려 이곳에 이르면, 해는 저물고 길은 먼데 풍력은 이미 다하고 조수는 물러가, 물이 얕아 돌에 부딪혀 부서지게 되는 것이니, 여기는 진실로 충청도 바다의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신이 호중(湖中 충청도내) 선비의 말을 들으니, 안민해관(安民海串)속에 한 가닥 긴 개[浦]가 있는데, 거의 50여 리나 되고, 북으로 서산ㆍ태안 사이에 이른다 하옵니다. 옛사람이 땅을 파서 수로를 열어 남북의 조수를 통하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큰 돌을 끼고 있어 그쳤다는데, 그 사이가 겨우 소울음 소리가 서로 들리는 거리에 불과하다 하옵니다. 만약 이곳에 창을 설치하고 통주(通州)의 석갑(石閘) 제도와 같이 다른 배로 교체해 싣는다면 안흥(安興)의 실패도 면할 것이오며, 영원히 만세토록 근심이 없을 것이오니 이는 조운의 상책입니다.” 하였다. 浦 개 포 한자
뜻① 개 ② 지류가 강이나 바다로 들어가는 곳 ③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 ④ 물가
○ 안흥창(安興倉). 열성조(列聖朝)에서 여러 차례의 논의가 있었는데, 현종조에 와서 굴포(掘浦)의 남북에 두 창을 설치하니, 상거가 10리쯤 되었다. 양남의 조세를 남창에 수납하고, 수레와 소로 북창으로 전수(轉輸)하였으니, 이것이 안민창(安民倉)이다. 폐단이 있어서 곧 폐지하였다.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안흥진(安興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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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년(1675)에 비국(備局)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안흥(安興)은 그 지세가 바다로 40여 리나 삐죽이 나가 있어서 삼남(三南) 지방의 배들이 이곳을 경유하지 않고는 달리 통과할 어떤 길이 없고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루면 강도(江都)에 닿을 수가 있으니, 이는 곧 수로(水路)의 인후(咽喉)요 강도의 문호(門戶)입니다
[주-D001] 안흥(安興) :
충남 태안군의 안흥만을 둘러싸고 있는 근흥반도(近興半島) 일대이다.
> 고전번역서 > 홍재전서 > 홍재전서 제49권 > 책문 > 최종정보
홍재전서 제49권 / 책문(策問) 2
조운(漕運)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춘시(春試) ○ 임인년(1782)
우리나라 조운은 비록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는 것도 있으나, 삼남(三南)에서 옮겨 실어 모두 바다를 거쳐 한강으로 올라오는데, 도성(都城)에 사용되는 물품이 오로지 이것에 의지하니, 그 역할의 중요함은 당 나라의 경구(京口)나 송 나라의 변하(汴河)와 같을 뿐만 아니다.
....
안흥(安興)에 포구를 파자는 의논은 오래되었으나 가부가 서로 견지하여 하나로 되지 못하고, 심지어 안흥의 좌우에 조창을 설치하여 위험한 물길을 피하자는 의논도 있다. 대체로 바닷길 천 리에 오직 이곳만 걱정이 되었는데, 지금은 내양의 파도가 평온하던 곳에도 모두 파선이 되고 암초와 모래톱으로 파선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비단 안흥만 위험한 곳일 뿐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2년 임진 > 11월 16일 > 최종정보
태종 12년 임진(1412) 11월 16일(정유)
12-11-16[05] 충청도 순제 안흥량에 운하를 파서 조운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다
순제는 충청도 태안군(泰安郡)의 서쪽 산마루에 있는데, 길고 곧게 바다 가운데로 수식(數息)이나 뻗쳐 있어 수로가 험조(險阻)한지라, 이름하여 안흥량이라 하였는데, 전라의 조운은 이곳에서 실패가 많아 예나 이제나 걱정거리였다. 산마루가 처음 시작된 곳에 뚫어서 수로를 통할 만한 곳이 있었으므로 전조(前朝)에 왕강(王康)이 뚫으려 했으나, 그 땅이 모두 돌산이어서 마침내 실효를 보지 못했던 곳이다. 이제 하윤이 건의하였다.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소선(小船)을 두며, 둑[堤] 아래를 파서 조선(漕船)이 포구(浦口)에 닿으면 그 소선에다 옮겨 싣고, 둑 아래에 이르러 다시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러한 차례로 운반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도 거의 배가 전복하는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 세조 1년 을해 > 윤 6월 29일 > 최종정보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9일(계유)
01-윤06-29[01] 호군 정유림이 윤대에서 전라도 조운에 대하여 청하다
정유림이 아뢰기를,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이 모두 안흥량(安興梁)에서 실패하는데, 안흥(安興)에 못 미쳐서 옛 순성(蓴城)의 기지가 있고, 이에서 겨우 7, 8리를 격해 또한 영풍창(永豐倉) 고기(古基)가 있습니다. 만약 전라도 조선으로 하여금 옛 순성 기지에 정박(定泊)케 하고는 육로로 영풍창까지 수송하고 이에서 다시 선박에 적재해 오게 하면 전복하여 빠질 이치가 없으니, 또 순성과 영풍 기지에 모두 창고를 설치하여 우습(雨濕)에 대비하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네 말이 진실로 옳다. 내 마땅히 이를 의논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17년 갑신 > 4월 26일 > 최종정보
선조 17년 갑신(1584) 4월 26일(임신)
17-04-26[01] 감목관 신점이 전세를 조운하는 중에 침몰하는 폐를 막을 대책을 아뢰다
[DCI]ITKC_JT_N0_A17_04A_26A_00010_2005_004_XML DCI복사 URL복사
감목관(監牧官) 신점(申點)이 서계(書啓)하기를,
“전라도의 전세(田稅)를 배로 운송할 때 안흥량(安興梁)에서 해마다 배가 침몰하여 조운(漕運)을 그르칠 뿐 아니라 또 물에 빠져 죽는 조군(漕軍)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굴포(堀浦)를 파서 왕래할 수 있게 하거나 혹 그곳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 아래 정박시켜 창고에 곡식을 옮기고 나서 빈 배로 서산(瑞山) 경내로 돌아가 정박하게 한 다음 이어 육로(陸路)로 운반하여다가 다시 배에 싣게 하소서. 그 사이의 거리는 육로로 10리가 채 못되니, 납세하는 자들에게 약간의 되쌀을 더 내게 하여 육로로 옮기는 비용을 치르게 하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일에 응모할 것이라서 운송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8년 병진 > 5월 4일 > 최종정보 광해군 8년 병진(1616) 5월 4일(계유)
황해도는 합당한 큰 재목이 이전부터 전혀 없었고 나무의 품질도 매우 나쁩니다. 할수없이 공홍도(公洪道)의 안면도(安眠島)에서 낱개로 가려서 베어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20년 임오 > 1월 24일 > 최종정보 인조 20년 임오(1642) 1월 24일(갑오) 맑음
통제사 유림을 인견할 때 유림이 아뢴 내용에,
“거제도(巨濟島), 안면도(安眠島), 완도(莞島), 부안(扶安) 등의 섬에 있는 선박 재료에 대해 수사(水使)와 수령이 성의를 다해 금단(禁斷)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현종실록 > 현종 10년 기유 > 1월 8일 > 최종정보현종 10년 기유(1669) 1월 8일(임인)
좌명이 안면도(安眠島)에서 재목을 채취하고 수사(水使)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7년 신해 > 8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7년 신해(1731) 8월 10일(경자) 맑음
07-08-10[20] 시민당에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 우의정 조문명 등이 입시하여 습조 등을 정지하는 문제, 평안도 장교에게 요미를 지급하는 문제, 중국인의 자손인 호두필에게 복호를 지급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조운(漕運)은 나라의 중대한 정사인데 조운하는 물길이 근래 매우 순조롭지 않습니다. 신은 이것이 걱정이 되어 지난번에 연석에서 변통할 방책을 대략 진달하였으나 앞으로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엽적인 것이며, 그 근본적인 해결책은 실로 물길에 달려 있습니다. 안흥항(安興項)은 실로 삼남의 조운 길인데 평소 구당(瞿塘)이라 일컬을 만큼 험하여 조운하는 배가 여기에서 많이 치패(致敗)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조(前朝 고려) 때부터 포구(浦口)를 깊숙이 파내 운하를 조성한 일이 있어 지금까지도 흔적이 아직 있으나, 끝내 그 물길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늘 취재(臭載)가 많아 그 폐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남창(南倉)과 북창(北倉)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개 남창은 안흥항 못 미친 곳에 있고 북창은 안흥항을 지난 곳에 있는데, 조운선이 안흥에 이르기 전에 곡물을 모두 남창에 부린 뒤 거마(車馬)로 북창에 실어 나르고 빈 배로 안흥을 지남으로써 취재 걱정을 피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민폐(民弊)가 심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중간에 어쩔 수 없이 안흥항을 따로 파기 시작하여 그 뱃길을 빠르게 하고 비로소 남창과 북창을 폐지하였습니다. 다만 그 포구 안에 또 곁으로 갈라져 나간 포구가 하나 더 있어 아침저녁으로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드나드는데 두 포구의 물이 휘돌아 흐를 때 서로 부딪쳐 요동치므로 한쪽의 힘만으로는 순조롭게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떠오르는 모래가 마침내 그 중간에 멈춥니다. 다달이 쌓이고 해마다 쌓여서 지금은 동서 양쪽 포구의 어귀가 거의 삼각주가 되어 오가는 배가 만조(滿潮) 때를 타지 않으면 출입이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남쪽에서 오는 배가 겨우 포구에 이르렀는데 조수가 이미 빠졌으면 포구 안으로 미처 들어오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포구 바깥에 닻을 내리는데, 바람을 만나면 번번이 치패됩니다. 이미 포구에 들어온 배는 내일 배를 출발시키려면 오늘 만조 때를 타지 않을 수 없으므로 포구의 동쪽에 나가서 정박하는데 바람이 불면 번번이 치패됩니다. 몇 해 전과 이번의 취재는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니, 앞으로 해마다 치패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조운 길의 첫 번째 급선무는 모래흙을 파내는 것만 한 것이 없으나, 한 해 두 해 파내는 대로 쌓이니 또한 예전처럼 될 것입니다. 물길의 이해(利害) 및 그 땅의 형편을 잘 아는 자가 말하기를 ‘그 곁으로 갈라져서 물이 새 나가는 곳에 제방을 쌓아 막으면 두 포구의 물길이 현(絃)처럼 곧고 평평하게 되고 물의 힘이 한 길로 순조롭게 모이므로 매번 모래를 파낼 필요가 없고 모래가 저절로 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므로 쌓여서 삼각주가 될 걱정이 더 이상 없습니다. 또 그 좌우로는 돌산이 아닌 데가 없어 무너져 내린 돌이 무수하니, 만약 이것으로 제방을 쌓으면 수월하게 효과를 얻을 것입니다. 제방 안쪽은 흙이 매우 기름지고 그 크기는 거의 천 섬지기에 가깝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조정에서 재력을 출연하여 쌓는다 해도 들어가는 비용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삼남의 조운에 관한 중대한 정사이니, 실로 한 나라의 명맥에 관계됩니다. 그 때문에 도본(圖本)을 만들어 들여왔습니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7년 신해 > 9월 30일 > 최종정보
영조 7년 신해(1731) 9월 30일(경인) 맑음
07-09-30[24] 《경종실록》 총재관의 직임을 체차해 줄 것을 청하고 도승지 박문수에게 안면도의 경영을 살펴 이해를 판단하게 할 것 등을 아뢰는 우의정 조문명의 차자
...............
삼가 듣건대 호서의 한 섬인 안면도(安眠島)가 잘 경영해서 나라와 가정에 모두 이로운 점이 있다고 하니, 만약 이 일을 일찌감치 결정한다면 거의 구석진 한 지역은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7년 신해 > 11월 15일 > 최종정보
영조 7년 신해(1731) 11월 15일(갑술) 맑음
07-11-15[24] 진수당에서 영성군 박문수를 인견하는 자리에 좌승지 이봉익 등이 입시하여 안흥의 일과 삼남 지역의 농사 형편 등을 보고하고 재해에 진휼할 방도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박문수가 소매 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펼치고 아뢰기를,
“좌향(坐向)은 이러합니다.”
하고, 지도의 바다 쪽을 가리키며 아뢰기를,
“이곳에서 원산(元山)까지 100리인데, 사람들은 이 두 물목을 파내어 조선(漕船)을 이리로 왕래하게 한다면 치패(致敗)의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으로는 안흥에 진(鎭)을 설치한 뜻은 대개 이 항만이 있으므로 풍도(風濤)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보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비록 파내더라도 두 물이 넘나들 곳은 모두 모래가 쌓일 테니, 얼마 동안이나 메워지고 막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순풍을 얻으면 돛을 걸고 곧장 강화(江華)로 향하면 되니 어느 겨를에 구불구불 돌아 이곳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바람의 기세가 순하지 못하면 노를 당겨 피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입니다. 또 이 진은 바닷길의 관방(關防)이니, 만일 파내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파지 않았겠습니까. 근래 조선이 많이 치패되다 보니 이 물목을 파내면 뱃길이 순편하겠다고 말하는데, 신은 조선이 치패되는 것은 바로 조정의 명령이 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거두어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봄이 된 뒤에 즉시 짐을 꾸려 배에 실어서 출발시킨다면, 봄바람은 대체로 온화하니 어찌 취재(臭載)할 우려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근래에는 조정의 명령이 엄하지 못한 탓에 봄이 된 뒤에야 비로소 거두고 여름과 가을 사이에야 겨우 배에 실을 수 있으니, 거센 바람을 만났을 때 치패되지 않는 것이 또한 요행입니다. 그러니 어찌 오로지 물길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안흥 지역은 실로 천연적인 곳으로 구부러진 모습이 마치 병목과 같아 수세(水勢)가 매우 급하니,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때로 말하더라도 적이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조수(潮水)가 들어오면 곧 큰 바다가 되고 조수가 지나가면 통할 수 있을 듯하지만, 또한 길이 없으므로 양남(兩南)의 소식은 여기를 말미암아 통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을 도모하는 계책으로 헤아려 볼 때 결코 파내서는 곤란하니, 어찌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만전(萬全)의 큰 이익을 버리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안흥은 안팎으로 겹겹이 물길을 안고 있다.”
하니, 박문수가 아뢰기를,
“물길의 이로움은 갯벌을 파는 데에 있지 않으며, 패선(敗船)의 이유도 오로지 물길의 험난함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농사가 여러 해 풍년이 들어 뱃사람들의 이익이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올해에는 농사가 이러하니, 내년 봄에는 뱃사람들이 앞다퉈 실으려 해서 필시 이러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복명(復命)하던 날에 돌아가 노모를 뵙고 그대로 우상을 만나 보고 어제 또 영상을 만나 보니 모두 신의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안면도(安眠島)에는 바람에 쓰러진 나무가 매우 많으니, 이 물목에 방죽을 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논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그리 대단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관방의 중요한 곳은 경솔히 열어 주거나 막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직접 본 것과 다름이 없다. 새로운 법을 만들지 말고 옛 법을 지켜서 예전 그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8년 임자 > 1월 13일 > 최종정보
영조 8년 임자(1732) 1월 13일(신미) 맑음
08-01-13[15] 진수당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송성명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영변의 철옹산성에 곡물을 비축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문수가 진달한 내용에, ‘뱃길이 원산(元山)에서 안흥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강화(江華)로 나아간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안흥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니, 이선이 아뢰기를,
“당초 간사한 자가 훼방을 놓은 탓에 굴항도(堀項島)의 물 밑은 온통 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의정이 나라를 위해 일을 신중히 하는 방도로 과연 적간하였지만, 적간한 것은 다만 그 반석의 유무만 살폈을 뿐입니다. 몇 길의 쇠기둥을 좌우에 두루 꽂아 보니 원래 편석이 없어 깊숙이 몇 길쯤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반석의 유무는 이것에 근거하여 단정하였지만 배가 운행하기 어렵고 쉬움은 단지 파냈거나 쌓여 있는 모래가 몇 길인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뱃길로 말하면 안흥을 피하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방을 쌓으면 비록 물길을 통하게 할 수 있지만 산성은 허술해진다고 하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이선이 아뢰기를,譔曰, 安興山城, 比他特異者, 連陸四十里, 跨海成島, 山城外, 泰山數疊, 周抱高低, 皆是泰山及內外帶河也。虛疎云者防水也。而其水一日兩潮退之水, 則無水時 便是大路大野, 有水時, 便成一江, 可通船路
“안흥산성(安興山城)이 다른 곳에 비하여 특이한 점은 연륙(連陸) 40리에 바다를 건너 섬을 이루고 산성 밖에 태산(泰山)처럼 높고 큰 산 여러 겹이 두루 싸며 높고 낮게 솟아 있으니 모두 태산과 그 내외를 둘러싼 강과 같습니다. 허술하다고 한 것은 수로에 대한 방어입니다. 그 물은 하루에 두 번 밀려왔다가 나가는 물이니, 물이 없을 때는 곧 큰 길과 큰 들이 되고 물이 있을 때는 곧 하나의 강을 이루어 배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적(賊)이 이때를 노리면 수륙 양쪽 모두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
마침 그때에 안흥진 굴항도에 바람에 꺾인 소나무 3000여 그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무는 목책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좋기 때문에 신이 이러한 뜻으로 우의정에게 말하니, 우의정도 그렇게 여겨 이미 낭청을 보내 적간하였다고 합니다. 국고가 고갈된 이런 때에 경비와 물력이 만금이 드는 공사를 어찌 함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바람에 꺾인 소나무의 목재로 그 사적의 좌측을 메우고 또 바자(笆子)로 막아 사적이 저절로 무너지면 수로가 순하게 통하여 아마 대소 공사(公私)의 배가 취재(臭載)하는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박문수의 말에 일리가 있었는데, 지금 이선의 말을 들으니 그의 뜻은 끝내 석연치 않지만 또한 일리가 있다.”
하였다
> 고전번역서 > 미호집 > 미호집 제1권 > 시 > 최종정보 1772년(영조 48)
미호집 제1권 / 시(詩)
안면도에 정박하여〔泊安眠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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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어느새 멀리까지 나와서는 / 舟行忽超遠
이미 벌써 강 남쪽 포구에 정박했다오 / 已泊江南渚
송림이 천겹만겹 무성하게 덮였으니 / 松林千萬重
꾀꼬리 울어대도 어딘 줄 모르겠네 / 鶯啼不知處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9년 계축 > 6월 28일 > 최종정보
영조 9년 계축(1733) 6월 28일(정축) 맑음
09-06-28[10] 희정당에서 약방이 입진하러 입시한 자리에 영의정 심수현 등이 입시하여 의관의 진찰을 받고, 안흥 첨사 이선이 포를 파는 공사에 관한 일, 새로 제수된 대흥 군수 이제현을 개차하고 가려 차임하는 일 등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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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현이 아뢰기를,
“안흥 첨사(安興僉使) 이선(李譔)이 포(浦)를 파는 공사를 힘껏 주장하였습니다. 지금은 터가 그럭저럭 조성되고 흙을 쌓는 공정도 거의 절반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선은 맨손으로 완성하기 어려워 중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도신(道臣)이 ‘반드시 성공할 수 없는 일에 물력을 허비하니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라고 하며 적당한 명색의 곡물을 우선 떼어 주라는 관문(關文)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간의 사정을 실로 확실하게 알기 어려워 어제 비변사 낭청을 강가에 보내 호남에서 공사 간에 곡식을 운반하는 뱃사람을 불러 모아 그 포를 판 곳의 물길이 어떠한지 상세히 물었더니, 모두 ‘물길이 전에 비해 자못 순조롭지만 쌓인 모래가 내를 막아 영구히 완전하고 견고하기를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속에서 이른바 모래 제방은 파괴되기 쉽다는 것이니 이 점이 염려할 만합니다. 다만 쌓는 공정이 절반이 넘어 운송하는 길이 자못 순조로운데 뒷날 훼손되거나 파괴될 것을 염려하여 공사를 마치기 전에 중지하는 것도 매우 애석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군향(軍餉)을 반에서 참작하여 제급(題給)하여 보고한 대로 입본(立本)하여 그 잉여를 취해 공사의 양식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昨送備邊郞于江上, 招聚自湖南公私運穀船人, 詳問其掘浦處水道之如何, 則皆以爲, 水道比前頗順, 而積沙防川, 難保其永久完固云, 此乃俗所謂沙隄易破者也, 是可慮也。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물길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갑자기 파괴되지는 않을 듯하다. 옛말에 이르기를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흙 한 삼태기 때문에 공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이선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자, 김흥경이 아뢰기를,
“그 사람됨이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며 담당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0년 갑인 > 4월 12일 > 최종정보
영조 10년 갑인(1734) 4월 12일(정사) 맑음
10-04-12[24] 희정당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어유룡 등이 입시하여 《근사록》을 진강하고, 안흥의 역사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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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이 아뢰기를,
“이 아래 장의 수리(水利)라는 글자가 있으니, 신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지금의 일을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안흥(安興)의 역사(役事)는 진실로 걱정스럽습니다.신의 숙부인 이태좌(李台佐)가 서호(西湖)를 안찰할 때에 또한 일찍이 가서 보았는데, 듣자 하니 쌓는 대로 무너져 일이 틀림없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재물을 축내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속히 정지하라고 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응(李膺)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하였으니, 그가 돌아와 아뢴 뒤에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0년 갑인 > 9월 28일 > 최종정보
영조 10년 갑인(1734) 9월 28일(경자) 맑음
10-09-28[30]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 우의정 김흥경 등이 입시하여 포항창의 곡물을 함경도에 떼어 주는 문제, 과거를 치를 때 수종을 금하는 문제, 안흥에서 방수하는 역사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김흥경이 아뢰기를,
“이 일이 만약 시작을 도모하는 때라면 신은 진실로 쟁론(爭論)하겠습니다만, 지금은 이미 일을 시작하여 거의 절반을 넘었습니다. 일을 맡은 자는 스스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하고, 신 또한 그것이 절대 성공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 저지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사세로 미루어 보건대 자갈로 제방을 쌓는 것으로 어떻게 하루에 두 번씩 들고 나는 수력(水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혹 성공한다 하더라도 몇 년 안에 필시 무너져 내릴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役事)는 삼남(三南) 선척의 취재(臭載) 때문인데, 근래에는 인심이 교활해져 고의로 치패(致敗)하는 사례가 대부분이고, 또 선척이 침몰하는 일이 꼭 안흥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소신은 그것이 좋은지를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공역이 거의 절반쯤 진행되었고, 일의 단초가 다릅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 일은 근원이 오래되었습니다. 고려 때에는 굴항(掘項)이 있었고, 아조(我朝)에는 남북창(南北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로로 운송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가 고려 때 폐기된 고랑을 파내었으나, 모래가 쌓여 다시 폐기되었습니다. 이번에 이 공역을 하는 것은 모래가 모여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뜻입니다. 외방의 일은 묘당에서 결정해야 하는데, 송진명 또한 묘당 사람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하니, 시행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좁기 때문에 파내어 넓게 한 것이고, 지금은 얕기 때문에 바닥을 긁어내어 깊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정제가 아뢰기를,
“신은 처음에 이 일을 듣고서 꼭 성공하리라는 가망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만, 근래 들으니 일이 거의 절반쯤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송진명은 전날 묘당 사람으로서 가서 형지(形止)를 살펴보고 이와 같이 조목별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겨울 전에 투입되는 인력은 오로지 이 때문에 백성을 동원하는 일이 별도로 없을 것이니, 시행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선(李譔)의 소식을 듣건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역의 감독에 부지런하고, 강상(江上)을 배로 다니는 사람들 또한 물길이 전에 비해 비교적 순탄해졌다고 합니다.”하고,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은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이상 감히 그 성패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廷濟曰, 臣始聞此事, 似無必成之望矣。近聞幾至半役云, 而宋眞明, 以前日廟堂之人, 泩審形止, 其所條錄如此。且冬前少入民力, 則別無專爲此動民之事, 似當許施矣。聞李譔, 不分晝夜, 勤於董役, 而江上舡行之人, 亦以爲水道, 比前較順云矣。宗城曰, 臣旣未目見, 雖不敢質言其成否,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1월 4일 > 최종정보
영조 11년 을묘(1735) 1월 4일(을해) 아침에 흐리고 오후에 눈이 옴
11-01-04[10] 차대를 행하여 군수보에 관한 수어사의 장계, 인삼으로 인한 폐단 문제, 구관 당상을 차임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바닷물을 차단하면서 제방을 만들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두 산의 골짜기 입구가 낮고 평평하여 앞뒤로 조수(潮水)가 찰 때에 물이 굽이져 들어가는 곳이니, 인력을 많이 들이면 막지 못할 이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이형좌(李衡佐)와 박문수(朴文秀)는 이룰 수 없다고 말하니, 알 수가 없다.”
하자, 송진명이 아뢰기를,
“이형좌와 박문수는 모두 소견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말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보거나 들은 데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신도 헐뜯는 말을 실컷 듣고 처음 태국사(泰國寺)에 도착하여 바라보니, 큰물이 범람하여 넘치는 가운데 나무 꼭대기만 드문드문 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물이 깊고 넓어서 결코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공사하는 곳을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헐뜯는 말이 사실에 어긋남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물길이 변하여 제방이 조만간에 허물어질지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석축(石築)이 이미 완료되었으니 석축의 안쪽에 흙으로 제방을 쌓아서 안팎을 견고히 한다면 또한 어찌 반드시 금방 허물어지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윤4월 23일 > 최종정보
영조 11년 을묘(1735) 윤4월 23일(임진) 맑음
11-윤04-23[26] 선정전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좌의정 서명균 등이 입시하여 《시경》을 진강하고, 안흥의 물길을 막는 일, 난동을 부린 강가 마을 백성의 처결 문제, 장릉에 연못을 파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DCI]ITKC_ST_U0_A11_04B_23A_00270_2020_231_XML DCI복사 URL복사
송진명이 아뢰기를,
“안흥(安興)의 물길을 막는 일에 관해 풍릉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은 조운 길이 순조롭지 않은 것을 염려하여 국가의 큰 우환으로 여겼습니다. 수만 냥의 재력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제때 방죽을 쌓지 않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이선(李譔)을 먼저 파견하여 터를 닦게 하였지만, 의론이 일치하지 않았고 이어 조정에서 돌보는 일이 없었으므로 이선은 스스로 물력을 마련하여 3, 4길 높이의 방죽을 쌓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홍주(洪州)에 근무할 때 조정의 명으로 가서 살펴보았더니 두 산 입구에 있는 모래가 많이 쌓인 곳을 열어 통하게 하는 것이 실로 이 공역(工役)의 관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현(上弦)이나 하현(下弦) 때 조수(潮水)가 빠져나간 뒤에도 1길 남짓의 물이 남아 있었고, 조수가 밀려오면 큰 선박도 통행에 아무 지장이 없었으므로 물때를 기다리느라 지체되는 염려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죽을 쌓는 효과가 없지 않다고 여겨 그 뒤 연석에서도 다른 비국 당상이 가서 다시 살펴보고 결정할 것을 청한 것입니다. 지금 이종성(李宗城)의 말을 들으니 모래가 많이 쌓인 곳은 조수가 물러가면 버선을 신고 걸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서로 현저하게 달라 매우 괴이하고 의아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보름이나 그믐에 바닷물이 크게 밀려올 때는 물러가는 속도 역시 급하기 때문에 말라 있는 곳이 많고, 상현과 하현에 물이 줄어들 때는 들어오는 시간은 짧고 물러가는 속도는 더디기 때문에 늘 물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는 대개 신이 가서 살펴본 때와 이종성이 가서 살펴본 때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12년 병진 > 6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6월 10일(계유)
처음에 무인(武人) 이선(李譔)이 말하기를, ‘안흥진(安興鎭) 해구(海口)에다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으면, 조선(漕船)의 취재(臭載)를 면할 수 있고, 갯벌 가장자리의 진흙이 생기는 곳도 수전(水田)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자,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이 이를 믿고 그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이선을 안흥 첨사(安興僉使)로 삼고 그 곳에 가서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는데, 5, 6년이 되어도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진명(宋眞明)은 그래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장하므로, 박문수(朴文秀)ㆍ이종성(李宗城)이 명을 받들고 가서 살펴보고는 그것은 이룰 수도 없으며 비록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국가에 이익이 없음을 극력 말하였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2년 병진 > 12월 2일 > 최종정보
영조 12년 병진(1736) 12월 2일(신유)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저물녘에는 맑음
12-12-02[29] 안흥진에 방죽을 수축하는 형편과 전 첨사 이희보의 죄상을 논열하는 지평 박사창의 상소
신은 바야흐로 스스로 탄핵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감히 다른 일을 아울러 언급하지 못하오나, 안흥진에 방죽을 수축(修築)하는 형편과 이희보가 죄를 범한 정절(情節)에 대해서는 이미 눈으로 보고 마음에 놀란 것이 있으므로 밝은 성상 앞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안흥이라는 한 진(鎭)은 바다 어귀에 쑥 들어가 있어 삼면이 막히고 한 면이 육지와 연결되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요새입니다. 이희보의 말에 이르기를 ‘본진으로부터 북으로 지령산(智靈山)에 이르기까지 방죽을 견실하게 수축하면 안흥과 새 진 사이는 수로(水路)가 꽤 좁아져 조수(潮水)가 왕래할 때 진흙과 모래가 깎여 나가 뱃길이 깊어져서 조운(漕運)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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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방죽을 수축하는 역사(役事)가 완료되면 앞바다가 좁아질 것이고, 앞바다가 좁아지면 왕래하는 조수가 틀림없이 장차 진흙과 모래를 밀어 와 그곳을 메울 것이니, 진흙과 모래가 파이고 깎이는 이로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깊이 파내려다가 도리어 얕아질 것이며 깎아 내려다가 도리어 막아 버릴 것이니, 이것이 방죽을 수축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큰 증거입니다.
대체로 호남의 조운선(漕運船)은 고군산(古群山)에서 선적하여 첫 번째로 원산(元山)에 정박하고 두 번째로 안흥에 정박합니다. 그런데 원산과 안흥 사이의 바닷길이 꽤 멀어서 중간에 풍랑을 만나 배가 왕왕 취재(臭載)하니, 이는 실로 두 섬이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이지 애초에 안흥 앞바다가 얕고 좁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안흥 앞바다를 준설하여 깊게 만든다면 어찌 배가 다니는 데에 편리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준설하여 깊게 만드는 방법이 실로 방죽을 수축하는 데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주-D002] 지령산(智靈山)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있는 산이다. 안흥진의 동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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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2년 병진(1736) 12월 3일(임술) 맑음
12-12-03[22] 승지 등을 인견하여 《경국대전》을 강론하고, 조미포의 징봉과 탕감 문제 등을 논의하고 좌부승지 유엄이 호서의 일을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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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엄이 아뢰기를,
“소신이 순안(巡按)할 때 안흥진(安興鎭)에 이르러 이희보(李喜報)가 방죽을 수축(修築)하는 곳을 보니, 그 죄가 비록 무거우나 수축하는 역사(役事)의 성대함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지금은 역사가 겨우 반쯤 진행되었으나 머지않아 또한 수축을 완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곳은 세 갈래의 물이 합쳐져 물살이 매우 급하고 모래 더미가 퇴적되어, 뱃길로는 지극히 험하고 쌓자마자 곧바로 무너져 내리므로 헛되이 애만 쓰고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 박사창(朴師昌)이 상소에서 한 말이 참으로 옳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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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4년 무오(1738) 7월 15일(을축) 맑음
14-07-15[25] 차대를 행하여 사행에 가지고 갈 은화와 자문에 대한 문제, 수상 습조를 정하는 문제, 《명사》전질을 얻어오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희보(李喜報)와는 다른가? 이희보는 지금 용서를 받았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비록 석방되었으나 종신금고(終身禁錮)에 처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탐오한 일이 아닌데 어찌 종신금고에 처하였는가? 들어간 비용은 그가 받아먹은 것이 아니다. 조정에서 주지 않고 그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는가. 조정이 그에게 속았으니, 민력과 군량이 참으로 아깝다. 지금은 물길이 다시 통하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또 해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생각건대 물길이 더욱 막혔을 것이다.”
하였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江全碧海 의 조선 서해안입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혹시 안흥성이 현 중국의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한강의 인입구에 있다고 했다는 점과.. 현 동정호에 물이 가득찼을때의 모양을 그려보면 현재의 무한으로 연결되는 漢水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양이 형성됩니다. 아래 fiffear님께서 올려주신 청사고의 기록은 지금의 사천성 가릉강이 한수였음과 현 중경이 무한이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안흥의 위치는 지금 추적해 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단지 동정호 좌측에 위치했던 조선의 당진-현 의창-에서 충주였던 현 수주시로 이어지는 축선중 한수와 만나는 지점에 안흥성이 있었다고 추단할수 있을 뿐으로 보여집니다.
청사고(淸史稿) 그곳은 朝鮮의 王京에서 西南쪽 150里 떨어진 곳으로서 仁川澳의 좌측 겨드랑이에 해당하는 沔江의 입구이다.(청일전쟁 주둔지~아산만 당진일대)) 택당선생집 한수 따라 서남쪽 면천(沔川) 못으로 내려가네 / 漢水西南下沔湖 면강.면천. 면호 같은 것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漢沔本一水。漢入江處謂之沔口。卽今湖北漢口。〔通鑑注〕今漢陽軍。即夏口也。所謂漢口也。庾仲雍曰。一曰沔口。 沔口
하구, 夏口 하구(夏口)를 말한다. 한수(漢水)를 면수(沔水)라고도 부르는데, 한수가 장강으로 흘러드는 주변을 면구라고 한다. 지금의 호북성 무한(武漢)의 한구(漢口)에 있다 ://cafe.daum.net/warong84/Hzgh/72 송계님 지도의 당진 참고하세요
fitfear님, 송계님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태안에 살고 있어서 현 중국에서의 위치가 궁금하여 문의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