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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비구니 승가 재건과 한국불교
“1천 년 이상 사라졌던 비구니 승단을 한국불교가 전해 줬다”
글 이치란 박사
불교승가의 구성은 사부중(四部衆)이 원칙이다.
비구(남자 출가 승려) 비구니(여성출가 여승)는 출가 이부중이라고 하여 승가의 핵심 구성원이다. 20세 이전의 출가자인 남성은 사마네라(사미)라고 하며 여성은 사마네리(사미니)라고 부르는데, 예비 비구, 비구니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승가 최초의 비구는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로서의 쉬라마나(Śramana사문)였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사문으로 출발할 때는 이런 쉬라마나들이 많이 있었다. 인도사회에서는 베다종교 수행인들 말고도 이런 은둔 수행자들이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쉬라마나, 중부 방언인 빨리어로는 사마나라고 부르는데, 의미는 한마디로 ‘은둔 구도자’이다. 은둔이란 어디 깊은 산 속에 꼭 숨어서 산다는 것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을 떠나서 걸림 없이 무소유의 수행자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정통 종교는 베다 종교이고, 베다 종교의 성직자는 브라만으로서 왕권과 세속 가까이에서 상위 신분으로 사회공동체의 카스트에 속하는 그룹이다. 하지만 자이나교나 불교는 인도의 비 정통 종교(철학)에 속한다. 자이나교의 은둔 수행자는 기원전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 고오타마 싯다르타로 부터이며 이밖에도 아지비카(Ajivika=運命決定論派), 아즈냐나(Ajñana=懷疑論者)와 차르와카(Carvaka, 유물론자)로서 로카야티카(Lokāyatika=順世論)라고 해서 일종의 쾌락주의로서 유물론에 가까운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을 인도 정통파 철학(종교)에서는 비 정통(이단)으로 차별화 했다. 불교측에서 이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른다.
외도란 비 정통파 종교 내지 철학을 말하는데 이런 유의 철학자가 많았지만 대표적인 그룹과 지도자를 여섯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쉬라마나 진리추구 운동은 요가수련과 결부해서 이루어 졌다. 이러한 정보는 불교경전 가운데서 《디가니까야 長部》의 《사문과경沙门果经=Samaññaphala Sutta》을 통해서이다. 이 경에 육사외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불교의 관점에서도 이들의 사상경향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육사외도라고 했던 자이나교는 지금까지도 인도에서 건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6개의 이단에서 제외됐던 불교는 왜 인도에서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는가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간단히 대답한다면, 인도 정통 6파 철학에서 본 불교교리의 비 정통성이라기보다는 내적인 안일과 외적인 침탈에 의해서이다. 부침을 거듭하긴 했지만, 인도 정통 종교(철학)인 바라문교의 힌두교는 주류종교로서 더욱 강성해졌다. 스리랑카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스리랑카 또한 인도문화권이기 때문에 이런 인도의 종교적 배경에 무관하지 않다.
불교수행 공동체인 승가가 형성되면서 비구 비구니는 기본 구성원인데, 비구는 석가모니 자신으로부터이고 비구니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처음이며, 사미는 아들인 라훌라가 최초였다. 비구 승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지만, 비구니 승가는 설명이 다소 필요하다.
축사를 하고 있는 의현 전 총무원장 스님과 필자
남방 불교권에서는 이 비구니 승가가 1천 년 이상 사라졌었기 때문이다. 1천년 이상 사라졌던 비구니 승단을 한국불교가 전해줬다고 하면 독자들은 믿지 않겠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1996년 12월 인도의 사르나트(녹야원)에서 한국불교의 조계종 전 종정 서암스님, 전 총무원장 의현스님, 전 호계원장 봉주스님과 일부의 비구니 스님들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11명의 다사실라(十戒) 여성들에게 한국 정통의 비구니계맥을 전수해줌으로써 비구니 승가가 재건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11명의 비구니 승가는 약 5천 명으로 증가했다.
이런 스토리를 전개하려면 수 십 쪽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차차로 소개하고자 한다. 스리랑카 불교는 지금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1천 년간 비구 승가만 존재했던 승단에 5천여 명이란 여승들이 출현함으로써 스리랑카 승가에 새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 비구니 승가가 새로 재건된 것은 불과 27여 년 전의 일이다. 태국과 미얀마도 비구 승가만이 존재했었는데, 이제 정식 비구니 승가가 형성되고 있다. 스리랑카에 가서 비구니계를 받고 있어서이다. 유럽, 미국에서 까지 스리랑카에 와서 비구니 계맥을 이어가고 있다.
약 5천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한 사찰에 모여 만발공양에 참가하고 있다. 2016년 12월 27일. 콜롬보 스리랑카.
현대 세계불교⑱
인도불교성지복원과 대각회
스리랑카 다르마팔라가 성지보호와 복원 활동
현재는 대각회 불교대표와 인도정부가 공동 운영관리
스리랑카의 비구니 스님들이 재가불자에게 오계를 주고 있다.
스리랑카의 현대불교를 소개하면서 최근에 활성화되고 있는 상좌부 비구니 승가를 거론하지 않으면안 되는 이유는 불교역사상 매우 중요한 그리고 획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좌부 비구니승가가 한국불교로부터 비롯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필자는 감동을 받고 있다. 물론 스리랑카나 미얀마 태국에 10계 정도를 수지하면서 준 비구니 역할을 한 다사실라(10계를 지키는 여성 수행자)들이 있었지만, 남방 상좌부 율장 전통에 의한 342계를 수지하는 정식 비구니 승가가 출현한 것은 1996년 이후의 일이다. 스리랑카에서는 1천 년 전에 비구니 계맥이 단절되었고, 미얀마에서는 ‘띨라신’ 태국에서는 ‘메치’라는 여성 수행자가 있을 뿐이었다. 필자가 비구니 승단의 재건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 분들의 포교활동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경우, 이 비구니 스님들이 마을 단위로 퍼져나가면서 포교활동의 영역을 넓히고 불교 본래의 대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한 종교의 일생을 보노라면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종교의 역사가 오래일수록 발생했던 지역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종교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종교는 탄생지를 떠나지 않고 수천 년 수백 년을 지키면서 원형을 지켜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출발지를 떠나서 제2, 제3의 지역에서 오히려 더 번성하고 흥성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불교에 국한해서 고찰해 본다면 발생지였던 인도에서는 거의 소멸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인도 불교는 기원전인 고대시대에 아소카라는 불교도 왕의 의지와 신심에 의해서 국책사업으로 인도 아 대륙과 해외에 불교전도를 하게 되었다. 인도 亞 대륙의 지도를 보면, 실론 섬(스리랑카)은 인도 亞 대륙의 맨 남쪽 끝에 물방울처럼 떨어져 있는 섬이다. 이 섬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의 일이다.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2300여년간 불교가 주류 종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도 와는 다르게 스리랑카에서는 불교가 외적 요인에 의해서 쇠퇴했다가도 나라가 평온해지면 내적 복원력이 빠르게 진행되어 원상회복이 가능했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아소카 왕 때이고,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인 비구 마힌다 장로와 딸인 비구니 상가미따를 직접 실론 섬에 보내서 불교를 전파시키는 열성을 보였다. 마힌다 비구는 불교 삼장(經律論)을 전했는데, 마힌다 비구 혼자서 실론에 간 것은 아니고 마힌다 비구가 그룹의 단장격이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 십 명의 비구가 함께 움직였을 것이고, 당시에 삼장은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구송(口誦)에 의한 전수였으므로 여러 명의 비구가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소카 대왕의 딸인 상가미따(Saṅghamittā, ?~281BCE)는 11명의 비구니를 대동하고 실론으로 향했는데, 그녀는 보드 가야 대탑 사원에 있던 보리수 오른편 남쪽으로 뻗은 가지를 실론에 가져다가 아누루다푸라에 있는 마하비하라(큰 절) 경내에 심었다.
지금도 이 보리수는 건재하다. 현재 보드 가야의 보리수는 실론의 이 보리수에서 가지를 다시 이식한 것이다.
보드 가야의 원래 보리수는 12세기 무슬림들에 의해서 베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 보리수 손자뻘이 되는 보리수라고 할 수 있다. 실론(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는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생존해 오고 있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거의 소멸단계에 이르렀지만, 인도권인 스리랑카는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다. 고대시대에는 남인도의 힌두세력에, 중세에는 이슬람 세력에 포위되고 공격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았고, 근대에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책략으로 거의 절멸의 위기에 까지 이르렀었다.
인도양의 중간에 위치한 스리랑카
이런 국난(國難)과 법난(法難)의 상황에 처한 스리랑카불교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이다.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였던 실론은 인도와는 다르게 불교가 강세였지만, 기독교 선교의 영향으로 기독교도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처음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민족주의란 바로 불교였고, 그는 불교를 새롭게 인식하고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했다.
그가 처음 가본 인도에서의 불교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불적지라고 있었지만, 힌두교도들이 관리하고 있음을 목격하고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각 인도불교성지보호와 개발을 위한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창립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인도 불적지를 순례하면서 가장 먼저 보드 가야로 가서 대탑(대각사)을 참배했는데, 이 탑은 불탑인데도 힌두 시바파의 승려가 관리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은 데에서 성지보호와 복원에의 원력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1892년에 당시 브리티시 인디아의 수도였던 콜카타(당시는 캘커타)에 대각회 본부를 설립하고,본격적으로 보드 가야 대각사 관리권 찾기에 시동을 건 결과, 지금은 불교대표와 인도정부가 공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해서 관리하고 있음은 그의 공로라고 하겠다.
인도 콜카타에 있는 대각회 본부에서 기념촬영.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중앙에 앉아 있다.
보드 가야 대각사(대탑)는 실론과는 보리수로 인한 깊은 인연이 있다. 고대시대부터 실론의 불교도 들은 보드 가야의 대탑과 보리수를 참배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 왔으며, 기원전부터 보드 가야에는 실론의 사원이 별도로 건립될 정도로 보드 가야와 실론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슬림들의 공격으로 이런 역사적 관련은 단절되었고, 19세기 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를 만나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대각회를 설립하고, 인도의 불교성지보호와 복원에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가 인도의 불교성지를 보호하고 복원하는 전말을 여기서 다 소개하려면 수백 쪽의 책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스토리가 길다.
19세기말경이면 인도는 브리티시 인디아로서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인도의 종교지형은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면서 이슬람 시크교 등이 공존하고 기독교도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불교는 12세기 이슬람의 침공으로 700백 년간 전무하다시피 할 정도로 소수 종교의 하나로 실 날 같은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불교란 종교를 잊고 있었다. 겨우 동인도(방글라데시의 치타공)와 라다크 지역에 몇 개의 사찰과 소수의 승려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같은 인도권으로서 실론은 그나마 불교가 살아 있었다.
인도불교의 상징, 보드가야 대탑
보드 가야 대각사는 팔라 왕조를 무너뜨린 힌두 왕조인 세나 왕조(11〜12세기)가 대체하면서 인도 북동부를 휩쓸었고, 그 다음에는 투르크계 무슬림의 한 장군에 의해서 파손된다. 그리고 부근에는 힌두 사원이 건립하게 되었다. 왕조를 잘못 만나면 아무리 강성했던 종교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인도불교의 쇠퇴는 이런 외부요인도 있었지만, 사실은 불교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종교가 이미 되어가고 있었다. 승가 내부의 타락과 민중의 외면이 점점 심화되어가는 차에, 외부의 공격을 받아서 결정타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대각사도 오랜 침묵 속에 묻혀버린 역사의 유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는 파손된 대각사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는 1880년대 고고학자 알렉산더 컨닝함 경에게 이 지역을 발굴하도록 했다. 에드윈 아널드 경은 1885년 이 지역을 방문하고 부다가야(보드가야)의 비참함을 주목하게 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와 에드윈 아널드 경은 의기투합하여 불교도에 의한 대각사의 관리권 이양 을 주장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이 운동의 결실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임종하기 전 비구계를 받고, 스님 신분으로 입적하고 그의 사후에 1949년 힌두 승려들의 손에서 관리위원회를 구성해서 불교 승려가 참여하게 되고, 위원장은 불교 승려가 맡도록 비하라 주 정부에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보드 가야(Bodh Gaya)는 인도 비하르 주 가야 지역에 있는 타운으로 대각사(Mahabodhi Temple)가 있는 곳이다. 보드는 깨달음(覺), 가야는 몸체(身)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각신(覺身)이란 뜻이다. 각신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한다. ‘깨달은 곳’이란 의미이다.
부처님이 되기 전에,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처음 왕사성에 갔다가 나중에는 전정각산(前正覺山)에서 6년간 고행하다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깡마른 체구를 이끌고 마을로 내려와서 우유죽을 공양받고 기운을 차려서, 바로 이 대각사가 있는 지점으로 왔다.
당시에는 이곳이 강둑(네란자라 강)에서 그리 멀지 않는 우루벨라 라는 곳으로 보리수나무들이 있는 숲이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 보리수 아래 자리(金剛寶座)를 잡고 명상에 들었다. 당시 출가한 무소유의 사문들은 동굴이나 나무 아래서 기거하면서 수행하는 것이 수행자들의 유행이었다. 결사항전의 각오로 용맹정진한 결과, 얼마가지 않아서 대각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 때가 기원전 528년(탄생 BC563)이다.
250년 후인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이 부처님의 대각(大覺)을 기념해서 이곳을 방문하고 절을 세웠던 것이다. 중국의 법현 법사는 5세기에 현장 법사는 7세기에 신라의 혜초는 8세기에 이곳 대각사 성지를 순례했다.
13세기 투르크계 무슬림 군대가 공격하여 파손한 후에 18세기 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인 불교성지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 의해서 주목을 받아 세계에 알려져서 많은 불교도들이 참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신심과 열성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임종하기 전, 비구계를 받고 비구가 되었고, 평생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다르마팔라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미국 일본을 순방하고 1913년 한국을 찾았을 때, 조계사를 방문 부처님 사리 1과를 기증했다고 하는데, 현재 조계사 앞 마당 사리탑에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