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충분한 게 어디 있어? 다다익선이지! 물론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워낙 많아서 하루에 네 시간 자기도 힘든 실정이야. 하지만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어놓으려고. 나중에 무슨일이 생길지 알아?”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분류하였다. 그는 ‘생리 욕구→안전 욕구→애정·소속 욕구→존경 욕구→자아실현 욕구’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식욕, 배설, 수면처럼 생존에 필요한 생리적인 욕구에서부터 출발해서, 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점차 고차원적인 욕구로 발전해 나아간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욕구 또는 욕망은 어떤 것을 채우려고 하는 감정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충족시키려는 데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불꽃과도 같아서 한 번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
그래서 허기가 사라졌음에도 과식하는가 하면, 성욕을 충분히 해소했음에도 성을 탐하기도 하고,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했음에도 더 위대한 승리를 향해 목숨 거는 위험을 선택하기도 한다.
욕망을 채우는 것은 컵에 물을 채우는 것과도 같다. 제정신이라면 컵에 물이 차기 전에 멈춘다. 컵에 물을 채우는 행위가 ‘자연스런 욕망’이라면, 넘쳐흐르는데도 계속 물을 따르는 행위는 ‘허황된 욕망’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본능인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해서 허황된 욕망을 부추긴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새로운 물건을 보여주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화려한 삶을 보여주며, 한 번뿐인 인생이니 이 모든 것을 한껏 누려보라고 속삭인다.
경쟁은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승부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안감도 커진다. 못 가진 자들은 열심히 일해도 끝내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하고, 적당히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해서 불안하고, 많이 가진 자들은 누리고 있는 특혜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불안하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욕망을 채우려면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욕망만 따라가다가는 인생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 채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욕망을 추구하는 게 좋을까? 우리는 컵에다 물을 따를 때 목마름의 정도를 무의식중에 감안한다. 갈증이 심할 때는 컵에 가득 따르고, 적당히 갈증이 날 때는 반만 따르고, 입안이 건조해서 살짝 축이고 싶을 때는 삼분의 일만큼만 따른다.
성인이라면 자신의 인생관 내지는 가치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욕망이 필요하며, 그 이상의 욕망은 불필요한 ‘허황된 욕망’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무조건 ‘다다익선’을 부르짖다가는 끝 모를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혀서 아까운 인생을 탕진하게 된다.
경제학 용어 중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밀이 있다. 부유한 사회에서는 소비보다 저축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이용 가능한 자원과 생산설비를 충분히 가동하지 못하함으로써 물질적 빈곤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의 삶 역시 비슷하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지려다 보면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반면 자유 시간이 줄어든다. 또한 감각이 둔화되어서 물질에 대한 만족도나 삶에 대한 만족감도 줄어든다. 과거와 달리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킬 능력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저축함으로써 오히려 욕망의 갈증을 느낀다.
17세기 스페인의 작가이자 현자였던 벨타사르 그라시안이모랄레스는 욕망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일단 손아귀에 사로잡히면 몸의 기능이 쇠약하게 될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욕망을 적당히 탐할 때 인생이 즐겁다. 잔에 물이 적당히 채워졌다면 이제 그만 욕망의 주전자를 내려놓아라. 그 순간, 당신의 가슴을 옥죄던 불안감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 ‘걱정이 많아서 걱정인 당신에게,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 감정에서 탈출하는 법(한창욱, 정민미디어, 2019)’에서 옮겨 적음. (2019.08.30.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