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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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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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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의 정체성은?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비롯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그리고 하느님이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도 신자들을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여기게끔 처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처신이 세상 사람과 똑같기에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하느님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인지 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정체성이자 신원 의식입니다.
자신들은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종이지 죄의 종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누구의 하수인도 아니라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지 세상사의 관리인이 아니라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기에 세상의 어떤 시비에도 말려들지 않는다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어떤 판단도 받지 않겠다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기에 하느님으로부터만 판단을 받겠다는.
이런 바오로 사도의 말은 즉시 프란치스코를 떠올립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 말씀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그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재산을
거덜낼 것을 염려하여 프란치스코의 소유권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세속 법정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니
그는 자기가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세속 법정에서 판결받지 않고,
교회 법정에서 판결받겠다고 하여 주교님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주교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 유명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옷을 홀라당 벗어서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행동 말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다 돌려주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옷을 홀라당 벗은 것도,
아버지 것을 아버지에게 다 돌려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서 그가 한 선언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르게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육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선언이고,
그래서 전기 작가인 첼라노는 프란치스코를 내내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칭하지요.
비참하게 죄의 종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시시하게 세상에 속한 사람도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을
우리도 가지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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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으냐?”(루카 5,3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새로운 때’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단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온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새 부대’란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착한 강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날드 롤하이저)를 들려드립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강에서 세 사람이 떠내려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심하게 부상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강에서 건져내어 죽은 사람은 정성껏 매장해 주고, 부상당한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어린 아이는 돌볼 가정에 의탁했습니다. 이 마을에 이런 사건들이 수년 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떠내려 오는 사람들을 잘 건져낼 방법을 고안하고, 그들을 잘 돌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런 자선행위에 자부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강 상류에 올라가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죽거나 다쳐서 떠내려 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착한 마을 사람들처럼 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이해대로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의한 사회적 환경에 대하여 교회가 갈등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저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떠내려 오는 이들만 도우면 될 테니까요.
만약,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환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식별하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과 공동선, 인간과 생명이 존중되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요한 7,7)
브라질의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이런 체험을 전해줍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가를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카마라 대주교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아픈지, 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이들이 많아지는지, 왜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착취되는지, 그 원인을 묻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우리의 현실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주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게 하소서
이 나라, 이 땅이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오순도순 모여 사랑 가득 채운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사랑과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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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하는 신부님을 위한 송별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동차로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기쁜 마음으로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교구 사제모임을 하면서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한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나이가 많은 선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침실을 가장 좋은 침실로 정해 줍니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하려 해도 후배 신부님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배려 해주는 후배 신부님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배는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선배들의 말을 실천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미안함 마음은 늘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인 저는 디지털 세대인 후배들의 능력에 감탄 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마술사와 같이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만들어 내는 것을 봅니다. 5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신부님께 수고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아 있는 사제들도 소임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은 매주 미사 후에 친교를 하고 있습니다.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친교를 위한 비용입니다. 생일, 기일, 백일, 졸업, 연도와 같이 애경사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친교의 비용을 내어 놓습니다. 늘 2달 정도는 친교 신청이 밀려 있습니다. 저도 곧 어머니의 기일이기에 친교를 신청했습니다. 음식 준비입니다. 국수, 비빔밥, 떡, 빵, 김밥과 같이 다양한 음식을 마련합니다. 본당 성모회의 임원들이 매주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차림입니다. 친교실 창고에는 의자와 접이식 탁자가 있습니다. 일찍 오는 분들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습니다. 저도 일찍 성당에 가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보다 일찍 오는 교우들이 먼저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합니다.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모회에서는 탁자에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꽃병을 놓습니다. 그러면 친교실은 아름다운 연회장으로 모습이 바뀝니다. 각종 야채가 들어간 비빔밥, 시원한 오이냉국, 후식으로 빨간 수박이 준비된 나눔은 부러울 것 하나도 없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는 선배를 배려하는 후배들의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부대는 매주 친교를 위해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봉사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새 부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 포도주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들의 ‘성실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새 포도주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새 포도주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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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사를 하는데, 누군가가 저만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빤히 보시는 것입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곧바로 제의방 거울을 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더군요. 성당 입구에서 인사하는데, 저만 바라봤던 자매님이 제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15년 전 갑곶성지에서 신부님을 처음 봤었는데,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 저는 이렇게 많이 늙었는데, 신부님은 하나도 늙지 않으셨어요.”
늙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역시 늙고 있습니다. 주름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없어졌으며, 검버섯도 보입니다. 젊어 보이는 부분은 제 또래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다는 것뿐입니다. 그밖에도 늙음의 징후는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님은 저를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하실까요? 자기 자신과 저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많이 늙었는데, 저는 늙고 있지 않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비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곳에서만 제대로 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렇게 물으면서 그들은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지 못한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생활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성적인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러 오셨지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새 옷과 새 부대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세대에는 새 기분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새 세대를 열면서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헌 옷에 새 천을 대고 기워보아도 옷은 더 찢어지기만 할 뿐, 헌 것(율법 시대)은 폐기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을 빌미로 각종 외부적인 형식으로 경직된 종교가 아니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풀어 나아가는 개방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과의 비교는 절대 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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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좋은 점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칭찬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남을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생각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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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기
-꼰대가 되지 맙시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새것과 헌 것”을 주제로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걸 듯 이의를 제기하는 참 고루해보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순간 “꼰대”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꼰대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 꼰대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꼰대와 멘토,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야말로 영원한 멘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습니다.
꼰대 6하 원칙에 의하면 꼰대는 “1.내가 누군 줄 알아? 2.네가 뭘 안다고, 3.어디 감히, 4.왕년에, 우리 나이 때엔, 5.어떻게 나한테, 6.내가 그걸 왜?” 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자라합니다. 꼰대 방지 10계명도 재미있습니다.
1.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2.“고맙다” “수고했다” 고 자주 말하라.
3.오만하지 마라.
4.칭찬에 인색하지 마라.
5.능동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라.
6.강요, 협박등 강압적 태도를 자제하라.
7.매사 솔선수범하라.
8.젊은 세대의 문화에 민감하라.
9.자기계발에 힘쓰라.
10.진짜 꼰대가 되라. 진짜 꼰대는 본인의 뚜렷한 소신과 철학이 저절로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참 재미있습니다. 어제는 참 귀한 자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짐이 되는 선물은 사양하는 편이지만 어제의 원숙한 노년의 요셉 성인상 그림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하루 2-3시간, 6개월 걸려 그림 그림이라는 설명에 놀랐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자비하신 노년의 아버지 모습의 렘브란트 그림과 짝을 이루는 성 요셉의 그림에, “아, 나도 이제 자비하신 할아버지 나이에 도달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림의 이런 자비로운 노년의 어른들을 두고 꼰대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부터 10월4일까지의 창조시기 바치기 시작한 기도문도 참 좋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시의적절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섬세한 조치에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톨릭의 힘이며 자랑일 것입니다. 철저한 생태적 회개를 바탕한 고백은 물론이고 다음 부분만 잘 명심하여 기도를 바치면 꼰대 예방에도 좋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참고로 어제 피조물의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주제는 “피조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였습니다.
“올해 창조시기에 청하오니,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처럼, 꺼지지 않는 주님 성령의 불로 저희를 불러 주소서. 저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소서. 저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자기 내면만 향하던 시선을 돌리게 하소서. 주님의 피조물을 관상하고,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각 피조물의 목소리를 듣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이 거룩한 땅을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우는 저희를 주님의 은총으로 비추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한마디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며 겸손히 배워 실천하면서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꼰대로 부터의 탈출이 가능하겠습니다. 꼰대가 아닌 꽃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이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꼰대에 버금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이의 제기에 주님은 흥분하지 않고 이들의 무분별의 무지를 일깨우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로 단식의 때 단식하라는 충고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계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축제의 때, 왜 축제인생을 자초하여 고해인생으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새것과 헌것의 비유를 통해 아주 알기쉽게 설명하십니다.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헌옷에 새 천조각을 꿰매는, 헌 가죽 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어리석은 꼰대 짓으로 매사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늘 깨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새 부대의 마음으로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새삼 노년의 지혜에 해당한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마음의 부대가 되도록 깨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이 종래의 관행에 익숙해진 우리의 보수적인 집착의 경향이 얼마나 바꾸기 힘든지, 그리하여 꼰대의 처지를 이해해야 함을 또 배우게 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무시할 수 없는 인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새 부대의 마음으로 새 포도주의 현실을 받아 들이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이런 겸손한 노년의 분들은 저절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새삼 꼰대는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 87세 노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꼰대라고 하겠는지요! 교황님의 정신의 젊음, 마음의 젊음은 어느 젊은이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정신 역시 복음의 예수님처럼 젊고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늘 주님 앞에서, 그 책임을 다한 결과의 확신일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나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세상 잣대가 아닌 주님 사랑의 잣대로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유로운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였을까?”가 참 좋은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시편37;27,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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