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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 가는 길
출 13: 17-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밑그림을 준비하여 오셨다. 그 그림은 구약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죄와 사망 중에 있는 인생을 구원하시는 경륜을 그림으로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외면적 역사는 나의 내면적 구원의 역사로서의 의미가 있다. 종 되었던 애굽을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과정을 그린 출애굽의 역정은, 그래서 때때로 사단의 수중에서 구원받아 교회생활을 통하여 천국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역정에 비유되곤 한다. 맞다. 모든 인생은 바로에게 사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바로라는 사단의 손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내셨다. 구원받은 백성은 이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천국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역정이다.
우리는 이제 신앙의 긴 여로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서 가듯이, 죄와 사망의 현실에서 나와서 영적인 천국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역정이다. 이 역정에서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여행자가 여행을 위해서 행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하듯이, 오늘은 우리가 걸어야 할 신앙역정이 어떤 길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갖는 것은 참 유익할 것이다.
첫째로, 신앙의 길은 돌아가는 길이다.(17절)
출애굽기는 400여 년간의 세월을 종으로 살던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애굽의 왕, 바로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중노동과 끝없는 태러의 위험 속에서 생명과 삶을 유린당했다. 아! 그 희망 없는 긴 고통의 터널 속에 깊이 떨어진 이후에야, 눈물 흘리는 고통을 당하고 나서야 부모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이스라엘은 비로소 그들의 여호와를 찾았다. 탄식으로 그들의 아버지를 불렀다... 그리고 자비하신 아버지가 그들의 슬픈 운명에 손을 대신다. 모세 안에서, 아버지는 가나안의 비전을 품고 애굽을 떠나게 하신다.
본문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17절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대단히 특이하다. 이스라엘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그 땅은 애굽을 출발하여 해안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잰걸음으로 사나흘이면 된다. 당시 사람들은 애굽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올라가거나, 반대로 내려갈 때 이 해안 길을 이용하였다. 평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나흘이면, 아니 일주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길을 놔두고 6~7배의 거리나 되는 광야 길로 이끄신다. 이 광야 길은 평탄한 해안 길과 비교되지 않는 악조건을 갖고 있다. 한 낮의 살인적인 더위가 있다. 한 밤의 살을 에이는 추위가 있다. 황량한 사막에서 물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쉴 만한 곳도 여의치 않다. 먹을 것도 없다. 광야의 배고픔을 견디며 갈아놓은 짐승들이 날카로운 이빨이 가까운 곳이다...... 도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더구나 남자 장정 60만,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합하여 약2백만이 이 길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 길로 돌아가게 인도하신다.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왜 이렇게 인도하셨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여러분을 이런 방식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지 않던가? 목표가 분명한데 하나님은 납득하기 어려운 형편으로 몰아가시는 경우를 경험하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는 종종 그런 일을 경험한다. 왜 이렇게 돌아가게 하시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길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앙의 길은 '돌아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돌아가도록 인도하신다.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지름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신앙의 길은 돌아가는 길이다. 신앙의 긴 역정을 지나 온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첩경을 따라 걸어 온 것이 아니라, 끝없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시인할 것이다. 인생의 먼 뒤안길을 걸어 온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무던히도 돌고 돌아서 여기에 왔어......" 이것은 진리이다. 인간은 돌고 돌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지겨운(?) 신앙의 역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높은 신앙의 수준에 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쉽게 아브라함을 말한다. 야곱을 말한다. 너무 쉽게 바울을 들먹인다. 너무 쉽게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그들의 영적인 수준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들의 인생의 뒤안길에 뿌려진 눈물을 아는가? 끝없는 갈증을 이해하는가? 목마름을 상상하는가? 그 끝없는 배고픔의 노정에서, 불어오는 모래 폭풍 속에서 빵 대신 모래를 삼켜야 했던, 그들의 지리한 여정을 이해하는가? 얼마나 많이 울어야 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외로워야 하는지 모른다...... 왜 그런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태도를 다시 가져야 한다. 인생은 돌아갈수록 좋다. 끝없이 반복해야 한다.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 사람들은 지름길 찾기를 좋아한다. 나도 첩경을 찾으려 했다. 학교 다니는 것이 지루하고 소비가 많은 것 같이 느껴져서 검정고시를 하려고 하였다. 첩경을 이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3년이면 되는 길을 12년만에 걸었다. 특히 청소년의 머리는 지름길로 가득하다. 첩경으로 가득하다. 청소년은 더욱 그렇다고 한다. 요즘 MBC에서 방영되는 '허준' 때문에 말이 많다.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는데, 요즘은 스토리의 패턴이 너무 뻔하다는 것이다. 무슨 사건이 시작되면 금방 어떻게 끝날 것인지가 손에 잡힌다. 시청자의 생각이 시작과 함께 결론에 가 있다. 거기에 무슨 깊이가 있겠는가? 과정이 빈약하면 깊이는 사라진다. 깨달음도 천박하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인생의 가나안이 꽃피리라고 생각하는가? 좋은 직장에만 취직하면 행복의 꿀송이가 눈앞에 열리리라 생각하는가? 결혼하면 금방 가나안의 초원지대가 펼쳐지리라 생각하는가? 속지 말라. 여러분의 현재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직선거리가 아니다. 의식의 직선거리를 소유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자신과 목표지점을 언제나 직선거리로 본다. 2층 베란다에서 놀던 아이가 밖에서 빨래를 널고있는 엄마를 보고 엄마에게 가려다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일을 기억한다. 그는 엄마에게 가는 길을 직선거리로 보았다. 그 안목이 그를 죽였다. 그는 계단을 따라 돌아가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려면 인생의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품을 아는 것이다. 신앙의 이치가 그렇다.
그러면, 왜 돌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돌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그 필연적인 이유가 뭔가? 본문(17절 하반절)을 보자. '이는', 돌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라고 했다. 왜 이스라엘은 돌아가야 하는가? 왜 광야를 거쳐야 하는가? 왜 그들은 목말라야 하고, 배고파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블레셋 사람의 길을 감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연약함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불레셋 사람의 길(17절)'은 가나안에 이르는 최단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길에는 블레셋이 있다. 블레셋은 당시 근동의 최강이었다. 그들과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그들은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전쟁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전의를 상실하고 애굽으로 그냥 돌아가는 게 좋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을 향한 꿈도 버릴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약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전쟁과 왕이신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함은 곧 믿음이 없다는 사실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면서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그를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 돌아가야 하는 신앙의 역정, 그 유일한 이유는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신! 이것이 돌아가야 하는 신앙역정의 최종적인 이유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차선이 '돌아가게 하시는 경륜'이다.
여러분의 광야생활은 어떠한가? 얼마나 돌고 돌면서 눈물 흘리고 있는가? 남편과 함께, 아내와 함께,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얼마나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괴로워하고 있는가?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혹시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의 불신 때문'이라는 외침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결과들이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라도 주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둘째로, 신앙의 길은, 그러나 반드시 도착하는 길이다.(18~19절)
돌아가는 사람에게 한가지 걱정이 있다. 내가 이렇게 빙빙 돌다가 끝나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내가 천국의 삶을 이룰 수 있을까? 나의 인생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경험할 수 있는가? 내가 이렇게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하는 걸까?...... 내 인격이 정말 변화될까? 정말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살수 있을까?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 수 있을까? 내 인생이 정말 젖과 꿀을 경험할까?...... 끝없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이것이 신앙의 갈등이다.
18~19절을 읽자. 이스라엘이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온다. 요셉의 유언에 따라 하나님은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오도록 했다. 뭐 하려고 해골을 가지고 나왔는가? 그렇다. 가나안 땅에 묻으려고 가지고 나왔다. 요셉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창15:13~16)을 믿었다. 400년간의 애굽생활이 끝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믿었다. 그래서 임종시 애굽을 나갈 때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서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50:25). 진정 요셉은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나안 정복 후 가나안 땅에 묻힌다(수24:32). 그러므로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반드시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오도록 하셨다. 이유는 가나안 땅에 매장하기 위해서이다. 가나안 땅에 매장하려면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 땅을 정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땅은 정복될 것이다. 해골을 가지고 나오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매장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해골을 가지고 나오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 속에는 약속의 땅에 먼저 도착하도록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애굽을 탈출했는가? 사단의 손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우리의 가나안은 천국이 될 것이다. 우리는 천국 갈 사람들이다. 물론 지금은 광야의 길에서 고단하다. 지금은 광야의 길에서 생명수가 없어서 목말라 한다. 지금은 광야의 모진 모래 바람 때문에 슬피 울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생 광야에서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요셉의 유골을 그 땅에 묻었듯이, 우리들도 젖과 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의 해골을 들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천국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셋째로, 신앙의 길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길이다.(21~23절)
그래도 우리는 실존적인 두려움에 빠진다. 신앙은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을 배우기 위해서 끝없이 방황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목표가 분명하다고 해도 나는 지금 너무나 약하다. 내 믿음을 나도 신뢰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광야의 길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포기할 지도 모른다. 목마름에 죽을지도 모른다. 살인적인 더위에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약한 존재들이다. 누가 우리의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두렵다. 이 긴 돌아서 가야 하는 길을 어떻게 가나!
본문21~22절을 보자. 본문에는 첩경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정말로 이후로 이스라엘에게는 낮에는 구름기둥이 함께 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함께 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사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구름기둥으로 살인광선을 차단해 주시고, 불기둥으로 밤의 냉기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다.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나타낸다. 그의 임재를 나타낸다. 사막의 길은, 광양의 길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막은 살인적인 더위가 있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장정은 몰라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지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낮에는 덥고 낮에는 기온이 급강하한다. 그 조건을 이스라엘은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셔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도움이 되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살인적인 더위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다. 광야의 공기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늘만 있으면 시원하다.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서 보온을 유지하도록 하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런 의미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도우신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인가?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가?
우리의 광야길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예수님이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가? '임마누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당신의 약속의 성취이다. 구약 광야인생에게 구름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를 도와주신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땅에 왔다. 그가 예수다.
여러분은 예수가 가슴에 있는가? 영혼 깊은 곳에 예수가 좌정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을 확신해야 한다. 광야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 이것을 믿으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엄청난 비밀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내 안에 영으로 존재한다는 이 분명한 확신! 이것이 인간 최고의 발견이다. 이것을 확신하라. 감격하라. 여기에서 모든 실마리가 풀려 나간다.
인간은 하나님이 도와야 산다. 인간은 연약하다.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해태의 야구선수 김상진 선수가 죽었다. 펄펄날던 운동선수의 육체는 이미 썩어 버렸다. 여러분의 장점인 신체적인 조건은 곧 썩을 것이다. 그전에 손숙씨와 정한용씨가 진행했던 아침 프로그램 '여성시대'에서, 한 남편이 글을 보냈다. 여성의 글마당에 남자의 글이 나오는게 이상했다. 그런데 그는 아들 하나를 낳고 딸이 하나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아서 낳았는데 선천성 백혈병이었다. 재산 다 탕진하고 부인에게 버림받고 홀로 남아서 눈물로 세월 보낸다고 했다. 아! 인간은 연약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보이지도 않는 갑상샘 한 가닥이 잘못되면 죽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도움! 이것이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생활필수품이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도움은 절대적이다. 생명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라. 그 분이 동행해 주시기를 사모하라.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내가 너와 동행해 주마. 내가 너의 도움이 되어 주마. 내가 너를 인도해 주마. 나를 믿으라. 너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너는 알라. 나 여호와가 너의 유일한 도움임을 믿으라.' 잠잠히 그를 보라. 그가 우리와 함께 계셔 도와주신다.
다시 한 번 기억하라. 우리는 연약하여 완전한 믿음을 소유하기까지 돌아서 가야한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표에 이른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렇게 하시고야 만다. 그리고 그 길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인도하신다. 그 분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도우신다. 결국 우리는 젖과 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므로 여러분의 광야인생 때때로 쉼을 얻고 젖과 꿀을 더욱 사모하기를 바란다.
늦어지는 것이 축복
출 13: 17-22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 보셨을 줄 압니다. 생전 처음 가는곳. 초행길 일때에는 그 가는 길이 멀고 멀게만 느껴지는 법이지만, 몇 번 다녀보면 이젠 별로 멀다 느껴지질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낯선 길'을 통해 목적지로 가는 일은 개척정신과 인내심이 없으면 도무지 못할 일이 되는 법입니다. 그것이 힘들면 남들은 '닦아놓은 길로 가면될 것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살다보면 미개척지에 들어서는 입구에 내가 제일 앞장서게 되는 날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가들을 참 존경합니다. 미술을 하던, 음악을 하던, 무용을 하던, 그 창작의 길을 앞서 걸어가며 무언가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저들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급한 사람"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자기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뼈를 깎는 고통',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저 남들이 음악을 잘하니까 멋있어 보여서 섣불리 달려들다가는 세월 낭비할 공산이 큽니다. 그저 남들이 예쁜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나도 해봐야지 하는 말만 가지고 그 일에 달려들었다가는 헛고생하기 십상입니다. 그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을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으로 한자리를 지켰겠습니까.
여러분! "장인정신"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무슨 일에 종사하는 그 자체를 단순히 생업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그 일에 온 정신을 담는 자세로 집중할 때 감히 어떤 누구도 따라올 수(흉내 낼 수)없는 "작품"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허준'신드롬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책도 읽어서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가 영상에 담겨 눈앞에 펼쳐질 때 그 감동이 남다르다는 얘깁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이 '허준'의 매력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돈" 보다는 "사람 살리는 일"이 의술을 가진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정신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지난번에는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는 도중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느라고 시험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장면이 나올 때는 사람들마다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허준의 출세가 늦어지는 장면이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깊은 인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시험에 돈으로 입적한 유의원(허준스승)의 아들을 향해 유의원이 호통을 치며 "너는 허준이에게 졌다. 이제 평생 허준이를 이길 수 없을게야! " 라고 말하며 부자간에 의절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빨리 출세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정신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허준이도 처음에 의술을 배우러 들어가서는 "물동이 지는 일"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의 병을 고치려면 약 짓는 법, 침 놓는 법부터 서둘러 배워야 당장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을텐데 왜 물지게부터 져야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초는 사람의 육신을 다루기 전에 빈부의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사람이 초행길을 갈 때는 어딜 가든지 멀게만 느껴지는 법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인생 중에 초행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남들은 자기 자신이 다 경험해 본 일이라고 하고 갖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닦아놓은 길일뿐. 자기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혀 가며 경험할 때는 모든 것이 다 낯설기만한 초행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그리 멀지 않다."고 강조하지만 당사자인 자기자신은 이 길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때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조급함으로 서두르다가 정말로 중요한 것. 즉, 바른정신을 놓치는 수가 있기 때문이죠. 인생은 미개척지입니다. 내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조심스레 "초행길" 더듬어가듯 전진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손재주"가 아니라 "장인정신", "예술 혼" 이고, 의사에게 중요한 것은 "병 고치는 기술" 이 아니라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정신" 이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남들보다 조금 더 부요하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왜 이 세상을 살고 있고 지금 내가 어디쯤에 와 있으며 지금부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 빨리 무언가를 이루어 놓아야겠다는 조급함보다는 조금 늦어지더라도 차라리 기초 "신앙의 기초", "신앙의 체험"을 잘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살면서 그럴듯한 무언가를 이루려는 노력만 하기 보다는 " 내용이 있는 삶" 즉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지닌 바른 신앙의 자세가 베여있는 그런 인생이 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삶을 너무 단순하고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보니 무엇이든 '빨리 빨리' 성취하고만 싶고 또 그렇게 빨리 무엇이든 성취한 사람을 성공한 인생으로 보는 경향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길고 짧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때론 인생의 초행길에서 원치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거친 광야'를 만날 때도 있고 지름길을 놔두고 먼길로 돌아가게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남들처럼 시원시원하게 전진만하는 것도 부족한데 갑자기 막힌 길(아득한 길)로 들어가 어디서부터 길을 뚫고 가야할지 몰라 까마득할 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난관을 만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늦어지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우리모두는 각자가 다 자기 앞에 놓여있는 인생 길을 열어가야 할 개척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급히 서두르고 완벽을 추구하며 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을 짓는가 하는 것이기 보다 어떤 과정을 밟았느냐에 달려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탄식과 눈물을 보신 주님은 떨기나무불꽃 속에서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시고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도 오랜 세월 일을 부리던 이스라엘을 하루아침에 내주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10가지 재앙'을 만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급기야 '장자'를 잃은 비참한 지경에 처하고서야 저들을 풀어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다음장면 즉, 10가지 재앙을 다 치루고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도달하기 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디로 이끌고 가셨는가 하는 장면에 해당됩니다. "어떻게 얻어낸 자유인가?" 그런 "바로 왕의 마음이 또 어떻게 맞이할는지 알 수 없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 아니던가?" 이럴 때는 한시바삐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머얼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지름길이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그 길을 택하고 속히 바로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일이 급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시가 급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디로 데리고 가셨는지 아십니까? 결코 인생의 생각만으로는 납득하기가 힘든 방향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약속시간을 정하고 나가서 기다리다 보면, 꼭 늦게 도착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늦어지는 사람은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심 '뭐 5분∼10분 정도야 이해하고 기다려 주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여러분. 여러분이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 본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을 기다리게 해 놓고는 5분∼10분 늦은 것이 '조금' 늦은 것이라 하겠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5분이 50분 아니 5시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급히 어딜 가야하거나 또 다른 약속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1분∼2분만 늦어져도 기다리는 당사자는 1∼2시간 늦게 오는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급하면 급할수록 늦어지는 것이 납득이 가질 않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생 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무척 분주한 사람들이 누구보다 앞서 가야하겠고,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놓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종종 '매우 급한 사람','매우 바쁜 사람'이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서 오히려 더 늦어지고 더 멀리 돌아가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윷놀이의 목표는 빨리 골인지점에 말이 다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때도 어떤 사람은 처음에 '모'나온 다음에 '걸'나오고 그 다음에 '윷'이 나와서 간단히 말 하나가 나오는가 하면, 남들은 말이 다 나왔는데 난 아직도 출발도 못하고 있다가 겨우 윷이 한 번 나와서 '좋다! 이제 풀린다.'하고 소리쳤는데 그 다음엔 '개'가 나와서 살짝 지나가더니 또 그 다음 모퉁이도 살짝 비껴가서 남들 질러가는 길을 크게 빙 돌아가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느긋한 사람이라면 '이게 인생이다.' 하면서 휘파람 불며 말을 놓을텐데 급한 사람은 "이거 정말 안되네. 지금 돌아갈 시간이 없는데"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러가도 시원치 않을 길을 빙돌아가느라고 속이 바짝타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나는 갈길이 바쁜데 무슨 일을 해도 남보다 시간도 두배 더 걸리고, 물질도 두배나 더 들고, 고생도 두배나 더 해야 할까'
보십시요! 정말, 살기 위해서는 갈 길을 서둘러야 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저들을 일부러 늦추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 어떤 길을 갔는지 아십니까?
(1) 그들은 먼길(돌아가는 길)로 가야했습니다. (출14:17)
사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광야까지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자기들의 본토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길이 없는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름길을 막으셨습니다. 일부러 돌아가게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질러가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을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생사가 걸려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죽기살기로 싸우면' 블레셋 땅을 지나갈 수도 있었을 법한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의 전쟁상황을 만나게 되면, 죽기살기로 부딪쳐 보자' 하기보다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편이 더 낫겠다' 고 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먼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지금 이스라엘은 너무 오랜 종생활로 인하여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그저 자기 처지만 탄식하며 세월을 보내는 약하디 약한 처지였다는 말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거친 현실(전쟁)에 마주서는 것 자체가 저들에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속도를 조절하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어려움을 만나면 금방 편안했던 소시쩍 생각 먹고 살만했던 옛 얘기만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왜 돌아가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날 보실 때 '뒤돌아서지 않을 만큼 견고한 신앙이 아직 갖춰져 있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과거로 다시 되돌아가기보다는 좀 시간이 걸리더라고 멀리 돌아가는 편이 너를 위해서 더 좋겠구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 보십시오. 빨리 고향에 들어가는 것보다 변하기 쉬운 간사하기 이를데 없는 인생의 마음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막상 어려움을 만나면 "마음이 바뀌어"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스라엘만 쉽게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애굽 왕 바로도 온갖 고초를 다 겪고서 할 수 없이 이스라엘을 내 보냈지만 출14:5을 보면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마음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한 하나님은 '멀리 돌아서가더라도(40년이 걸리더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변함없이 붙들기를 훈련시키셨듯이 지금 우리를 훈련시키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복입니다.
(2) 그들은 거친 길(광야 길)로 가야했습니다. (출14:18)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지났던 광야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어찌보면 피할 수도 있었을 법한 길이었습니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좀 편안하고 안전한 길이었다면 좋겠는데 시간은 시간대로 더 걸리는데다가 또 고생은 고생대로 더 하게끔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 길에서 얼마나 '속전속결'을 외치며 남들보다 한발작 이라도 앞서가기를 원하였습니까?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남들 다하는 고생을 나는 안하고 좀 편히 지날 순 없겠는가에 얼마나 집착했었습니까? 그런데 남들보다 편한 길을 찾다가는 오히려 남들보다 몇 배 더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남들보다 더 피곤하고 힘든 인생 길을 걸으면서라도 얻어야 할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비싼 값을 치르면서 배워야 할 만큼)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편한 길로 하나님 없이 혼자 달려가는 것 보다는 고난의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을 앞서 인도하시는(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을 좇아가는 것이 몇 갑절 더 복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친 인생 길을 살면서도 "하나님! 왜 나는 남들보다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만 하는 겁니까?" 하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 내가 이 광야 길에 들어선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내가 바로 이곳에서 내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불기둥.구름기둥 하나님)만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저에겐 최고의 축복입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광야(거친 길)을 이리 부딪히고 저리 찢기며 지나느라고 상처 투성이 이신 분이 와 계십니까? 지금은 비록 죽을 지경이라 할지 몰라도 여러분은 지금 앞서 가시는 주님만 바라볼 수 있다면 축복받으러 가시는 길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마십시오.
(3) 갇힌 길(막힌 길. 아득한 길)에도 들어서야 했습니다.(출14:3)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길로 거친 길로 데리고 가시더니 결국 어디까지 데리고 가셨는지 아십니까? "막다른 길"까지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야말로 오도가도 못할 막다른 길, 땅으로 들어가야 할지. 하늘로 날아 올라야 할지 도무지 더 이상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몰고 가셨습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14장 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막다른 길에 가 있다.'할 때, 바로가 마음이 바뀌어 '이때다.'하고 쫒아 올 때 저들을 이곳 홍해에 수장시켜 "본때를 보여주시려고" 이스라엘을 막다른 곳에 두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계심을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셨다는 내용을 본문에서는 훨씬 점잖게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두손 다 들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눈으로 똑똑이 봐라.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를' 하고 보여주실게 있었고 애굽에게도 '너희도 잘 봐라.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를'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때로 기가 막힌 형편에 처해 보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빨리 출애굽에서 빨리 고국 땅을 밟게 하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때론 거친 길로, 때론 막다른 길로도 몰아가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8:2∼3에 정확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를 고생시키며 시간이 걸리게 하시며 또는 막다른 길에 세우신 것은 사람이 자기편리한 대로만 살수있는게 아니라 조금 더 수고하더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늦어지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늦어진 만큼 더 소중한 것을 축복으로 받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낮엔 구름기둥, 밤은 불기둥
출애굽기13장 17-22절/김병덕 목사
출애굽기13장 17-22절] “파라오가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뜻을 돌이키고 이집트로 되돌아갈까 염려하노라, 하셨기 때문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백성을 인도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와 무장을 하고 올라가니라. 모세가 요셉의 뼈를 취하니라.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 그들이 숙곳에서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진을 치니라.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백성 앞에서 치우지 아니하셨더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영혼 구원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도리어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편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 이단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본다면 그리스도편지 역시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제가 구원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고 또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의 모든 설교가 다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보아도 맞습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모든 성경은 다 이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보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안에서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살펴보고 그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성경을 통해서 평생 알아가도 우리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두 가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악을 즐겨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육적인 이스라엘이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은 물론 단회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저 역시도 백번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성도와 그렇지 않은 교회 안에 교인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을 확신하면서 자기 구원에 대해서 성경에서 계속해서 확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두 가지를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이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교회 안에서 온갖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인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그 행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도는 구원에 대해서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까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또 하나님의 성도로서 성화가 되어야 하고 또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더욱 잘 나타내서 그것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옳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말에 거의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구원도 받지 않고 그저 종교인으로 열심을 내고 있는 그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주님 앞에서 먹었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율법을 지켰고 주의 이름으로 이제 막 교회에 들어온 소자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가르쳤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모든 일이 악이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7장의 그 일들을 그대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 가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을 보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마나 많은 예표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그런 것이 안 보이면 소경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만 소경입니까? 그들만 음녀였습니까? 그들만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까? 이것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설경은 이스라엘이 왜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은 잘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 믿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경입니다. 그리고 음녀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로 이 시대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것을 이스라엘의 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처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 받았습니까?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한 모양이라고 취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그저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은 정당하다고 하고 있고 남이 지키는 율법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영의 싸움과 육의 싸움을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육의 싸움은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을 잘하려고 하는 것이 육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영의 싸움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싸우고 있는 싸움부터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성경은 곧 영생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왜 성경을 보는지 조차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다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부르니까 마치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야 합니다. 죽을 때 까지 나에게 영생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읽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다 아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어느 정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의 일을 너무 모르고 있고 또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17절) “파라오가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시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뜻을 돌이키고 이집트로 되돌아갈까 염려하노라, 하셨기 때문이라.”
새 번역] “파라오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모세 오경은 창세기부터 이집트 탈출기(출애굽)의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창설하셨고 또 그 자손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있고 세상이 얼마나 쉽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가를 보여 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 자손들을 이제 천국의 모형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이집트의 왕 파라오도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내 보내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두고 싶었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노예가 되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천국의 모형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광야라는 교회에서 이스라엘은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까지는 그리 먼 길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있다 해도 넉넉잡고 30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중간에 블레셋 땅이 있었습니다. 그 길로 그냥 가면 반드시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전쟁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무기도 없고 또 군대도 없기 때문에 사실 싸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전쟁입니다.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뜻을 돌이키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단 전쟁이 없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 하셨습니다. 물론 블레셋과의 전쟁은 피했지만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아말렉과 전쟁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말렉을 이 세상에서 영영히 그 씨를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그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고백하였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많은 싸움을 했습니다. 물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역시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서 수많은 종족들과 싸움을 했습니다. 그 모든 여정의 싸움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주심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육체적으로 싸웠지만 그 싸움은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블레셋으로 가서 싸우면 뜻을 돌이키고 이집트로 다시 돌아갈 것을 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7장에서 보면 아말렉과 싸움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전쟁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세상 이집트로 돌아갈 것을 하나님께서 염려를 하셨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는 일은 없겠지만 전쟁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치열하게 자기 육체의 것을 가지고 전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그저 자기 육체를 가지고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을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 싸움을 해야 하는데 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자기 육체를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육체의 그 싸움을 보면서 영의 싸움이라고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싸움입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잘하기 위해서 육체로 하는 일을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저 자기들의 육적인 싸움입니다. 평생을 그 싸움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교회는 광야입니다. 그것에서는 싸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실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알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선한 싸움을 해서 영생을 취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우리가 왜 교회 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하는가 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육체의 싸움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의 선한 싸움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싸움과 영의 싸움을 도무지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싸움이지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오히려 그 율법을 안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바르지만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을 폐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싸움을 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이고 그 싸움을 하라고 하면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 그 싸움은 아무리 잘 해도 영생을 얻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양생을 얻기 위해서는 내 안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갖는 것의 시작은 율법을 버리는데서 부터 출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육적으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다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12절]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처음에는 싸움을 못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아마 처음부터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하지 말라고 하면 아마도 그는 교회에서 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저 교회는 혈과 육에 대해서 싸우지 말라고 한다고 하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혈과 육이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을 지키고 또 성화가 되고 지적으로 모양을 내고 하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 그리고 성화가 되지 말라 또 은사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면 뭐 이상한 것도 다 있네 하면서 나가고 말 것입니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기독교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설교를 보면 아마도 다 이단이라고 주장을 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면서 시비를 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혈과 육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과의 싸움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혈과 육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초등학문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종교가 그리고 어느 조직이 이 싸움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세상과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은 일을 교회 안에서 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고 그 싸움을 잘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하면서 그것을 영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에 나온 지 오래 되었으면 우리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집트를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런데도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고 앵무새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싸웠고 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많은 싸움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기 까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과 그렇게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주님께서 이기신 싸움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긴 것을 믿기만 하면 나도 이긴 자가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육체로 이기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겼습니다. 다시 싸우고 말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이긴 싸움을 우리가 믿으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같이 육체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육체의 싸움을 하면서 힘을 빼고 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싸움을 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블레셋이 있는 것으로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들으면 이 싸움을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이 싸움을 하라고 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에는 복음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 복음을 알기 까지는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배운 성도만이 어두움의 세상 권세자들과 악한 영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어두움의 세상 권세자들이 누군가 하면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은 사단과 귀신들입니다.
성경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두움의 세상 권세자라고 하니까 저 북한의 김정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에 빠져 모든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랬고 이 시대 교회도 역시 율법주의가 되어서 교회 안에서 권세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의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너희가 초등학문 아래 있다가 이제는 복음으로 들어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모두가 다 초등학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오래 되었으면 영의 싸움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싸움을 해야 합니다.
(1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의 광야 길을 통해 백성을 인도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와 무장을 하고 올라 가니라.”
새 번역]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광야에 나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 살던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면 천국 잔치에 참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는 못 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을 그것을 믿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기 전에 스스로 나오려고 했고 하나님께 간구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어서 나오지를 못하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교회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자기들의 눈으로 보면서 당당하게 광야로 나왔지만 그들의 결말이 어떠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광야 길을 돌리셨습니다. 그들은 대오를 지면서 나왔지만 아직까지는 전쟁을 할 그런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지만 그것이 표적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가 죽었습니다.
교회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다기고 있는 교회는 방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광야에 나온 것입니다 이제 광야라는 교회에 나왔으면 먼저 아말렉과 싸워야 합니다. 이집트 탈출기의 모든 사건들은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모형들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사건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19절) “모세가 요셉의 뼈를 취하니라.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
새 번역]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창세기50장 25절]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
요셉의 유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와서 이집트의 총리까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 당시 모든 나라가 칠년간의 흉년으로 거의 다 망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미리 가르쳐 주심으로 해서 그가 이집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야곱의 가족이 다 이집트로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얼마나 원했으면 자기가 죽고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권고 하시리니 그때에 내 유골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요셉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믿지 못 했습니다, 그저 야굽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을 누렸습니다. 광야로 나가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가나안이 그렇게 마음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가 죽으면 유골이라도 가져가서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지만 요셉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죽어서 뼈만 남아 있지만 그 뼈라도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 요셉입니다. 자기들이 조상이 묻혀 있는 그 땅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천국을 별로 사모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말로만 천국을 간다고 하지 그들의 예배나 기도나 찬송을 들어보면 다 바알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천국을 사모한다면 그것부터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이 세상의 것을 탐하고 있습니다.
(20-21절)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백성 앞에서 치우지 아니하셨더라.”
이스라엘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서 장막을 쳤습니다. 굳이 지명에 대해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 지명이 다 뜻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바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정말 성경을 보면서 다른 것이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오직 내 영혼의 구원을 취하기 위해서 보아야 합니다.
쓸모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특히 성경을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이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어에 집착을 하고 있고 또 사람의 이성으로 따지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연구를 해서 이 세상의 이성으로 무엇인가를 알면 대단한 신학자나 되는 것으로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영생입니다. 이 영생이 없다면 여러분이 성경에서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내 영혼의 생명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대해서는 많은 설교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서로 각각의 주장들이 많고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 것이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장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구름기둥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름기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니 구름기둥을 통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이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동을 할 때는 반드시 구름기둥을 보고 인도함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는 늘 이 구름기둥이 성막에서부터 올라왔습니다. 이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름기둥이 있어야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야 할 줄을 알았습니다.
반드시 입니다. 구름기둥이 떠오르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그 자리에서 몇 년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름기둥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를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구름기둥을 보고 인도함을 받았지만 이 시대는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7장 17절] “왕좌의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양]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생수의 샘들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리라. 하더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로 구름기둥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는 표징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까지 구름기둥을 따라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생명수 샘으로 인도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시대도 구름기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의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생명수 샘을 마시게 됩니다.
성령이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보이는 구름기둥을 보고 따라 갔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육적인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 영의 인도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주야로 진행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4장 6절]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무엇을 비취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시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육의 일은 이 시대 우리에게 영의 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기둥이 왜 이스라엘에게 밤에 비춰주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이제 막 광야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기들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았지 영의 일은 전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백성 앞에서 치우지 아니하셨더라.”
낮에는 구름기둥이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영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떠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자기들의 눈으로는 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줄을 몰랐지 때문에 그저 육적으로만 보고 따라 가기만 했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이 이 시대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불기둥이 우리 마음에 비춰져야 합니다. 하지만 역시 성경을 육적으로 보다보니까 구름기둥이 자기를 인도하는 줄도 모르고 있고 또 불기둥이 자기를 비춰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구약의 그림자를 통해서 신약의 영의 일을 알아야 하는데 그저 육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있습니다. 구름기둥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불기둥이 우리 마음에 비춰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구름기둥을 보고 인도함을 받고 있고 불기둥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어두운 곳에 비춰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춰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성경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을 보면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고 영광의 빛입니다.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고 또 불기둥의 비췸을 받아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천국에서 모든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