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전후의 한국문학 – 계몽시기이다.
을사년(1905) 겨울에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이때는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이 제국주의의 야욕을 거침 없이 드러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처지가 되자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 운동이다. 외양간을 고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국가가 붕괴되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도시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문화운동으로 펼쳐졌다. 지식인들이 주도하였고, 대표적인 사례가 구 소설을 읽는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구소설을 차용하여 살짝 바꾸므로 계몽사상을 담았다. 그들이 구서설을 개조한 형식을 신소설이라고 하였다. 보기로는 이해조의 ‘자유종’이다.
한편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을 빌미로 오히려 친일 운동을 벌린 ‘친일계몽사상 운동이 나타났다. 조선의 구습을 타피 양반 문화의 봉건성을 강조하면서 양반 문화를 까부수자는 방향으로 펼쳤다. 일본의 주장을 답습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인직(작품은 혈의루)이다. 최초의 소설이라는 혈의누가 만세보에 실린 것은 1906년이다. 이때부터 각 신문은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까지는 공식적인 글쓰기는 한문이었다. 국문체 글쓰기는 개무시를 당하였으나, 신문이라는 공식 매체가 국문 소설을 싣자. 국문의 전범을 찾아나서면서 국문에 관한 연구도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에는 국문은 핵심적 요소로 떠올랐다.
친일계몽사상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는 것이 아니고, 일본과 한 배를 타고 계몽을 하자는 것이다. 애국계몽주의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는 주장과는 반대로 나아갔다.
친일 계몽주의를 일본이 적극 후원하였다. 따지고 보면 왜정시대의 계몽사상에는 친일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들(80대)들은 광복 이후에 학교에 다녔지만 일본식 사고를 가진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우리의 의식에는 나도 모르게 친일적인 요소들이 베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계몽사상에는 애국적인 것과 친일적인 두 단체가 있었다, 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엇다.
이때의 특징적 사건이라면 민족 종교가 나타난 것이다. 1905년에 나철의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함으로,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냈다. 1906년에는 손병희가 최제우의 동학 사상을 이어서 천도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비폭력 민족주의 운동이엇다.
1909년에 안중근이 이등방문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의병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셨고, 애굮계몽운동도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공작하였다. 다음 수순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더욱 더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쳐나갔다.
첫댓글 1900년 전후의 한국문학-계몽시기이다.을사년(1905)년 겨울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었다.나라가 풍전등화의 처지가 되자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 운동이다.농촌지역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다.구소설을 살짝 바꾸어 계몽사상을 담았다.이해조의 '자유종'같은 책이다.한편 친일 계몽사상이 나타났다.양반문화의 봉건성을 타파하고일본의주장을 답습하였다.이인직의 '혈의 누'이다.이때부터 각신문은 소설연재를 시작했다.신문이라는 공식매체가 국문소설을 싣자 국문에 관한 연구도 나타났다.근대 국민국가의 탄생에는 국문은 핵심적 요소로 떠올랐다.
친일계몽사상은 일본과 한 배를 타고 계몽을 하자는 것이다. 애국계몽주의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는 주장과는 반대로 나아갔다.친일 계몽주의를 일본이 적극 후원하였다. 따지고 보면 왜정시대의 계몽사상에는 애국적인 것과 친일적인 것 두단체가 있었다.1905년 나철의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함으로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냈다.1906년에는 최재우가 천도교를 설립했다.1909년 안중근이 이등방문을 암살하자 일제는 의병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조선식민지화를 더 공고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