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기습 남침한 인민군 전차 ...
♣ 아 ~ 치욕적인 6.25 전쟁 ♣
오늘이 6.25전쟁 74주년을 맞은 치욕적인 날이지요 6.25전쟁을 항간에서는 동족상쟁(同族相爭) 또는 한국전쟁(韓國戰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북한의 남침전쟁이지요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침을 확인시키는 6.25 당시의 극비문서를 전달했고 지금 그 서류가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이로 인해 중국도 모든 교과서에서 6.25전쟁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修正)했지요 그러나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남침도 북침도아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 전교조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역사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는 것이지요
6.25전쟁은 미국이 참전한 전쟁중 가장 ‘지독한 전쟁'으로 손꼽히고 있어요 어느전쟁이건 전쟁이 발발할 시점에는 정보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6.25전쟁에는 세가지의 오판(誤判)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 첫째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오판이지요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가 우리가 전쟁을 일으켜도 이미 한국을 철수한 미군은 참전하지 않을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두번째가 남한에 있는 남로당(박헌영)이 봉기하기 때문에 이 전쟁은 쉽게 승리할수 있다고 오판한 것이지요 그러나 유엔군을 등에 업은 미군은 참전하였고 남로당(박헌영)은 봉기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그 세번째가 중공군은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것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오판이었지요 인천상육작전을 기화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거듭하여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어요 그러나 중공군은 여지없이 참전하였고 절호의 남북통일을 가로막았지요 이렇듯 전쟁에서의 오판은 승패를 떠나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 오지요
이 전쟁으로 인해 유엔군은 6만여명 한국군은 15만명이 전사 하였고 민간인도 30만명이 희생되었어요 그러나 이 전쟁으로 인해 살아남은 나라가 있었지요 중국은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대만을 공략하려고 대규모 군비를 증강하고 있던차에 한국전쟁에 참여 함으로서 많은 병력손실을 가져왔어요 그리고 미국은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여 했다는 이유로 대만을 공격하면 중국본토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지요 그래서 중국은 대만공격을 하지 못하고 대만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건재할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나라 일본은 쾌재를 불렀어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국제법에 밝은 이승만 대통령은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대마도는 우리고유의 영토 이므로 일본은 무조건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일본을 옥죄이고 있었지요 지난 2005년에 확인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0년 4월 27일 한국 이승만은 대마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
여기에서 「specifically renounce」귀절을 중시해야 하지요 이는 외교문서로서는 최고로 강력한 의사표시이며 "대마도 회복(반환) 문제는 우리 7,000만 민족의 숙제다"라고 분명히 적시했어요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회복하는 문제에 있어 국제관례의 관점에서도 아무런 제약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1862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小笠原) 군도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본 영토로 인정받고 반환 받았던 국제적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일본은 대마도문제로 매우 심각했으며 미국또한 한국편에 서 있었어요
그러나 국가의 존립이 달린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 대마도 문제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잠시 접어 두어야만 했어요 그러자 일본은 쾌재를 부르며 '김일성이 대마도를 살렸다'고 좋아 했지요
오히려 일본은 유엔군의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생산하여 보급하므로서 전후 경제개발의 초석을 이룰수 있었어요
대저 동족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어떤 경우든 바람직 한것은 못 되지만 6.25전쟁이 불러온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요 전쟁을 전후하여 이념대결이 극심한 까닭에 무고한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죽어갔어요 사실 6.25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들보다 더 잔인한 건 대한민국에 기생(寄生)하고 있던 좌익, 빨치산 그리고 완장을 차고 죽창 들고 다니던 ’부역자‘들이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끝날쯤 10만여명에 달하던 좌익 세력들은 모두 월북하였고 공산당의 폭정을 경험한 북한에 있던 우익 사람들은 대거 월남 하였어요 이때 월남한 사람들이 150만명에서 200만명이라 하지요 어찌보면 이때 좌우익이 분명히 갈렸으며 남한에서는 좌익을 일시에 제거하는 효과를 보았어요 이때부터 반공을 국시로 걸고 자유 경제국가를 건설할수 있었지요 그런데 10여만명에 달하던 좌익 월북자들은 모조리 숙청되어 목숨을 잃었지만 자유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수많은 우익인사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수 있는 큰 힘이 되었어요
무역규모 세계7위 자유대한 인구 5천만명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세계 5대 공업국 IT 세계1위 이모든것을 종합해 볼때 우리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다음으로 세계7대 강국이 되었지요 정말 자랑스럽지 않나요? 북한 보다도 못살던 우리나라가 세계7대 강국 이라니 실로 엄청난 성과 아닌가요? 세계 제2차 대전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유민주국가를 이룩한 나라도 우리나라가 유일(唯一)하며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10대 경제대국을 이룩한 나라도 우리나라가 유일(唯一) 하지요
그렇지만 요즘 좌파정권으로 바뀌고 나더니 이념싸움이 치열해 졌어요 마치 6.25전쟁 발발 이전 보다도 더 극심해졌는지도 몰라요 이 정권 청와대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주사파들이 100여명 가까이 운집해 있다고 하지요 이들은 역사를 서슴없이 왜곡하고 핵을 가진 북한에 가짜평화를 부르짖고 있어요 그러나 명심해야 할것은 북한 정권의 적화야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또 주사파들이 좌시해서는 안될 교훈이 베트남에 있지요 우리가 피땀흘려 지켜주었던 베트남은 적화통일이 되었지만 그 이후 가장 먼저 숙청을 당한 사람이 자유월남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익인사 들이었지요 지금은 개방정책으로 전쟁의 아픔들이 사라져 가고 있으나 자유월남 출신들은 사상교육으로 전향을 유도한 반면 오히려 월맹에 부역했던 좌익인사들은 모조리 숙청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요 마치 박헌영 남로당 일파가 북한 정권으로 부터 숙청당한 것처럼 ...
그런데 6.25전쟁 74주년을 맞아 우리가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할 일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6만명에 달하는 국군포로 송환문제 이지요 아직도 그 생사가 불분명한 우리의 국군포로들에 대해서 어느 정부도 언급한 적이 없어요 더욱이 무단으로 납치된 납북어부들도 송환해야 하지요 김대중 정부 당시 미전향 장기수 70여명은 무조건 송환해 주면서도 우리 국군과 납북어부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안했지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된 국군장병들을 이 나라는 왜 잊고 있을까요? 역대 정부는 북한정권에 대한 퍼주기는 열심히 하고 간첩과 빨치산들은 다 보내주면서 불법 억류한 국군포로를 돌려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지요 살아있는 생존자도 송환받지 못하면서 휴전선 유해발굴이나 하고 있으니 세계 역사상 이런 나라는 없었지요 이건 나라도 아니지요 이는 한민족(韓民族)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국가적 범죄이지요 우리는 그 죄값을 어떤 형태로든 받게될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이 정부가 할일은 평화를 논하기전 아직도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부터 송환받아야 하지요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의심받지 않지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역사는 진실하여 언제나 신성한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알고 바로 말해야 하지요 ‘6.25전쟁’이라는 ‘진실’이 훗날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한층 더 빛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6.25전쟁 74주년을 맞아 조국을 위해 기꺼이 싸워주신 참전용사들에겐 고마움과 피흘려 장열히 산화하신 순국선열 영령앞엔 삼가 고인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진정한 명복을 빌었으면 좋겠어요
▲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
▲ 인민군 탱크들 -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
▲ 6.25 전쟁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85형 인민군 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지요...
▲ 끊어진 한강철교...
▲ 끝없는 피난행열...
▲ 6.25전쟁당시 죽창을 든 지방 빨갱이들의 인민재판...
▲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 1950년 9월18일 서울 수복을 위한 시가전..
▲ 드디어 38선(한탄강)을 돌파하고 북진중인 육군용사들... ] ▲ 38선상의 간이 아치.(1950) 38선돌파 기념으로 우리 국군들이 세운것임...
▲ 압록강변에 감격의 태극기 - 1950년 10월26일, 국군 선봉대 용사들이 만주를 눈앞에 바라보는 압록강 기슭 혜산진에 도달하여 감격에 벅차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고창하고 있어요...
▲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집결한 중공군들 ...
▲ 1953년 7월 23일 판문점에서 UN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오른쪽)과 북한 인민군 남일 대장(왼쪽)이 휴전협정에 조인하는 모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