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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개혁
독일의 개혁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과 백년전쟁 등을 거치면서 세력을 키웠고,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주변국들의 간섭으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년 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그리스도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초입세(사제가부임하여 첫 수입을 교황청에 납부하는 제도),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다. 이때 건축되거나 제작된 작품 중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마르틴 루터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발표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indulgentia)에 대한 논박이었다. 면죄부는 교회가 고해성사의 보속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배교, 우상 숭배, 살인, 간통 등의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고,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런데 박해를 받은 신자들이 배교를 하는 일이 생기자 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교회에서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고해성사를 실시하였다. 12세기 이후 중세 교회에서는 고해성사가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의 일정한 벌에 대한 만족(Satisfacio)를 주기 위해 개인고해로 바뀌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의 형벌 즉 보속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연옥에서 벌을 받아서 죄를 정화한 후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보속이 면제되는 것이 흔히 '면죄'[14]이다. 면죄는 일정한 조건을 완수하면 주어지며, 면죄를 얻은 사람은 보속이 면제된다.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의 천주교회에서도 존재하며, 주로 기도나 성지순례 등이 면죄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헌금으로 인해 주워지는 면죄'가 본격적으로 출현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극에 달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헌금을 통한 면죄부를 선포하였으며[15] 특히 독일 지방에 선포된 다음 조건들이 논란에 휩싸였다.[16]
1.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 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일곱 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 양발, 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를 바쳐야 한다.
3.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금식재)로 면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세 번째 조건이다. 이 조건만 본다면 헌금은 의무가 아니며, 교황 역시도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해야 한다"라고[16] 언급하였으나, 일부 성직자들이 대사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였고, 대사 전문 판매원이 등장하는 등 많은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한편 세 번째 조건의 헌금이 강제였다는 오해가 많이 퍼져있으나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헌금이었고, 루터의 비판 역시도 '면죄부의 강제성'이 아닌 '면죄부의 효력'에 대한 것이다. 이 시기 대사 전문 판매원의 예로 다음 사례를 들 수 있다.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그의 초입세(사제가 처음 부임하여 얻은 헌금을 교황에 지불하는 것) 납부하기 위해 면죄부 수입에 열을 올렸다. 알브레히트의 면죄부 판매원인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테첼을 시켜서 면죄부를 팔게 했다. 테첼은 "단순히 면죄부를 산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조차 면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식의 과대 선전을 하면서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테첼과 같은 면죄부 판매원들은 "면죄부 헌금을 내는 순간 그만한 교회의 영적인 은혜를 얻기 때문에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살 수 있으며 이때도 고해성사나 회개의 필요가 없이 오직 돈을 가지고 오면 연옥의 영혼이 구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7] 이리하여 종교개혁 직전에 면죄부가 엄청난 숫자로 팔렸으며 이는 당시 교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인 요소에 대해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지표가 되었다.[18]
결국 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초래했다.[19] 마르틴 루터는 서방교회의 교황청 세력이 현세의 소유와 권리를 포기해야 하며 초입세와 면죄부 판매, 십자군 전쟁세 등 부조리한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선언했다.[20]
95개 논제
95개조 명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면죄부 판매로 구원을 거래하는 서방교회 교황청의 부패를 인식한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이 담긴 서신을 작성하여 마데부르크의 알브레히트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그가 보기에 "모든 주교는 하느님의 백성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배우도록 도와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당시 관습에 따라 성 교회의 북쪽 문에 붙였는데 이 날이 10월 31일인지는 논란이 많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 즉 교황청의 수입원이었던 고해성사의 문제점을 논박하고 교황의 권위도 부정함으로써 당시 서방교회를 유지시키던 기존 교황중심주의 질서에 대해 투쟁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은 14일안에 95개조 반박문이 독일 전역에 깔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사람들의 찬성을 받았다.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 세력 중심인 교황청에서는 루터가 위험한 인물임을 알고는 아우구스부르크에 소환하여 심문하였고, 1521년 보름스 국회로 불러들여 루터의 책들이 불온서적임을 시인하라고 강요하였다.
루터는 95개조 논제에서 회개를 강조하였다. 루터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한 신자는 십자가를 멀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구원을 돈을 주고 사는 대사의 값싼 은혜가 아닌,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값비싼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일생동안 회개를 함으로써 육신의 정욕을 억누르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고 보았으며, 회개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징계의 뜻으로 주시는 형벌이 부과되지 면제되지 않는다고 논박했다.[21]
1519년 에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는데,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회는 복음중심주의를 따르며, 교황을 인정하는 교황중중주의는 필요 없다고 반박하였고, 콘스탄스 공의회(1414 - 18)가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22] 또한 제2바울 서신인 즉, 기독교가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서 직제를 형성한 제도적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등장한 서신인 에베소서 1:22-23[23]을 논거로 하여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만물의 우두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라는 논박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 권위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자신의 주장이 공교회적(보편교회적)이라고 확신했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현재의 천주교)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인 수구세력(현재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탄압받았던 개혁 찬성파(현재의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적 그리스도(Anti-Christ)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24]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보름스 회의
보름스 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루터는 자신의 개혁 사상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인 보름스 회의에 참여하여 1521년 4월 18일 독일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멘.” | ” |
보름스 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독일 농민 전쟁과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배계급들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민중항쟁이 일어난다.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는데 이는 농민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착취를 받으며,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사회개혁의지가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독일 농민들이 지배계급의 착취에 맞서 투쟁한 독일 농민혁명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리드리히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리드리히는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서방교회 개혁 반대세력인 교황청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1524년 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은 파리코뮌 같은 근·현대 사회주의 운동처럼 정치, 사회적 비평사상을 가지고 단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노 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다. 그래서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므로 농민혁명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혁명은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농민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짐으로써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신앙개혁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이 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가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개혁' 평가
사회문제에 대한 보수성
현실권력인 로마 가톨릭에 저항한 루터를 믿고 혁명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종교개혁의 원천, 신학
루터의 종교개혁은 정의감에 근거한 열정만이 아닌, 체계를 갖춘 신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단순히 정의감만으로 나섰다면 탄탄한 신학과 교의로 무장한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교황청과 그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써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신도들이 피난 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 일해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츠빙글리의 개혁
울리히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신학적으로 성만찬에서 나타난다.[26]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 데서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복음 이해와 화체설에 반대하는 영성체 신학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마무리를 후배인 칼뱅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개혁주의로 바뀌었던 칼뱅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 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 체제에 의해서 통치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자연히 자유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 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대사는 대의회에서 결정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현수막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대사를 수여 받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었다.
가톨릭 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 3월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 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다.
칼뱅의 개혁
시작
장 칼뱅의 석판화, 추정 1830.
1537년 1월에 칼뱅은 제네바의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뱅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시는 칼뱅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뱅은 아리우스주의자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코로우, 파렐, 칼뱅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뱅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하였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뱅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었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뱅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뱅은 보름스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있었다. 이때 파렐의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뱅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칼뱅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네바의 개혁 추진과 칼뱅의 신학
칼뱅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뱅도 이들을 맞이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뱅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장 칼뱅의 신학
장 칼뱅의 신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칼뱅 역시 신앙 본래의 모습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서방교회 전통적 가르침을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 교계제도를 교인 중에서 원로를 선출하는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을 우상이라며 배척하고 파괴하였다. 그의 신학은 저서 《기독교 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뱅과 그의 《기독교 강요》 만큼 기독교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뱅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 유파를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은 ‘칼뱅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뱅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뱅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칼뱅이 만든 것은 아니고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칼뱅주의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칼뱅주의 5대 강령입니다.
이들 주장은 개혁주의자들 내에서도 반대가 있었으며, 개혁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또한 개혁교회나 장로교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서 완화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교황청 소속 교회 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27] 이로 인해 칼뱅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네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뱅은 신앙회의(이단 심문은 아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28]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고, 이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28][29]
칼뱅과 신정정치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그는 신학이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퓨리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뱅의 개혁' 평가
칼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받는 것은 개혁 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 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뱅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뱅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장 칼뱅의 사상은 유럽교회사에 영향을 주어 불란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에 영향을 주었다. 칼뱅에 대한 비난 중엔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인 비관용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회적 제도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현대적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