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생(出生)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初年期)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 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 가 독학하기도 하였다.
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中年期)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후 52세 때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 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군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晩年期)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講學)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死亡)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條目)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 이 유서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1.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2.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1998년 서울대출판부
3. "퇴계선집" / 윤사순 역주 / 1993년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