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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량하고 맑은 맛, 필동면옥
필동면옥에 찾아간 날은 사방에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이었다. 활짝 열린 가게 문 앞에 보라색 라일락이 만개해 있었다. 영업 시작 시간인 11시에 맞춰 출발했지만 15분 정도 늦었는데, 이미 1층은 만석! 2층에도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 계단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았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먼저 내어주신 김치와 무절임을 한 젓가락씩 집어 들었는데…
밑반찬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맛있는 거죠? 다른 평양냉면 집에서도 김치와 무절임을 반찬으로 주곤 하지만, 필동면옥의 것은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달랐다. 입을 깨끗하게 씻어주면서도 한 번 더 먹을 수 있게 만드는 상큼함이 느껴졌달까. 한시라도 빨리 이 김치와 단짝일 게 분명한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그렇게 만난 필동면옥의 평양냉면에 대한 첫인상은 ‘깔끔하다’였다. 면이 우러난 탁한 느낌은 최대한 배제하고, 투명하고 맑게 만들어진 고기 육수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올 때의 그 청량함이란. ‘평양냉면은 슴슴한 맛이 매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맛을 이야기한 것이었구나. 게다가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면의 향은 왜 이렇게 좋은지.
나는 메밀면에서 아주아주 약하고 수수한 흰 꽃향기를 느끼곤 하는데, 메밀국수가 아닌 평양냉면에서도 그 향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1층에서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라일락 꽃향기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입안으로 꽃이 가득한 호숫가가 펼쳐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평냉 러버1_ 필동면옥은 기복이 약간 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맛있었지만 지난번에 먹었을 때는 더 맛있었거든요! 맛이 없던 적은 없고, 존맛과 핵존맛의 차이 정도?
💼평냉 러버2_ 그래, 이 맛이야! 슴슴해야 평냉이지!
필동면옥
[3] 균형의 중요성, 을지면옥
낡은 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펼쳐지는 을지면옥의 세계(?)는 투박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정겨웠다. 알게 모르게 각 테이블을 예의주시하고 계시는 이모님들의 친절 또한 새삼스러웠다. 면이 길어서 낑낑대자 어디선가 쏜살같이 가위를 들고 달려와서 면을 잘라주고 사라지신 이모님, 무절임 리필 요청하기도 전에 테이블에 놓고 가신 이모님… 모두 감사했습니다. 처음에 내어주시는 면수가 생각보다 밍밍해서 왠지 걱정이 됐지만, 냉면을 받아들자마자 그 걱정은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제법 평양냉면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인 양, 두 손으로 그릇을 들어 차가운 국물부터 들이켰다.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고기 향과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짠맛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 쪽으로도 임팩트를 주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느낌이랄까? 절로 고개가 갸웃해지며 두 번, 세 번, 연거푸 국물을 마셨다. 면 또한 메밀의 향보다는 구수한 맛과 질감이 느껴지는 스타일이었다.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옅은 단맛으로 번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잘 모르겠어서, 감질맛이 나서, 젓가락질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냉면 그릇의 바닥이 보였다. 쩝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가게를 나섰다. 부족한 게 있어서 드는 아쉬움이 아니라, 뭔가 조금만 더 먹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나에게 이런 기분 느끼게 한 냉면, 을지면옥 네가 처음이야!
🙋평냉 러버1_ 필동면옥은 클래식한 매력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평냉 러버2_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 을지면옥이야! 사람들이 ‘걸레 빤 물 맛’이라고 하는, 바로 그 맛이 평냉의 매력 포인트거든!
을지면옥
[번외] 평양냉면 실패기, **옥
한참 평양냉면 투어에 불이 붙어있던 시기였다. 그날은 원래 버거를 먹으려고 했는데, 가게 앞에 도착해 보니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선 상태. 주변의 가볼 만한 가게들도 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 ‘평양냉면’의 메뉴가 적힌 가게가 눈에 띈 것이다. 이름에도 ‘옥’이 들어가니까, 평양냉면집 맞겠지? 여기서도 평양냉면을 도전해 볼까?
그렇게 들어간 가게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딱 하나 남아있는 자리를 차지하면서 ‘역시 유명한 곳인가 보군’ 흐뭇해했다. 직원분이 들고 온 메뉴판을 내려놓기도 전에 평양냉면을 외치고 난 후,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라…? 냉면을 먹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
뭔가 잘못된 것을 예감한 순간, 내 앞에 냉면 그릇이 놓였다. 그런데 면 위에 초록색 이파리가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먹어서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면은 메밀의 느낌이 있긴 했지만 밀가루 냄새가 더 많이 났고, 국물은 탁하고 차가운 고기 육수 맛이었다.
올려진 초록 이파리는… 먹으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음, 평양냉면이 메뉴에 있다고 다 평양냉면 집은 아니구나. 단순한 진리를 뒤늦게 깨달으며, 처음으로 냉면을 다 남기고 일어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지 말아야 했다. 옛말에 아는 것이 힘이라 했지? 앞으로는 을지로를 벗어나 더 너른 곳에서 평양냉면 투어를 해봐야겠다.